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73화
제273화
심통이 난 미도가 양 볼을 크게 부풀렸다.
하얀 피부에 홍조를 띤 것이 마치 찹쌀떡 같은 모양새였다.
입술을 오물거리는 미도는 영락없이 삐져버린 네 살배기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그리 서운하냐?"
"당연하죠. 저 녀석 복수는 제가 하고 싶었다구요."
미도가 저 멀리 있는 카를로스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단단히 삐진 듯한 미도의 말투에 하마터면 백무열은 웃음보가 터질 뻔했다.
왜냐하면 최춘택과 자신에게 같이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제안했었던 것이 미도였기 때문이다.
"어쩌겠냐. 네가 제안해놓고 졌는데. 껄껄껄."
"끙."
"그러면 춘택이한테 지라고 할까?"
"에이, 아니에요. 됐어요."
그제야 미도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백무열은 양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흐뭇하게 웃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놀리는 재미가 있는 아이였다.
"걱정마라. 아무렴 춘택이가 네 복수를 허투루 하겠냐. 아마 저놈의 모가…. 큼. 사지를 부러트리려 놓겠지."
차마 '모가지'를 돌려놓을 것이라는 말은 내뱉지 못하는 백무열이었다.
미도가 백무열을 힐끔 보고는 정면을 보았다.
"에휴. 할아버지가 알아서 잘 해주시겠죠?"
"그렇다마다."
"스승님의 말씀이니까 참아볼게요."
미도가 햇살을 닮은 눈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둘이 있을 때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그녀가 이제는 자신의 손녀처럼 여겨지곤 했다.
어쩌면 백성찬과 엇비슷한 나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백무열은 내심 그런 미도의 싹싹함이 좋았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이참에 성찬이와 짝지어서 한 가족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크흠. 아니다."
미도의 부름에 상념이 깨진 백무열이 고개를 털었다.
이건 자신만 좋다고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하늘에 달린 일.
우선 성찬이와 미도가 좋은 관계가 되야 하고, 무엇보다 그 꼬장꼬장한 춘택이 놈이 허락을 할지….
"…망할."
"네? 뭐라구요?"
"크흠. 아니다."
"앗, 이제 경기 시작하나봐요."
삐이이이-!
마침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춘택과 카를로스의 신형이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좁혀진 두 사람의 사이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콰아아앙-!
최춘택은 어느새 두 다리에 태양의 불꽃을 피워낸 상태였고, 카를로스는 기민한 웨어울프의 움직임과 강철같은 강도의 발톱으로 한 번의 공방을 주고받은 상태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시계 방향으로 돌았다.
거리를 가늠하는 듯한 살벌한 눈빛이었다.
"흠. 저 카를로스 놈도 춘택이 놈에 대한 대비를 한 모양인데."
"옷에 화염 내성 인첸트를 했나봐요."
당장에 카를로스가 입고 있는 붉은 옷들을 보니 알 것 같았다.
한눈에 보아도 화염에 대한 내성을 올려주는 마법이 걸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춘택이에겐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쉬쉬쉬쉬쉭!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최춘택의 두 다리에서 자그마한 태풍이 불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최춘택이 카를로스의 뒤편으로 나타났다.
그렇게 날카로운 칼바람들이 카를로스를 찢어발기려는 순간.
째깍-. 째깍-.
갑자기 최춘택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 * *
'됐다!'
칼바람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아슬아슬하게 피해내 시간의 화살을 맞추는데 성공한 카를로스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우우웅-!
[시간의 화살이 대상의 인지 능력을 느리게 만듭니다.]
[대상의 공격속도가 대폭 감소합니다.]
[대상의 이동속도가 대폭 감소합니다.]
"……!"
당황한 최춘택의 낯빛을 보며 카를로스가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의 어깨에 박힌 시간의 화살은 황홀한 금빛 오오라를 불러일으키며, 최춘택이라는 존재의 시간을 통째로 느리게 만들었다.
말 그대로 시간의 굴레에 갇힌 하찮은 존재로 만든 것이었다.
"…흐흐흐흐. 흐하하. 하하하하!"
카를로스가 밑바닥부터 천천히 광소를 터트렸다.
웨어울프로 변신을 한 상태여서 그런지, 마치 달빛을 보며 미친 늑대처럼 보였다.
자신이 변신한 웨어울프는 보름달만 바라보면 광기가 돌며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무척 어려웠는데, 말 그대로 지금 카를로스는 미칠 듯이 좋았다.
