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어떤 괴물의 기억 (29/50)

| 목 차 |

3. 어떤 괴물의 기억

4. 암군

5. 성역에서

6. 탈피

7. 빈사의 백조

8. 수장

9. 최후의 적

3. 어떤 괴물의 기억

<여섯째 왕자님께는 가까이 다가가선 안 된다. 방심했다가는 크게 다칠 수 있으니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도록. 내 말을 명심하거라.>

덩치 큰 성녀는 탑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 말을 귀에 딱지가 얹도록 들어왔다. 전쟁터, 그중에서도 마물이 가장 들끓는다는 로겐 영지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이번에 탑에 배정되었다. 그녀 정도 되는 실력자가 맡아야 하는 일이라니, 여섯째 왕자는 얼마나 끔찍한 괴물이란 말인가….

성녀가 들은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다. 평소에는 작은 배식구를 통해서 식사를 준다. 대신 이주에 한 번 정도 그분의 상태를 확인하고 주변을 청소하는 것이다. 덩치 큰 성녀가 맡은 임무는 그중에서 바로 그 청소 업무였다.

<이것이… 괴물?>

‘감당 못 할 괴물’이라 들어 왔기에 바짝 긴장했으나 탑에 오른 첫날, 그 실체를 본 덩치 큰 성녀는 탄식하고 말았다. 예상과는 크게 달랐다. 성녀가 본 괴물의 모습은 그저… 자그마한 아이에 불과했다.

탑 꼭대기에 자리 잡은 하나뿐인 방.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괴물은 손발이 흰 쐐기풀 천에 묶인 채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금빛 머리카락은 손에 잡히는 대로 급히 잘랐는지 들쑥날쑥했다. 유달리 가녀린 발목과 손목은 처음 보는 이로 하여금 동정심을 얻기 충분했다.

‘세상에, 저런 작은 아이를 가혹하게 묶어 둘 필요가 있을까?’

믿기지 않는 광경에 덩치 큰 성녀는 거부감이 들었다. 아이는 성녀의 반절도 되지 않았다. 저 정도 체격은 그녀 자신의 힘으로도 충분히 제압 가능 할 것 같았다.

더구나 굳이 묶지 않아도…. 아이는 한구석에 몸을 말고서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덩치 큰 성녀는 꺼림칙한 기분으로 이곳저곳을 청소했다. 그런 성녀의 착각은 고작 몇 시간 만에 깨지고 말았다.

<와… 왕자님께서 탑을 나가지 못하게 막아라…!>

사건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방 안에서 괴물의 상태를 살피던 성녀가 급히 외쳤다. 그녀는 잘린 팔을 움켜쥔 채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탑 주변을 청소 중이던 덩치 큰 성녀는 다른 성녀들을 이끌고 문제의 장소로 향했다. 외침을 들은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는지 여기저기서 비명과 신음이 들려왔다. 한 걸음 먼저 도착한 기사들이 사건을 봉납해 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둔탁한 소음과 함께 문이 부서졌다. 방 안에 침투한 기사들이 물건처럼 문밖으로 내던져졌다. 성녀들은 방 안으로 들어서기 전, 방어 태세를 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그마한 형상이 문밖으로 기어 나왔다.

<…….>

설마 했으나, 정말로 그 아이였다. 손발의 구속은 풀려 있었고 입혀 둔 성녀복은 갈기갈기 찢어져 나신이나 다름없었다. 짧았던 머리카락은 땅에 내려앉을 정도로 길게 자란 채였다. 금빛 머리카락은 비단처럼 괴물의 몸을 가려 주었다. 그리고 금빛 비단의 끝자락은… 피로 젖어 붉었다.

<우, 아으…….>

괴물은 겉모습과 달리, 제대로 된 말을 구사하지 못하고 아기처럼 웅얼거렸다. 땅에 질질 끌리는 머리카락의 무게가 버거운지 연신 비틀거렸다.

<아… 안으로 돌아가십시오, 왕자님.>

덩치 큰 성녀는 두 팔을 벌리고 괴물을 막아섰다. 언제 다시 싸움이 시작될지 모르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괴물은 제 머리카락을 밟고는 넘어지고 말았다.

<우… 으!>

<…!>

성녀는 저도 모르게 괴물에게 달려가, 넘어진 괴물을 일으킬 뻔했다. 잔해 위로 쓰러진 모습은 영락없이 그 나이의 아이로 보였다.

<왕자님, 부탁입니다! 방으로 들어가 주십시오….>

이 순간까지도 덩치 큰 성녀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괴물이라 불리는 소년은 너무나 작고 연약해 보였다. 눈앞의 아이가 아닌 다른 마물이 사람을 해치고 주변을 부쉈다고 믿고 싶을 정도였다.

<하아…. 으….>

아이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는 덩치가 커다란 성녀를 노려보았다. 푸른 눈은 보석처럼 아름다웠으나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괴물은 성녀와 눈을 맞춘 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사이 바닥에 깔린 금사가 날카로운 창으로 변했다.

<—!>

거대한 창이 달려들자, 덩치 큰 성녀는 빠르게 방어막을 펼쳤다.

