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4)

14

“윽, 아파!”

“하….”

무명의 가출로부터 한 달, 서인은 그간 자위만 하다가 결국 다른 남자를 안았다. 무명에게 했던 것처럼 엉덩이를 때리고 뒤를 딜도로 쑤셔 봐도 만족감은커녕 기분이 더러웠다.

“야, 꺼져.”

괜히 제 성기만 더러워진 거 같아서 남자를 보내자마자 몸을 몇 번이나 씻었다. 게다가 할 때마다 이상하게 뒤가 간질거렸고 무명의 위에 올라타 목을 조르며 내리찧었던 감각이 그리웠다.

서인은 제가 차단한 주제에 무명이 남긴 메시지를 몇 번이나 돌려보는 어울리지 않는 짓을 했다.

[제가 있어서 형이 힘들다면 떠나드릴게요. 찾지 마세요. 사과할 마음이 들면 저를 찾으세요.]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짓이었다. 누군가에게 연락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 역시도 처음이었다. 필요한 게 생기면 대욱에게 명령하면되니 개인용 휴대전화는 말이 개인용이지 거의 필요가 없는 수준이었다.

“아, 윽….”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몸은 거짓말을 못 한다. 신경이 예민해진 서인은 다시금 찾아오는 격한 두통에 약을 찾았다. 상용화의 부담감을 느꼈을 때와 같은 수준의 두통이었다.

예전처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끊었던 담배도 다시 물게 되었다. 모든 게 무명의 부재라는 것쯤은 서인도 인정했지만, 그는 성욕도 해결해주고 가끔 즐거움도 주던 노예를 잃은 감정 정도라고 생각했다.

예전과 다르게 그리워하고는 있으니 발전이 있다고는 말할 순 있었다.

잡생각에 괴로워하던 서인은 꽤 오랜만에 수면제를 복용했다. 무명을 집으로 데려오고 나서부터는 약을 먹을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전혀 자지 못해서 먹지 않고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제 옆자리에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컸다. 껴안으면 뜨겁고 부드러웠던 피부와 같은 제품을 써도 향이 더 달았던 그가 그리웠다.

“미치겠네, 하….”

약 기운이 돌 때까지 눈을 감고 머리를 비우려고 해도 무명의 말들이 자꾸만 떠올라서 이상하게 울컥했다. 일할 때는 한 달은 무슨, 석 달도 안 보고 지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사진이 있나 싶어 휴대전화 갤러리를 들어가 봐도 무명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명의 갤러리 속 가득했던 제 사진들과 식단, 단답형 문자메시지의 캡처본들을 기억해내고는 제가 얼마나 무명에게 관심이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형은 저를 사랑해요?’

사랑을 그토록 무서워하던 그의 입에서 나온 애정 갈구가 얼마나 큰 변화인지 서인은 모르지 않았다.

제 딴에는 큰 노력을 했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기특하다고는 생각했으나 태어나서 처음 접한 사랑이 제 부모의 것이었기 때문에 진심이 담긴 사랑 따윈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었다.

동물원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무명이 뜻 자체를 잘못 알고 지나치게 두려워했으니 불안을 잠재워주기 위해 내뱉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왜냐, 무명을 향한 마음이 그때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달래기 위해 사랑, 사랑 노래를 불렀을 때와 지금은 다르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아니다. 아껴주고 잘해주고 싶고 예뻐해 주고 싶지만, 제가 사랑하고 있음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미디어에선 사랑이 인생의 전부이며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다 버릴 수 있다고들 떠들어대지만, 서인은 아니었다.

혹시나 무명에게 그런 비슷한 감정이 들 때면 언제나 그건 사랑이 아닌 단순 성욕인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부모의 사랑 결말이 형편없었던 것이 서인의 인생에 꽤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랬는데, 지금은 성욕 이상의 감정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마음을 헤집고 난도질했다. 수면제로도 모자라 술의 힘까지 빌리려던 서인은 대욱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그래, 왜.”

전화를 받은 서인의 목소리가 떨리고 갈라졌다. 무명의 소식일 것 같다는 감이 왔다. 심장이 뛰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라 속이 울렁였다.

저를 찾는다는 게 아닐까, 홍주원에게서 도망치려다가 잡혔나 등등 무명이 다시 돌아오는 쪽으로 초점을 두고 있던 서인은 믿을 수 없는 소식에 큰소리를 냈다.

“뭐? 너 방금 뭐라고 했어!”

- 홍주원 측 주장이라 신뢰성이 떨어지지만…. 무명 님이 임신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오르내렸다. 전화를 받기 전까지 힘없이 누워있다가 대욱의 전화에 가슴이 설레었고 지금은 눈이 돌았다. 서인은 약과 술기운에 취해 헛구역질하며 몸을 일으켰다.

“으, 윽….”

제 두 번째 일터이고 보는 눈이 있으니 멀끔한 상태로 가야 하는데, 서인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는 아무 옷이나 대충 주워입고 구두를 구겨 신은 채로 집 밖을 뛰쳐나갔다.

반쯤 정신이 나간 모습으로 운전대를 쥐자 저 멀리에서 대욱이 달려왔다.

“술 드셨습니까?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비켜, 나와 내가 해! 씨발, 내, 하…. 임신? 다른 놈 애를 뱄다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비켜!”

“제가 합니다!”

흥분한 상태의 서인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대욱은 차 키를 빼앗아 들었다. 술과 약을 먹은 채 운전대를 쥘 정도로 정신이 나갔으면서 무명을 사랑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니 대욱은 슬슬 화가 났다.

“너도 알고 있었지? 알았으면서 입 다물고 있었던….”

“정신 좀 차리세요! 언제까지 이러실 겁니까! 대표님께서 철부지 애도 아니고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대욱은 저를 의심하며 운전석에서 나오지 않는 서인을 힘으로 제압하고 화를 냈다. 서인에게 힘을 쓴 것만으로 해도 그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인데, 흥분한 서인은 속도 모르고 의심만 해댔다.

“하….”

“실례했습니다. 마켓으로 모실 테니 눈 좀 붙이고 계세요.”

서인은 제가 얼마나 미련해 보였으면 대욱이 저러나 싶어 정신을 차리려 찬물을 들이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술도 마시지 않고 약도 먹지 않았을 건데,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타들어 갔다.

애라니, 도대체 누구의 애를 밴 건지 짐작 가는 놈이 없어서 더 미칠 노릇이었다. 매번 의심은 해도 무명이 제가 아닌 놈과 잠자리를 했을 리 없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어서 믿기지 않았다.

대충 듣기로는 배가 많이 나왔고 구역질을 한다고 킬킬 웃으며 말했다던데, 홍주원이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하는 인간은 아니라서 농담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물을 마시며 창문에 비친 제 모습을 본 서인이 마른세수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

무명을 다시 만날 때에는 흐트러짐 없고 좀 더 냉정하게 대하리라 다짐했는데, 냉정은 얼어 죽을 구두까지 꺾어 신고 대욱에게 주정이나 부리는 취객 꼴이었다.

그는 만약 무명이 정말로 남의 애를 가졌다면 제 손으로 직접 수술해서 다른 놈의 흔적을 떼고 두 번 다신 몸을 함부로 굴리지 못하게 큰 충격을 안겨줄 계획을 세웠다.

“차에서 기다려.”

“예, 대표님.”

긴 시간을 달려 마켓에 도착한 서인은 죽을죄를 진 사람처럼 구는 대욱을 세워두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마켓은 여전했다. 고위관계자는 꼭대기 층에 모여 명령만 내리고 노동자들은 쫄쫄 굶으며 죽어라 일만 하는 분위기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사랑합니다!”

“그놈의 사랑, 씹.”

“힉!”

오가며 그를 봐 왔던 노동자가 인사하자 서인은 대답 대신 뺨을 후려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사랑 때문에 이 지경이 꼴이 됐는데, 사랑을 들먹이고 지랄이냐며 죄 없는 사람에게 괜한 화풀이를 했다.

“야, 나와.”

노동자들이 없이 조용한 꼭대기 층으로 올라온 서인은 휴게실 문을 벌컥 열고 무명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안에서는 고위관계자들이 노동자를 상대로 성적 학대를 가하고 있었다. 정액과 성인용품, 콘돔이 가득한 방을 둘러보던 서인은 여유롭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홍주원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 거 찾으러 왔는데, 어딨지?”

