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69화
제369화
그 시각.
명계에 있던 아이올로스의 몸에서 잔잔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런 그에게선 예전과 같은 힘을 찾아볼 수 없었다.
미약하지만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아이올로스는 간신히 살아있었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힘을 주입하던 검은 수정구슬에서 천천히 손을 떼었다.
유선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요?]
"예, 괜찮…습니다. 후우."
유선영이 플루토의 눈으로 아이올로스의 몸을 살폈다.
이제 그에게서 신수의 기운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눈앞의 아이올로스는 이제 평범한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플루토 님. 덕분에 그 아이에게 제대로 힘을 양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죄송하게도 저는 이제 명계의 문을 닫는 신물에 힘을 보탤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이올로스가 낭패 어린 표정을 지으며 식은땀을 훔쳤다.
그런 그에게 유선영은 자애로운 얼굴로 괜찮다고 말했다.
이미 그녀는 천천히 회복을 하던 힘을 5할 정도는 되찾았기에 괜찮았다.
알렉서스가 히죽 웃었고, 툰드라 드래곤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코웃음을 흘리며 반투명한 화면을 냉랭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 * *
같은 시각.
황금 사과나무 앞에서 가이아의 힘을 흡수하던 이건명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 기운은 설마….]
이건명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마의 주름을 한껏 만들어냈다.
그는 최춘택이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서둘러 가이아의 봉인을 다시 푸는 중이었고, 누군가 기습을 하게 되면 대사를 그르칠 수도 있었기에, 그는 이곳에서 눈을 감은 채 하늘을 이용해 전황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형용할 수 없는 천지 기운들이 모여들더니, 어마어마한 폭풍을 형상화하며 움직이는 것이 아니겠나.
[개람들이로구나! 아이올로스가 죽고 새로운 풍백이 나타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던 놈들이 이렇게 나타났다는 것은 설마 그 녀석의 핏줄이 아직 살아 있었단 말인가!]
이건명이 탄식 어린 어조로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라그나로크 전쟁 당시 죽음의 군단으로 인한 피해는 인간계는 물론이고, 그가 있었던 천계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죽지 않는 존재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로 죽지 않는 존재들뿐이었고, 당시 개람들이 라그나로크에 참전했었다면 무수히 많은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당시 아이올로스를 죽였던 이건명은 그 실책을 뒤늦게야 깨닫고 말았다.
하지만 이젠 그런 죽음의 군단과 개람들이 서로 한편이 되고 말았으니 통탄할 노릇이었다.
[허어, 잘못하다간 전황이 한순간에 뒤집어지고 말겠구나.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겠어.]
이건명이 천천히 양손을 들어 하늘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풍희는 얼떨떨한 얼굴로 둥글게 자신을 둘러싼 개람들을 보았다.
그런 풍희의 머리 위엔 오색의 사슴뿔을 한 하얀 호랑이가 바람을 부리는 형상이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눈부신 빛이 그녀에게서 터져 나오며 그녀의 머리에 오색 사슴뿔을 두 개를 만들어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아이올로스의 목소리를 통해 모든 힘을 건네받을 수 있었는데, 곧바로 이어진 깨달음에서 마침내 지금처럼 각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재빨리 냉정을 되찾은 그녀는 그들에게 마족들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풍백의 명을 받듭니다."
동풍의 에우로스, 서풍의 제피로스, 남풍의 노토스, 북풍의 보레아스가 각기 다른 개람들을 이끌고 동서남북으로 퍼져나갔다.
무시무시한 폭풍이 불어닥치며 마족들이 놀라운 속도로 죽어 나갔다.
북풍의 보레아스는 저 멀리 산타클로스와 늑대 부부인 로믈라나와 레무스가 이끄는 북극의 수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며 마족들을 얼리고 망치로 부쉈다.
남풍의 노토스는 아틀란티스와 세 여신들이 싸우는 곳으로 개람들을 이끌고 날아갔다.
서풍의 제피로스는 인간들을 도우며 싸웠는데, 놀랍게도 그런 그의 곁엔 케레노스가 함께 바람의 창을 사방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새로 깨달음을 얻은 기술을 써볼 때가 찾아왔구나."
