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70화
제370화
[강재성…?]
단번에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본 나는 허공에 유유히 떠서는 들려오는 말에 집중했다.
- 하하, 알아보시는군요. 맞습니다. 저 강재성입니다. 지금 본사에서 슈퍼컴퓨터를 통해 연락드리는 겁니다.
[본사? 자네 현실로 돌아간 것인가? 이미 넵튠의 몸을 벗어난 게야? 넵튠은 어떻게 되었지?]
- 다 말씀드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군요.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넵튠은 죽지 않고 현재 잠들어 있습니다. 제가 떠나기 전 가진 신력을 소모해 세 여신을 살리고, 어르신이 주셨던 포크 숟가락에 제 권능을 일부 불어넣었기 때문이죠. 육신은 잠든 상황입니다.
[그랬었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갑자기 나타난 세 명의 여신들과 클리메네와 데우칼리온이 내 포크 숟가락을 들고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포크 숟가락에서 느껴지던 이질적인 기운의 정체 또한 알게 되자 얽힌 실타래가 풀린 것처럼 궁금증이 한결 해소되었다.
나는 맑아진 얼굴로 귀에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자네가 본사로 돌아왔고, 내게 연락을 했다는 것은 분명 무슨 부탁을 하거나 방법을 찾았다는 뜻이겠지?]
- 현명하시군요. 맞습니다. 저는 어르신께 작은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일단 들어봐야겠지. 말해보게.]
그렇게 강재성의 말이 이어지고, 모든 얘기를 들은 나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이건 작은 부탁이 아니군. 내게 유피테르를 막아달라니.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나 혼자서는 그를 막을 수는 없네. 아무리 내가 지금 신격을 갖게 되었어도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야.]
-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꼭 이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시간만 끌어주신다면 제가 마스터키를 이용해 해킹당한 가이아를 되찾아 올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전쟁은 끝이 나겠지요.
나는 잠시 고민한 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자네 말에 따르도록 하지.]
-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럼 곧장 해킹당한 가이아를 되찾기 위한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혹시 '마력 발아'라는 스킬을 가지고 계신지요? 확인해보니 갖고 계신 걸로 나와서요.
[자네가 본 것이 맞네. 그 스킬을 가지고 있네. 근데 그건 왜 묻지?]
- 그건 이따가 말해드리겠습니다. 잘되었군요. 혹시 백무열 어르신도 함께 불러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열이를? 알겠네. 잠시만 기다리게.]
나는 곧장 귓속말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백무열을 불러들였다.
백무열은 의문스러운 눈빛을 하더니 이곳으로 날아왔다.
저 멀리 루시퍼와 일행들의 싸움이 최고조에 이른 것처럼 연이은 파공성이 들려왔다.
"왜 불러? 한창 싸우는 중이었는데."
- 백무열 어르신.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으잉? 이건 또 무슨 소리여."
- 다행히 들리시는군요. 전 강재성 박사라고 합니다. 현재 저는 유니온 본사에서 슈퍼컴퓨터를 통해 어르신께 연락을 취하고 있습니다. 어르신께서 가지고 계신 목검을 잠시 최춘택 어르신에게 빌려주셔야겠습니다.
"뭬야? 내 목검을?"
백무열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강재성이 그를 진정시켰고, 목검이 필요한 연유를 차분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모든 설명을 들은 백무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새하얀 목검을 내게 던져주었다.
"부러트리지 말고 갖고 와."
[될 진 모르겠지만 노력하지.]
곧장 말을 마친 나는 이건명이 있는 부유성을 향해 궤적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날았다.
* * *
최춘택이 궤적을 그리며 시야에서 사라지자, 백무열은 다시 일행들이 싸우는 전장으로 되돌아왔다.
때마침 대마법을 펼쳐 하늘에서 떨어지는 오색 빛의 유성을 루시퍼에게 쏟아내던 박막순이 불평 어린 기색을 드러내며 인상을 썼다.
"이 중요한 상황에 어딜 도망갔다가 오는겨!"
"할망구가 말을 해도 꼭…. 에휴, 말을 말자. 춘택이에게 다녀오는 길이다."
