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315화
제315화
잦아든 어둠과 함께 도깨비불 같은 것들이 좌우로 일직선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마치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처럼 보였다.
나와 풍희는 말없이 앞으로 걸었고, 풍희는 조금 무서웠는지 내 옷과 팔을 붙잡고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서 오라. 바람의 피를 이은 자여. 그리고 바람을 인도하는 자여."
넓은 공동이 나타남과 동시에 허공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돌로 지어진 어떤 석탑 위에 두둥실 떠 있었다.
천사와 비슷한 자그마한 녹색 날개와 갑주.
귀 너머로 꽂은 하얀 꽃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그의 외모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런 그의 옆으로 역시나 비슷한 외양의 존재들이 셋 더 있었다.
…개람의 4대 장군들이 모두 나타난 건가.
개람(鎧嵐)이란 갑옷을 입은 폭풍이란 뜻이었다.
그들은 과거 아이올로스를 따르던 바람의 친위대들로, 언제나 모든 전선에 앞장서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깨부수던 최고의 기사들이었다.
왼쪽부터 서풍의 제피로스. 남풍의 노토스. 동풍의 에우로스. 북풍의 보레아스.
그런 그들의 위로 셀 수도 없이 많은 바람의 병사들이 허공에 두둥실 떠서 우리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 기세가 무척이나 대단해서 잠깐이지만 압도당하는 느낌도 들었다.
"흐음. 하얀 머릿결이 그분을 쏙 빼닮았네. 그런데 좀 늙었…구나."
아까 처음 말 걸었던 부드러운 목소리의 남자가 날 가리키며 물었다.
그는 서풍 장군 제피로스였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쏟아졌다.
"큼. 내가 아니네만."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배를 잡고 웃습니다.]
[제3사도, 아틀라스가 낄낄거리며 웃습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아틀라스를 때리며 웃습니다.]
[제3사도, 아틀라스도 프로메테우스를 때리며 웃습니다.]
[두 사도가 서로 싸우기 시작합니다….]
이 자식들은 왜 또 웃다가 지랄이야?
하여간 속 시끄러운 놈들 같으니라고.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구만.
"아니라고? 하지만 분명 우리는 바람의 피를 이은 자를 느꼈는데. 그럼 설마…?"
제피로스를 비롯한 모든 바람의 시선이 내 바로 옆에 있는 풍희에게로 옮겨갔다.
풍희는 화들짝 놀라며 하얀 머리칼을 흩트리며 얼굴을 붉히더니, 내 등 뒤로 몸을 숨겼다.
다 큰 처자가 등 뒤에 숨어 있으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었다.
"그분이 남긴 후예가 여인이었나…?"
붉은 날개와 곱슬머리를 가진 뜨거운 바람의 주인.
동풍 장군 에우로스가 한 말이었다.
풍희는 하얀 머리칼을 곱게 흩트리며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으음, 하지만 바람의 피를 이은 건 분명하다! 우리 개람을 만날 자격은 충분하지!"
바로 옆에 있는 북풍 장군 보레아스가 차디찬 바람을 일으키며 호쾌하게 말했다.
그가 입은 망토가 펄럭거리며 손에 쥔 고둥과 망치가 유독 돋보였다.
"맞는 말이다. 그분의 딸이라면 분명 우리를 만날 자격이 있지. 하지만 그것도 우리를 이끌 자격이 있을 때의 얘기일 터."
역청같이 검은 안개와 하얀 백발.
젖은 날개가 돋보이는 남풍 장군 노토스였다.
습기를 먹은 갑주가 번들거렸다.
그때. 개람의 4대 장군들이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동시에 말했다.
"바람의 피를 이은 자여, 그대의 바람을 우리에게 증명하라."
* * *
성유계, 천궁과 마족의 전장.
아이올로스는 플로라와 기절한 아리에스를 데리고 성좌들을 이끌며 인간계로 향하는 차원의 문을 향해 하염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성좌들은 마치 날카로운 창과 같은 진형을 구축해 마족들과 싸워나갔는데, 가장 앞선 것은 바람의 신수로의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낸 아이올로스였다.
하얀 바람이 되어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아이올로스가 거친 포효음을 내뱉었다.
[크허어엉-!]
