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64화
제264화
병실에 들어온 최강현은 한참이나 아픈 곳은 없는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미도에게 물었다.
그러다가 문득 며느리에게 전화가 와서는 "미도 몸보신 시키려고, 장본 것이 많은데 좀 들어줘. 여보."라는 말을 듣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다시 병실에는 나와 미도만이 남아 있었다.
의사도 딱히 이상은 없다고 했고, 미도 또한 괜찮다고 해서, 나는 이참에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미도야."
"네."
"정말 기억이 없는 거냐?"
미도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입술을 오물거렸다.
어쩌면 내가 아픈 부위를 찌른 것일지도 몰랐다.
순간 아차 싶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려는 그때.
"…죄송해요."
미도가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
제길.
"아니다. 내가 괜한 이야기를 꺼냈구나. 너한테 사과를 받으려고 그랬던 건 아닌데…."
"아니에요. 죄송해요. 제 잘못이 맞아요. 할아버지 말씀대로 해야 했는데, 제가 욕심을 부렸어요. 그래서 상황이 이렇게 된 거예요."
그녀의 어깨 위로 죄책감이란 글자가 무겁게 내려앉은 것처럼 축 늘어졌다.
힘 빠진 손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잘못이다.
"할애비가 얘기를 잘못 꺼냈다. 내가 알고 싶었던 건, 어쩌다 네가 그렇게 되었는지 경위가 궁금해서 그랬다. 내가 아는 다빈치에겐 그런 능력이 없었거든. 그저 난 정보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래야 널 도울 수 있으니 말이야."
"아, 사실…."
미도가 다빈치와 있었던 일을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 다빈치를 만났을 때 그림자 잉크로 병사들을 빠르게 그렸고, 필살기를 알려달라고 했는데, 거절을 당했던 것까지.
"다빈치가 잉크 드래곤을 그리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네. 싫다고 그랬어요."
"그럼 그때 나타난 잉크 드래곤은 뭐냐."
"사실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제가 기억이 끊어진 건 다빈치가 '피의 갈망'이란 것을 제안했을 때까지였어요."
"피의 갈망…?"
역시나 내 머릿속엔 없는 것이다.
"다빈치가 그걸 받아들인다면 잉크 드래곤을 그리는데, 힘을 보태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만…."
미도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다시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잠깐 그녀의 눈을 마주쳤다가 투박한 손으로 머릿결을 흩트렸다.
"우으으."
"고생했다."
바로 그때.
드르륵.
별안간 병실 문이 열리더니 덩치 큰 노인이 성큼 들어섰다.
뭐야. 저 녀석? 아프다더니.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왔어?"
"흥. 천하의 이 백무열이 갈 수 없는 곳이 어디 있나."
백무열이 성큼 걸어오더니, 의자를 끌고 와서는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두 명의 백발노인이 팔짱을 낀 채 이러고 있으니, 약간 늙은 마피아 보스들이 병문안 온 것 같다.
"몸은?"
"괜찮아. 그냥 가벼운 몸살이야."
"무리하지 마라. 백가야. 우리도 이제 칠십이 다 되어간다."
"거 참. 괜찮… 콜록! 콜록!"
"…하여간 센 척하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백무열을 바라보자, 그 모습이 웃겼는지 미도가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끙."
미도의 앞이라 부끄러운 백무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 또 한 번 병실 문이 열리며 최강현과 김미경이 들어왔다.
그들의 양손에 각종 과일과 먹을 것들.
그리고 몸보신을 위해 장을 본 재료들이 한 가득이었다.
"어서 와라. 근데 몸보신은 이놈이 해야겠다."
* * *
한국과 미국의 치열한 골렘 공성전이 끝난 직후.
아스라 커뮤니티는 그야말로 뜨겁게 타올랐다.
메인 기사는 이번에 새로 스타 프루츠 능력자로 각성한 '최미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화가 성애자(星愛者)로 본인이 그린 그림을 병사로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가 만들어낸 잉크 드래곤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가 주목을 받은 것은 그런 부분이 아니었다.
[한국의 핏빛 장미를 화나게 하면 이렇게 된다.avi]
그것은 원인 불명의 붉은 눈빛을 한 채, 최미도가 방심한 한국팀을 도륙하고, 영구동토로 인한 슬로우 효과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국팀을 썰어버리며 피의 꽃을 피우는 장면을 짜깁기 한 동영상이었다.
하드 메탈락의 팝송을 곁들이니 마치 한편의 매드무비처럼 멋들어지게 만들어져서 그것은 현재 조회수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을 올린 것은 당연히 한국인.
현재 채팅창은 한국인들의 애국심이 폭주하고 있었다.