<윽…?! 말도 안 돼, 내 보호막이…. 아…아악!>

급히 금사를 막는 사이, 등 뒤에서 또 다른 금사가 기어 와 덩치 큰 성녀의 어깨를 꿰뚫었다. 여인의 어깨를 뚫고 나온 금사는 순식간에 뱀처럼 유연하게 변하더니, 성녀의 목을 칭칭 감았다. 금사가 성녀의 목을 부러뜨리려는 찰나.

<막아 줄 테니, 그사이에 성력을 불어넣어서 잘라 내라.>

차가운 목소리가 덩치 큰 성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사내의 손이 그녀의 목으로 불쑥 들어오더니 단번에 금사를 움켜쥐었다.

<아, 알겠습니다…!>

성녀는 성한 왼손으로 금사를 붙잡았다. 그녀는 살기 위해 금사에 성력을 붙어 넣었다. 성녀가 쥔 금사가 검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본체와 금사가 끊어지자 알테르는 망설임 없이 성녀를 밀쳐 냈다. 덩치 큰 성녀는 제 어깨를 꿰뚫은 금사 뭉치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으, 으, 으아…. 으……!>

알테르를 발견한 괴물은 곧바로 공격의 방향을 바꿨다. 피가 묻은 금사가 검을 쥔 알테르의 오른팔을 향했다.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알게 되었구나.>

알테르는 왼팔을 뻗어 달려드는 금사를 움켜쥐었다. 일부러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 오른팔은 무방비하게 두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금사를 막을 힘이 없어 실현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똑같이 마물의 피가 흐르는 알테르는 제 동생의 움직임을 훤히 꿰뚫었다. 알테르는 금사를 세게 잡아당겼다.

<히— 히윽!>

괴물은 온 힘을 다해 버텼다. 알테르의 칼날이 괴물을 향하고 있었다. 이대로 끌려간다면 그 끝에는 칼에 찔려 죽는 결말뿐이다. 땀을 뻘뻘 흘리는 괴물과 달리 알테르의 표정은 더없이 고요했다.

<아으……. 마, 아…!>

괴물은 유독 알테르에게 살의를 내뿜으며 잔뜩 털을 곤두세웠다. 그 안에는 오직 한 가지의 감정,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근본적인 공포가 담겨 있었다.

<…….>

알테르 프리드웬은 10년 가까이 전쟁터를 누빈 전사였다. 괴물과 힘겨루기를 하던 알테르는 대뜸 금사 쪽으로 얼굴을 묻었다. 으직, 그는 금사를 이로 물어뜯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금사가 피를 흘리며 뜯어져 나가자, 알테르는 칼을 바닥에 던지고는 두 팔로 금사를 찢어 버렸다. 그 순간, 양편에서 팽팽히 당겨진 실이 끊어지고 말았다.

<아아아……!>

괴물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뒹굴었다. 벽에 머리를 쿵, 부딪친 괴물은 금사로 다시 공격하려 들었다. 알테르는 바닥에 피가 섞인 머리카락을 내뱉었다. 떨어진 금사는 마치 살아 있는 살덩어리처럼 펄떡거렸다.

알테르는 괴물이 다시 공격하기 전에 자그마한 몸 위에 올라탔다. 그는 괴물이 반항할 수 없도록 관절 몇 군데를 부러뜨린 후, 가는 목을 짓눌렀다. 커다란 손은 목뿐만 아니라 얼굴도 반 이상을 덮었다.

<히이, 악, 아아! 시, 으…. 으으!>

그러자 괴물은 알테르의 손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의 손등에 선명한 잇자국과 함께 피가 흐르더니, 살점마저 뜯겨 나갔다.

<…….>

알테르는 고통 따위는 느끼지 않는 조각상처럼 괴물의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 둘은 형제처럼, 그리고 부자처럼 닮아 있었다. 그럼에도 알테르는 괴물에게서 다른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프리드웬의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흔적을….

<왕비님께서 지은 천을 내와라. 성녀복이 남아 있다면 그것도 챙겨 오거라.>

알테르는 오른손이 갈기갈기 찢기고 있음에도 흔들림 없이 명령했다. 이제 막 어깨에 박힌 금사를 뽑아낸 성녀가 몸을 일으켰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예상했다는 듯, 방 주변에는 정갈한 성녀복과 흰 쐐기풀 천이 준비되어 있었다. 성녀는 비틀거리며 그것들을 안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악… 아아아악!>

알테르의 뒷모습에 가려져 괴물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괴물의 비명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알테르는 에레즈의 머리카락을 잘라 내고 있었다. 평범한 머리카락처럼 검으로는 잘리지 않아, 마치 살점을 찢어 내듯 손으로 찢고 이로 끊어 냈다. 그때마다 괴물은 신체 일부가 잘려 나가는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적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금사는 뒤늦게서야 평범한 머리카락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알테르는 검을 사용했다. 덩치 큰 성녀는 그 광경을 두 눈에 새기며 알테르에게 다가갔다.

<이리로 가져와라.>

알테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명했다. 성녀는 품에 안고 온 옷가지를 전했다. 그사이에 천에 피가 짙게 묻고 말았다. 알테르는 발광하는 짐승에게 억지로 성녀복을 입힌 후, 손과 발을 흰 쐐기풀 천으로 묶었다.