“네 거? 그거 네 거 아니잖아, 이제. 난 분명 빌려줬고 대표님이 안 돌려준 건데?”

그는 서인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실실댔다. 주원은 그의 속을 벅벅 긁어놓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굴었다.

“도련님 얼굴에 담배 연기는 좀 심했나?”

“씨발, 나랑 장난해? 어디 숨겨뒀어, 내놓으라고!”

서인은 저를 놀려대는 주원에게 무명을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어디 숨어있는지 보이지 않아서 눈두덩이 뜨끈했다. 이성을 잃은 그는 주원의 발치에서 덜덜 떨며 무서워하는 노동자를 죽일 기세로 밟아댔다.

“그러다 죽겠는데.”

“내가 싹 다 죽여버리기 전에 내놔.”

서인은 주원이 무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을 전부 분쇄기에 넣어버리고 마켓을 불 질러 버릴 생각이었다. 고기에 중독된 상태이고 제 두 번째 수익을 내는 장소임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안 주는 게 아니야. 걔가 스스로 원하는 거거든.”

“무슨 헛소리야, 씨팔. 지랄하지 마. 네 애 가진 거야? 네가 임신시켰냐고.”

“대표님이 정말 미쳤구나? 난 남자랑 안 자.”

주원이 질겁하는 모습을 본 서인은 여전히 흥분한 상태였지만, 한결 마음이 놓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계속 얼굴을 봐야 할 주원의 아이였다면 마주칠 때마다 살인 충동을 느낄 테니 말이다.

“나도 어딨는지 몰라. 건방지게 오자마자 인사도 안 하고 어디로 처박혔거든.”

“씨발, 그럼 나보고 찾으라는 얘기야? 나 장난할 기분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야. 알아서들 잘 해보라고.”

주원의 태도에 그가 무명의 행방을 모른다는 말이 사실임을 확신한 서인은 이곳저곳 다 들쑤시고 돌아다녀 봤지만, 무명의 머리털 하나 찾지 못했다. 여전히 사과할 마음은 없어도 직접 찾아와줬는데도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니. 삐쳐도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왜, 왜 안 나와, 왜!”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그를 찾아 헤맨 서인은 이대로 영영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칠까 봐 두려움을 느꼈다. 일반인이라면 어디로 숨든 찾아낼 수 있어도 무명은 음지 생활이 익숙하고 정말 볕도 들지 않는 수상한 장소도 알고 있을 테니 마음먹고 숨어들면 찾기가 어려웠다.

“명아! 형 왔어. 그래, 그래. 형이 사과할게, 응?”

노동자들은 서인에게 맞을까 봐 무서워 그를 외면하며 일에 집중했다. 붉은 술이 추출되는 소리와 도축 기계가 돌아가는 소름 끼치는 소리, 도축되는 짐승의 비명이 서인을 미치게 했다.

“씨발, 하아…. 하, 윽….”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갔다. 모든 게 그대로인데, 무명만 보이지 않는 이 상황이 낯설었다. 그가 세상에 없었던 존재가 아닐까 싶은 미친 생각이 들 정도로 서인은 불안정했다. 그런 데다가 술과 약까지 먹었으니 그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도 못했다.

“나와, 나오라고.”

“아아악!”

그럴 리가 없는데, 왠지 무명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 서인은 아무나 다 두들겨 패고 물건을 집어 던지며 난동을 피웠다. 일터에서는 망가지지 않고 평정을 지켜오던 그가 추한 꼴로 날뛰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몸속 혈관에 펄펄 끓는 쇳물을 흘려보내는 것 같다. 숨을 삼킬 때마다 칼날이 폐를 파고드는 듯이 괴로웠다.

“명아, 나와. 형이, 형이 미안해…. 미안하다고, 씨발 나와! 나와!”

서인은 급기야 노동자를 질질 끌어다가 분쇄기에 집어넣기까지 했다. 버튼만 누르면 눈앞에서 신체가 갈려버리는 그런 위험한 상황이었다.

“흐, 형….”

그리고 그런 위험한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무명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이제는 옷으로 가릴 수 없는, 크게 부푼 배를 힘겹게 받쳐 들고 힘겹게 계단을 오른 그는 쉽사리 서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흐윽, 흐….”

혼나거나 맞는 게 두려운 게 아니었다. 서인이 저를 원망하고 미워할까 봐서 다가갈 수 없었다.

“흐아앙…. 흐….”

무명도 이제는 사과 따위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와 떨어져 지낸 한 달간 너무나도 힘이 들고 괴로웠으며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으니 말이다.

아니, 사랑받지 못한다고 해도 서인과 함께하고 싶었다. 공일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했었지만, 서인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달랐다. 그가 죽었든 어쨌든, 이제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무명에게는 서인밖에 보이지 않았으며 서인을 제외한 그 모든 것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형, 형아아…. 흐아, 아….”

게다가 제 배가 불룩 부풀어 오르고 식욕이 돌던 것이 임신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그는 하루빨리 서인이 해결해주고 돌봐줬으면 싶었다.

“서인이 형아…. 흐, 윽, 아!”

뒤뚱뒤뚱 걷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진 무명은 바닥에 배를 찧고 괴로워했다. 큰소리에 노동자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꽂히자 서인도 뒤를 돌아보았다.

“명아?”

그는 무명을 발견하기 무섭게 뛰어와 배부터 살폈다. 보고 싶었다고 우는 그를 달래주지도 않고 눈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서인의 시선이 온통 제 배에 쏠렸다는 것을 눈치챈 무명은 더 큰 소리로 울며 저를 봐달라고 애원했다.

“씨발, 진짜 애를 가졌잖아. 이거 누구 새끼야. 어떤 빌어먹을 놈이 너한테 쌌어! 내가 고작 이런 취급 받으려고 죽도록 노력했어? 이럴 거면 씨발! 아무도 임신할 수 없게, 그딴 약 따위는 만들지 말 걸 그랬어, 알아들어!?”

서인은 무명의 몸에 제 약물이 투여되었으니 수술하지 않으면 유산 가능성 없이 출산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니 이 순간만큼은 평생 해왔던 제 노력이 원망스럽고 부질없게 느껴졌다.

남의 애를 임신한 채로 도망간 것도 그렇고 약물에 인생의 반을 갖다 바치고 받은 회장의 인정이 그리 값지지도 않아서 여러모로 회의감이 들었다. 복합적인 감정에 복받친 서인은 무명을 죽어라 노려보았다.

“몰라요! 몰라요, 몰라요, 몰라요! 그게 중요해요? 저는 얼마나, 흐윽, 흐…. 얼마나 형을 보고 싶었는데, 얼마나!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서인이 저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지만, 막상 제가 아닌 저를 임신하게 한 사람을 찾는 모습을 보자 속이 상하고 화가 났다. 무명은 서인에게 힘겹게 주먹질을 하며 그를 비난했다.

“그래, 씨발, 쓰레기 맞아. 그런 나를 사랑하는 너는 쓰레기통이겠지!”

“너무해, 너무해요, 아팠어, 보고 싶었어, 흐윽, 흐….”

밉다고 미워죽겠다고 말하며 비난해도 그는 서인을 올려다보며 목을 감싸 안고 사랑한다는 고백을 반복했다.

“그러니까 받아내! 쓰레기통이면 쓰레기통답게 내 모든 걸 군소리 없이 받아내라고!”

“네에, 흐, 그럴 테니까 사랑한다고 해주세요, 나 사랑해주세요, 제발….”

무명은 마음에 없는 소리라도 그냥 한 번만 해달라고 빌었다. 서인의 세상에는 수많은 방해꾼이 있고 여러 가지 요소가 존재하겠지만, 무명의 세상에는 서인 하나뿐이었다.

“흐으, 흐….”

그의 말을 빌려 버러지 같고 시궁창 같은 인생에서 끌어올려 준 건 부정할 수 없이 서인이었다.

“명아….”

“끅, 흐…. 네, 네에….”