"춘택 오라버니? 거긴 뭐하러 갔디야."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작전회의 같은 걸 하고 왔지."
"그게 무슨 헛소리여? 뭐 잘 못 먹었어? 그리고 들고 있던 목검은 어디다 버리고 온 거여? 전장에 총도 안 갖고 다니는 군인이 있다냐!"
박막순이 백무열의 손에 언제나 쥐여져 있던 새하얀 목검이 없자,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빽 소릴 질렀다.
그런 그녀의 앞에서 오색빛의 찬란한 유성이 계속해서 루시퍼를 향해 떨어지며 폭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콰쾅! 콰콰쾅!
백무열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내 목검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라서 말이야. 춘택이에게 빌려주고 오는 길이다."
"염병. 분명 치매가 도졌구만. 헛소리가 늘었어. 그딴 나뭇가지가 무슨 최후의 방편이라고. 쯧쯧."
백무열이 이마에 커다란 힘줄을 만들어냈고, 박막순은 코웃음을 치며 마법진을 조종해 수결을 맺더니 또 다른 마법들을 쏟아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굉음은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냈다.
박막순은 다시 두 손가락을 루시퍼에게 뻗으며 연속된 마법 폭격을 가했다.
"무기도 없는데 워떻게 싸우려고 그랴!"
그 말을 들은 백무열은 인벤토리에서 새하얀 벼락을 뿜어대는 천둥의 검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원래 이건명이 아슈타르에게 내린 천둥검이었는데, 백무열이 아슈타르를 죽이고 전리품으로 빼앗아 온 것이었다.
츠츠츳!
"큭."
백무열이 검 손잡이를 잡는 순간 전신을 찌릿하게 만드는 고통에 인상을 쓰며 오른팔을 살펴보았다.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피부가 벗겨져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목검 대신 이걸 쓰려고 했는데, 설마 못 쓰는 건가?"
백무열이 낭패가 어린 표정으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바로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도와주지. 난 태초 신이신 아버지 유피테르의 힘을 절반이나 이어받은 몸. 그대와 나의 힘을 합친다면 분명 그 검을 잡고 싸울 수 있을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창백해진 얼굴로 다가왔다.
그의 거체는 이제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는데, 그만큼 그가 가진 신력과 성좌로서의 영성이 줄어들은 탓이었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겠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아비가 잘못된 길로 가는데 어찌 아들인 내가 외면하겠나. 아마 한계까지 힘을 끌어올린다면 당분간은 잠들어야겠지만,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지. 기꺼이 감수하겠다.]
"각오가 그렇다면 말릴 수는 없겠지."
[좋다. 당장 시작하지.]
쿠르릉!
헤라클레스와 백무열의 몸이 합쳐지더니 눈부신 빛살이 터져 나왔다.
* * *
같은 시각.
갑작스레 들려오는 우레와 같은 천둥소리에 별의 궤적을 그리며 빠르게 날아가던 나는 뒤쪽을 쳐다보며 눈을 크게 떴다.
[백무열? 헤라클레스? 아니지. 둘이 힘을 합친 모양이군. 지금 상태로 저런 짓을 했다간 헤라클레스 녀석이 감수할 대가가 제법 클 텐데….]
쿠르릉!
그때. 백무열과 하나가 된 헤라클레스의 곁에 새하얀 검이 쿠르릉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무척이나 놀라울 정도라서 나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초감각을 시력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검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을 느낀 나는 재빨리 의식을 거두었다.
[유피테르의 벼락으로 만든 검인가보군. 저게 어째서 저 녀석의 손에 있지? 어쨌든 저걸 잡고도 멀쩡한 것을 보니 일이 잘 풀리는 모양이야. 걱정 안 해도 되겠어.]
나는 백무열과 헤라클레스가 힘을 합친 것이 저 검 때문이라는 것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합쳐진 두 사람의 신형이 하얗게 번쩍이며 총알같이 튀어나가더니 루시퍼를 향해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헤라클레스와 백무열의 힘이 담긴 거력과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벼락의 기세가 합쳐지니 경천동지할 기세로 루시퍼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당연히 루시퍼의 표정이 안 좋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흡족한 얼굴을 한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전방을 향해 날아가려 했다.