번들거리는 푸른 눈이 알테르의 어깨너머로 성녀를 노려보았다. 성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수많은 마물을 상대해 왔다. 수없이 부정하려 했지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괴물은 인간이 아닌 주제에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썼다는 사실을.

* * *

<문제는 폭력이 아니라 성스러움에 있다.>

알테르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성스러움이 강해질수록 그만큼 폭력성도 짙어진다. 상충하는 두 힘이 내부에서 부딪치다 보면, 육체는 견디지 못하고 찢어지지. 보통 인간이었다면 사지가 찢긴 채 죽고 끝날 일이나… 저 녀석의 몸은 찢어지고 회복되기를 반복하고 있다.>

노인 몇이 어둠 속에서 알테르의 말을 경청했다.

<그저 강하기만 했다면 내 선에서 처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녀석은… 육체가 감당 못 할 정도의 상처를 입으면 탈피를 한다.>

<탈피? 설마 껍질을 벗는단 말입니까?>

노인 중 하나인 원로 성녀가 물었다.

<그래. 뱀과도 같이 껍질을 벗고 새로운 육신을 얻는다.>

<…….>

그것은 마치 신과도 같지 않은가? 원로 성녀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두에게 든 생각이었다. 그러나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다.

<성년이 되기까지 성장 속도가 빠른 보통의 알파와 달리, 프리드웬 왕실의 알파는 인간과 비슷하게 성장을 하지. 하지만 이것은 탈피를 반복한 나머지 제 나이를 잊은 모양이다. 때로 더 어리게, 어떨 때는 훌쩍 나이를 먹기도 하지. 죽음을 피하려는 방법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신치고는 지나치게 덜떨어지고 어리숙하지 않은가? 그것이 알테르의 감상이었다.

<그 탓인지 탈피를 하고 나면 일시적으로 이성이 퇴화한 마물과 같은 상태가 되더군. 이전까지 익힌 지식이나 개념을 잊고 갓 태어난 아이처럼 그저 본성대로만 행동한다. 내버려 두면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 다시 태어난 정신이 어느 정도까지 복구되는지는…. 본인만이 알겠지.>

<그렇다면 여섯째 왕자님을 죽일 방법은 없다는 겁니까?>

<현재로서는.>

여기저기서 탄식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완벽하게 죽일 수 없다면 되도록 탈피시키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군. 너희에게도 그편이 부담이 덜할 것이다.>

<…하지만 왕자님께서 계속해서 여섯째 왕자님을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그로 인해 여섯째 왕자님은 인간보다는 마물에 가까워지시고 말았습니다.>

<어찌 보면 왕자님께서 더한 괴물을 만들어 내신 것일 수도….>

다른 노인이 알테르를 탓하며, 에레즈의 상태를 염려하며 말을 덧붙였다.

<너희에게는 선왕을 길들이는 데 실패한 전적이 있다. 그런 안일한 방법이 이제 와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있나?>

<…….>

<하나 네 말에도 일리는 있다. 반박해 봤자 실패는 실패.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한동안은 멈춰야겠지.>

알테르는 코웃음을 쳤다. 돌이킬 수 없는 괴물은 결국 태어나고 말았다. 그러나 괴물을 대하는 방식에는 양측의 차이가 컸다. 인간들은 선왕 때처럼 괴물을 가두고 달래는 쪽에 중점을 두었다.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말이야….>

그러나 힘을 지닌 알테르 프리드웬은 달랐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제 동생을 죽이고 싶어 했다. 다른 동생들에게는 제법 따를 만한 우두머리였으나 에레즈 프리드웬만은 예외였다. 그것을 없애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듯했다.

<……저것을 없앨 방법을 찾게 된다면, 그때는 왕자님을 최대한 돕겠습니다.>

인간으로서는 마물 혼혈인 알테르 프리드웬이 자진해서 동족을 죽여 주겠다는 것에 이의가 없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고마워해야 할까?

<답을 찾을 때까지는 살려 둔 채로 힘을 빼 두도록 해라.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이고, 주기적으로 피를 뽑아내는 거다. 단 것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가끔 포상으로 독을 탄 음료를 먹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마물 혼혈이니 수갑이나 쇠사슬보다는 지금처럼 너희 성녀단의 옷을 입히는 편이 훨씬 압박받을 거다.>

알테르는 아무렇지 않게 제안했다.

<극단에 몰리면 흉포해져 주변을 공격하고 탈피하려 들 테니, 서서히 말려 죽이는 수밖에.>

마물을 죽이는 방법에 있어서 알테르 프리드웬만큼 깨우친 이가 없었다. 노인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알테르를 바라보았다.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완벽하고 잔혹한 짐승이었다.

* * *

<죽어라.>

자연에서 태어난 모든 생명이 그러하지만, 괴물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죽음의 위협이었다.

<네가 살아 있길 바라는 자는 아무도 없다.>

죽음의 신은 지독히 아름다운 모습을 띠고 있었다. 어깨 위로 늘어뜨린 찬란한 금발은 누구라도 시선을 빼앗길 것이다. 그러나 보석처럼 번뜩이는 푸른 눈은 괴물을 볼 때 어떤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끔찍한 괴물에게는 감정의 소비조차도 아깝다는 듯….

