4. 암군
몸을 빼앗긴 후로, 칼리번은 에레즈의 안위만큼이나 에어리얼의 행방에 대해 고민했다.
자신의 몸을 가진 그는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해답을 젠이 가지고 왔다. 칼리번은 그녀에게 그동안 벌어진 일을 설명하고, 반대로 듣기도 했다.
“어째서… 내 몸을 왕성에 숨긴 거지.”
왕성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들은 후, 칼리번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에어리얼에게 대적했던 용병이 멀쩡하게 살아 있다니.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에어리얼이 정말 패퇴한 것이었다면, 적군의 동료는 미끼로 삼든가 죽이고 갔을 거다.”
모두가 에어리얼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칼리번은 그 점이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내 몸뚱이를, 왕자님의 정신이 지배당할 때까지 숨겨 두고… 보살폈다니.”
말을 고르고 또 삼켰는지, 칼리번의 목울대가 몇 번이나 크게 울렁거렸다. ‘칼리번’의 껍질은 배 속에 병사를 가득 넣어 둔 목마나 다를 바가 없었다. 모두가 잠든 때에 은밀하게 독을 퍼뜨리는…. 발견한 순간 목을 베어 냈다면 일이 여기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음영이 짙게 진 얼굴은 더없이 지쳐 보였다.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방치한 거냐.”
젠을 비난해 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애초에 칼리번은 그런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칼리번은 무작정 들이받는 성난 들소처럼 두 눈이 형형했다.
“왕성을 탈환한 후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그만 언급하겠다…. 에어리얼이 네 몸을 가지고 그런 술수를 썼더라면, 나 또한 감쪽같이 속았을 테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왕성의 탈환하기 전까지의 일이다.”
“…….”
칼리번이 이토록 흥분하여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은 젠도 처음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칼리번이 쏟아 내는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무슨 의미인지는 너도 알 거다, 젠. 너는 왕자님보다도, 나보다도 훨씬 경험이 많은 용병이다. 너라면 왕자님께서 전쟁을 벌이지 않도록 충분히 말릴 수 있었을 거다.”
고난 끝에 간신히 재회한 동료였다. 더구나 젠은 간신히 자신이 진짜 칼리번임을 알아주었다. 기뻐해도 모자랄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칼리번은 자꾸만 속이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울분이 차올랐다.
“8년 전, 나는 널 믿고 왕자님을 맡겼다. 그 후로 나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왕자님과 함께 지냈을 테니, 그분이 얼마나 유약하고 눈물이 많은 분인지는 알고 있을 거다. 그분이라면…. 그래, 죄책감 때문에 나를 찾겠다 나설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너만은 일이 이렇게 되지 않도록 말렸어야 했다.”
아스터 또한 칼리번 자신조차 감당하기 힘든, 감정의 폭풍을 고스란히 느꼈다. 칼리번의 심장 박동은 품 안의 아스터에게도 전달되고 있었다.
“아니면… 설마 성녀단을 위해 왕자님을 이용한 건가?”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기억을 흡수해 왔다. 그는 젠이 어떤 과거를 지녔는지, 에어리얼과 젠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성녀라는 말은 한 적이 없는데…. 붉은 오메가와 몸이 바뀌더니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라도 있나 보지?”
젠은 칼리번의 말에서 그 이상을 읽어 냈다. 그녀는 대화가 길어질 것을 예감했는지 벽에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았다.
“…그래, 뭐, 내가 부추긴 부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어. 그건 부정 못 해. 난 용병 이전에 성녀단에 속한 몸이니까.”
젠은 칼리번이 지적한 부분을 순순히 인정했다.
“근데 무법천지인 알테르의 왕국보다는 에레즈 녀석이 왕이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게 뭐가 나쁘지? 그게 오랜만에 만난 동료에게 욕을 먹을 정도의 잘못인가?”
그러나 머리와 가슴은 다른지 어딘지 비아냥거리는 투였다.
“이 자리에서 한 가지는 맹세할게. 난 절대 강요는 하지 않았어. 괜히 그 녀석의 약해 빠진 정신머리를 긁지도 않았고. …선택은 에레즈 본인이 했다.”
“큭….”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에레즈는 ‘널’ 구하기 위해 인간들을 모아 왕성을 탈환했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위험천만한 모험 놀이를 한 게 아니야! 내가 그 자식을 얼마나 말렸는지 넌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걸? 상황이 안 좋게 풀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녀석의 결심까지 애 취급 하지는 마.”
젠은 칼리번의 비난을 차갑게 반박하기 시작했다.
“네 기억 속에서 에레즈 프리드웬은 아이였으니,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지금 그 녀석은 나나 너보다도 강해. 감싸고 도는 건 적당히 해라.”
딱딱하게 대답하는 젠은 진심으로 화가 난 듯했다. 칼리번은 모래를 삼키듯 마른침을 삼켰다. 몸속의 피가 어찌나 빠르게 흘렀는지 심장이 절로 욱신거렸다.
“……알겠다.”
맹목적이던 칼리번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젠에게 보인 언행이 괜한 화풀이라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도.
젠을 내려다보던 칼리번은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묵직한 침묵이 주변을 짓눌렀다.
“…….”
아스터만이 칼리번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어 괜히 품 안에서 덜그럭거렸다. 칼리번의 온기가 몸을 덮으니 투구가 뜨끈해져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아스터가 그걸 변명 삼아 젠을 해치지 못하도록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건 그렇고 저 투구 게 같은 녀석은 뭐냐?”
분위기는 험악했으나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칼리번과 아스터의 다툼을 지켜보던 젠이 불쑥 물었다.
“음?”
“저 움직이는 투구 말이야. 전에 봤을 때는 제대로 된 갑옷 차림이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대가리만 남은 거지?”
젠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칼리번의 가슴을 가리켰다. 뒤늦게서야 두 사람의 관계를 깨달은 칼리번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고 보니 이들은 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만난 정도일까? 하마터면 젠은 아스터에게 목숨을 잃을 뻔하기까지 했다.
“흥, 알파 계집에게 알려 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특히나 당신한테는 내 이름조차도….”
“이 녀석은 아스터다.”
아스터를 무시하며 칼리번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음…. 사정이 복잡한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에어리얼의 부하 같은 거다. 지금은 버림받았지만.”
아스터는 끝까지 자신의 긍지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눈치 없는 칼리번이 술술 불고 말았다.
“…잠깐. 무슨 소리입니까? 버림을 받았다니 어처구니가 없군요. 에어리얼이 저를 잠시 놓친 것뿐입니다. 그리고 고작 부하 정도가 아닙니다. 저는 에어리얼의 가장 가까운— 윽!”
칼리번은 주먹으로 투구를 내리쳤다. 퉁, 철 덩어리가 울리는 소리가 감옥 안을 울렸다.
“에어리얼의 몸이 된 후로 도움을 받은 것도 있어서 동행하게 되었다. 쓸데없는 말을 나불거리기는 하지만, 지금은 몸을 잃어 약해졌으니 별 위협은 못 될 거다. 그러니 해치지만 마라.”
“쓸데없는 말이라니? 여태껏 당신은 그렇게 여긴 겁니까?”
“…….”
아스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으나 칼리번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투구 안쪽에서 금사로 두드리는지, 투구가 쿵쿵 울렸다. 그러나 칼리번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못했다. 검은 투구가 집인 본인만 괴로워질 뿐이다.
“흠…. 그래? 그게 전부야?”
젠은 팔짱을 낀 채로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렇다.”
본의 아니게 칼리번은 젠에게 거짓말 비슷한 것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스터의 근원을 생각할 때면 칼리번 자신조차도 혼란스러웠기에, 차마 모든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좋아. 정체는 그렇다 치고.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인데…. 착각인가?”
“착각일 거다.”