무명은 어릴 때부터 포기만 해봤고, 무엇이든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에 제가 뭘 원하는지도 몰랐다. 그런 게 없으니 평생 세뇌당해 고기만 썰었으며 잘못하면 사체가 가득 쌓인 감옥에 갇혀 하릴없이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 기다림이 너무나도 사무쳐서 죽어버릴까 생각을 하다가도 매번 죽지 못해 좌절했다. 그런 우중충한 곰팡이 색 삶을 살던 무명에게 서인이란 구원자 그 자체였다.

“돌아보면, 흐, 흑…. 형 말이 모두 다 옳아요. 형한테, 흐윽, 구원받았어요….”

“…….”

“전, 전, 형밖에 없어요….”

서인은 떨리는 손으로 제 뺨을 쓰다듬는 무명의 손등 위로 흐르는 제 눈물을 보며 크게 동요했다. 언제 울어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인데, 매번 들어왔던 저밖에 없다는 별거 없는 말에 모든 게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하!”

다른 놈 새끼 밴 놈이 뭐가 예쁘다고 이러는지 자신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제 의사와는 관계없이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고 무명은 그런 서인을 보며 오열했다. 임신한 꼴을 보면 당장 죽이고 싶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것보단 많이 야윈 무명의 모습이 더 보기 싫고 신경 쓰였다.

“울지 마세요, 흐아아, 울지 마세요!”

“누가 운다고…. 씨발.”

“형, 사랑…. 사랑해요….”

서인이 그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우자 무명의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조금 전에 넘어진 게 몸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고 숨어지내는 동안 잘 먹지 못한 탓에 체력이 약해진 것도 있었다.

“명아!”

무명은 결국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도 못한 채 정신을 잃고 말았다. 서인은 축 늘어진 몸뚱이를 안아 들고 급히 그를 차로 옮겨 병원으로 향했다.

♦ ♢ ♦

“사산이라…, 그래. 잘됐네.”

“친자 검사는 진행 중입니다.”

무명은 벌써 사흘째 눈을 뜨지 못했고 서인은 그의 사산 소식을 접했다. 누구 애인지는 친자 검사하면 될 일이니 지금은 무명이 의식을 회복하는 게 급선무였다. 서인은 죽은 사람처럼 잠만 자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유산의 주원인이 아젝신의 투여가 아닌 원인 불명의 약물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 비서가 아젝신 이외의 약물도 무작위로 투여한 모양입니다.”

“하…. 뒤져서까지 피곤하게 하네. 우선 명이 정밀 검사 진행하고 회복에 집중하는 거로 하지.”

“네, 오후에 인터뷰가 있습니다. 밖에서 대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욱은 자리를 피해 주며 둘이 함께할 시간을 주었다. 아직 무명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서인을 위함이었다.

서인은 대욱이 나가기 무섭게 무명의 뺨에 입을 맞추며 작게 속삭였다.

“언제 일어날 거야?”

조잘조잘 떠들던 그가 그리웠다. 서인은 무명을 상대로 혼란과 무력감을 느꼈고 때로는 평정심을 잃었다. 또 보고 있어도 보고 싶었고 얼른 회복했으면 싶으면서도 친자 문제로 싸울 걸 생각하니 피곤하기도 했다.

이런 지저분한 감정들이 사랑이라면 서인은 어쩌면 무명을 사랑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론이 생각만큼 나쁘지 않아서 자꾸만 헛웃음이 났다.

“가볼게.”

한 시간 정도 더 곁을 지키던 서인은 인터뷰 일정으로 병원을 떠났다. 더 곁을 지키고 싶어도 그 밖에도 기자회견에서 직접 약을 먹는 모습을 보였으니 경과 영상을 촬영해야 하는 등 일정이 빡빡했기 때문이다.

무명을 두고 나가는 발걸음이 처음으로 무겁게 느껴졌다.

♦ ♢ ♦

[다음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목표 기한은 언제인지 일정 정리해서 보고하거라. 오늘 1시 즈음에 얼굴 좀 비치고. 네 승계 문제로 할 말이 있다.]

[빌어먹을 놈, 네가 그리 잘 된 게 다 이 아버지 덕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냐!? 돈 좀 보내라!]

“…….”

일정을 끝내고 차에 올라타기 무섭게 도착한 메시지들은 각각 회장과 아버지였다. 서인은 오늘 얼굴을 비치라는 문장에 인상을 썼고 모든 게 제 공이라는 아버지의 메시지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끌끌 찼다.

“이제는 아주 번호를 바꿔가면서 지랄이군.”

이미 10번 가까이 차단했는데, 서인의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번호를 바꿔가며 메시지를 보냈다.

서인은 새로운 번호도 차단한 뒤 회장의 메시지를 다시 훑었다. 이미 할 건 다 했는데 무슨 다음 계획을 이야기하는 걸까. 그는 급격한 피로감에 당장 무명을 껴안고 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죽어라 일하고도 마음에 들만한 만족을 느끼지 못했던지라 한 달 정도는 좀 쉬려고 했던 서인은 만사가 귀찮고 따분했다.

게다가 승계 이야기는 또 뭔지 예상할 수 없어서 짜증이 솟구쳤다.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며 이미 MS 그룹 내부에서 권수연이 경영 승계를 받는 것이 확정되어있는데, 왜 제게 이야기를 꺼내는지 몰랐다. 누나가 부회장이 아닌 회장직을 승계받았으니 부회장직은 자연스레 형인 서진의 몫일 텐데 말이다.

“우선 회장님부터 봬야겠는데, 명이 별 소식 없지?”

서인은 출발할 생각은 않고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대욱에게 물었다. 묘하게 좋지 않은 감이 와도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만일 무명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무명과 회장의 만남 중 어느 쪽을 우선순위로 둘지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게, 발작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회복도 더디고 수술 경과도 좋지 못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발작? 이런 씨발….”

선택의 갈림길에 선 서인은 섣불리 결론 내지 못했다. 불과 몇 달 전이였다면 고민 없이 무명을 놓았겠지만, 지금은 빠른 판단이 불가능했다.

시간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회장이냐, 발작까지 일으키고 오늘로써 나흘간 의식불명인 무명을 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친자 확인 결과가 나왔는데…. 아이가 대표님의 아이라고 합니다.”

“…뭐?”

말이 안 되는 이야기에 서인이 몇 번을 되물었다. 무명은 임신 부작용 약을 투여받았지 임신 촉진제를 맞은 게 아니다. 게다가 남성이 임신하려거든 아직 약물의 힘을 빌려야 하는 세상인데, 그 어려운 걸 해냈다는 건 로또를 맞는 확률에 가까웠다.

그와 아무리 성관계를 많이 했다고 한들 서인은 삽입하지 않았고, 무명은 약을 먹지 않았다.

“…병원으로 가.”

“예, 대표님.”

무명의 아이가 제 아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침묵하던 서인은 결정을 내렸다. 대욱은 되묻거나 정말 그렇게 하겠냐고 재차 확인하지 않았다.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이 결정이 평생을 억압 속에서 살아온 그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서인은 처음으로 회장을 직급이 아닌 가끔은 부름에 응하지 않을 수 있는 어머니로 보았다. 마음이 편하냐고 물으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겠지만, 결정을 후회치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확고한 결정이었다.

“명아, 형 왔어.”

하루 만에 다시 마주한 무명은 다행히 의식은 돌아온 상태였다. 그러나 약물 과다 투여와 임신 기간 내내 제대로 된 관리를 받지 못해 몸이 많이 약해져서 경과가 그리 좋지 못했다.

“형…. 나, 아파요….”

“알아.”

서인은 중요한 일까지 내팽개치고 무명을 선택했으면서도 아프다는 투정에 따뜻한 말 한마디를 못 했다. 아직은 그런 말이 어색하고 낯간지러웠기 때문이다. 대신 쓰다듬어주거나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는 등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나…. 사랑해요?”

무명은 눈 뜨자마자 한다는 말이 아프다는 칭얼거림과 사랑 타령이었다. 서인이 저를 사랑하지 않아도 함께 지내는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생각했으면서 막상 얼굴을 보자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다는 욕망이 부풀어 올랐다.

변덕이 죽 끓듯 한 건 어떻게 해도 고쳐지지 않는 문제였다. 서인은 기대에 찬 그의 눈을 바라보며 제 이야기를 해주었다.

“회장님이 수장님 같은 거예요? 안 가면 때려요?”

“…때린다기보다는….”