케레노스가 재빨리 자세를 잡더니 창끝에 무시무시한 살풍(殺風)의 기세를 일으켰다.
한순간이지만 그의 뒤로 거대한 새의 형상이 맺혔고, 그대로 창을 횡으로 긋자, 봉황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새가 있었다.
끼오오오!
공간을 찢으며 날아간 바람의 봉황이 울부짖자 주변이 초토화되며 공간을 비틀기 시작했다.
봉황의 울음소리를 들은 마족들은 그것을 들음과 동시 몸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케레노스는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창을 휘둘러 춤을 추었다.
그의 창끝이 춤을 출 때마다 봉황이 창끝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치 바람의 봉황을 조종하는 것 같았다.
"네가 뮤겐보다는 낫구나."
그 모습을 보던 제피로스가 싱긋 웃었다.
그 또한 바람의 부채를 휘둘러 마족들을 휩쓸었다.
그때쯤 동풍의 에우로스가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며 오크들에게 닿아 있었고, 그는 고르바를 비롯한 오크들이 상대하던 마족들을 남김없이 불태웠다.
이어서 도깨비와 뱀파이어들을 도와 모든 것을 태우기 시작했다.
풍희도 그 모습에 흡족했고, 재빨리 몸을 하얗게 변신시켰다.
은빛 뇌전이 그녀의 몸을 휘감으며 또 한 번 천둥이 치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회백색 먼지가 걷혔을 땐 이미 그녀는 그 자리에 없었다.
풍희가 튀어간 곳은 최춘택이 있는 곳이었다.
* * *
그때쯤 나는 전장의 상황이 확연하게 뒤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풍희가 마침내 각성을 마쳤고, 본연의 힘을 되찾게 되어 개람들을 이끌고 마족들을 격퇴시키고 있음을 알아 본 것이다.
그때. 저 멀리서 하얀 섬광이 날아들더니 주변에 있던 마족들이 전부 반 토막 나버렸다.
미처 반응하지 못한 마족들이 우수수 쓰러졌고, 당연히 내 부근을 떠다니던 별 조각들이 그런 마족들이 다시 살아날 수 없도록 사방으로 빛기둥을 뿜어내서 지져버렸다.
여인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마족들은 제가 맡을게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루시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 전 내게 말을 건 것은 풍희의 목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다시 헤라클레스를 공격하고 있는 루시퍼가 있는 곳으로 날아올랐고, 인근의 마족들은 빠른 속도로 정리되고 있었다.
[…….]
차가운 루시퍼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런 그의 맞은편엔 피에 낭자 되어 천천히 기력을 잃어가는 헤라클레스가 보였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루시퍼를 보았다.
[이젠 나랑도 한 번 붙어보는 게 어떻겠나.]
[…….]
하지만 루시퍼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이었다.
그는 아래쪽을 훑어보며 일이 안 좋게 흘러가고 있음을 직감한 듯 눈가를 씰룩였다.
그때 누군가 이곳으로 날아왔다.
"…다녀왔다."
그것은 백무열이었다.
그런 그의 뒤편엔 아슈타르의 커다란 머리통이 두 개나 있었다.
마치 전리품을 얻은 듯 백무열은 위풍당당해 보였다.
당연히 그의 양손엔 피에 절은 몽둥이와 차원의 가위가 들려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점차 다른 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중엔 아리에스와 몇몇 성좌들도 있었다.
루시퍼는 천천히 포위되어가기 시작하자,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바라보며 돌연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모두가 싸늘한 시선으로 그런 루시퍼를 지켜보았다.
그렇게 약 5초간 크게 웃던 루시퍼가 돌연 정색을 하더니, 날카로운 이를 씩 드러내며 웃었다.
[너희가 이겼다고 생각하느냐.]
[그게 무슨 말이지?]
그 물음과 동시에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형의 기운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은 감각이 일었다.
그리고 갑자기 번쩍! 하더니 주변에 있던 성좌 하나가 벼락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재가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 성좌의 몸은 검은 연기가 되어 천천히 다시 살아났다.
[……!]