괴물은 태어나면서부터 탑에 갇혀 수 없이 살해당했다. 불안정한 괴물에게는 지성과 이성이 없었다. 괴물은 오직 본능만으로 죽음에 저항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만으로 가득했다.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사투였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신의 시체가, 껍질이 널브러져 있었다.

<우, 으….>

괴물은 자신의 껍질을 먹어 치웠다. 약점을 들키지 않으려 하는 자연스러운 본능이었다. 더구나 탈피하고 난 후에는 심하게 허기가 지곤 했다.

시간이 지나자 죽음의 신은 자주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대신 굶주리고 외로운 가뭄이 이어졌다. 괴물은 거의 먹지 못했다. 간혹 인간에게 피를 뽑혔는데 그 짧은 만남을 제외하고는 손발이 묶인 채 홀로 있어야만 했다.

괴물은 기나긴 고독 속에서 때때로 발작하듯 몸부림을 쳤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흐느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높은 창 위에서 바닥으로 내려오는 햇빛과 달빛뿐. 창살에 잘려 내리쬐는 다섯 가닥의 빛은 마치 손가락과도 같았다. 괴물은 땅에 몸을 대고는 거기에 머리를 댔다.

* * *

성녀단은 알테르의 제안대로 괴물이 탈피하지 않도록 기력을 빼내는 데 주력했다. 그 전략은 꽤 효과적이었다. 전과 달리 지친 괴물은 그저 살아서 숨 쉬는 것만이 목적이 되었다. 그로 인해 겉으로 보기에는 그 또래의 아이처럼 얌전해졌다.

피를 빼고 힘을 약화할 약을 만들기 위해, 괴물은 가끔은 탑에서 내려와 성녀원으로 옮겨졌다. 그럴 때도 괴물은 대체로 얌전했으나 ‘그날’은 달랐다.

<……!>

오감이 예민한 괴물은 성녀원에 앉아 있음에도 저 멀리서 알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최근 들어 마물이 인간계로 다수 소환되었다. 왕실에서는 마물에 대항할 용병대를 새로 임명했고, 그 임명식을 위해 알파들이 대거 모여든 것이다.

탑에 갇혀 지낸 괴물은 알파가 무엇인지도 몰랐으나, 본능적으로 동족을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그가 최초로 마주한 알파는 알테르 프리드웬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몇 차례나 죽음의 문턱을 넘어섰다.

‘날 죽이러 온 거야.’

괴물은 알테르 프리드웬이 저와 같은 이들을 여럿 데려온 것으로 판단했다. 실제로 알테르는 동생들을 데려와 괴물을 죽이려 든 적이 있었다. 괴물은 살아남기 위해 성녀원을 나왔다. 괴물은 지난 몇 년간 성녀가 주는 잔을 마시고 잠든 척을 해 왔다. 그래서 아무도 괴물에게 내성이 생겼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아…. 내가 먼저 죽여야 해.’

아마도 괴물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방에 깔린 알파의 기운에 털이 쭈뼛 선 괴물은 나무 위로 올라갔다. 적이 언제 다가올지 모를 일이었다. 알테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괴물이 방심한 틈을 타서 죽이려 들었다.

괴물은 아직 체격이 작았다. 그러므로 위에서 덮치는 편이 승리할 가능성이 컸다. 오로지 본능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체력이 남아 있다면 금사를 써서 버텼겠지만, 괴물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정도로만 영양을 섭취하고 있었다. 더불어 내성이 생기기는 했으나 약 기운이 몸에 돌고 있었다. 그 탓에, 경계 태세를 서던 괴물은 제 몸을 감당하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으앗!>

그러나 괴물을 처박힌 곳은 차가운 바닥이 아니었다. 따뜻한 몸이었다. 단단하고 커다란 손이 괴물의 몸을 감싸 주었다. 한 번도 누군가의 품에 안긴 적 없는 괴물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평소였다면 상대가 누구든 목을 물어뜯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괴물은—

<저… 괜찮으십니까?>

반항은커녕, 그 품 안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괴물은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늘 끔찍한 얼굴이라며 저주를 했던 것이 기억에 남은 것이다.

<후으, 으….>

괴물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짧은 순간에도, 그의 모든 것을 훔쳐보고 말았다. 그 사람은 괴물과 모든 것이 달랐다. 커다랗고 단단한 몸. 짙은 피부와 그보다 훨씬 검은 머리카락. 밤하늘처럼 검고 깊은 눈까지.

알파가 아니다. 멀리서도 그 존재를 눈치챌 수 있었던 알파들과 달리, 그에게서는 체취랄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인간도 아니었다.

<…….>

어째서인지 괴물은 알 수 있었다. 이자는 기사들이나 성녀들과는 달랐다. 심장이 두서없이 뛰었다. 그저 살기 위해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공격하던 괴물이었다. 그런 괴물이 그의 품 안에서 자꾸만 움츠러들고 자그마해지고 말았다. 정체 모를 이 사내는 성녀들보다도, 알파들보다도, 알테르 프리드웬보다도 강했다. …강력했다.