“8년 전에는 뜬금없이 애를 데리고 나오더니, 이번에는 투구 게냐. 또 나한테 맡기는 건 아니겠지? 애 보기는 이제 질렸어. 내가 저 녀석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 녀석만은 안 지켜 줄 거다.”
“저는 투구 게 따위가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의 보호 따위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 때문에….”
“조용히 있어라, 아스터. 지금부터 한마디라도 더하면 밖에 갖다 버릴 거다.”
칼리번은 급히 아스터에게 명령했다.
“…….”
표정이랄 게 없는 투구인데도 아스터는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내 말대로 해라.”
하지만 칼리번은 봐주지 않고 명령했다. 아스터의 목소리는 어린 시절의 에레즈를 닮아 있었다. 몹시나 다정하고, 아주 조금 더듬고, 겁이 많던 어린 에레즈와 듣는 이의 성질을 긁는 아스터는 말투는 전혀 달라 바로 눈치채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칼리번은 젠에게 괜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
아스터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단히 삐졌는지 이제는 젠뿐만 아니라 칼리번마저 금사로 공격하려 들었다.
“이 녀석, 말만 안 한다고 조용히 있는 게 아니지. 투구 속에 가만히 있어라.”
칼리번은 버둥거리는 투구를 퉁퉁 두드리며 진정시키느라 진을 뺐다. 젠은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너 변했구나.”
그녀가 툭 하니 감상을 내뱉었다.
“그런가? …그렇겠지.”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외관을 떠올리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품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아스터를 붙잡느라 젠에게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말하는 건 겉모습이 아니야.”
아스터를 감시하던 칼리번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젠은 묘한 표정이었다.
“아까 나한테 에레즈 일로 화를 내는 것도 그렇고… 아, 그건 8년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그때는 이런 얘기를 편히 나눌 상황이 아니었잖아? 그때도 이상하기는 했는데, 전체적으로 뭐랄까….”
젠은 적절한 말을 찾기 위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돌멩이 같던 녀석이 사람다워졌네. 알파인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
그 말에 칼리번이 굳어 버렸다. 품 안에 있던 아스터마저 움직임을 멈췄다.
“난 네가 에레즈 녀석을 장작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내가 뭘 놓쳐도 단단히 놓친 모양이군.”
젠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뒤통수를 천막에 기댔다. 어째서인지 두 사람의 사이가 서먹해졌다.
“…그것도 육체가 바뀐 탓이 아닐까 싶다.”
칼리번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검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하는 나약한 몸. 생존을 위해서는 예민해지고, 작은 일에도 악을 쓰는 수밖에 없다. 이 작은 몸 안에는 온갖 감정이 고여 있었다. ‘칼리번’일 때는 몰랐던 감정을 에어리얼을 통해 배우기도 했다.
이것이 과연 어떤 도움이 될까? 오히려 자신을 좀먹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있잖아, 에레즈 녀석도 너만큼이나 변했어.”
그때, 젠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왕자님께서 변하셨다고?”
에레즈가 화제에 오르자 칼리번은 뚫어지게 그녀를 보았다.
“물론 지금은 에어리얼 때문에 완전히 맛이 가 버렸지만…. 그건 말고, 지난 8년 동안 말이야.”
젠은 멍청한 칼리번을 배려해서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근거를 원천 차단했다.
“우리의 적은 마물을 조종하는 에어리얼만이 아니었어. 알테르 프리드웬과 알파 부하들, 그 밑에 인간 노예들까지…. 녀석과 나, 둘이서 전부를 상대하기에는 버거웠지.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인간들을 끌어들였다. 나는 성녀단을 재건하기 위해, 에레즈는 너를 위해.”
“…….”
“우리의 전략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었어. 왕성을 탈환하기 전까지 인간을 철저하게 도구로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지. 토굴 속에서 숨어 있었다면 몇 년 더 살 수 있었을, 수많은 목숨이 전쟁으로 희생시켜야 했으니까. 처음 에레즈는 그 전략에 개의치 않아 하는 듯했어. 그 녀석은 낮에는 미친 사람처럼, 밤에는 몽유병에 걸린 놈처럼 너만 찾아 헤맸으니까. 하지만 결국 그 녀석은…. 변하고 만 거지. 너처럼.”
칼리번은 홀린 사람처럼 젠을 응시했다. 왕자님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도 아닌 젠을 통해서 듣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자신을 구원자처럼 떠받드는 인간들에게 마음을 품게 된 거야. 그때부터 알테르를 향한 칼날은 동시에 에레즈 녀석의 목을 찌르는 칼날이 되고 말았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프리드웬 왕실의 피를 물려받긴 한 건가? 젠은 서글픈 농담을 덧붙였다.
“그런데 말이야, 널 구하겠다는 우리의 계획에는 사실 커다란 문제가 있어. 칼리번, 너라면 겪어 봤을 테니까 그게 뭔 줄 알고 있겠지?”
젠은 예전처럼 물었다.
“오메가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마물이 따라온다.”
칼리번은 익숙하게 대답했다.
“그래. 네 몸을 보호하면 보호할수록, 그만큼 인간들이 마물에게 피해를 보게 돼. 실제로 북문이 습격당하기도 했지.”
“그건 내가 한 짓이 아니었다.”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부질없는 변명이었다. 젠은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메가 토벌을 위해 왕성 밖으로 떠나는 순간까지 에레즈는 그 일로 고민하고 있었어. 내 앞에서는 늘 그렇듯 너만 신경 쓰는 척했지만 말이야. …근데 다 보인단 말이야, 이 정도 나이를 먹으면.”
젠의 입에서 나오는 에레즈가 좋았다.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땅 위로 떨어지는 다디단 빗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자신의 백성들을 아끼게 된 것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그것은 옳은 일이다. 죽어 가는 인간 사내에게서 보았던 기억에서처럼, 왕자님은 훌륭한 왕이 된 것뿐인데….
“나는 그런 녀석을 성안에 혼자 두고 나온 거야. 에레즈에게는 왕으로서 백성을 선택하라고 했지만, 정작 나야말로…. 성안 사람들보다 에어리얼을 우선순위에 둔 거나 다름없어.”
녀석에게 진짜 스승이 되어 주지 못했어. 젠은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에레즈가 빠르게 세뇌에 빠지게 된 원인은 나일지도 몰라. …미안하다.”
그러나 ‘괜찮다’라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다.
“…….”
칼리번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칼리번은 자신만이 변해 버렸다고 생각했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까지도 일그러지고 망가져 버렸다고. 그러나 왕성에 홀로 남겨진 왕자님도 변했다고, 젠이 말해 주었다. 그 말에서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으나 칼리번은 곧 고개를 저었다.
“젠. 나와 왕자님은 다르다.”
똑같이 변했다는 말은 칼리번에게 과분했다.
“나는 변하지 않았다면 죽었을 거다. 그뿐이다. 하지만 왕자님은 다르다. 그분은… 더 나아진 거다. 훨씬 더 대단한 분이 되신 거다.”
몸이 바뀌기 전 에어리얼은 칼리번에게 선택을 종용했다. 정말로 에레즈를 위했다면, 그때 칼리번은 죽음을 택했어야 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서… 이런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에레즈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만을 위해서였을 지라도, 한 걸음 더 나아가 많은 사람을 위하는 왕이 된 것이다.
“분명 좋은 스승에게 배워서 그렇게 자라신 거겠지. 그건… 나는 하지 못한 일이다.”
“…….”
“그러니 자책하지 마라. 일이 이렇게 된 건 전부 에어리얼의 잘못이지, 네 탓이 아니다. 나야말로 화를 낸 것에 대해 사과하지.”
8년 전의 용병과 왕자. 그리고 8년 후의 반역자와 왕. 오랜 시간이 흘렀다. 다시 만난다 해도 지금의 그와 자신은 여전히 그때와 같을까? 칼리번은 에어리얼에게 몸을 빼앗긴 후로 수도 없이 묻곤 했다.