자세히 설명해줘 봐도 무명은 역시 회장이나 승계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고 서인이 느끼는 부담감도 잘 헤아리지 못했다. 서인이 눈높이에 맞춰서 마지막으로 설명하자 무명은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아,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런데, 그걸 꼭 그 회장님이라는 분께 받아야 하는 거예요?”

“그래.”

“제가 생각하기엔 아닌 거 같아요!”

“너 지금 아프니까 작게 말해.”

무명은 해맑고 자신 있게 꼭 회장에게만 인정받지 않아도 된다고 소리쳤다. 서인은 그런 그를 보며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게 어쩌면 가장 편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대충 웃어넘기려 하자 무명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형이 뭘 하든 칭찬도 안 해주시고 인정도 안 해주신다면서요, 그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 일인데요? 수장님도 그러셨어요….”

얻어맞고 세뇌당하며 살아왔던지라 무명은 아직도 마켓 고위관계자들이 무서웠다.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던 그는 주원을 언급할 때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서인의 손을 힘겹게 붙잡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아…. 인정 안 해주시는 분들은 아마 평생 안 해주실 거예요! 형이 뭘 하든 말이에요.”

“…….”

정말이지 무명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서인은 저 역시 알고 있지만, 의미 없는 집착을 이어나갔던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 만든 아젝신을 세상에 내놓고도 만족하지 못했던 것은 회장의 인정만을 바라고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MS 그룹 이사직을 보류해두고 SI 바이오 사의 대표직으로 오른 이유는 처음에야 인정받기 위했지만, 나중에 돼서는 일에 애정도 생기고 나름의 자부심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회사가, 제 신념이 담긴 약이 오롯이 회장의 인정을 받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전락한 꼴이었다.

“저는 고위관계자가 되려고 할수록 여기가 막 아프고 힘들었어요…. 형도 그러면, 인정받으려고 하면 할수록 아프지 않을까요?”

무명은 제 가슴을 살짝살짝 치며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어느 누가 서인에게 포기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말이지 무명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타인에게 처음으로 제 약점을 드러내 본 서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천치 그에게 의도치 않게 위로를 받았다.

“…….”

언젠간 네 노력을 알아주실 거야, 더 힘내봐, 따위의 형식적인 위로가 아닌 포기 하라는 말과 적절한 공감이 섞인 위로였다.

서인은 제 결정에 좀처럼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회장의 부름에 처음 거부 의사를 표했고 승계 가능성까지 내버렸으니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었다. 그러나 제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닌 진심이 담긴 무명의 위로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화나셨어요? 제가 인정하는 건 어떻게 안 될까요? 형은 성관계도 잘하고 멋있고 잘생겼고, 일도 잘하시고 멋있어요!”

“명아.”

“네?”

“…사랑해.”

서인은 아파 죽겠다면서도 저를 위로하고 제 기분을 살피는 무명을 보며 줄곧 부정해왔던 사랑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이고 나니 무명에게 미안한 일이 많았다.

우선, 제 애를 임신했는데, 다른 놈의 애를 임신했다고 의심하고 화를 낸 게 가장 미안했다. 호르몬 변화로 예민했던 그를 유난 취급하고 괴롭히기까지 했으니 정말 쓰레기가 따로 없었다. 물론 제 아이를 뱄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사랑해요, 저를요?! 정말요?!”

“그, 읏….”

무명은 서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무겁고 아픈 몸을 일으켜 턱에 뽀뽀하고 난리 난리를 쳐댔다.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아서 좀 아파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요…. 아가는 어떻게 생긴 거래요? 누구 아가래요?”

좋아하던 것도 잠시, 문득 아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누구의 아기인지 궁금해진 무명은 서인에게 안긴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내 아이래. 아무래도 이 비서가 무슨 짓을 한 거 같은데….”

“형 아이였다고요?! 그럼 저희 사이의 아가잖아요?! 아가는요? 아가는요?”

“…….”

“죽었어요? 죽은 거예요? 아가가요? 저희 아가가요?”

무명은 침묵하는 서인을 보며 눈물을 후드득 떨어뜨렸다. 제가 넘어져서, 몸을 함부로 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며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저도 그렇지만, 서인은 제가 처음 집에 왔을 때부터 아가 이야기를 했으니 임신을 누구보다 기다렸을 텐데 실망하게 했을까 봐 걱정되었다.

“흐으, 우리 아가 어떡해요, 아가 어떡해요, 흐아아, 아아아…. 죄송해요, 흑, 하아, 아 ….”

“괜찮아, 괜찮아. 울지 마. 괜찮아.”

서인은 아가를 잃게 해서 죄송하다는 무명을 안아주었다. 제 아이라는 걸 알고 그 역시도 속이 상하긴 했지만, 임신 계획을 세웠던 것도 아니고 무명도 애 같은데 아이 하나 더 키우는 느낌이니 갖지 않으려 했기에 크게 상관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무명의 몸이 더 걱정됐다.

“이 비서가 저한테 주사 두 개랑 알약 매일매일 줬었는데….”

“주사 두 개? 알약? 그건 내가 처방한 적 없어. 이 비서 이 씹 새끼가….”

“우리 그럼 아가 다시는 못 낳아요? 아가 없어요?”

“우선 너 아프니까 나중에 생각하자. 형은 아기 없어도 돼.”

“왜요? 그때는, 그때는 분명히 아기 필요하다고 했는데….”

무명과 아기를 실험체로 쓰려 했던 때를 떠올린 서인은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산다고 해도 무명에게 마음이 간 지금은 달랐다.

무명은 아기를 낳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한시름 걱정을 덜었지만, 내심 저와 서인을 닮은 아기를 갖고 싶었던 건 사실이었기에 유산이 아쉬웠다.

“아니야, 괜찮아. 나중에, 나중에 다 준비되면 낳자. 알았지?”

“네….”

그래도 아예 낳지 않겠다고 못 박은 건 아니니 무명은 방긋 웃으며 서인의 온기를 느꼈다.

♦ ♢ ♦

계절이 여러 번 바뀌고 무명은 올해로 스물한 살이 되었다. 그는 마켓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고 쉽게 보내주지 않을 줄 알았던 홍주원도 둘이 하도 유난을 떠니 어쩔 수 없이 무명을 놓아주었다.

자유의 몸이 되고 안정을 되찾은 무명은 서인에게 서른한 살이 된 것을 축하한다며 케이크를 사 들고 왔다. 한 살 한 살 먹어가는 게 서인에게는 그리 좋은 일이 아닌데, 무명은 싱글벙글했다.

“저 사랑해요?”

“그래, 사랑해.”

1년이 지나도 태생이 바보인 건 변치 않는지 무명은 모두 작은 초로 총 52개를 꽂았다. 서인의 나이와 제 나이를 합쳐서 꽂았다는데, 초가 빼곡해서 케이크가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다.

“후, 부세요. 후!”

생일도 아닌데, 초를 불게 된 서인은 두 손을 모은 채로 소원을 비는 무명의 콧잔등에 생크림을 묻혔다. 예상대로 그는 자지러지게 좋아하며 서인의 손등에 크림을 묻히고 케이크를 우걱우걱 퍼먹었다.

“맛있어요!”

“응, 맛있네.”

단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서인은 반강제로 단 케이크를 먹으며 고기를 떠올렸다. 무명의 건강 회복을 위해 건강식만 먹다 보니 급격히 고기가 당겼다. 무명도 눈치가 꽤 생긴 터라 그가 고기를 먹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형, 있잖아요….”

“응?”

“우리, 고기 앞으로 안 먹으면 안 돼요?”

“…왜?”

1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변화가 있다면 서인이 무턱대고 화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제 기준에서 이해해주기 어려운 말이라고 해도 일단은 의견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제가 요즘 공부를 좀 하잖아요…. TV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모두 살인과 육류 소비는 말도 안 되는 악행이래요….”

죄의식이 생기게 된 건 꽤 지난 일이었지만, 그동안 계속 마켓에 몸을 담고 있었으니 말하지 않았던거지, 무명은 꽤 옛날부터 서인이 육류 소비를 멈추길 바랐었다. 벌써 두세 번 정도 먹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고 말이다.

열량이 높기도 하고 그냥 아예 그쪽과는 연관도 없기를 바랐다. 게다가 완전히 양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음지에서나 하는 나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경찰에 잡혀갈 수도 있다는 게 가장 두려운 부분이었다.