<불편하신 것 같군요. 내려 드리겠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괴물을 진정시켰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안도감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바위처럼 단단하면서도 나무 그늘처럼 시원했다. 이 정체 모를 안정감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평화는 도리어 불안을 가중시켰다. 괴물은 칼에 꿰뚫린 것도 아닌데 심장이 아팠다. 흰 쐐기풀로 만든 옷을 입고 있어 온종일 신경이 예민했던 괴물은 저도 모르게….

<…히끅!>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다리를 다치셨나요?>

<흐읍! 끅…… 히, 끅!>

괴물은 그 사람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괴물이 온 힘을 다해 매달려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 그는 강건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어디로 안내해 드릴까요?>

그는 왕궁 내에서 아는 장소 몇 곳을 천천히 읊었으나 말을 할 줄 모르는 괴물은 대답할 수 없었다.

<…….>

그런데도 그 사람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괴물을 내던지지 않았다. 품에 감싸 안고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괴물을 얼렀다. 괴물은 사지가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 사람은 보석으로 따지자면 원석과도 같은, 식물로 따지자면 씨앗과도 같았다. 어느 쪽이든 흙에 파묻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같았다. 그러나 괴물은 가장 먼저 그의 가치를 피부로 깨달았다. 오메가란 말을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었지만, 괴물은 그가 단 하나뿐인 존재임을 직감했다.

대부분의 알파는 인간에게서 태어난 오메가나 인간 사내를 통해 번식했다. 그와는 달리, 프리드웬 왕실은 순수한 오메가에게서 이어진 핏줄이었다. 가장 먼저 손을 더럽혔다는 증거였지만, 동시에 그들을 다른 알파보다 강하고 예민하게 만들었다.

<힉! 히끅….>

사내는 딸꾹질을 멈추지 못하는 괴물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는 괴물보다 몹시 커서, 커다란 손이 등의 반을 가렸다. 이 손으로 맞으면 정말 아플 텐데 이상하게도 괴물은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잠이 조금씩 몰려왔다….

* * *

탑으로 돌아온 괴물은 오래도록 그 온기를 잊지 못했다. 어째서 그 사람만이 다른지 그때의 괴물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난생처음으로 얻은 평안이었다. 다시 한번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 품에 안기고 싶었다. 수많은 알파가 오메가에게 바라는 욕망처럼.

<으, 우…. 아, 아….>

괴물은 입을 오물거렸다. 괴물은 알테르 프리드웬을 두려워했고, 그에게 협조적인 인간 또한 무의식적으로 미워했다. 그 탓에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로 안내해 드릴까요?’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괴물에게는 말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피어올랐다. 인간의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괴물은 경비병과 성녀들의 목소리를 유심히 듣고는 그대로 따라 했다. 탑에서 끊임없이 혼잣말이 들려온다는, 두려움에 찬 보고가 알테르에게도 들어갔다.

괴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인간의 언어를 중얼거렸다. 고작 몇 개월 만에 그것은 어설프게나마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심하게 더듬거리고 몇 마디 안 되기는 했지만…. 그럴수록 괴물을 관리하는 인간들은 두려워했다. 짐승이 말을 하는 것과 비견될 만한 공포였다.

* * *

괴물이 인간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선왕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에게 집착하지 않도록 외부와의 교류는 되도록 차단했는데….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괴물의 변화는 알테르 프리드웬에게는 새로운 위협이었다. 그러나 세상을 인식하기 시작한 괴물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주변인을 공격한다든가, 감옥을 부순다면 그 행위를 막으면 된다. 그러나 조그마한 머릿속에서 일어난 깨우침은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었다. 심지어 탈피한 후에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제 괴물은 인간을 무작정 두려워하는 대상이 아닌, 호기심과 탐구의 대상으로 여겼다. 말귀를 알아듣기도 하고, 동그란 눈으로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거나 귀 기울이기도 했다. 얌전해진 괴물은 한결 다루기 쉬워졌다. 실제로 성녀단과 귀족들은 에레즈가 알테르의 형제들처럼 길들여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깨지기 전의 고요에 불과했다.

<…….>

성녀원에서 얌전히 피를 뽑히던 괴물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창문을 넘어 흘러든 바람이 그에게 어떤 소식을 귀띔해 주었다. 성녀에게는 미풍에 불과했으나 괴물에게는 달랐다.

알파들의 냄새다. 그리고 어딘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왕자님?>

왕자는 홀린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난 몇 년간은 시키는 대로 따르는 덕에 손발을 묶거나 속박하지 않고 성녀복만 입히곤 했다. 너무나도 유순하여. 그간 무수히 일으킨 살육이 서서히 잊히던 시기였다.

<왕자님?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성녀가 괴물의 팔을 잡았다. 괴물이 인간의 말을 알아듣게 된 이후,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평소였다면 성녀의 말대로 다시 의자에 앉았겠지만, 그날은 달랐다. 괴물은 기어이 밖으로 나가려 들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규율에 어긋나는…. 커, 허억!>

밖으로 나가려 하는 괴물을 의자에 앉히려던 순간이었다. 그녀는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어느새 자라난 금사가 그녀의 몸을 꿰뚫고 있었다.