“그분은 더 좋은 왕이 되실 거다. 그러니 에어리얼이 멋대로 조종하게 둬서는 안 된다.”
일련의 사건을 겪은 칼리번은 더는 재회를 바라지 않았다. 지하에서 신음하던 자신이 잠시나마 자유를 얻은 것은, 구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다짐한다.
“…그래, 에레즈한테도 가서 그렇게 말해 줘. 그 한마디면 분명 정신 차릴 거다.”
에레즈와 칼리번, 두 사람 모두를 아는 젠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에어리얼 자식은 혼쭐을 내주고, 네 몸도 되찾자고.”
젠의 말에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어른이 되고, 왕이 되는 그 어떤 순간에도 자신은 없었다. 아마 미래에도 그러하겠지. 칼리번은 눈가가 지끈거릴 정도로 고통스러운 한편,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그때였다.
“윽…. 뭐지?”
어떤 예후도 없이 땅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젠과 칼리번 모두 진동을 느꼈다. 품 안의 검은 투구도 함께 덜걱거렸다.
“설마 적의 기습인가?”
“젠. 불편하겠지만,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는 잠시 여기 있어라.”
칼리번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스터를 한 손으로 들고는 천막 밖으로 나왔다. 전쟁 준비를 하던 알파들은 하던 모두가 행동을 멈추고 지진의 진원지를 찾기 위해 몸을 바짝 긴장했다.
“저기를 보십시오!”
누군가 외쳤다. 다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검은 손자국이 또…?!’
칼리번은 검은 투구를 세게 움켜쥐었다. 현실은 그의 예상과 비슷했으나 달랐다. ‘검은 손자국’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 대신…. 검은 숲에 잠들어 있던 마물들이 날아올라 하늘을 새까맣게 덮고, 이동하며 땅을 울리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알파, 인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칼리번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한 짓인가요?”
단둘이 되고 나서야 아스터가 물었다.
“내가 한 게 아니다.”
칼리번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마물들의 행선지를 바라보았다. 더는 성녀가 남아 있지 않은 왕성이었다.
* * *
난데없이 들이닥친 마물로 인해 왕성은 아비규환이었다.
“뭣들 하고 있나! 어서 기름을 부어라!”
인간들이 성녀의 보호막만을 믿고 대비를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병사들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마물의 몸 위로 기름을 들이부었다. 그런데도 미끄러지지 않는 마물의 몸에는 불화살을 쏘았다. 순식간에 마물의 몸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잠시간의 방책일 뿐,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추락한 마물들을 밟고, 새로운 마물이 벽을 타고 올라왔다.
한편, 비행형 마물들은 다른 마물을 발톱으로 꿰어 왕성에 투척했다. 그러고는 매처럼 하강하여 왕성 중심지로 파고든다. 기겁하여 도망치는 인간을 비웃기라도 하듯 날카로운 발톱으로 집어 들었다. 위태롭게 매달린 인간은 발버둥을 치다 땅으로 떨어졌다.
땅을 기는 마물들은 제 몸을 파성추로 사용하기도 했다. 성문 네 곳 중 두 곳이 빠르게 파괴되었다. 둑이 무너지듯 문이 열리자, 마물들은 성난 물길처럼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성벽을 방어하던 병사들은 차례로 희생당했다.
위기를 알리는 종소리가 온갖 방향에서 미친 듯이 울려 댔다. 지원병들은 어느 쪽부터 방어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북쪽과 남쪽, 그리고 서쪽 성문까지 모두 뚫렸습니다! 이대로는 성 전체가 마물로 뒤덮이고 맙니다!”
“큭…. 백성들을 토굴로 대피시켜라! 이대로 흩어지면 마물의 먹이가 될 뿐이다!”
흰말을 탄 로위나는 종횡무진으로 움직였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최악의 사태를 가정해 피난처를 준비해 두었다. 그러나 왕성에 거주하는 전체 백성에 비하면 그 수는 턱없이 부족했다. 사정이 여의치 못한 사람들은 건초더미나 술통에 몸을 숨겼다. 몇몇은 농기구를 들고 싸움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마물은 여자를 짓밟고 남자만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어 입에 물었다.
“살려 주세요!”
“누, 누가 좀 도와줘!”
“이럴 때 성녀들은 어디에 있는 거야?”
사람들은 뒤늦게 성녀를 찾았으나 무형 무색의 보호막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물들이 사내를 약탈하지 못하게 막아라!”
로위나를 비롯한 기사들은 병사들을 지휘했다. 그러나 마물의 수는 인간이 감당 가능한 정도를 까마득히 넘어섰다. 대열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전투는 금세 일방적인 살육으로 흘러갔다. 마물은 마치 소라의 껍데기에서 살점을 뽑아먹듯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헤집어 숨거나 다친 사내들을 잡아갔다.
“으아아악! 살려 줘!”
백성들은 죽어 가며 비명을 질렀다. 이 모든 일이 성녀들을 광장에 매단 왕의 잘못이라 피를 토하며 외쳤다. 마녀를 쫓아낸 대신, 대비책을 세웠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다 후회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왕성을 떠난 성녀들이 원망스러울 뿐. 간신히 얻은 평화는 이토록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어째서 용병 연합은 움직이지 않는 거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용병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로위나는 마물을 상대하며 이를 악물었다. 잇몸이 내려앉아 피가 흐를 지경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본성으로 향했다. 성녀단과 기사단을 쫓아낸 후, 용병 연합의 근거지가 된 장소. 배가 무너져 침몰하고 있음에도 그곳만은 평안했다.
향기로 인간과 알파를 구분하는 마물에게는 그곳은 먹잇감도, 번식 상대도 없는 장소였다. 식사를 앞에 두고 굳이 기웃거릴 이유가 없었다. 물론 본성의 중심에는 오메가 한 마리 있기는 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마물은 본성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 이유야 뻔했다.
“…오메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남문과 서문, 그리고 복구 중이던 북문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인간 거주 구역의 시설이 1/3 이상이 파괴되었습니다.”
오드론은 에어리얼에게 상황을 보고하고는 지시를 기다렸다.
“슬슬 움직일까요?”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은, 인간이 걱정된다기보다는 마물이 남은 사내를 모두 약탈해 갈까 조바심이 들어서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기다려.”
에어리얼은 나긋하게 말했다. 검투사들의 친선 경기를 관람하는 것처럼 여유로운 태도였다.
“알겠습니다.”
오드론은 순순히 따랐다. 그의 시선이 에어리얼의 곁에 있는 사내에게 향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자신의 왕국이 파괴되고 있음에도 전혀 나서지 않고 있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은 살아 있는 인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만큼이나 완벽하게 오메가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왕성의 풍경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왕자님?”
에어리얼이 시험하듯 물었다.
“붉은 오메가가 왕자님께서 아끼는 백성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성녀들이 왕성 밖으로 도망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하다니, 저희의 약점을 파악한 모양입니다. 아니면 성안에 배신자가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
“성녀들은 역시 붉은 오메가와 한통속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그 옛날에는 마녀라고 불리던 계집들 아닙니까?”
왕성에 이는 불길이 에레즈의 푸른 눈동자 속에서 일렁거렸다. 그러나 그의 눈은 유리알처럼 그저 풍경을 담기만 할 뿐이다.
“흐음, 전과는 달리 얌전하시군요. 당장에라도 밖으로 뛰쳐나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에레즈는 고개를 돌려 에어리얼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머뭇거린다든가, 거부한다든가, 수긍하는 척조차도. 손에 피를 묻히기를 망설이는 왕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에어리얼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제아무리 에어리얼이라 할지라도 본성 전체의 마물 혼혈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오드론처럼 순종하는 자에게는 어느 정도의 자유와 권력을 쥐여 주었다.
그러나 에레즈에 한해서는 예외였다. 에어리얼은 오랜 시간에 걸쳐 그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박살을 내 버렸다.