그 순간. 어마어마한 기운이 하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느껴지며 눈 깜짝할 사이에 연격을 퍼부었다.
쿠콰콰쾅!
어느 곳으로 들이닥칠지 모르는 무시무시한 벼락 공격이었다.
[유피테르…!]
아리에스의 낮음 외침과 동시에 몇몇 성좌들이 벼락에 대항하려 검을 휘두르고 공격을 퍼부어 보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재가 되어 다시 살아났다.
문제는 그들이 살아나는 속도가 차츰 느려지고 있었다.
아마도 같은 태초 신의 격이 실린 공격이었기에 플루토의 권능마저도 조금씩 와해되는 것 같았다.
그것을 느낀 아리에스의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전장 전체가 다시 요동쳤다.
마족들을 공격하던 개람들과 죽음의 군단이 하늘에서 내리치는 벼락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재앙과도 같은 모습이었고, 하늘의 신이 내리는 천벌에 어느 누구도 대항하지 못했다.
루시퍼가 더욱 크게 광소를 터트리며 발톱을 날려 보냈다.
전쟁이 다시 가속화된 것이다.
주춤했던 마족들은 다시 기세를 되찾아 반격에 나섰고, 이제 어느 누구도 승리의 향방을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나를 비롯한 일행들이 눈앞의 루시퍼를 향해 다양한 공격을 쏟아 보냈다.
[어리석긴.]
루시퍼는 그런 우리들의 공격을 상상의 실체화라는 권능을 이용해 모조리 흩어버렸다.
때마침 가세했던 박막순이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쳤다.
"흐미, 저 썩을 것이 뭐 저리 흉악한 기술을 쓰고 그런디야! 요로코롬 해가지고 승산이 있을랑가 모르겄어!"
그때. 재빨리 루시퍼의 뒤를 점한 백무열이 그의 한쪽 팔을 향해 가위질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루시퍼는 그저 손가락을 튕겨내어 상상의 실체화라는 권능을 이용해 그의 몸을 투명하게 만들었다.
차원의 가위는 그대로 허공을 갈랐고, 어느 것도 자르지 못한 백무열의 빈틈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앙!
백무열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땅으로 떨어져 처박혔다.
간신히 되살아난 그는 낭패가 어린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마침 그의 곁에 나타난 박막순이 플라이 마법을 걸어주었고, 이제 백무열은 손쉽게 하늘을 날 수 있었다.
루시퍼가 여전히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모두 통과시키자, 백무열이 어이가 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그러게.]
나 또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장 아래쪽에 있던 놈들도 문제야. 마른하늘의 날벼락을 먼저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데."
[…….]
어느새 날이 저물고 달이 뜨고 있었다.
싸움은 벌써 반나절동안이나 지속되고 있었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파공음이 끝없이 들려왔다.
마치 밤하늘을 수놓은 별이 반짝이는 듯 아래에선 무시무시한 마법과 스킬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그곳에선 모두 죽음을 각오한 이들이 투쟁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허공을 올려다보았고, 새로운 춤을 추며 하늘을 내달렸다.
마침내 완성된 것은 비천기상무의 또 다른 비각술 중 하나인 달의 비각술이었다.
[달그림자.]
상공에 떠 있는 달에서 휘황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아래에 있는 이들을 훑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아래쪽에 있는 그림자가 솟구쳐 오르더니, 그림자의 주인이 하는 공격을 따라 하며 돕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주인의 공격을 절반이나 따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10분 정도밖에 지속 되지 않는 것이었다.
달의 정기를 흡수하지 못한 내가 가진 마력으로 강제로 일으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뒤엔 그림자가 무려 세 개나 떠 있었다.
마치 분신순을 쓴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갑작스러운 이상 현상을 감지한 유저들과 NPC들은 살짝 놀랐지만, 이내 그림자가 자신들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사기가 충천하여 마족들을 격살하기 시작했다.
백무열과 박막순도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옆에 있는 그림자를 보고는 신기하다는 쳐다보다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시 루시퍼에게 날아갔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뒤따르려고 했다.
그러던 바로 그때였다.
- 아, 아, 혹시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