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74화
제374화
"……."
이건명은 말없이 멍한 시선으로 사라져가는 한혜연을 지켜보았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강재성의 말대로라면 이곳에서는 아무 힘을 쓸 수 없어야 정상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이건명은 씁쓸하다는 듯 웃으며 검붉은 손이 원래대로 되돌아오자 쓴웃음을 머금었다.
"복제키 또한 이번 한 번으로 명이 다했구나. 더는 쓸모가 없겠어. 이젠 다 끝인가…."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묻지 않나!"
나는 이건명의 멱살을 쥐고 강하게 흔들다가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냅다 후려쳤다.
내팽개쳐진 이건명의 냉랭한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하지만 그는 씩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할 뿐 말이 없었다.
그 순간 치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강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르신, 어르신. 제 말 들리십니까!
"듣고 있네. 말하게."
- 제가 방심했습니다! 그가 방금 복제키를 이용해 가이아에게 자폭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대로라면 본사의 통제실에 있는 코어 에너지가 막대한 힘을 분출해 핵폭탄 여섯 개와 같은 위력으로 한국을 휩쓸어버릴 거예요! 다른 나라들은 괜찮겠지만, 아마 본사가 자리한 한국만큼은 그 피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자폭 명령이라고…?"
나는 안색이 창백해져서 아래에 주저앉은 이건명과 눈을 마주쳤다.
이건명 또한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놀랐는지, 눈이 살짝 커져 있었다.
그는 "조력자가 있었던 건가?"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이보게 강재성 박사, 그게 사실인가? 그렇다면 그걸 막을 방법도 있는 건가?"
그때 이건명의 낯빛이 분노에 휩싸이며 놀란 얼굴을 했다.
"강재성! 네놈이 살아있었단 말인가! 기어코 끝까지…!"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는 돌려차기로 그의 머리통을 냅다 후려쳤다.
이건명은 작은 비명과 함께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런 이건명과 눈싸움을 하며 강재성에게 다시 물었다.
"다시 묻겠네. 막을 방법이 있는가?"
- …….
강재성의 침묵이 짧게 지나가고 그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가진 마스터키로도 이 명령을 철회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꽤 오래 걸립니다. 거기다가 그곳의 폭발이 이제 채 20분도 남지 않았다는 것도 문제구요. 당장 자폭 명령을 철회할 수 있는 건 명령을 내린 당사자뿐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건명의 멱살을 틀어쥐어 일으키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장 명령을 취소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자네 끝까지!"
나는 분이 풀릴 때까지 이건명을 계속해서 후드려 팼다.
주먹질을 가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어난 그에게 화려한 발차기를 날리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이건명은 마치 오뚜기처럼 피를 흘리면서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뭉개지고 이빨이 부서져도 웃기만 했다.
나는 그것이 더 화가 났다.
"웃지 마!"
빠악!
1080도 돌려차기가 그의 면상을 후려쳤다. 순간 어마어마한 힘이 실린 공격에 이건명의 몸이 붕 뜨며 허공에서 한 바퀴 반을 돌았다.
이건명은 힘없이 주저앉으면서도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그야말로 광인(狂人)이 따로 없었다.
"흐흐흐흐. 포기해. 이젠 다 끝이야. 나와 함께 죽는 거네. 다른 나라 놈들을 데려가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이놈의 망할 나라 하나 데려갈 수 있다면 나는 족해! 족한다고! 크하하하!"
"이 미친 새끼가!"
퍽! 퍽! 퍽!
이건명은 곤죽이 되도록 맞았지만 절대로 명령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를 내려놓고 다른 방법이 없는지 강구하기 위해 강재성을 불렀다.
"정말 다른 방법은 없나?"
- 한 가지 있습니다만….
"기탄없이 말해보게. 시간이 얼마 없네."
이제 폭발까지 남은 시간은 15분이었다. 할 수 있는 방법이 남아있다면 어떻게든 막아야했다.
-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무언가 조작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러 목소리가 뒤섞이며 들려왔다.
눈앞에 떠오른 화면엔 백무열을 비롯해 미도와 백성찬. 그리고 박막순과 일행들이 함께 있었다.
그들 또한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때, 바로 옆에 또 하나의 화면이 떠오르며 강재성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 다행히 연결이 성공되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약 15분 뒤 우리나라에 핵폭탄 6개에 상응하는 위력의 대폭발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허공에 15분의 카운트다운이 떠올랐다.
백무열이 있는 곳도 마찬가지인지, 그들의 안색이 모두 창백해져서 혼비백산하고 있었다.
"조용!"
나는 재빨리 그들을 진정시켰다.
"강 박사 계속 말하게."
- …예, 지금 살펴보니 복제키도 완전히 사라진 마당이라 당사자의 명령 취소도 소용없을 듯합니다. 어쩔 수 없이 최후의 방법을 써야할 것 같아요.
"최후의 방법이라 함은 역시 그걸 이르는 건가?"
- 그렇습니다.
강재성의 고개가 끄덕여짐과 동시에 나는 그곳에 있는 춘자에게 백무열의 새하얀 목검을 꺼내게 했다.
목검은 웅웅거리며 빛과 함께 공명하는 것처럼 진동을 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의 전조를 알리는 듯했다.