“지금도 나쁘지 않은 광경입니다만, 이 정도로는 제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에어리얼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인간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항쟁 중이었다. 긴 전쟁 후에 간신히 탈환한 왕성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집을 빼앗길 수 없다는 의지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막아서는 모습은 일견 고귀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지요. …누구 좋으라고?”
에어리얼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어렸다.
“오드론.”
“예, 오메가님.”
그가 손을 들자 뒤에서 대기하던 오드론이 다가왔다.
“용병들을 투입해. 인간을 공격하는 마물을 막아라.”
“분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마물을 불러와 부수던 왕성을 이제 와 구하라니. 그러나 오드론은 일말의 의문을 품지 않았다. 이런 사태가 벌어질 것을 붉은 오메가에게 이미 들었고, 그 대처법도 배워 두었으니까.
* * *
저 멀리에서 검붉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칼리번. 왕성으로 알파를 이끌고 갈 겁니까?”
그 광경을 바라보며 아스터가 물었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 해도,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정리된 후겠군요. 당신이 부리는 마물 혼혈들이 이동하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까요.”
아스터는 품 안에서 얄미운 소리만 골라서 했다. 칼리번은 인상을 쓴 채로 왕성 쪽만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마물이라면 나도 부릴 수 있다.”
칼리번은 단단히 대답했다. 에어리얼이 화력으로 승부하고자 한다면 이쪽도 응하는 수밖에 없다. 마물을 이용해 일단 급한 불을 끄고, 그사이 부대를 이동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략은 양날의 검이었다. 칼리번은 상당한 수의 마물 혼혈을 통치하는 중이었다. 이 와중에 마물까지 다룬다면 너덜너덜해진 에어리얼의 몸에 큰 무리가 갈 것이다. 최악의 경우, 정신을 잃고 모든 알파에 대한 통제권을 놓치고 말 거다.
“…….”
칼리번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그로서는 도무지 에어리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어리얼은 이미 왕성과 왕자님을 손에 넣었다. 그런데 어째서 스스로 그것을 부순단 말인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칼리번은 비행형 마물을 이용했다. 몸체가 검은 비늘로 덮인 새 형태의 마물이었다. 하늘 위는 막힌 것이 없으므로, 거대한 날개가 달린 마물은 빠르게 왕성까지 날아갔다. 이전에는 방어막 때문에 왕성 안을 감히 볼 수 없었다. 칼리번은 왕성 주변을 빙 돌았다. 성녀가 없는 왕성은 마물에게 더없이 취약했다. 끔찍한 광경을 마물의 눈을 통해 칼리번에게로 전해졌다.
‘엄청난 수….’
에어리얼은 보란 듯이 젊고 강한 마물을 끌고 왔다. 칼리번은 자신이 부릴 수 있는 마물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
이대로는 이쪽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상대는 칼리번의 몸을 지닌 에어리얼이다. 최악의 몸과 두뇌를 가진 칼리번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왕자님은 어디에 계시지?’
칼리번은 본능처럼 에레즈를 찾았다. 에어리얼이 일전에 북문을 공격했을 적, 연합군이 수세에 몰리자 에레즈가 성검의 힘으로 마무리를 지었었다. 정신을 지배당했다고 한들 왕자님은 왕자님이다. 아스터와 싸웠을 때도, 궁수 부대가 공격당하자 바로 태세를 전환했었다. 이번에도 분명 어딘가에서 인간을 위해 싸우고 있을 것이다….
“사, 살려…. 으아악!”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마물과 싸우는 것은 여성 병사뿐이었다.
“제기랄, 이게 다 성녀들이 도망친 탓이야!”
“왕께서는 지금 어디에…. 으윽!”
인간들은 마물에게 죽어 가거나 범해지며 저주를 내뿜었다.
“전하!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아직도 왕을 기다리며 울부짖는 자들도 있었다. 정반대의 기원과 저주였으나 하나같이 처절하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그렇게, 인간 병사들이 패전을 거듭하고 왕성이 반 이상 점령당한 때였다.
“전원 돌격해라!”
소란을 일시에 잠재우는 남자의 목소리. 이 전쟁터에서 가장 드문 소리였다.
“본성을 드러내도 좋으니 어떤 모습으로든 백성들을 지켜라!”
사람들이 죽어 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던 용병들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드론의 허가가 떨어지자 알파 용병들은 제 몸을 마음껏 변형시키며 전투에 임했다.
“아…! 여기입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마물에게 붙잡힌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외쳤다. 비협조적이던 예전과 달리, 용병들은 남자고 여자고 가리지 않고 마물로부터 구해 주었다.
‘…….’
칼리번이 보기에 그 모습은, 에레즈 프리드웬을 떠올리게 했다.
“아아, 알렉스!”
“엄마!”
“세상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그러나 목숨을 구원받은 인간들은 기시감을 느낄 틈이 없었다. 용병의 손에 목숨을 구한 인간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했다.
‘왕성의 알파들은 에어리얼의 지배를 받을 텐데?’
그 광경을 하늘 위에서 지켜보던 칼리번은 기괴함을 느꼈다. 이 작은 세계는… 에어리얼에 의해 공격받고, 에어리얼에 의해 구해지고 있었다.
칼리번은 머리가 나빴다. 그러나 머리가 좋았다 해도, 에어리얼의 의중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적의 행동은 모래성을 쌓고 부수기를 반복하는 아이처럼 변덕스럽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속셈인 거냐, 에어리얼…!’
하지만 머리가 나빠도 분노는 느낄 수 있다! 전쟁은 놀이가 아니다. 뒤늦게 용병 연합이 전투에 합세하기는 했으나, 끊임없이 몰려드는 마물을 상대하기란 버거웠다. 성녀만이 만들 수 있는 보호막이 없으니 결국 소모전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에어리얼이 마음을 바꿔 마물을 왕성 밖으로 물러나게 하지 않는 이상…. 하지만 전쟁을 일으킨 에어리얼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에어리얼이 하지 않는다면, 역시 내 쪽에서….’
마물을 사용해 막는 수밖에. 칼리번이 자연스럽게 결심한 순간이었다.
“아, 아…. 으아아악!”
누군가 비명을 질렀으나, 그가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아수라장이었다. 아직 침략당하지 않은 본성에서 마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괴물이다! 괴물이 나타났다!”
또 다른 마물을 목격한 인간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왕성을 공격하는 마물과는 어딘지 달랐다. 용병 연합에 소속된 마물 혼혈들은 적어도 인간의 형태를 유지할 줄 알았다.
그러나 지하 감옥에서부터 기어 나온 이것들— 기형 알파들은 달랐다. 곰의 형태를 띤 마물 같았으나 사람의 팔이 등에 달려 있어 꿈틀거린다. 혹은 사슴과도 같은 날렵한 하체에 인간의 상체 두 개가 등을 맞대고 들러붙어 있다. 마물과 인간이 규칙 없이 멋대로 합쳐진 것처럼, 하나같이 인간의 정신력으로는 버티기 힘든 기괴한 형상이었다.
“저, 저기를 보십시오, 단장님! 기형 알파들이 감옥에서 탈주한 것 같습니다!”
백성들을 등 뒤에 두고 필사적인 방어전을 치르던 로위나도 뒤늦게 기형 알파들을 보았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저것들이 날뛰기 시작한다면 용병들이 전선에 합세했어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큭….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버티는 수밖에. 대열 일부는 기형 알파를 상대해라!”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향해 외쳤다. 형제의 갑옷은 이미 피로 얼룩져 있었다. 상당한 양이 로위나 자신의 피였다.
“단장님!”
“또 무슨 일이냐!”
“뭔가 이상합니다. 저것들이… 저희를 공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몰려드는 기형 알파 무리에게 검을 세우던 병사들이 외쳤다.
“…뭐라고?!”
로위나는 결국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건…!”