‘그때도 기분 나쁜 냄새가 많이 났었어….’

그러나 괴물은 쓰러진 성녀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그 냄새 사이에… 그 사람이 있었지.’

괴물은 그저 밖으로 걸어 나갔다. 복도에는 대기 중이던 성녀들이 여럿 있었다. 괴물을 발견한 그들의 운명도 비슷했다. 어느새 길게 자란 금빛 머리카락이 점점 피로 물들어 갔다.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순수한 만큼이나 잔인한 욕망에 인간의 이성마저 더해졌다. 이제 괴물은 사람들이 피 묻은 모습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비명, 일그러진 얼굴…. 칼로 찌르고, 몽둥이로 몸을 부순다. 그 사람에게만은 그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으, 우우….”

괴물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 사람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 괴물은 상대가 오메가인 줄도 몰랐으나 본능이 그렇게 행동하게 했다. 금사가 그의 마음을 대신하듯 단검을 가지고 왔다. 성녀가 자신을 제압하기 위해 휘두르던 것이었다.

괴물은 엉성한 손놀림으로 금사를 잘라 냈다. 알테르에게 뜯겨 나갈 때는 안간힘을 쓰며 버티던 금사였으나 이번에는 손쉽게, 평범한 머리카락처럼 잘려 나갔다. 마지막으로 괴물은 쓰러진 성녀에게서 두건을 가져다 썼다. 겉으로 보기에 괴물은 가녀린 꼬마 성녀로 보였다. 주변에는 다친 성녀들이 피를 흘리고 있었으나 정작 괴물이 입은 성녀복에는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복도도 온통 피투성이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순진무구한 괴물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괴물은 서둘러 성녀원 밖으로 향했다.

커다란 나무에 기대 잠들어 있는, 그 사람에게로.

* * *

“이럴 수가.”

힐난이 담긴 한탄에 에레즈의 등이 움찔했다.

“설마 왕자님께서 왕비님을 죽인 겁니까?”

에어리얼이 다시 성벽에 올라섰을 때는 이미 에레즈가 베이가를 죽인 후였다. 그녀가 흘린 피는 돌바닥에 고여 들다 못해 돌의 틈새를 따라 선으로 퍼져 나갔다. 그런 주제에 에레즈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어쩔 줄 몰라 하며, 함께 피에 젖어 들고 있었다.

“그, 그렇지 않아….”

에레즈는 항변했으나, 한없이 작은 목소리여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 그러면 왕비님께서 자살이라도 하신 겁니까?”

“…….”

에레즈는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품에 안긴 베이가는 점점 더 차갑게 식어 갔다.

“그렇다면 왕자님, 어째서 머리카락이 그렇게 길어지신 거죠?”

에어리얼의 지적에 그제야 에레즈는 자신을 살펴보았다. 손으로 급히 머리를 쓸어 넘기자, 긴 머리카락이 피 묻은 손등 위로 흘러내렸다. 눈부신 금발이 그의 몸을 덮고 있었다.

“칼…. 나, 나는…….”

에레즈는 다급히 몸을 돌렸다. 제 몸으로 왕비를 가리는 모습이 큰 잘못을 숨기는 아이 같았다.

“당신만은, 나를….”

에레즈는 나약하게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 두렵다. 칼리번이 무너지고 흩어져만 가는 자신을 예전처럼 안아 주길 원했다.

“이제 왕자님께서 어떤 존재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나 칼리번은 아이를 훈육하듯 에레즈의 심장을 들쑤셨다.

“마물이 인간을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마물을 이 땅에 불러들였죠. 프리드웬 가문은 마물을 인간계에 끌어들인 것으로도 모자라 대대로 오메가와 인간을 범하며 대를 이어 왔습니다. 왕자님께서는 강간과 살육 끝에 태어난 괴물입니다.”

에레즈의 목울대가 울렸다. 칼리번은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 프리드웬 왕실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도.

“그런 주제에 인간을 지키려는 척해 봤자 근본이 바뀌지는 않지요.”

진흙탕에서 태어난 자신의 정체마저도….

“사려 깊은 왕처럼 군 것도 ‘칼리번’을 흉내 낸 것 아닙니까? 그건 그 사람처럼 되고 싶어서였습니까, 아니면….”

“…….”

“오메가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

베이가를 끌어안은 에레즈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눈앞이 깜깜했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어떤 방식으로 태어났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미리 알았다면 ‘칼리번’은 당연히 당신을 거부했을 겁니다. 그래서 교미할 때까지 본성을 속에 눌러 담은 채 연약하고 무해한 새끼 짐승인 척 구신 것 아닙니까?”

숨을 쉬기가 버거운지 에레즈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 그런 게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 나는…. 나는 그저…… 당신을 마, 만나고 싶었을 뿐…….”

“칼리번의 기억을 보았으니, 이제 왕자님께서도 오메가가 어떤 지옥을 경험하는지 아실 겁니다. 아니지. 알파들은 알려 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알파들이 본능적으로 그런 짓을 오메가에게 하겠습니까?”

에어리얼의 비난에, 에레즈의 귓가로 악몽 속 칼리번의 울부짖음이 어른거렸다.