한 마리의 거대한 백호가 전장을 휘저었다.
그런 그의 등엔 기절한 아리에스를 보살피는 플로라가 함께 있었다.
쒸아아악-!
아이올로스가 앞발을 휘두를 때마다 거친 폭풍이 불고, 삭풍이 뒤엉키며 마족들을 찢어발겼다.
뒤이은 성좌들의 외침이 이곳이 전장임을 일깨웠다
"뚫고 나가!"
"다들 차원의 문으로 달려!"
"조금밖에 안 남았어!"
성좌들은 그야말로 안간힘을 쓰며 마족들과 싸웠다.
아까 전 루페온이 죽음에 이르며, 성좌들은 그 힘의 1/3가량이 줄어들었는데, 그럼에도 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아이올로스가 루페온의 뜻을 성좌들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반드시 살아서 인간계로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으음…."
바로 그때.
기절했던 아리에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장 화들짝 놀란 얼굴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루, 루페온 님…! 루페…."
아리에스가 치열한 전장을 돌아보며 뒷말을 삼켰다.
그리고는 곧장 고개를 돌려 루페온이 있던 곳을 한 번 보고는 바로 옆에 있던 플로라를 보았다.
아리에스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잘게 몸을 떨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몸에 있던 별의 힘이 약해진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루페온…님…."
아리에스가 눈물을 흘렸고, 플로라는 루페온이 남긴 마지막 말을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그 순간. 한 성좌의 비명이 그런 아리에스를 일깨웠다.
아리에스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달콤한 호박 수집가라는 별명을 지닌 말벌 성좌 '무스카'.
무스카는 아리에스와 꽤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무스카의 얇은 날개 하나가 마족의 검에 찢겨져 나가고 있었다.
아리에스는 곧장 검을 뽑아 들고 무스카를 공격한 마족에게로 뛰어올라 머리를 내려찍었다.
푸확-!
마족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무스카. 괜찮아?"
"고맙습니다!"
무스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른 마족을 공격하기 위해 벌처럼 움직여 사라졌다.
그런 그녀의 뒤로 말발굽 소리와 중후한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아리에스. 깨어났는가!"
그는 바로 인마궁의 주인.
켄타우로스들의 왕이라 불리는 키론이었다.
평소엔 성격이 온화하고, 인간들에게도 호의적이며, 의술, 궁술, 예술, 마법에도 조예가 깊은 다방면에 재능을 지닌 궁좌.
그는 한때 천재라 불리기도 했었지만, 현재 키론은 주무기인 활에 마력 화살을 쏘아내며 마족들의 머리를 꿰뚫는 중이었다.
"늦어서 미안해!"
"아니오! 어서 양털 기사단을!"
"알았어!"
아리에스가 곧장 그녀의 머리털을 뽑아 황금 양털 기사단을 소환했다.
양털 기사단은 무척이나 강했다.
그녀의 1/4의 능력을 가진 병사들이 순식간에 100명이나 소환되었다.
이어진 것은 인마궁 키론의 힘.
'동쪽의 현자'라는 별명을 가진 그답게, 현자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번 본 것은 절반의 능력으로 똑같이 따라 할 수 있는 '위대한 스승'이라는 필살기였다.
"가라-!"
아리에스와 키론이 동시에 외쳤고, 양털 기사단이 가세하자 그제야 숨통이 트인 성좌들의 외침이 이어졌다.
아이올로스는 그런 아리에스를 힐끔 보고는 전방에서 자신과 함께 싸우던 늑대 성좌 '레무스'를 보았다.
[레무스.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그보다 어서 성좌들을 인간계로 보내야합니다."
아이올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남지 않은 곳에 인간계로 향하는 차원의 문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많은 마족들이 있다는 것.
다른 성좌들이 인간계로 가고 나면, 마족들이 지나갈 수 없도록 문을 닫을 사람이 필요했다.
문제는 그 역할을 누가 맡느냐는 것이었다.
"제가 문을 닫겠습니다."
그때. 레무스가 말을 했다.
아이올로스가 레무스를 직시했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한 자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아이올로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무래도 자네 혼자로는 무리야. 나도 가세하겠네.]
"어차피 전 성혼(星魂)의 상태로 성유계에 왔습니다. 인간계로 돌아갈 순 없어요."