그런데 어느새 수천 마리의 날개달린 마족과 마수들이 내 앞을 가로막고 둘러싸고 있었다.
이걸로 벌써 다섯 번째였다.
[지긋지긋한 놈들. 끝도 없이 나타나는구나.]
이건명이 있는 부유성까지 가는 길은 무척이나 멀고도 험했다.
당연히 마족들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고, 이번에는 장군급들 몇 명과 대장군급이 두어 명 섞여 있었다.
아마 이번에도 시간을 꽤 잡아먹을 듯 보였다.
나는 곧장 아껴뒀던 여의초로 적들을 휩쓸어 버리기 위해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그때, 돌연 마족들의 가운데에 거대한 블랙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우웅!
블랙홀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주변의 마족들을 빨아들였다.
장군급이든 대장군급이든 차별하지 않고, 모조리 빨아들인 것은 순식간이었다.
찰나에 벌어진 광경에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빠!"
[춘자 너였구나. 못 본 사이 무척이나 강해졌어. 허허.]
"에헴, 내가 풍희보다는 낫지?"
검은 단발머리의 소녀가 코를 슥 문지르며 어깨를 한껏 추켜세웠다.
마치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곧장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구해줘서 고맙다. 아무래도 네 도움이 계속 필요할 것 같은데, 방금 쓴 그 기술은 얼마나 쓸 수 있는 거냐?]
"아, 그거? 새로 배운 금지된 마법인데 꽤 쓸 만하지? 얼마나 쓸 수 있을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생각보다 소모되는 마력이 제법 크거든! 그래도 지금은 달이 떴으니까 밤이 지속 되는 동안은 계속 써도 괜찮을 거야. 지금은 달이 떠서 마력이 거의 무한하니까!"
[혹시 움직이면서도 쓸 수 있는 거냐?]
"음, 해본 적은 없는데 한 번 해볼게! 가능할 것 같아!"
[그럼 당장 가자꾸나. 저기에 있는 부유성이 목적지다. 저기까지만 데려다 주면 되. 그 뒤로는 네가 부유성으로 날아드는 마족들을 막아주면 된다.]
"그 정도는 간단해!"
춘자가 짝! 하고 박수를 치더니, 양손 사이에 핏빛 마법진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가 손을 앞으로 뻗자 무시무시한 기세의 블랙홀이 다시금 나타났다.
춘자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며 밀어보았다.
다행히 블랙홀은 춘자와 일정거리를 유지하며 움직였다.
"가자! 내가 길을 뚫어줄게!"
춘자가 검은빛에 휩싸여 앞으로 뻗어 나가자, 전방을 가로 막았던 마족들이 속수무책으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갔다.
진공청소기가 따로 없었고, 나는 곧장 별빛의 궤적을 그리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수만의 이르는 마족들은 차마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거리를 벌려 뒤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무려 수만에 이르는 마족들이 뒤에서 무리를 이루어 쫓아오자, 나는 코웃음을 치며 여의초를 발동했다.
"커져라. 여의초."
그제야 뻗어나간 여의초가 횡으로 퍼지며 무시무시한 구름의 파도가 되더니 마족들에게 들이닥쳤다.
난데없는 구름의 재앙에 마족들은 맥도 못 추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쿠쿠쿵!
하지만 그런 마족들 사이에도 강자들은 있는지, 간신히 뚫고 나온 몇몇 마계 장군들이 씩씩거리며 나타났다.
그러나 이미 중상을 입은 상태였기에, 주변을 떠다니던 별 조각들이 자동으로 움직여 그들을 격살했다.
그렇게 마족들이 순식간에 정리되자, 이제 앞은 휑해진 것처럼 부유성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을 부탁한다.]
"알았어!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할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부유성에 내려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춘자에게 던졌다.
춘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새하얀 목검을 받았고,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혹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나보단 네가 가지고 있는 게 좋겠다. 나중에 내가 부르면 바로 내게로 와야 한다. 알았지?]
"응!"
그제야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부유성으로 날아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