“그런데도 왕자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발현하지도 않은 오메가를 발견하고 자극해서, 알파를 모르던 그 몸을 독점하고는….”

“아니야!”

에레즈는 소스라치듯 외쳤다.

“모, 몰랐어…!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해서…. 내, 내가, 당신에게… 그, 그런 존재인 줄 알았다면…. 절대로,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칼리번을 향한 진심이 본능과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서.

“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 도와주지 않았어, 칼! 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나, 나는… 계속…… 혼자였어…!”

어느새 에레즈는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죄인이 자신이야말로 가엾다 주장하는 꼴이었다.

“…….”

에어리얼은 붉은 눈동자를 가늘게 뜬 채 에레즈 너머의, 시체를 볼 뿐이었다.

“칼…. 제, 제발, 날 용서해 줘….”

모든 비밀이 파헤쳐지고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에레즈는 더는 버티지 못했다. 그는 칼리번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금빛 머리카락과 두 손이 핏빛으로 물든 채 사죄하는 모습은 일말의 진정성도 보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이 땅에 흔해 빠진 알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나, 나한테는 이제… 당신밖에…….”

에레즈는 칼리번에게 동정심을 사기 위해 베이가를 품 안으로 가렸다. 그 모습이 더없이 구차해 보였다.

“당신마저 날 싫어하면, 나는….”

에레즈는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태어나서는 안 되는 괴물이었다. 모든 것이 가짜였고, 가식이었다. 칼리번에게만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뿐인데…. 창백해진 에레즈는 더없이 가련해 보였다.

“마지막 기회를 드렸는데 아직도… 순진하고 연약한 척 연기를 하고 계시는군요.”

그러나 칼리번과 달리 에어리얼은 속지 않았다. 그는 이를 꽉 깨물었다. 턱을 감싼 근육이 당겨지면서 성난 윤곽이 두드러졌다.

“진짜 왕자님의 모습을 보여 주세요.”

“진짜 모습…?”

에레즈는 제 일인데도 에어리얼에게 답을 구하듯 물었다.

“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에어리얼이 물었다.

“…….”

에레즈는 망설였다. 어떤 대답을 하듯 부정당할 것만 같았다.

“인간을 마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하지만 왕자님께서는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혼란스러운 까닭은 이 자리에서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한 이유와 같습니다. 바로, 남이 세워 준 철학을 내세우며 인간의 흉내를 내고 있기 때문이지요.”

에어리얼은 그런 에레즈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았다.

“흉내….”

모진 비난에도 간신히 버티던 마음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렸다.

“왕자님께서는 알파에 불과합니다. 교미와 번식에 대한 욕망만으로 살아가는 알파 말입니다. 설령 여자에게서 태어났다고 해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에어리얼은 에레즈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 텅 빈 내부에는 오메가를 향한 욕망과 증오밖에 없지 않습니까? 지난 8년간, 다른 알파와 수도 없이 교미를 나눈 오메가에 대한 집착 말이죠.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조차 숨겨 온, 진정한 당신의 모습입니다.”

“아… 아니야….”

칼리번을 존경한다. 그처럼 되고 싶었다. 그를 지켜 주고 싶다. 구하고 싶다. 지난 8년간 반복해 왔던 한결같은 마음이….

“칼리번을 성안에 몰래 숨겨 두고 깨어나면 교미하실 작정 아니셨습니까? 그동안 못 한 만큼?”

칼리번의 입을 통해 더럽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

에레즈는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거칠게 외쳤다.

“제 말이 틀렸다면, 어째서 어머니를 죽이셨나요? 모든 진실을 숨기기 위해서 아닙니까?”

에레즈는 그제야 텅 빈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왕비는…. 어머니는, 자살하지 않고 오욕을 견디며 지금까지 버텨 왔다. 더 큰 비극이 다가오기 전에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자신은… 태어나서는 안 되는 끔찍한 괴물은 죽어야만 한다. ‘인간을 위하는 왕’이라면 마땅히 그리해야만 한다. ‘칼리번을 지키고 싶은 에레즈’라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나는….”

그런데 왜 죽지 않고, 죽였나?

어째서.

알테르 프리드웬을 죽인 직후, 성검은 이어서 에레즈를 죽이려 했다. 사실 그전에도, 다른 형제를 베어 죽일 때마다 같은 일을 겪곤 했었다. 그것은 어쩌면 경고였을지도 모른다. 성검이 그릇된 행동을 할 리가 없다.

하지만 에레즈는 죽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에레즈는 고개를 들어 칼리번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밤처럼 까맣고 포근했던 사내는 붉은 눈으로 자신을 심판하고 있었다.

“……맞아.”

결국, 에레즈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더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에어리얼은 에레즈의 곁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목소리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치 다정해졌다.

“알파는 아랫도리밖에 존재하지 않는 괴물입니다. 그런 주제에 명분이 있어서라느니, 인간의 보편적 감정 때문이라느니…. 그런 쓸데없는 이유를 붙이니까 괴로울 뿐이잖습니까?”

에어리얼은 축축이 젖은 에레즈의 눈을 손으로 가려 주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십시오, 왕자님. 맹목적으로 오메가를 원하기만 하던 그 시절로. 그러면 괴로울 일도, 슬퍼할 일도 없을 겁니다.”