“이미 저지른 악행, 지금 와서 그만한다고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거든.”

서인도 이제는 고기를 먹지 말라는 말에 화내지 않았다. 음지에서 행하여야 할 정도로 불법인 것도 맞고 나라가 주장하기를 윤리에 어긋나는 일인 건 사실이니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해봐야 더 추해 보이고 이상하게만 보였으니 말이다.

“없어지진 않지만, 더 늘어나진 않잖아요.”

“…근데 네가 그런 죄를 운운할 자격은 없지 않나? 며칠 전에 사람 죽여놓고서는.”

서인은 비겁하게 실수로 노동자를 죽인 것을 언급하며 무명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떠나겠다는 저를 붙잡고 나쁜 말로 세뇌하려는 부하를 떼어낸다고 밀어버렸는데, 그만 계단에서 굴러 머리를 부딪쳐 죽어버린 일이었다.

“그건 실수였잖아요….”

“무슨 일이든 대화는 항상 눈을 마주 보고 하는 거야.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면.”

하필 그 장면을 주원이 목격하게 돼서, 바쁘니 처리하고 가라는 명령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무명은 서인에게 시체를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제가 멋있는 남자가 된 것 같아 그만 흥분했었다.

그런데, 서인은 그가 사람을 죽이며 흥분했다고 우겼다. 무명의 시선에선 우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객관적으로 보아 발기한 건 사실이니 의심을 아예 피해가긴 어려웠다.

“내 눈엔 즐기는 거로 보였어.”

“아니에요! 그럼, 그럼 저도 평생 의뢰 안 받고 실수로도 안 죽일테니까 형도 평생 고기 먹지 마세요!”

“…….”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고기가 당기긴 당겼지만, 거의 6개월 내도록 안 먹었더니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서인은 잔인한 영화도 안 보고 살인도 하지 않겠다는 제안에 잠시 고민했다.

그는 무명이 의뢰를 받고 일을 즐기는 것 자체는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가끔 지나가는 사람과 시비가 붙거나 남이 조금만 거슬리는 말을 해도 돌변하는 그의 눈을 보면 언젠가 사고 한 번 치지 싶어서 되도록 안 했으면 했다. 막아주는데에도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무명은 건드리면 귀찮아질 사람과 쉽게 덮을 수 있는 사람을 구분할 줄 모르니 더더욱 그랬다.

“생각해볼게.”

“정말이죠?!”

“그래.”

서인은 제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건넨 그가 기특하며 귀엽기도 하고 또 불쌍하기도 해서 고려해보기로 했다. 또 많이 먹는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다 보니 정말 그런가 싶어서 조금 줄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 섰다.

“그리고 하나 또 있는데요….”

“바라는 게 많아졌네? 뭔데.”

무명은 이번에야말로 우물쭈물했다. 고기를 먹지 말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있다니 서인은 뭘 요구할지 몰라서 조금 아찔했다. 예전처럼 징징대는 게 아니라 조곤조곤 나름대로 논리 있게 요구를 해대서 말장난으로 빠져나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저 임신하고 싶어요…. 형 닮은 아가 낳고 싶어요.”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지 않았어? 합의 봤는데 왜 자꾸 그러지?”

무명은 자그마한 서인을 키우고 싶은 마음 하나로 임신을 원했다. 서인의 어릴 적이 어땠는지 모르니 닮은 아이를 낳으면 아기 서인을 키우는 기분일 것 같아서 무슨 일이 있어도 낳고 싶었다.

“몸 안 아플 때 이야기하자고 했잖아요….”

“너 임신 잘 안 돼. 약 부작용도 심했고, 사산도 했으니 회복하려거든 아직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인형도 아니고 무턱대고 낳아서 뭘 어쩔 건데?”

서인은 낳기만 하면 끝이 아니라며 임신에 관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젖몸살이라는 건 알고 있냐, 아기가 하루에 몇 시간을 우는지는 아느냐, 기저귀를 갈 줄 아냐 등등 아이 아빠가 되기 위해 기본적으로 해야 할 것을 말해주자 무명이 하품을 쩍쩍해댔다.

“어때, 이래도 낳을래?”

“…준비되면 낳을게요.”

“그래, 잘 생각했어.”

서인은 마음을 고쳐먹은 무명을 예쁘다고 칭찬하며 자연스레 대화 주제를 바꿨다. 무명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서인은 10년이 지나도 무명의 아이를 볼 생각이 없었다. 이미 몸이 많이 망가졌으니 임신 약물도 먹이지 않을 테고 피임도 무조건 해야 했다.

임신 계획은 없다만, 무명을 쏙 빼닮은 아이를 상상해본 서인은 부푼 머리카락과 빵빵한 볼살을 떠올리며 웃었다. 무명은 서인을 닮은 아이를 상상하고 서인은 그 반대를 상상했다. 굳이 낳지 않고 서로를 보며 살아가면 될 일인 듯싶었다.

“형.”

“왜 자꾸 불러? 또 부탁할 게 남았어?”

무명이 배시시 웃으며 서인을 부르자 그가 턱을 괴고 어디 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임신이나 고기 이야기도 끝났는데, 또 바라는 게 있다니 어떻게 참고 살았나 궁금할 지경이었다.

“혀엉.”

“왜.”

“많이 사랑해요.”

무명이 뭘 요구하든 결정권은 제 손에 있으니 웃고만 있던 서인은 얼굴을 들이밀며 콧잔등에 뽀뽀하고 고백하자 목덜미와 귀가 터질 듯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형, 여기가 막 빨개요! 부끄러우세요? 제가 너무너무 좋으세요!?”

“…아, 씨. 진짜.”

무명은 서인이 사랑 고백을 껄끄러워하고 애정 표현을 어색해한다는 걸 눈치챘기에 장난스레 서인을 놀리곤 했다. 서인 상대로 부끄러워하는 건 언제나 제 몫이었는데, 지금처럼 그가 당황하거나 놀라면 기분이 좋았다.

“형, 귀여워요!”

무명은 서인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동안 고생하긴 했지만, 그의 마음을 확인한 이상 서인이 평생 사랑을 어색해하길 바랐다. 그게 아니라면 좀처럼 이런 귀여운 모습을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럼 더 귀여워 해줄래?”

“아, 읏! 네, 네?”

서인은 테이블 밑으로 다리를 뻗어 무명의 성기를 짓뭉개며 물었다. 잠시 주도권을 쥐고 행복해하던 무명은 발로 기둥을 쓸며 문지르는 그의 행동에 테이블에 엎어져 앙앙댔다.

둘은 이렇게 연애를 하면서도 서로를 이겨 먹으려는 것만큼은 변함없었다.

♦ ♢ ♦

“형, 나 뽀뽀해주세요.”

회장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놓아버린 서인은 일에 치여 살지 않았다. 제 할 일을 다 해결해놓고 건강을 회복한 무명을 집무실에 놓은 채로 매일 물고 빨며 시간을 보냈다.

“좋아?”

“응!”

서인이 잠자리할 때를 제외하면 더는 때리지도 않고 제게 욕도 하지 않으니 그가 편해져서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사용하곤 했다.

무명과 제 사이를 계약 관계처럼 여겼던 때 서인은 말을 놓지 말라고 혼쭐을 냈었으나 지금은 툭툭 튀어나오는 반말이 그만큼 편하다는 증거 같아서 좋아했다. 그래도 여전히 순종적인 쪽이 취향이라 아예 반말하길 원하지는 않았다.

“한 번 더 해주세요.”

“그래.”

서류를 보고 있자니, 무명이 계속해서 뽀뽀를 요구했다. 노는 비중이 높더라도 일할 땐 눈치껏 빠져있던 그인데 오늘따라 애정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인은 얘가 왜 이러나 싶어 유두를 아프게 꼬집었다.

“악!”

“왜, 뭐가 또 불안해?”

둘의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그렇다고 무명의 정신적인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정신이 망가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원인을 제거했다고 한들 축적된 충격들을 상쇄하기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에요…. 아아!”

서인은 속일 사람을 속이라며 무명의 뺨을 꼬집었다. 전처럼 그가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할 이유도 없고 묻어놓으면 더 큰 문제가 되니 얼른 말하라고 재촉했다.

“형이 다른 남자 만날까 봐 무서워요….”