-캬. 제목 잘 지었네. 한국의 핏빛 장미.
-우리 여신을 화나게 하면 이렇게 된다. 이거야.
-근데 아무래도 저거 위험한 능력 같은데.
└그게 무슨 상관임. 어차피 강하면 장땡이지.
-그래도 아직은 최춘택 할아버지가 좀 더 강한 거 아님? 마지막에 겨우 말렸잖아.
└ㄴㄴ 그건 내일 직접 붙어보면 결과가 나올 거임.
└아, 맞다. 내일은 PVP지?
└ㅇㅇ 과연 누가 최강인지 알 수 있을 거임.
"…흐음. 이거야 원."
그리고 마침 한국에 마련된 숙소에 있던 데미안은 노트북으로 그것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들려있는 와인잔을 살짝 들었다.
호로록-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마시는 것이 마치 소믈리에가 된 것만 같다.
"데미안.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좋다."
데미안이 의자를 돌려 뒤편에서 와인을 마시는 마이클을 보았다.
지금 두 사람은 함께 와인을 마시는 중이었다.
그것도 지난번에 약속했던 1945년 산 '무통 카데'.
데미안이 미국에 있는 집사에게 부탁해서 어렵게 공수해온 최고급 와인이었다.
"…와인이 참 달고 맛있군."
"하핫. 그렇지? 이래봬도 가장 오래된 와인 중 하나라고."
데미안은 목 뒤로 수십억을 호가한다는 말은 꾹 삼켰다.
어차피 미국의 경제를 꽉 틀어쥐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 덕에 데미안은 돈이 썩어 넘치는 수준이었다.
사실 이 와인은 아버지가 자신이 결혼하는 날 축배를 들겠다고 다짐하며 봉인하듯 모셔놓은 와인이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
데미안은 마이클과 무통카데를 마시는 것이 아깝지 않았다.
아버지에겐 미안하지만, 이것을 다 마시고 오늘의 패배를 털어버릴 작정이었다.
그리고 집사에게 말해 싼 와인으로 아무거나 채워놓으라고 할 작정이었다.
뭐, 정 아니면 무통카데를 다시 사도 되겠고.
"어쩔 생각이야? 내일 말이야."
"…글쎄. 최선을 다해야겠지."
마이클이 손에 쥔 와인 잔을 살짝 흔들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내일 있을 PVP는 각 나라의 개인 기량에 달린 것이었다.
어차피 대결은 1대1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데미안은 팀원들에게 자유로운 개인 훈련을 할 것을 지시했다.
자신과 데미안이 이러고 있는 것은 내일 있을 경기의 긴장을 잠깐 풀기 위해서였다.
"데미안."
"말해."
"난 내일 있을 경기에서 기분 좋게 이기고 싶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란 말이야?"
데미안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찢어졌다.
"아니. 어차피 내일 PVP에서는 전략 따윈 필요 없을 거야. 대신 팀원들 간의 분위기에서 질투와 시기는 없었으면 좋겠다."
"……."
데미안은 말없이 마이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제임스를 말하는 거야?"
"그래."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어. 백인들 사이에 동양인이 끼어있는 거잖아."
"그 또한 미국의 인재다. 데미안."
"흠.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알았어. 내가 신경 쓰도록 할게."
그제야 마이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마이클은 와인잔 안에 든 와인을 쭉 들이키며 원샷을 하더니 테이블 위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근처에 마련된 캡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데미안은 여전히 자신의 먼 미래의 꿈을 보고 있었다.
왕이 된 마이클을 보좌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말이다.
"마이클."
"……?"
"넌 언제나 그렇게 있어라. 변하지 말고 지금처럼."
피식.
마이클이 등 뒤로 가볍게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데미안도 그런 마이클의 뒷모습에 피식 웃었다.
* * *
나와 백무열은 각종 몸보신 음식을 먹고 헤어졌다.
유니온이 설립한 병원이고, 팀장인 유민석이 마련해준 VIP 병실이다 보니, 병실 안에 따로 정갈한 주방이 마련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선 미도에게는 그 '피의 갈망'이라는 것을 쓰지 못하도록 단단히 못을 박았다.
미도는 당연히 알았다고 답을 했다.
백무열 또한 경기를 TV로 지켜봤었는데, 미도에게 한참이나 수련의 부족함을 설명하며 퇴원을 하면 바로 목검 1만 번 휘두르기를 가르칠 거라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물론, 미도는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집에 조금 일찍 돌아와 게임에 접속했다.
내일 있을 PVP 종목을 위해 간단한 정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 저번에 부탁하셨던 텔레포트 마법서예요."