"큭큭. 영감탱이. 드디어 복수의 시간이 다가왔어."
카를로스가 최춘택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시간의 화살의 지속시간은 60초.
그 안에 영감탱이를 쓰러트려야 한다.
하지만 영감이 느끼는 시간의 개념은 60초가 아니라 60분과 같으리라.
"내가 얼마나 이 시간을 기다렸는지 알아?"
챙!
카를로스의 손톱이 날카롭게 벼려지며 강철처럼 까맣게 변색되었다.
그가 가진 비스트 마스터의 스킬 중 버프 계열의 스킬인 '아이언 클로'였다.
[아이언 클로를 사용합니다.]
[공격력이 소폭 증가합니다.]
카를로스는 곧장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포효했다.
아우우우-!
[비스트 버서커를 사용합니다.]
[공격력이 2배 증가합니다.]
[공격속도가 2배 증가합니다.]
또 다른 공격 계열의 버프 스킬인 '비스트 버서커.'
짧은 시간이지만 분노를 끌어올려 공격속도를 비롯한 공격력을 2배로 끌어올리는 무시무시한 필살 스킬이었다.
이것은 카를로스가 낼 수 있는 최대의 힘이었다.
"후후. 그래도 노약자에 대한 대우로 고통은 천천히 느끼게 해주었으니 감사하게 여기라고."
촤아아악-!
카를로스의 오른손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최춘택의 앞가슴을 할퀴었다.
그가 입고 있는 정장의 앞섬이 크게 찢어졌다.
그리고 이어진 왼손.
그리고 또 오른손.
촥촥촥촥!
빠른 속도로 교차된 카를로스의 양손이 미친듯한 광기로 날뛰었다.
그 광기가 향하는 대상은 당연히 최춘택이었다.
"끄…ㅇ…ㅏ…"
후후. 이제야 고통이 느껴져?
난 당신 때문에 포크로 스테이크도 잘 썰지 못한다고.
호텔에서 돈까스가 나왔을 때 썰지 못하는 고통을 당신이 알아?
촤아악!
또 한 번 최춘택의 앞가슴이 패이며 피가 흘렀다.
옷은 이미 넝마가 되었고, 입고 있던 정장 바지는 반바지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카를로스는 변신을 풀고 커다란 곰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비스트 마스터 영웅이었던 '브라우니'가 즐겨 변신하던 크레센트 문 베어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크르륵."
이마와 배에 초승달 문양이 그려진 곰이 으르렁거렸다.
크레센트 문 베어의 몸집은 무려 웨어울프의 2배였다.
양손이 두툼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고, 이것으로 후려치면 어지간한 오우거나 힘이 센 몬스터들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 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눈앞의 하찮은 영감 또한 예외가 아닐 것이다.
"너무 고깝게 생각지 말라고. 어차피 서로 한 번 씩 주고받은 셈이잖아. 흐흐."
날카로운 이를 보이며 웃은 카를로스가 거대한 곰 발바닥으로 최춘택의 몸통을 후려쳤다.
마침 시간의 화살 제한시간인 60초가 모두 지나간 순간에 맞춘 일격이었다.
퍼어억-!
최춘택은 정신을 잃은 채 맥없이 날아가더니 거대한 바위에 부딪혔다.
콰앙!
이어서 무너져 내린 바위 더미.
그의 머리 위에 있던 생명력 게이지가 모두 떨어진 것을 확인한 카를로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곧장 하늘을 향해 거친 포효를 뿜어냈다.
크허어어엉-!
기쁨에 도취한 승자의 포효였다.
'보아라!'
웅혼한 기상이 느껴지는 크레센트 문 베어의 포효는 한 낮임에도 초승달의 고고함을 잃지 않으려는 것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내가 바로 너희들이 무시했던 카를로스다!'
카를로스는 바깥의 관객들에게 자신의 위대함과 강함을 뽐내고 싶었다.
너희들이 그토록 찬양한 다크울프.
최춘택은 이토록 나약해져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었노라고.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뭐야. 왜 경기 종료가 안 되는 거지?"
그제야 카를로스는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깨달았다.
이쯤 되면 경기 종료를 알리는 메시지라던가 버저비터가 울려야 하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카를로스는 그제야 오싹한 소름을 느꼈다.
"설마…?"
카를로스의 시선이 무너진 바위 더미로 향했다.