기형 알파들은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었다. 병사들 뒤에는 마물이 원하는 사내들도 상당수 숨어 있었는데, 그들을 지나치기까지 한 것이다.
‘영문을 모를 일이군!’
로위나는 혼란스러웠으나 지금은 고민할 시간조차 없었다.
“병력을 다시 전방에 집중시켜라! 저것들 말고도 아직 마물은 잔뜩 남아 있다. 하지만 긴장을 늦추지는 마라!”
저러다 언제 또 속셈을 바꾸고 인간에게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에 힘을 기울이기에는 병사 한 명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두려워하면서도 대열을 정비했다.
그사이, 기형 알파들은 같은 마물에게 공격을 당하고 인간들에게 경계를 받으면서도 그저 비틀거리며 걸어가기만 했다. 기형 알파는 정해진 특징 없이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이들은 하나같이 표피가 단단하다는 특징이 있었다. 현존하는 인간의 무기나 알파의 힘으로도 죽이기가 힘들어 왕성 탈환 후 처리되지 못하고 지하 감옥에 가둬 두는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 특성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렇게 기형 알파들은 강물처럼 흐르다 왕성의 갈라진 골목과 거리에서 서로 합쳐졌다. 하늘 위에서 바라보아도 눈에 띌 정도로 그 수는 상당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그 광경을 목도한 인간 병사들만큼이나 간접적으로 관찰 중인 칼리번도 의문이 들었다. 칼리번은 기형 알파들이 향한 곳으로 검은 마조를 이동시켰다. 도달한 곳은 바로… 서쪽 성벽 앞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인간들은 두 눈을 의심했다.
“이럴 수가, 알파들이 무너진 벽을 뒤덮고 있잖아…?!”
알파 한 마리가 성벽의 잔해에 들러붙고, 또 한 마리가 그 알파를 짓밟고 올라 그 위를 덮는다. 제 몸뚱이가 벽돌이라도 되는 것처럼 성벽의 틈에 끼워 넣었다. 기형 알파의 몸이 압력으로 인해 기괴한 방향으로 부러지고, 잘려 나가기까지 했다.
그들은 마치 이렇게 사용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처럼 무너진 벽을 대신했다. 살점과 뼈고 쌓아 올린 벽은 우후죽순으로 자라났다.
기형 알파로 만들어진 벽은 하늘에 지붕을 씌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에 준할 정도로 높고 날카로운 벽을 세웠다. 칼리번과 시력을 공유한 마조가 창공으로 몸을 띄웠다. 그들이 있던 남문과 서문만이 아니라 어느새 북문에도 검은 성벽이 올라섰다. 위에서 내려다본 세 곳의 성문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보였다.
‘아니….’
칼리번은 정정했다. 그보다는 새의 발톱이 왕성을 움켜쥔 형상이었다.
“저게 뭐지?!”
전투에 여념이던 병사들과 도망치기 바빴던 백성들도 곧 왕성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눈치챘다.
“맙소사…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
인간도, 마물 혼혈도, 심지어 마물까지도 끝없이 솟아오르는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알파로 쌓아 올린 벽은 마물의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이 들지 않을 정도로 튼튼했다.
“말도 안 돼!”
“마물이 우리를 도와준다고?”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믿지 못할 것도 없다. 지금만 해도, 알파 용병들이 나서서 인간들을 지켜 주고 있지 않은가?
가장 먼저 전투에 나섰던 기사단은 준비가 덜 되고 화력이 부족한 탓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러나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낸 용병들은 병사들의 시체를 밟고 훨씬 용이하게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전하께서 한 마리의 마물도 놓치지 말라 명하셨다! 감히 왕국을 삼키려고 드는, 붉은 오메가의 자식을 전멸시켜라!”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갑옷을 입은 채 쓰러진 병사들보다, 사내의 모습을 한 용병들이 더욱 믿음직해 보였다. 인간은 언제나 희생하는 자가 아닌 더 강한 자에게 매료되곤 했다.
“이 꼴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마물에게 고통받는 인간들을 구하자!”
오드론을 비롯한 용병 길드의 대장들은 짜 맞춘 듯 같은 말을 외쳤다. 그 기세에 본능적으로 패색을 눈치챘는지, 마물들이 도망치려 들었다. 날 수 있는 것들은 하늘을 통해 도망쳤으나 네발로 기는 것들은 성벽에 막혔다. 용병들은 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마물과 교전을 펼쳤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백성들은 하나둘씩 용병들에게 구출되었다. 세상에 목숨보다 귀한 것은 없었다. 그것을 위협당하거나 빚지게 되는 순간, 머릿속에 든 가치관이나 사상은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마물 혼혈을 멀리했던 백성들은 어느새 용병에게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했다.
“…….”
적도, 아군도 전부 에어리얼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다. 칼리번은 혼란스러운 나머지 왕성 주변을 맴돌며 쉬이 떠나지 못했다.
그때, 성벽을 기어오르던 마물이 칼리번에게로 날아들었다.
‘에어리얼!’
검은 마조의 정체가 칼리번이 조종하는 마물이라는 것을 예상했다는 듯. 에어리얼의 마물은 길고 날카로운 부리로 검은 새 마물의 머리를 꿰뚫었다. 두 마조가 함께 추락한다…!
마물과의 연결은 순식간에 끊어지고 말았다.
“…큭!”
눈알이 뽑히는 듯한 고통에 칼리번은 한쪽 눈을 움켜쥐었다.
“칼리번?”
익숙한 아스터의 목소리가 귀를 울린다.
“칼리번. 혼자서 뭘 본 겁니까? 에어리얼이 어디에 있는지 발견한 겁니까? 칼리번. 저한테도 알려 주십시오.”
“…….”
“칼리번. 칼리번.”
칼리번의 정신이 이쪽으로 돌아오자, 아스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아스터는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답답했는지 투구를 쿵쿵 두드리기까지 했다.
“젠장….”
“왜 그러십니까?! ……이건.”
칼리번이 눈에서 손을 떼자, 아스터의 지독한 부름이 뚝 그쳤다. 칼리번의 오른쪽 눈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에어리얼이… 부르고 있다.”
칼리번은 손에 묻은 피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부르고 있다니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
칼리번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뜨겁게 오르는 오른눈을 손으로 꾹, 짓눌렀다.
* * *
네 군데의 성문 중 세 군데가 무너졌고, 구멍을 기형 알파로 채워 넣었다. 그 과정에서 문 자체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동문뿐이다. 칼리번이 어느 곳으로 쳐들어올지 예상하기가 한결 쉬워졌다. 아니, 에어리얼이 이리로 들어오라며 골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사히 백성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군요. 기쁘지 않으십니까?”
검붉은 성벽을 지켜보던 에어리얼이 에레즈에게 물었다.
“…….”
예전이었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러나 에레즈에게는 더는 의지랄 것이 없었다. 어둠 속에 가라앉은 푸른 눈은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았다. 에어리얼은 완벽하게 세뇌된 에레즈를 확인하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넌 붉은 오메가로서 왕성을 침략해야 해, 칼리번.’
에어리얼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오지 않는다 해도, 네 손으로 부수는 것과 같은 꼴이 될 테니까.’
끝이 날카로운 발톱이 태양을 찌르는 모양새였다.
* * *
칼리번은 아스터를 데리고 젠을 가둬 둔 천막으로 돌아왔다.
“뭐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표정이 좋지 않은데.”
지진이 일어났는데도 젠은 용케도 제 자리를 보전하고 있었다. 물론 부러진 다리가 회복되지 않은 탓이 크겠지만.
“밖에서 알파들이 떠드는 소리를 좀 훔쳐 들었거든? 마물이 왕성으로 갔다는데…. 설마?”
“…내가 벌인 일이 아니다. 이건 에어리얼의 짓이다.”
“그래서 에어리얼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칼리번. 알려 주십시오!”