그 말에 에레즈는 참으로 오랜만에 안도감을 얻었다. 마치 칼리번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에어리얼은 가렸던 손을 내렸다. 에레즈의 두 눈은 전보다도 깊은 어둠에 갇힌 채였다.

“그래…. 그럴게.”

이번에도 칼리번에게 구원을 얻은 에레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는 추악하다. 현재는 어리석고, 미래는 새까맣다. 그 어느 시대에서도 쉴 수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에레즈는 더는 번민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이란 것을 할 필요조차 없어졌다. 인격은 무지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왕자님, 왕비를 다시 탑에 가두십시오. 이 여자는 아직 죽어서는 안 됩니다.”

에레즈는 두 팔에 베이가를 안은 채로 칼리번과 함께 일어섰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에레즈는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둔다면 죽고 말겠지만요.”

에레즈는 왕비의 상태를 살폈다. 과연 에어리얼의 말대로 미미하게 가슴이 들썩이고 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인간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들에게 맡기면 목숨은 부지할 겁니다.”

성녀가 없어 아쉽게 되었군요. 에어리얼이 덧붙였다.

“…알겠어.”

에레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홀로 남은 에어리얼은 성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성벽 너머로는 지난 8년 사이 검게 변해 버린 숲이 펼쳐져 있었다.

‘저곳 어딘가에 칼리번이 있겠지.’

에어리얼은 자신의 반신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형제를 향해 비웃음을 흘리고는 등을 졌다. 그때, 발치에 무언가가 걸렸다.

“하하….”

알테르 프리드웬의 잘린 머리였다. 목이 잘렸을 때보다 살짝 더 끔찍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잘린 머리가 심장을 막아 줬군.’

베이가의 심장 대신 금사에 꿰뚫린 것은 알테르의 이마였다.

“…뭐, 가당찮은 우연이겠지.”

에어리얼은 그의 머리를 성벽 아래로 던졌다.

* * *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군.>

왕성이 연합군에게 탈환되기 직전, 알테르는 베이가를 찾았다. 전장의 화염이 왕성을 집어삼키는 와중에도 그녀는 자신의 할 일— 끊임없이 직조하는 일에 몰두 중이었다.

<난 네가 낳은 아들을 죽일 거다.>

알테르는 그녀에게 선언했다.

<…이상한 기분이군. 분명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었는데 말이야. 그때 나는, 네가 자식을 죽이지 못할 거라고 했었지. 기억나나?>

베이가는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놀릴 뿐이다. 곁에 놓인 물레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인간인 네가 기뻐할 만한 소식이다. 놀랍게도, 내가 지고 있다. 붉은 오메가가 꾸민 농간 덕분이지.>

알테르는 그녀가 묵묵부답이어도 상관없이 말을 이어 갔다.

<…한 가지 더 알려 주지. 나도 모르는 새에 오메가의 향기에 지배당한 모양이다. 인간과 달리 알파는 오메가의 향기에서 벗어날 수 없거든.>

알테르는 헛웃음을 짓고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것도 에어리얼이 눈감아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불쾌해졌다.

<이 말이 변명처럼 들리나? 몸이 뜻대로 움직인다 해도, 내가 에레즈 프리드웬을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지. 알고 있다. 하지만 운이 좋다면, 내 손으로 네 아들의 목을 벨 수도 있지 않겠나?>

알테르는 주먹을 쥐었다.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 녀석을 죽이면 네 힘이 원래대로 돌아올지 궁금하군.>

허공에서 흔들리던 긴 손가락이 베이가의 턱을 움켜쥐었다.

<…8년인가. 이제 너도 다른 여자들처럼 나이가 들고 주름이 져 가는구나.>

알테르의 손가락이 베이가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마물과 인간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은 중년의 여인과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다.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한 번쯤 입을 맞추고 싶은 기분이 들 법도 한데 말이야.>

알테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베이가에게 손을 뗐다.

<이번 전쟁에서 내가 죽으면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투항해라. 너는 인간 사내가 아닌 알파에게 사로잡혔을 뿐이다. 이 왕국에서 알파가 여자를 돌멩이보다도 하찮게 여긴다는 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

<왕비로서 네 지위는 무결하다.>

베이가의 검은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고 하얀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담기지 않았다.

거대한 사내는 한참을 더 서 있었다. 이곳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과 소음이 마치 다른 세계의 일만 같다.

<오메가와 같은 능력이 하나쯤은 있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군.>

너희 여자에게도 말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알테르는 마침내 떠났다. 베이가는 깎아 놓은 조각상처럼 시간을 흘려보냈다. 인간과 마물이 뒤엉켜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불길에 타올랐다. 그 재가 바람을 타고 탑까지 전해져 왔다.

인간을 배신하고, 핍박했던 왕자의 목은 베여 성벽에 걸렸다. 사람들은 새로운 왕의 탄생에 기뻐했다. 환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쉼 없이 손을 놀리던 그녀의 움직임이 그 순간 멈췄다. 베이가는 유일하게 빛이 드는 드높은 창을 올려다보았다. 금빛의 볕뉘가 그녀에게 내려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