아이올로스가 빙그레 웃었다.
[나와 플로라도 마찬가지라네.]
"……."
레무스는 더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차원의 문은 자신과 아이올로스가 함께 닫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든든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함께해서 영광입니다."
[그런 말은 살아서 하자고.]
크허어엉-!
아이올로스가 다시 한번 포효하며 길을 뚫었다.
대부분의 바람의 힘을 딸에게 준 상황이었기에 아이올로스가 지금 가진 바람으로는 솔직히 버티기 힘든 게 사실이었지만, 레무스가 있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었다.
'딸은 얼마나 컸으려나. 아직 얼굴도 못 봤는데. 그건 좀 아쉽네.'
아이올로스는 아직 얼굴도 모르는 자신의 딸이 무척 보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리고 새삼스럽지만, 걱정도 되었다.
그 까탈스러운 개람(鎧嵐)들이 딸을 잘 보살펴 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하아. 오늘 밤은 무척이나 길겠구만.'
지금의 자신에겐 지금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 * *
바람의 탑, 개람의 동굴.
"꺄악!"
연약한 소녀의 비명이 동굴 안을 울렸다.
풍희는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풍희를 상대했던 개람의 병사가 충직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산들바람처럼 흩어지며 바람의 탑 위로 나타났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로 두둥실 떠 있던 개람의 장군들이 머리를 휘휘 저었다.
"음, 약해. 너무 약해."
"그분께서는 어찌 아들이 아닌 딸을…."
"어허, 아직 깨달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세."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개람의 4대 장군들이 모두 미간을 찌푸리며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꼬인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것 같은 그런 얼굴이랄까?
어쨌든 무척이나 복잡한 심경이라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아직 풍희에겐 너무 이른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
"음…."
그리고 나는 뒤편에서 팔짱을 낀 채, 그런 풍희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풍희는 전보다 분명 강해졌지만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과 같았다.
바람의 숙련도에 있어서 경험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그녀에겐 실전의 경험 또한 무척이나 적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강하게 키울 걸 그랬나…."
괜스레 후회가 밀려왔다.
풍희를 너무 싸고돌아서 저렇게 된 건 아닌가 싶어서.
"흐갹!"
풍희가 방금 또 한 번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녀는 삭풍의 권능을 이제 막 각성한 상태였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법이 무척 미숙해서 한낱 개람의 병사에게도 지고 있는 중이었다.
머리 위에서 비웃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풍희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웃지 마-!"
풍희가 씩씩거리며 다시 일어섰고, 그녀는 양손에 삭풍을 거머쥐며 날카로운 발톱처럼 사용했다.
또 다른 개람의 병사 하나가 땅으로 내려와 머리를 숙였다.
"…이래선 끝이 없겠는데."
개람들에게 바람을 증명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것은 바로 인간형의 모습으로 개람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었다.
무척이나 간단해 보여도 사실 이건 굉장히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것이었다.
풍희는 지금의 나보다도 바람을 잘 다루지 못했다.
"잠깐만."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
나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박수를 치고는 머리 위에 있는 개람의 장군들에게 소리쳤다.
"잠깐 쉬었다 하지 않겠나! 풍희가 좀 많이 지친 것 같은데!"
개람의 장군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지. 의미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쉬엄쉬엄 하자구~"
"으흠, 걱정이구만 걱정이야."
"어허, 아직 깨달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좀 쉬고 나면 깨달음을 얻을 거라니까."
그렇게 개람의 4대 장군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을 무렵.
나는 풍희에게 다가갔다.
"잠시 바깥에 좀 다녀오마."
"어딜 가시려구요?"
"네 과외 선생님 데리러."
"…과외? 그게 뭐예요?"
"그런 게 있다. 아무튼 조금만 기다리거라. 금방 오마."
그렇게 나는 풍희와 바람의 탑을 뒤로하고 동굴을 빠져나왔다.
바깥은 이제 해가 뉘엿거리며 노을이 하늘을 붉힐 무렵이었다.
나는 곧장 지니를 불러 위에 올라탔다.
"어디로 갈구름~?"
"윈디아로 가자."
"알았구름!"
슈우웅-!
지니가 노을을 등지며 빠른 속도로 날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