칼리번은 버둥거리는 아스터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한쪽 팔에 단단히 끼웠다. 그러고는 마물의 눈을 빌려 본 것들을 젠에게 말해 주었다.
“…….”
젠은 팔에 턱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겼다. 칼리번보다 머리가 좋은 편인 그녀도 에어리얼의 의도를 이해하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여자의 수를 줄이기 위해서 벌인 짓일 수도 있어.”
고민 끝에 젠이 입을 열었다.
“네 몸을 차지한 에어리얼이 힘이 넘쳐서 왕성의 알파 모두를 통제한다 해도, 인간은 절대로 지배하지는 못해. 인간은 오메가의 향기를 맡지 못하니까. 하지만 알파들에게는 오메가를 대신할 인간 남자가 필요하지. 알파를 달랠 수 있는 좋은 미끼니까. 그리고 인간 남자는…. 여자를 필요로 하고.”
젠의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
아스터는 투구 밖으로 금사를 쭉 빼냈다. 금사가 젠을 향하기 전에 칼리번이 덥석 낚아챘다.
“하지만 에어리얼에게 여자의 존재는 가축만도 못해. 개미와 같은 미물에 가깝지. 쓸 만한 여자는 오히려 귀찮을 뿐이고. 그래서 나를 비롯한 성녀들을 쫓아낸 거고….”
젠은 스스로 말하고도 어딘지 미덥지 않아 했다.
“그래서 이런 일을 벌였다기에는… 좀 모호한데.”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앞뒤가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는 느낌이 자꾸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마물을 조종하는 데에는 상당한 힘이 든다. 언제 내가 공격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낭비할 바에는, 왕성 내의 용병을 시켜 여자를 전부 죽이는 편이 쉬울 거다.”
“…하긴 그렇군. 에레즈를 죽이지 않고 세뇌한 것도 인간을 왕성에 남기기 위해서일 텐데, 굳이 귀찮은 짓을 하지는 않겠지.”
젠은 혀를 차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어리얼은 나를 부르고 있는 거다.”
젠에서 답을 얻지 못한 칼리번은, 제 생각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
칼리번의 손에 잡혀 퍼덕거리던 백금사가 움직임을 멈췄다. 젠의 표정 또한 굳었다.
“에어리얼이 ‘붉은 오메가’를 위장해 왕성을 공격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내가 지금 부리고 있는 부하들을 데리고 ‘진짜로’ 전투에 나설 때까지는 아마… 계속해서 그런 짓을 해 댈 거다.”
칼리번은 백금사를 쥔 채로 가볍게 흔들었다.
“왠지 그럴 거라는… 느낌이 든다.”
미꾸라지처럼 버둥거리던 것이, 지금은 평범한 머리카락처럼 그의 힘을 따라 갈대처럼 흐물거린다. 젠의 시선이 백금사에 오랫동안 꽂혔다.
“널 왜 부르는 것 같아?”
젠이 물었다. 칼리번은 답하지 못했다.
“에어리얼은 널 죽이고 싶어진 거야.”
젠이 칼리번이 차마 말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아마도 그렇겠지.”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에어리얼은 모든 걸 가졌어. 인간. 마물 혼혈. 마물. 그리고 기형 알파까지. 데릴만을 통해 성 밖에 있는 알파들까지 흡수하려 했지만, 그것만은 너에게 빼앗겼지.”
“…….”
“거기다 넌 에어리얼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어. 물론, 난 오메가에 대해서는 너만큼은 모르지만…. 에어리얼이라면 분명 눈엣가시일 거야.”
칼리번은 유희를 즐기지는 않지만, 전쟁을 흉내 낸 놀이 하나는 알고 있었다. 그 놀이는 왕과 왕비, 기사와 주교, 성채, 그리고 병사를 본뜬 말을 두고 백과 흑으로 나뉘어 싸운다. 그 거대한 판에서, 칼리번은 아마도 졸병에 불과했을 것이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고 금방 죽고 마는 하찮은 말….
“그동안은 너에게 ‘붉은 오메가’의 껍데기를 씌워서 우리를 교란시키는 데 이용했지. 이제는 쓸모가 없어졌으니 널 죽이고, 네가 가진 알파를 차지하면…. 그 녀석이 이기는 거야.”
아주 오래전, 칼리번은 살 수 없을지라도 죽지만은 않겠다고 약속했다. 비록 헤맬 때도 있었으나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가장 약한 졸병은 적진으로 계속 나아가다 보면 여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대가로 게임의 승패를 좌우하는 왕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제는… 붙잡힌 왕을 위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정할 때였다.
“에어리얼 녀석이 맘대로 하게 둘 수는 없지.”
그 결심은, 칼리번보다 젠이 먼저 내린 모양이었다.
“다른 성녀님들과 얘기는 해 봐야겠지만, 일단 나는 네 곁에 남겠어.”
“…그러지 않아도 된다. 나는 에어리얼의 기억을 봤다. 그리고 너희의 관계는….”
“에어리얼은 내 손으로 죽인다.”
젠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칼리번은 손안에서 백금사가 움찔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녀석 워낙 지은 죄가 많아서 말이야, 내 차례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젠은 너스레를 떨었으나 칼리번은 그 속에 숨겨진 진의를 파악했다.
“거기다 넌 아직 에레즈도 만나지 못했잖아.”
그 말에 칼리번은 가슴이 따끔거렸다. 이미 두 번이나 만났다. 하지만 머릿속에 안개가 낀 에레즈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에어리얼이 그의 바로 곁에 있는 이상 안개는 짙어지면 더 짙어졌지, 맑아질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다. 그중 첫 번째는 포로들을 안전한 곳으로 안내하는 일이지.”
칼리번의 말에 젠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젠장, 맨날 나만 이런 역할이냐?”
“알파를 모으다 보니 포로의 수가 상당히 늘게 되었다. 왕성으로 피신하지 못한 자들은 대부분 노예로 잡혀 있더군.”
칼리번은 센어르가 만들어 낸 작은 영지에서 지냈던 날들을 떠올렸다. 그 정도로 본격적인 곳은 더 없었지만, 많은 인간이 알파의 노예가 되어 가혹한 노역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알파를 조종할 수 있다 해도 그 힘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전투에 임하기 전까지는 의식을 흐리게 하고 동조를 구하는 정도로 유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아직도 ‘붉은 오메가’인 척을 하고 있지. 알파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을 전부 풀어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노예가 되지 않은 인간들은 토굴을 파서 숨어 살고 있다. 그곳으로 노예와 성녀들을 데려가라.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다. 피신한 후 때를 기다리는 거다.”
“참고로 토굴은 제가 발견한 겁니다.”
아스터가 불쑥 끼어들었다. 칼리번이 말을 하지 말라고 명령했건만 이 순간만은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 이 녀석이 찾아냈지.”
칼리번은 투구를 무심하게 쓰다듬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우리의 목적은 왕자님을 구출하는 거다. 하지만 에어리얼 때문에 쉽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동시에 아스터를 내려다보았다.
“?”
계속 무시당하다가 처음 노골적인 관심을 받았으나 아스터는 유쾌하지는 않은 듯했다.
“흠…….”
“…….”
두 사람은 머리밖에 남지 않은 남의 편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이 녀석은 귀가 어디 있지?”
“딱히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흐음…. 그래?”
젠과 칼리번은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제 귀를 자르려 든다면 저도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아스터는 투구 밖으로 금사 두 줄기를 내밀었다. 힘이 빠진 백금사는 퍽이나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이봐, 칼리번. 예전에 말이야, 너 한쪽 귀 잘렸을 때 기억나냐? 잘 붙지 않아서 손으로 붙이고 있었잖냐.”
젠이 아스터를 무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거라면 기억하고 있다.”
“좋아. 그럼 그때 내가 열 받아서 너한테 했던 욕은 어때, 기억나?”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그럴 거냐?”