“다른 놈 만날 거였으면 너랑 그 난리를 쳤겠냐?”

서인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문제를 걱정하며 우울해하는 무명이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웠다. 사디스트는 사디스트인 모양이다. 그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을까 오늘 있던 일을 돌아보고는 이유를 찾아냈다.

“내가 아까 윤 실장이랑 얘기해서 그래?”

“…네, 그 사람 눈빛이 이상했어요! 형을 좋아하는 것 같았단 말이에요!”

어쩐지 무명은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허리를 펴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었다. 서인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윤 실장을 보고 나서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말이다.

그는 단순 회사 대표 인사하는 윤 실장의 의도를 오해했다. 서인을 사랑하고 그가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는 무명은 세상 모든 사람이 서인에게 관심이 있다고 착각에 빠졌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감정은 개인적인 건데, 가서 나 좋아하지 말라고 해?”

“그게, 그게…. 죄송해요….”

무명은 다정하기만 하다가 날카로워진 서인에 말투에 놀라 딸꾹질해댔다. 화가 났나 눈치를 보던 그의 눈이 눈물로 가득 차 그렁그렁할 때쯤 서인은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걔들이 나한테 호감이 있거나 말거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 하난데 다른 놈들이 무슨 상관이야?”

“으….”

불안과 두려움에 울먹이던 무명은 그대로 달려가 서인에게 안겼다. 서인 역시 티를 안 냈을 뿐 무명이 하도 예쁘니 누가 물어갈까 봐 걱정되는 마음은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소유욕과 성욕이 타올랐다.

“명아.”

“네?”

“우리 재밌는 거 할까?”

“네에….”

무명은 제 허리를 은근히 쓸며 재밌는 걸 해보자고 말하는 서인의 신호에 셔츠 단추를 한둘씩 풀어내렷다. 그간 참 많이도 붙어먹었지만, 무명이 회복될 때까지는 삽입은 없는 관계를 맺어왔기에 말은 안 해도 둘은 꽤 성욕이 쌓인 상태였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어?”

두 시간을 나갔다 온 서인이 넥타이를 풀어내고 집무실 잠금을 해제하고 문을 벌컥 열자 손수건을 물고 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무명이 눈에 띄었다. 그는 신음할 힘도 움직일 여력도 없이 축 늘어져 허벅지만 달달 떨었다.

“우, 으으….”

무명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경련했다. 그의 몸에는 군데군데 신음을 참은 흔적들이 보였다. 침으로 범벅된 입가와 배와 허벅지를 덮은 굳은 정액, 손등에 남은 잇자국 등 어디 하나 멀끔한 곳이 없었다.

“…하아….”

두 시간은 과했나 싶어 걱정했던 서인의 걱정은 엉망이 된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사라져버렸다. 서인은 무명을 눕히고 제 이름이 각인된 허벅지를 정신없이 깨물어 자국을 남겼다.

“흐, 힉…. 아, 아, 아아!”

성적인 자극도 아닌 피부가 깨무는 고통도 성감이 오른 무명에겐 끔찍한 쾌감이 되었다. 그는 서인의 손길이 몸에 닿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을 때는 묽은 정액이 위를 향해 튀어 올랐다.

“흐, 힉, 끄…. 으응, 읏, 응….”

무명은 숨을 쌕쌕 몰아쉬며 자지러졌다. 서인이 왔으니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는 가슴에 붙어 진동하는 바이브에 손을 올려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안 돼.”

그러나 서인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쾌감이 죽을 것처럼 괴로워서 서인만 보면 발딱발딱 세우던 성기도 허벅지 언저리에 힘없이 축 내려앉았다.

차라리 삽입하게 해주면 좀 나을 텐데 아무것도 못 하게 하자 무명은 미칠 노릇이었다. 서인의 몸에 성기를 비비고 울어도 소용이 없었다. 박지도 만지지도 않고 타투 근처를 애무하며 물어뜯는 행동에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울기만 했다.

“아, 아아악!”

서인이 귀두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아프게 치자 울던 무명이 비명을 지르며 그만 실례를 하고 말았다.

“허, 헉…. 싫어, 싫어, 시, 싫어! 싫….”

“왜 못 참아? 나 같으면 참았을 거 같은데.”

서인은 제 성향을 확실히 알기 전 무명의 지하실에서 당했던 수치스러운 플레이가 떠올랐다.

“명아.”

“으, 응….”

명령하려는 투였다. 무명은 반쯤 풀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도 서인을 마주하려 애썼다. 정액이 범벅되어 상기된 뺨에 입을 맞춘 서인은 무명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마셔.”

“…으, 네?”

“오늘, 명이 몸에서 나오는 건 명이가 다 마시는 거야.”

서인은 또 제멋대로 놀이를 시작했다. 물론 정말로 마시게 할 생각은 없었고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함이었다.

“못 마셔, 흣, 못 해….”

무명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제가 실례한 곳에서 벗어나 엉금엉금 기어 도망쳤다. 대충 입혀둔 흰 셔츠 자락 밑으로 케이블이 늘어져 달랑이며 허벅지 안쪽 살을 두드렸다.

“흐으….”

한껏 예민해진 몸뚱이는 별거 아닌 그마저도 자극으로 받아들이고 파들파들 떨며 반응했다. 기어 도망치던 무명의 무릎이 쉽게 무너져내렸다. 서인은 붙잡지도 않았는데 혼자 엎어져 경련하는 모습을 비웃었다.

“환장을 해서는. 버릇없이 어디서 질질 흘려?”

“안 마셔요, 흐, 응….”

서인은 무명이 힘들게 기어간 것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 코앞에 멈춰 섰다. 고개를 든 무명은 그런 그를 보며 울먹였다.

“핥아먹기 싫어?”

“응, 싫어요….”

소변을 마시는 건 싫지만, 서인의 고압적인 태도가 흥분되는 건 사실이었다.

“남의 거 마시는 것보단 본인 거 마시는 게 나을 거야.”

입을 강제로 열고 억지로 먹이는 것보다 더 무서운 협박이다. 서인은 무명을 끌고 와 벨트를 풀었다. 오랜 시간 동안 얕은 쾌감으로 힘들어했을 그를 좀 더 본격적으로 괴롭혀 줄 시간이었다.

“흐, 으…. 오줌 안 마셔요! 싫어! 더러워! 아, 아! 앙!”

무명의 거센 반항과 투정은 서인을 달아오르게 했다. 무명도 그걸 알고 있어서 좀 더 격하게 반응했다. 실제로 소변을 마시기 싫고 괴로운 것도 있긴 있었지만, 서인이 흥분하는 게 더 좋았기 때문이다..

태도는 평소처럼 고압적이지만 말투는 달랐다. 서인은 언제나 같은 상황에 질릴 무명을 위해 색다른 변화를 주었다.

“네 주인이 난데. 하라는 대로 해야지.”

“흣….”

다행히 효과는 확실했다. 고함을 지르고 강제로 붙잡는 것보다 조곤조곤한 말투가 더 큰 자극을 주었다.

흥분한 무명은 묶인 손을 풀고 제 성기를 흔들었다. 핏줄이 도드라진 손등과 길쭉하고 새하얀 손가락이 예쁘장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흉흉한 성기를 훑자 서인도 여유를 잃었다.

“형, 하아…. 아, 나, 아아! 좋아, 좋아….”

“더 벌려 봐.”

“응…. 벌렸어, 벌렸어요….”

무릎을 세우고 허벅지 안이 당길 정도로 다리를 활짝 벌리자 다리 근육이 꿈틀댔다. 서인은 저를 범하고 싶은, 욕정 가득한 눈을 보고도 불쾌해하지 않았다. 얼른 뒷구멍에 무명의 성기를 쑤셔 박고 싶은 충동만 가득했다.

“하, 아아, 아! 아! 흐으….”

엄지손가락으로 두툼한 귀두를 두어 번 매만지고 기둥을 쓸어올려 주자 무명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목을 젖히고 사정했다. 이제는 정액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불투명한 액이 기둥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위하는 무명을 반찬 삼아 제 것을 문지르던 서인은 빠른 사정에 흥이 식어 혀를 찼다.

“자위 쇼는 여기까지야?”