집무실에서 일을 하던 헬레나가 내게 텔레포트 마법서를 내밀었다.
저번에 마탑의 보물창고에서 눈 여겨 보았던 마법서 중 하나였는데, 다행히 헬레나는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그녀의 책상 위에는 엄청난 양의 종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고생이 많구나."
"아니에요. 근데 혹시 가면 벗으셨어요?"
"음? 어떻게 알았냐."
"하아. 어쩐지."
헬레나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요즘 다크울프의 정체가 밝혀졌다면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리고 얼마 전부터 이곳으로 이주하겠다는 사람들도 늘어났구요. 기자들은 또 얼마나 극성인지, 취재하겠다는 숫자가 너무 많아서 출입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에요."
"그 정도냐?"
"네. 어마어마한 파급력이에요. 대체 요즘 무슨 일을 벌리시는 거예요? 이 속도라면 순식간에 소도시에서 또 한 번 승격을 하게 될 거예요."
"허허."
나는 그저 너털웃음을 흘리며 대답을 피했다.
우선 지금은 춘자를 불러야 할 시간이었다.
곧장 바깥으로 나왔다.
"춘자야~"
그러자 어느새 팔뚝만큼 자란 춘자가 하늘에서 "구우욱-"하며 울더니 순식간에 오른팔에 내려앉았다.
나는 가볍게 부리를 쓰다듬으며 녀석을 영주실 안으로 데려왔다.
"잘 있었니?"
"구룩. 구루룩."
"자, 선물이다."
"구룩?"
춘자는 내가 내민 텔레포트 마법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커다란 날개로 책을 펼치며 읽기 시작했다.
설마 저번처럼 버리는 건 아니겠지?
[현재 춘자의 지능이 해당 마법서를 습득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춘자가 '텔레포트'를 습득하는데 5분 걸립니다.]
"휴우."
다행히 저번처럼 마법서를 몰라보고 버리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저것만 배우면 이제 춘자도 대회에서 써먹을 수 있겠지.
어느새 춘자의 레벨도 180이다.
그동안 꾸준히 사냥을 내보내 강하게 키운 보람이 있구만.
"구루룩-!"
녀석. 그렇게 좋은가. 허허.
춘자는 날개를 퍼덕거리며 좋아하고 있었다.
충분히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을지는 내일 두고 보면 알 것이다.
"잠깐 나갔다 오마."
"네~ 기자들 조심하세요~"
헬레나의 인사를 받으며 나는 영주성을 나섰다.
그런데 바깥을 나온 순간.
찰칵.
"……?"
카메라 소리에 돌아보니 그곳엔 웬 코쟁이 놈이 이를 보이며 씩 웃고 있었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기자들의 출입을 감당 못 할 정도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그렇게 광장으로 향하는 순간에도 사방에서 찰칵거리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뒤쫓는 기자들이 한둘이 아닌 것 같았다.
숫자도 점점 늘어나는 것이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무래도 단단히 혼을 내야겠군.
"이보게들. 취재를 하고 싶은가? 다들 귀찮게 하지 말고 나와 보게나."
그러자 주변에 있던 기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가 자그마치 50에 이르렀다.
시끌벅적한 그들의 아우성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망할. 이러니 못 잡지.
아무래도 헬레나에게 경비병의 숫자를 대폭 확대하라고 지시를 해야겠다.
"다들 이리 모여보게나."
그렇게 50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여전히 플래시를 터트리며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기자회견을 방불케하는 열기였다.
그러나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후우웅!
순식간에 바람의 힘을 끌어올린 나는 그대로 바람처럼 움직여 거미줄을 이용해 50명을 순식간에 묶어버렸다.
그들의 눈, 코, 입. 그리고 팔과 다리까지 묶으니 파닥거리는 잉어 같았다.
나는 가볍게 손을 털었다.
"썩을 놈들 같으니라고. 내가 그만큼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거늘."
[춘자가 '텔레포트'를 모두 익혔습니다.]
마침 잘됐다.
"춘자야."
그러자 왼쪽에 자리한 공간이 작게 일그러지며 춘자가 나타났다.
"구루룩-!"
"춘자야. 이놈들 전부 마을 밖으로 내쫓아버려라. 가능하면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곳으로."
"구룩. 구룩."
알겠다고 대답한 춘자가 텔레포트를 발동하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묶여있는 자리에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기자들은 제각기 풀려나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소리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제법 귀엽기까지 했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작은 경고를 남겼다.
"귀찮게 하지 마라. 다음번엔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
슈아아악-!
그리고 춘자의 텔레포트가 펼쳐지며 한순간의 빛과 함께 그곳에 있던 기자들이 모두 사라졌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