칼리번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아.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 …알았어.”
그러자 젠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알아서 이해했다.
“……도대체 뭡니까. 저만 두고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아스터가 어딘지 부루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칼리번은 그런 그를 무시했고 젠은 딴청을 피웠다.
* * *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검은 성벽은 인간을 마물로부터 지켜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의 일이었고, 이미 폭풍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후였다.
“살아 있는 자는 모두 광장으로 모두 모이시오!”
용병들이 여기저기서 외쳤다. 바다 위 부표처럼 흔들리던 사람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이동했다. 용병들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외치며 왕성을 순회했다. 그런 와중에 건물에 깔리거나 도움을 받지 못한 사내를 구해 내는 것은 덤이었다.
“도와주세요…. 여기도 사람이 깔려 있어요! 으으윽, 이러다 죽게 생겼어요!”
무너진 건물 하나에 여자 여럿이 매달려 잔해를 지고 있었다. 잔해에 아래에 깔린 사람은 그 덕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으나, 그래 봤자 그도 여자였다. 순찰 중이던 용병들은 소리가 들린 곳을 흘끗 보더니 모른 척 지나쳤다.
“어째서 저들의 간청을 무시하는 거지? 어서 도와라.”
그때, 누군가 용병의 어깨를 붙잡았다. 리론 후작의 여식이자 왕실 재건 기사단의 단장인 로위나였다. 전투가 끝난 후, 그녀는 팔에 입은 부상을 안은 채로 구호 활동 중이었다.
“이런…. 단장님. 저희는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용병들은 귀찮은 일에 걸렸다는 듯이 돌아보았다.
“너희처럼 귀가 좋은 자들이 못 들었다는 건가?”
로위나가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 용병들은 서로 눈을 맞추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저 정도 부상이면 구해 봤자 얼마 못 가 죽고 말 겁니다. 그럴 바에는 포기하는 편이 서로에게 이득입니다. 용병질을 오래 했더니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나서 잘 알지요.”
“저희가 겉모습은 어려 보여도 30년 가까이 용병대에서 일했습니다. 단장님께서는 기사가 되신 지 얼마 안 되셨으니 모를 수도 있으나….”
“모두를 살릴 수는 없습니다. 저들 말고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널리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좋게 넘어가고 싶은지, 로위나의 앞에서 입을 맞춰 너스레를 떨었다.
“죽고 살고는 신께서 정할 일이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구조해야 한다. 그러니 가리지 말고 도와라.”
로위나는 그들의 이죽거림을 단칼에 잘라 냈다.
“…이건 명령이다.”
그녀는 칼을 뽑아내어 용병들 앞에 겨누었다. 상처를 입은 팔에서 흐른 피가 갑옷 안에서 고여, 밖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아….”
“이것 참….”
용병들은 그런 기사단장을 보며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서열이 높은 알파의 말 외에는 듣지 않았다. 상대가 귀족이자 남성인 리론 후작일 때도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니 여성인 로위나에게는 더욱 그랬다.
“따르지 않을 셈이냐?”
로위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노기가 서린 그녀와 달리 알파들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치하던 중, 용병 하나가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단장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괜한 다툼을 만들기 싫었는지 알파들이 슬슬 명령을 따르는 척을 했다. 얕잡아 보는 태도에 발끈한 로위나가 칼을 휘두르려던 차였다.
“단장님! 어디 계십니까, 단장님!”
병사 한 명이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여기다.”
로위나는 용병들을 죽 둘러본 후, 아쉽게 칼을 집어넣었다. 로위나의 목소리를 들은 병사는 한시가 급한지 건물의 잔해를 껑충껑충 뛰어넘으며 달려왔다.
“내가 지금 자리를 뜬다고 해서 태만해서는 안 될 것이다. 후에 다시 찾아오겠다. 돌아왔을 때 저들이 잔해에 깔려 죽어 있다면…. 너희를 용서치 않겠다.”
로위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는 자리를 떴다. 그 뒤에 남은 용병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의식적으로 무시했다.
“그래, 아버지께서는 어찌 되었지?”
로위나는 달려오는 병사를 붙잡고 급히 물었다.
“다행히도 후작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다만 원래 머무르시던 저택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현재는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알겠다. 그렇다면 더 두려워할 일은 없겠군. 왕자님의 명령대로 광장으로 가자.”
로위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 힘이 달려서 우리에게 시키는 주제에 오만하게 굴기는.”
“놔둬. 인간 계집이 언제까지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닐 수 있겠어?”
한편, 용병들은 멀어지는 로위나의 뒤통수에 대놓고 험담을 했다. 평소 같았으면 침이나 뱉고 떠냈겠지만, 한동안은 인간 친화적으로 굴라는 오드론이 명령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설렁설렁 걸어갔다. 여자 여럿이 매달려 낑낑거리던 건물의 잔해를 번쩍 들어 올리고는, 부상자들도 꺼내 주었다. 마물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에 비하면 이 정도는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아아…. 감사합니다!”
여인들은 용병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했다. 용병들은 오드론을 통해 지시를 받은 대로, 여자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사이 로위나는 부상자를 이끌고 뒤늦게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은 시장판처럼 시끄러웠다. 그러나 그만큼 활기가 넘치지는 않았다. 먹구름 낀 새까만 울음과 신음만이 가판대 위에 가득 늘어져 있다.
두 발로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다들 주저앉아 다친 이를 무릎에 눕히거나, 얼마 안 되는 짐을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었다. 고통을 파는 사람은 무수했다. 그러나 슬픔을 사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부상자 대부분은 아이나 노인, 여자였다. 인간 남자는 수가 적기도 했지만, 전투가 한창일 때 토굴에 숨었기 때문에 무사했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우리 아이가 죽어 가고 있어요!”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이 외쳤다. 그러나 돌봐 줄 성녀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성녀가 곁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참회라든가, 그녀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인간은 자신은 후회하지 않으면서 남은 후회하기를 바라는 신기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제길, 사람이 죽어 가고 있는데 성녀들은 다 어디를 간 거야!”
“감히 저희만 살겠다고 도망을 쳐?”
“성녀들이 마물을 불러들인 거야. 자기들을 박해한 복수를 하려고 그런 거지!”
진통제조차 없었기에 부상자들은 이곳에 없는 존재를 짓씹으며 버텼다.
“모두 조용히 하십시오!”
광장에 사람이 어느 정도 모이자, 용병들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신음을 참기 힘든 환자 외에는 대부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오드론과 그의 수하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광장의 한 가운데에 놓인 단상 위에 섰다. 당연히 왕자님께서 나올 줄 알았던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이번 급습을 통해 붉은 오메가가 왕성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확인했습니다. 붉은 오메가는 빠른 시일 내에 다시 공격해 올 겁니다. 왕성을 빼앗고 인간을 모두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드론은 확신에 찬 어투로 외쳤다.
“다… 다시 공격해 온다고!?”
“지금도 버거운데, 만약 또 공격을 당한다면….”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붉은 오메가를 없앨 수 없습니다. 마물을 막기 위해서는 마물에 필적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오드론은 두려움이 충분히 퍼지기를 기다리다 적절한 때에 외쳤다.
“오, 옳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용병들이 나서서 우리를 지켜 주세요!”
사람들은 이번 전투로 인간 여자로 구성된 왕실 재건 기사단보다는 마물 혼혈 용병이 훨씬 쓸모 있고 강한 존재임을 체감했다. 사람들은 마물 혼혈을 배척했던 과거를 잊고 오드론에게 간절히 매달렸다.
“고심 끝에 왕자님께서는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오늘과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기존의 기사단을 철폐하고 용병대를 새로운 기사단으로 임명하시고자 합니다.”
“뭐라고?!”