무명은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했다. 여유로운 서인을 닮고 싶어 사정하지 않고 버티려 했는데, 3분도 안 되어서 줄줄 싸질렀으니 말이다.

“하아….”

무명은 서인의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와 펜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콘돔을 찾았다. 손가락에 콘돔을 씌운 그는 서인의 뒤에 젤을 넣고 열심히 움직였다.

“그냥, 그냥 해.”

무명은 기다렸다는 듯 제 위에 올라탄 서인의 허리를 붙잡고 성기를 삽입했다.

“윽, 큭…. 하, 아….”

“흐…. 으응, 으…. 좋아….”

무명은 여전히 성행위 자체에 익숙하지 않았고 서인 역시 뒤로 받는 것이 아직은 힘들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좋아짐을 알기에 이를 악물고 견뎌냈지만, 의지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일었기에 몸을 일으켜 결합부에 젤을 쏟아부었다.

“아으읏!”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인내, 절제를 되뇌며 신음과 사정을 참던 무명은 차가운 젤이 닿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서인의 안에 묽은 액을 토해냈다. 젤과 무명의 것이 섞여 삽입이 수월해지자 서인도 막힌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성기가 워낙 커서 굳이 한 지점을 찾지 않아도 내벽 전체가 헤집어지고 짓눌렸다. 그래도 더 좋은 곳을 눌러주면 좋으니 서인이 몸을 뒤척여 제가 쾌감을 느끼는 곳을 찾아주었다.

“읏, 윽…. 아, 씨. 좋아.”

“형, 나도, 나도, 녹아, 하아, 으응, 응…. 우, 으응….”

한 번 긴장을 풀자마자 무명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고 있던 그는 다짜고짜 자세를 바꿔 서인을 밑으로 깔았다.

몸이 반으로 접히자 서인은 저도 모르게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무명의 무게에 눌려 안 그래도 숨이 막히는데 무자비한 키스 탓에 호흡이 달렸다. 제 물건의 크기를 알면서도 더 깊이 밀어 넣는 탓에 구역질까지 치밀었다.

“욱, 흐, 하아, 하….”

“악!”

서인에게 혀를 깨물린 무명은 금방 뾰로통해져 그의 어깨맡을 짓누르며 거칠게 삽입했다. 그간 많이 배워 온 그는 사정, 신음을 참지 못할 뿐 허리의 움직임이나 키스 정도는 기본적으로 할 수 있었다.

“하, 아, 아, 더 빨리, 빨리, 윽….”

열기와 마찰로 인해 정액이 엉킨 젤 뭉치가 덩어리째 떨어져나왔다. 서인은 엉덩이를 타고 흐르는 뜨끈한 액체에 불쾌감을 느끼며 인상을 썼다.

“후, 하으…. 시, 싫으세요?”

신음을 참지 않기로 했으니 눈을 감을 이유가 사라진 무명은 고개를 돌려 물을 마시는 서인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서인과의 관계에서 무명은 언제나 황홀하고 과한 쾌감을 선물 받았다. 그러니 서인 역시 저와 같은 황홀경에 빠지기를 바랐는데, 서인이 인상을 쓰니 속상했다.

“형, 싫어요? 우, 응…. 나는 좋은데….”

무명은 제 체중에 짓눌려서 힘들고 삽입이 깊어져 구역감을 느끼는 것도 모르고 좀 더 과하게 짓누르며 미간에 입을 맞췄다.

“허리, 숙이지 마….”

무명은 그를 불편하게 한 것에 충격을 받아 황급히 허리를 뒤로 무르고 서인을 제 위로 옮겨주었다. 제 딴에는 서인을 편하게 할 의도였는데 앉은 자세는 삽입이 더 깊어질 뿐이다.

서인을 껴안고 소파에 앉은 무명은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몸을 굳힌 서인의 목을 깨물며 하반신을 격렬히 움직였다. 하도 많이 사정해서 그런지 성기를 쥐어짜는 내벽에 느꼈던 공포가 조금씩 사라져갔다.

“좋아아…. 형, 사랑해요, 내가, 으응, 형, 하…. 많이, 사, 사랑해, 흐, 흣…!”

천천히 숨을 내쉰 서인은 무명이 오늘따라 지치지도 않고 기절도 하지 않아서 만족스러웠다. 정확히 제게 딱 맞는 딜도를 찾은 그런 기분이었다.

“후….”

“사랑해, 이제, 윽, 읏…. 나는, 나느은…. 흐, 사랑한다는 말이 좋아…. 으, 응…. 해주세요….”

“알아, 윽!”

무명은 몸을 열심히 움직이며 사랑을 속삭였다. 서인이 대답해주지 않자 무명은 피부를 깨물어 제 흔적을 남겼다. 사랑을 확인받지 못하는 불안을 자국을 남겨 해소했다.

“형, 사랑해요, 윽, 흐응, 으! 사랑해요, 사랑, 사랑해…. 으으….”

“나도, 하아…. 아! 으…. 사랑해, 명아, 아….”

“흐으, 으, 흐아아, 아…. 흐아아아, 아….”

무명은 서인에게서 답을 듣자마자 몸속 깊은 곳에 사정하며 흐느꼈다. 몸이 연결된 채로 듣는 사랑은 알맹이 없는 표현과는 달랐다. 무명은 엉엉 울며 서인을 더 세게 껴안았다.

“왜, 우는, 데….”

“좋아서요, 흑, 흐윽, 흐…. 좋아서 그래요, 좋아서….”

“명아, 혀.”

“네에….”

서인은 사랑받는 기분이 좋다며 우는 무명의 뺨을 두어 번 쓰다듬었다. 울며 혀를 내밀자 입안에 서인의 정액이 퍼졌다.

“하아, 맛있어여….”

서인은 꼴깍꼴깍 받아먹는 무명의 목구멍 깊숙이 성기를 삽입했다. 거칠지 않은 삽입에 무명도 더 정성껏 서인의 것을 애무할 수 있었다. 깊이, 더 깊이 성기를 받던 무명은 성기가 갑자기 크게 움직이자 눈을 크게 뜨고 구역질을 했다.

“우, 욱, 혀, 자까마, 학, 우, 욱, 큭!”

서인은 나른한 얼굴로 무명을 이리저리 쓰다듬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따뜻하고 축축한 혀에 성기가 문질러지자 무명도 무명대로 흥분했지만, 이물감에 역겨운 감각이 더 컸다.

“헉, 이게, 우, 우엑! 켁, 크, 에!엑…. 흐, 아아, 아, 우…. 욱….”

“아…. 좋다….”

서인은 눈두덩을 경련하며 신음했다. 목구멍 깊이 정액을 받는 것과 흐름성이 강한 액체를 받는 것과는 달랐다.

“후으…. 남의 거 먹는 것 보다 네 거 먹는 게 낫다고…. 말했잖아, 응? 그렇지?”

안 마시고 넘어갈 줄 알고 걱정을 덜고 있었던 무명은 충격받은 얼굴로 반항하며 괴로워했다. 서인은 짓궂게 웃으며 무명이 바로 삼킬 수 있도록 더 깊이 삽입했다. 물론 소변은 아니고 정액이었지만, 매우 묽어서 무명이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 에, 엑…. 흐, 흣….”

서인이 멈추지 않고 사정하자 숨이 틀어막혀 생명의 위협을 느낀 무명이 허벅지를 마구 내리치며 성기를 아프게 깨물었다. 정액이 무명의 가슴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강제로 먹이는 것도 좋았지만, 몸에 싸지르며 무명을 변기 취급하는 것도 꽤 훌륭한 만족감을 가져다주었다. 흥분되긴 했지만, 무명은 서인이 저를 변기통 취급을 하는 게 조금은 불쾌했다.

“어떻게 사람한테 오줌을 쌀 수가 있어요!”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고 오줌도 아닌데 무명은 혼자 착각해서 신경질을 냈다. 좋았으면서 아닌 척하자 서인이 감상평을 남기는 것처럼 단조로운 어투로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하찮은 제게 사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맛있었어요. 명이는 형한테 사용돼서 기분이 좋아요.”

징징거리던 무명은 눈웃음을 치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서인을 보며 눈에 띄게 당황했다.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듣는 무명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강요로 받아들여졌다. 이제 몸에 싸지 말라고 따져야 한다는 의견이 점점 힘을 잃어갔다.