그리고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저 멀리 최춘택의 생명력이 다시금 차오르고 있었다.
* * *
처음엔 게임을 하다가 실제로 죽어버린 줄 알았다.
모든 초감각이 느려진 것만 같은 착각.
마치 혼자만 다른 시간의 개념을 사는 듯한 이 낯선 감각은 무엇으로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 낯설고 이질적인 것은 나를 한없이 나약하고, 보잘 것 없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흐…ㅎ…ㅏ…ㅎ…ㅏ…ㅎ…ㅏ"
눈앞의 웨어울프가 웃는다.
광기 어린 그 웃음마저 느리게 보여서 나는 정말 죽어서 저승에 가는 줄 알았다.
아니, 어쩌면 버그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내 몸을 본 것이다.
바로 그때.
어깨에 꽂힌 무언가가 보였다.
그것은 아주 자그마한 화살이었다.
…아, 내가 당한 것이구나.
그제야 나는 돌아가는 사정을 알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카를로스는 내 앞에 있었다.
흉악한 웨어울프의 시선이 나를 내려다보며 응시했다.
무척이나 느리고 느린 움직임이었다.
촤아아아악-.
세상이 멀어지는 듯한 소리.
눈을 내리니 내 가슴팍이 찢어져 천천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나는 카를로스에게 낭자 되었다.
고통은 조금 늦게 밀려왔다.
끄아아아-!
이어지는 고통은 정말 끔찍했다.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고, 빌어먹게도 느려진 시간의 감각은 고통마저도 천천히 느끼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으으으!
고통스러운 시간은 1시간처럼 느껴졌고, 카를로스의 모습이 천천히 거대한 곰의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을 땐 직감했다.
나는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아, 원통하구나.
어쩌다 보니 미도에게 가위바위보를 이겨버리는 바람에 이렇게 출전하게 됐지만, 나는 미도의 복수를 철저하게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미 거대한 곰 발바닥이 자신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미도야.
퍼억!
그 생각이 마지막이었다.
눈을 감기 전 보았던 것은 온통 까만 어둠 속이었다.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것도 본 것 같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세상이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시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째깍. 째깍. 째깍.
그제야 나는 천천히 눈을 감으려 했다.
[취익. 어이 정신 차려.]
무두르가 말을 걸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카를로스가 믿을 수 없는 눈을 하며 무너진 바위 더미를 향해 걸어갔다.
거대한 크레센트 문 베어의 걸음으로 열 발자국이면 되는 거리였다.
'말도 안 돼…. 거기서 다시 살아난다고? 설마 부활 계열의 스킬이 있었던 건가?'
경기 전 커뮤니티로 최춘택에 대한 자료조사는 물론 감독이 했던 브리핑을 참고하며 그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알았다고 생각했다.
착용한 아이템.
가지고 있는 스킬.
그리고 스타피스.
그렇게 철저히 복수를 준비했고, 카를로스는 누구보다 치밀하게 이번 경기를 준비했다.
그렇기에 더욱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최춘택은 분명 부활 계열의 스킬이 없다.
한데 지금 이 상황은 대체….
"썅!"
카를로스의 생각이 끝났을 땐 이미 최춘택의 생명력은 전부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등줄기로 오한이 끼치는 듯한 감각이 일어났다.
온몸의 솜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것 같은 감각.
자신이 가진 동물적인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도망치라고.
어서 도망치라고!
쿵! 쿵! 쿵!
심장 뛰는 소리가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
갑작스레 터져버린 바위 더미가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켰다.
카를로스는 팔을 엑스자로 교차해 날아오는 작은 바위들을 막아냈다.
큰 데미지는 없었지만, 그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흩날리는 먼지가 시야를 가렸고,
바로 그 순간.
덥썩!
"……!"
자신의 왼쪽 다리를 붙잡은 거대한 붉은 손이 있었다.
온몸의 혈관이 꿈틀거리며 근육이 울긋불긋한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모골이 송연한 느낌을 받으며 카를로스의 시선이 흙먼지 너머에 있는 존재에게로 향했다.
그 존재 또한 광기에 물들어 눈빛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보다 한 수 위의 광기를 마주하는 듯한 낯선 감각.
"이런 미ㅊ…."
콰아아아앙-!!!!
그 순간 카를로스의 세상이 뒤집히며 울컥 피를 토해냈다.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지며 비명을 질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