부상자를 돌보던 로위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 결정에 대해 언질은커녕 며칠간 에레즈 프리드웬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흠, 흠…. 또한, 인간 사내는 마물의 최우선 목표입니다. 이들을 마물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각별한 관리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왕자님께서는 인간 사내들만 따로 추려 보호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광장의 경계를 둘러싸던 용병들이 사람들의 무리를 헤치고 척척 다가왔다. 모든 일이 짜 맞춘 것처럼 반박한 틈도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붉은 오메가가 언제 습격할지 모르니, 지금 바로 실행에 옮길 것입니다.”
선언은 곧 명령이었다. 용병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내를 찾기 시작했다.
“아버지!”
알파에게 가족을 빼앗긴 아이가 소리쳤다. 마물에게 어머니와 형제를 모두 잃고, 아버지만이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었다. 어른의 보호 없이 여자아이가 살아남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용병은 아이에게서 사내를 가차 없이 빼앗아 갔다.
“안 돼!”
“그이를 돌려주세요,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이런 식으로 딸은 아버지를, 손녀는 할아버지를, 아이는 형제를, 아내는 남편을 빼앗겼다. 갑작스러운 결정과 집행에 저항하는 이가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요, 용병님…. 제발, 이 아이만은…! 제 아들은 제가 지킬 수 있어요, 이대로 갑자기 헤어질 수는 없어요! 아악!”
반항하는 여자들이 생기자 알파는 무력을 동원했다. 저보다 큰 자식을 보호하던 여인은 용병에게 얻어맞고는 땅으로 고꾸라졌다.
“이게 다 여러분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왕자님께서 명하신 것이니 순순히 따라 주시길 바랍니다.”
오드론이 들끓는 사람들을 혀로 진정시켰다. 사내들은 자신과 같은 성별이면서도 더 강한 알파에게 기가 죽어 따랐다. 알파와 맞설 정도의 배짱을 지닌 사내는 전쟁으로 죽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여자들은 남자들만큼 순순하지 않았다. 에레즈 이전에 알테르 프리드웬의 인간 농장이 있었다. 말만 다를 뿐이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던 것이다.
“그, 그러면 남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저희야 젊어서 싸울 수 있지만, 노인과 아이들은요?”
“지금 우리끼리 이럴 때가 아니에요, 부상자들이 우선입니다!”
여자들이 외쳤다. 그러나 알파들은 여자들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알파의 세계에는 노인과 아이가 없었다. 그들은 부모 없이 태어나 혼자서 성장하고, 그 과정에서 약한 자는 죽었다. 그것은 당연한 순리였다.
목소리를 드높이는 여자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일은 더없이 쉽다. 그러나 이 이상으로 억누르면 소란이 일어날 것이다. 오드론이 조금씩 반항하는 여자들을 보며 턱을 만지작거릴 때였다.
“저, 저는… 제 남편이 죽는 걸 원치 않아요.”
사람들 사이로, 한 여인이 외쳤다.
“전 이미 아버지와 남동생을 잃었어요! 마물에게 당하고 말았다고요! 하지만… 여기 있는 용병님들은 왕성 밖의 알파들과는 달라요. 저희를 구해 주는 모습을 보았잖아요?!”
남편을 더없이 소중히 여기는 아내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여인이 그 의견에 목소리를 더했다.
“저와 제 딸은 괜찮으니 제 아들이라도 보호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싸우는 건 여태껏 그래 왔듯이 저희가 하면 되지 않습니까? 부상자도 서로 도우면서 치료하면 충분할 겁니다. 남자는 어차피 적어요, 용병님들이 저희와 함께 싸울 건데 뭐가 무섭겠습니까!”
일방적인 살육에 가까웠던 전투가 끝난 직후였다. 그런데 내부마저 분열될 조짐을 보였다. 이는 두려움과 공포를 증대시킬 뿐이다. 여자들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늘 그랬듯 자신을 아끼지 않았다. 그 평화가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왕자님의 명령이라면 마땅히 따라야지요!”
더구나 명령을 내린 사람은 끔찍한 알테르 프리드웬이 아닌, 에레즈 프리드웬이었다. 비록 인간 농장과 다를 바 없는 명령이라 할지라도, 명령을 실행하는 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물과 용맹하게 싸우던 용병들이다. 여태껏 힘을 합쳐 왔는데, 그들이 배신할 리가 없다.
“잃을 것 없는 성녀들은 도망갔지만, 우리는 도망가지 맙시다!”
자칫 싸움으로 번질 수 있었으나 분위기는 금세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여자들은 서로를 다독이고 응원했다. 스스로의 의지로 무기를 포기하도록 종용했다. 격렬한 저항을 예상했던 오드론은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다.
“그래…. 우리가 일단 살아남아야 여자들도 살 수 있는 거지.”
“이 굴욕은 붉은 오메가가 죽은 후에 다 같이 갚읍시다.”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것이니까….”
흐름이 이러하니, 인간 사내들도 여자들을 전쟁터에 남겨 둔 채 특별하게 보호받는 일을 부끄러워하거나 꺼리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분리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성년 이상의 사내들은 용병을 따라갔고, 노인이나 사내아이들은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여자에게 다시 맡겨졌다.
“멈춰라.”
그러나 로위나는 더는 좌시할 수 없었다.
“나는… 왕자님께서 직접 명령하시기 전까지는 인정할 수 없다.”
로위나의 주변으로 병사들이 함께했다.
“인정하고 말고는 단장님…. 아니, 영애께서 정하실 것이 아닙니다. 왕자님께서 직접 명령을 내렸고, 저희는 명령을 따를 뿐이니까요.”
어느새 단상에서 내려온 오드론이 용병들 대신 그녀를 상대했다.
“말을 하려면 똑바로 하여라. 소후작이다.”
단장의 직위를 빼앗긴 로위나는 이를 악물며 반박했다.
“여자는 작위를 잇지 못합니다. …아직은.”
오드론은 말꼬리를 은근히 올렸다. 여우처럼 가는 눈매가 평소보다 더욱 교활해 보였다.
“큭…. 왕자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진정 허락하셨단 말인가?!”
믿기지 않았다. 왕자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인간의 편을 드셨던 분이다. 로위나는 항상 몸을 아끼지 않고 전투에 임하던 왕자를 존경했다. 그가 왕성을 탈환한 후 점점 변해 가고, 성녀를 괄시하는 행보를 보일지라도 여전히 믿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충직한 기사였으니까.
“나를 왕자님께 안내해라! 이 두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해야겠다!”
왕자님께서 우리를 버릴 리가 없다. 로위나에게 에레즈 프리드웬은 마지막 밧줄이었다.
“왕자님께서는 붉은 오메가를 막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 성역으로 향하셨습니다.”
“…성역?”
뜻밖의 대답에 로위나의 눈이 뜨였다. 성역이라니. 그건 누구도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전설에서나 나오는 땅 아니던가?
“예. 그리고 무사히 귀환하실 때까지 전권을 저희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로위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변명할 것이 없으니 감히 거짓말을!”
그녀는 알파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버텼다. 쓰러진 아버지를 대신해서 기사단을 이끌어야만 했다. 저딴 알파의 손에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왕자님께서는 중대 사안을 처리하기 전에는 늘 기사단과 성녀단, 그리고 용병대의 장을 소집하여 의견을 구하셨다. 그렇게 급작스럽게, 독단적으로 결정하셨을 리가 없어!”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더구나 오드론은 신용병 연합의 이인자였다. 이런 일에는 으레 교섭에 나섰던 데릴만은 코빼기도 보이지도 않고, 여우가 활개를 치는 것이다.
“기사단은 방금 막 해제되었고, 성녀단은 떠났습니다.”
분노한 로위나와 달리 오드론은 더없이 차분했다. 그의 뒤로 알파들이 몰려왔다.
“이제는 저희 용병 연합밖에 남지 않았는데…. 규칙이 지켜져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인간 남자보다도 커다란 알파들이 로위나와 병사들을 둘러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