“안 해. 싫어….”

“그래서?”

서인은 무명의 의견을 완전히 뭉개버리고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자위했다. 자위하며 제 손가락을 핥는 서인에게 시선을 빼앗긴 무명은 또다시 흥분해 숨을 몰아쉬었다.

“아…. 명이 자지 너무 좋았어…. 으응, 응….”

평소에 전혀 내지 않는 애교 섞인 신음까지 내주며 손을 움직이자 무명이 조금씩 기어 다가왔다. 머리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무명의 눈은 벌써 쾌감에 잠식되어 붉게 충혈되었다. 소변은 더럽고 역겹다는 것을 망각할 정도로 흥분한 그는 황급히 다가가 게걸스럽게 성기를 핥았다.

“명아, 형 좋아? 후으….”

“으, 크욱, 응…. 맛있, 어….”

“싸줄까?”

“으, 응…. 응, 응….”

꿇어앉아 제 성기를 핥는 무명의 가슴을 구둣발로 짓뭉갠 서인은 단계라도 정한 듯 차근차근 늘려나갔다. 처음에는 성기를 다음은 정액을, 그다음은 소변 이야기를 꺼내며 조심스레 세뇌했다.

“흐…. 사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맛있어요, 좋아요…. 몸에, 몸에…. 목구멍에 싸주세요…. 흑…. 흐으응….”

서인도 명령하며 폭력적으로 구는 것에 흥분했고 무명도 겁은 조금 나지만 싫은 척 더 자극하며 둘의 잠자리는 점점 더 가학적으로 변해갔다. 더 자극적인 것을 찾으려 하니 언제든 문제가 된다면 되겠지만, 서인은 제가 적절히 끊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Epilogue.

“와, 근데 저 살인도 안 하고 도축도 안 한 지 정말 오래됐어요! 거의 1년 다 되어 가나?”

“그러네, 형도 고기 안 먹은 지 좀 됐어.”

여전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평생 하지 않을 대화였지만, 무명은 이제야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며 좋아했다. 무명은 앞치마를 두른 채로 채소볶음을 만드는 데 집중하며 말했고 서인은 끝이 접힌 서류를 훑으며 대답했다. 눈을 마주 보지 않는, 어쩌면 성의 없고 형식적인 대화였다.

“그나저나 저희 이제 이사하는 건가요? 정말요? 그냥 해본 소리였는데….”

채소볶음을 반찬통에 넣어둔 무명은 서인의 품에 안기며 질문했다. 최근 그가 TV에 나오는 집을 보고 흘러가는 소리로 살고 싶다고 했는데, 서인이 고민도 않고 덜컥하니 꼭대기 층을 사버렸다.

서인은 원래 씀씀이가 크고 기분전환을 위해 이것저것 사들이는 편이었다. 그러나 무명은 딱히 필요하지 않았기에 조금 당황했다.

“사랑하니까 사주는 거지.”

“어? 이건 좀 감정이 안 담긴 거 같은데요? 저한테 실수라도 하셨나요? 인터넷에서 보니까 미안한 거 있는 남자가 느닷없이 선물을 준다던데….”

“실없는 소리는. 내가 너한테 무슨 실수를 해. 두 번째 집 정도로 생각하면 돼. 이제 짐 가지러 가야지.”

서인은 보던 서류를 여러 번 접어 가방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별장도 전체적으로 리모델링을 할 계획이었기에 무명의 짐을 정리해야 했다. 따라가려고 했던 무명은 서인이 돌아오면 진수성찬을 차려두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해 집에 남기로 했다.

“그 대신 제가 서재 짐 정리하고 있을게요.”

“그래, 그럼 네 물건만 챙겨온다? 도축 도구는 폐기해?”

“…네!”

별장에 가득 한 정리되지 않은 도축 도구 이야기에 무명이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비인간적인 행동 따위는 하지 않을 테니 도구를 폐기할 때였다.

“다녀오세요!”

서인을 보낸 무명은 금고를 한 번 정리하고 새로운 집에 먼저 가져갈 중요한 물건을 상자에 담으며 주변을 정리했다. 무거운 금고도 번쩍번쩍 들어내 구석구석 깨끗하게 닦아냈다.

“어?”

금고를 들어낸 무명은 구석에 처박힌, 어딘가 익숙한 낡디 낡은 시계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저 비슷한 물건이리라 생각했던 그는 시계 뒤에 자리한 각인을 보고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Zero, One’. 그 촌스럽고 이상한 각인은 시계의 주인을 알려주었다.

“이게 왜, 이걸 왜 서인이 형이 가지고 있지? 어?”

무명은 제가 마켓 고위관계자들의 눈을 피해 챙겨온 공일의 시계가 왜 여기에 있느냐며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공일이 사라지고 나서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느라 까맣게 잊고 살았던 시계였다.

우선은 서인의 집에 있을 만한 물건은 아니었기에 무명은 의문 가득한 얼굴로 물건을 조심스레 숨겼다.

“못 보게 숨겨둬야겠다….”

무명은 딱히 들켜도 상관없었지만, 서인이 공일을 싫어하니 괜히 말싸움으로 번지지 않게 미리 치워두었다. 어떻게 여기 있는지는 나중에 차근차근 알아가면 될 일이니 말이다. 방을 마저 정리하던 무명은 부엌에서 울리는 서인의 휴대전화 소리에 쪼르르 달려나갔다.

[대표님, 이번 달 주문하신 고기 명세서 전송 드립니다. 이제 곽대욱 실장님이 아닌, 대표님께 직접 전달 드려야 하는데, 자리를 비우셔서 이렇게 메시지로 보내드렸습니다. 내일 도착할 추가 상품과 함께 실물 명세서를 다시 한번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럼 올해도 어김없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고기? 명세서?”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한 무명은 함께 첨부된 사진을 살피고는 서인의 말투를 흉내 낸 답장을 보내고 메시지를 삭제했다. 기록도 싹 다 지우고 아예 도착한 적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확인했습니다. 회신 안 하셔도 됩니다.]

“하, 하하…. 고기 계속 드시고 있었구나?”

명세서의 날짜도 확인한 무명은 서인이 저와 약속한 이후부터 고기를 사들이기 시작했음을 알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몸을 파르르 떨었다. 입술을 꾹 깨물던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고 나서는….

“하,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킬킬 웃으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고 다행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서인이 대욱까지 속이고 고기를 계속 소비했다는 증거에 무명은 아주 자지러지게 기뻐했다.

서인이 정말로 고기를 끊었다면 언젠가 들킬 제 살인을 경찰에 고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불안에 떨었는데, 그가 저와 한 편이라는 걸 알았으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서인이 살인쯤이야 아무 잡음 없이 덮어버릴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희생되는 고기에게 미안함을 느끼기보단 억지로 했다, 잡혀갈까 봐 무서웠다는 마음이 더 컸던 무명은 점점 흐려지던 죄의식을 완전히 떨쳐버렸다.

“하하, 그럼 그렇지.”

그 시각 서인 역시, 무명의 몫으로 넘겨준 별장 뒤뜰 땅속에서 펼쳐진 광경을 보고 웃었다. 그 옆에 서서 구덩이 속을 확인한 대욱도 한마디 거들었다.

“도대체 언제 이렇게 많이….”

“뼈 다 태우고 원래대로 덮어. 티 안 나게.”

“예?”

꽤 심각한 얼굴로 선 대욱과 달리 서인은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무명이 저지른 만행을 그대로 덮으라고 명령한 뒤 등을 돌렸다. 그에 대욱이 당황하며 재차 확인했다.

“덮으라고 말씀하신 거 맞습니까?”

“그래, 알잖아. 사람 쉽게 안 변하는 거.”

“…….”

“그래서 난 고기가 좋아. 도축 방법에 따라, 부위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니까 항상 색다르잖아?”

서인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기분이 좋아 보였다.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어쩐지 성적으로 흥분한 것처럼도 보였다. 그는 들뜬 발걸음으로 미리 준비한 새 도축 도구들을 들였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한 번 쓰레기는 영원한 쓰레기다. 태생을 악하게 태어난 서인은 넘치는 제 악행을 받아낼 넓은 쓰레기통을 찾아냈고 무명은 텅 빈 자신을 채워줄 쓰레기를 만났다.

[납치범이 취향이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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