- 백무열 어르신께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마력 발아를 쓸 수 있는 것은 어르신뿐이니까요. 아마 지금 그곳의 황금 사과나무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을 겁니다. 보이십니까?
- 그렇네. 눈에 보이는군. 자네 말대로 확실히 사라지고 있네.
- 방법은 간단합니다. 어르신의 목검은 그 나무의 가지로 만든 것이니, 황금 사과나무가 사라지고 비워진 자리에 다시 마력 발아를 통해 새로운 나무를 심어 주시면 됩니다. 하실 수 있겠습니까?
- 당장이라도 가능하네. 지금 당장 움직이지!
백무열의 화면이 어지러워지며 순식간에 황금 사과나무가 있던 곳으로 달렸다.
잠시 뒤, 1과 0으로 이루어져 사라지는 나무의 잔재가 하늘로 흩어지는 것이 화면으로 보였다.
이건명이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강재성! 또 네놈이 나를 막는구나! 죽어서도 네놈을 저주할 것이다!"
강재성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그의 말을 무시했다.
이제 시간은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 최춘택 어르신.
그때 백무열의 화면이 꺼지더니 돌연 강재성의 화면만 떠올랐다.
"말하게."
- …봉인이 성공하더라도 그곳의 폭발은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 이 방법은 가이아의 핵심 코어를 운용하는 에너지의 가동 그 자체를 아예 닫아버리는 것이죠. 일종의 초기화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쉽게 말하면 어르신은 그 영향으로 아마도… 죽게 되실 겁니다. 의식은 폭발의 영향으로 저조차도 알 수 없는 계면 데이터의 우주 속을 맴돌게 될 것이구요. 쉽게 말씀드리면….
"되었네. 이러나저러나 죽는 건 마찬가지란 말 아닌가. 폭발을 막지 못하면 그대로 끝일 테고, 그것을 막아내도 내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 …그렇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재성은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나. 난 괜찮네."
- 방금 백무열 어르신께서 마력 발아를 사용해 새로운 나무를 심기 시작하셨습니다. 다행히 이곳 연구소의 코어 에너지도 점점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구요. 혹시… 가족분들께 남기실 말이라도 있습니까?
"허허, 글쎄. 갑자기 이렇게 유언을 남기라고 하니 나도 생각이 안 나는구먼."
- 녹화 기능도 있습니다. 그냥 편지보다는 동영상으로 전하는 게 더 나을 테지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라 죄송할 따름입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언은 되었네. 그런 것을 남겼다가는 가족들과 무열이 저 친구가 더 힘들어질 거고 말이야. 아내가 죽고 편지를 남겼을 때 내가 그랬거든. 아, 그렇지. 명계에 있는 안사람은 그럼 괜찮은 겐가? 갑자기 보고 싶구만."
-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사실 지금 대화 내용을 다 듣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화면이 떠오르며 아내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는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구려. 조금 더 오래 당신과 있고 싶었는데. 하하하."
내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음을 터트리자, 유선영도 글썽이는 눈으로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녀는 목이 메여서 말이 나오지 않는 듯했다.
- …여보. 우리 다음 생에도 부부인거죠?
나는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소릴."
- 사랑해요. 당신과 함께했던 나날들은 정말 행복의 연속이었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약 3분이 남았을 무렵.
갑자기 화면이 무수히 많이 띄워지며 다른 일행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가장 중앙에는 손녀인 미도 또한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강재성이 말했다.
- 정말 손녀분과 얘길 안 나누셔도 괜찮겠습니까? 이야길 나누려면 지금뿐입니다. 1분이 되면 자동으로 로그아웃되게 설정해놨거든요.
"……."
나는 말없이 미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하얗고 맑은 미소로 웃고 있었다.
아내 유선영과 닮은 그녀는 언제나 내 삶의 원동력이었다.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을 손녀.
내 핏줄. 그리고 내 사랑.
"…사랑한다고. 미도에게 그렇게 전해주겠나?"
- 제가 책임지고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강재성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때, 이건명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사랑! 웃기는군. 너희들은 모르겠지!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혜연이를 어떻게 보내야 했는지! 나는 평생 그런 것은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지. 유일하게 사랑을 준 그녀를 비루한 신이 데려가 버렸고,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온갖 추악한 인간들이 손가락질을 해댔다! 고작 내 아내란 이유로, 재벌의 아내란 이유로 말이야! 추악한 인간들은 머지않아 몰락하게 될 것이다! 당장에 나 또한 그렇지 않느냐! 크하하하!"
이건명이 미친 듯 광소를 터트렸다.
때마침 화면에 있던 모든 이들이 새하얗게 변해 이곳에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미도가 사라졌다.
"……."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뜨고는 유일하게 내 곁에 남아있는 아내 유선영의 얼굴이 비친 화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뒤돌아 동정심 어린 눈빛으로 이건명을 보았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이건명이 희색을 띠며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붉게 충혈된 눈에는 광기가 어려 있었다.
시간은 30초가 채 남지 않았다.
"역시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래! 역시 그대는 나를 닮았어! 흐하하! 우린 닮았다고! 어? 우린…."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천천히 뒷짐을 지고 웃었다.
"그게 오늘은 아닐세."
때마침 카운트가 0을 가리켰고, 동시에 눈앞이 새하얗게 터지며 온 세상이 빛으로 가득 찼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하얀 빛에 온몸을 맡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