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44화
제244화
나지막한 정적이 한국팀 벤치를 휘감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신태일이었다.
"그게 무슨…? 이 선수가 누구입니까?"
"그건 비밀입니다."
"하지만 이름을 알아야 선수로 등록할 수 있는 데…."
그곳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쏟아졌다.
그들은 전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웬 이상한 가면을 쓴 남자가 유니온의 직원과 함께 오더니, 다짜고짜 선수 교체로 들어가겠다고 하고 있었으니까.
유민석이 나를 돌아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선택에 맡기겠다는 뜻이다.
"최춘택이네."
"…최춘택. 그렇군요. 처음 듣는데, 혹시 한국 랭커이십니까?"
신태일의 물음에 나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내 요리사 랭킹이 3위까지 올라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도 랭커라면 랭커겠지.
"혹시 몇 위쯤…."
"3위일세."
그러자 "오오-!" 하는 자그마한 탄성이 벤치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후보 선수로 보이는 이들은 제각기 쑥덕거렸다.
"헐. 대박. 3위래."
"근데 왜 가면을 썼지?"
"신비주의 컨셉인가 보지 뭐."
"무슨 직업일까?"
그것은 신태용 또한 궁금했는지 내게 물었다.
"혹시 직업은…."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요리사일세."
"……."
"……."
"……."
한국팀 벤치 내에서 흐르던 감탄은 다시 침묵이 되었다.
신태용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잠깐만요. 제가 잘 못 들은 것 같은데 뭐라구요? 요리사요?"
"그렇네."
"……."
또 한 번 벤치가 정적에 휩싸이는 순간.
해설자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경기장에 메아리쳤다.
벌써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경기가 시작된 모양이다.
- 아아! 한국팀의 기수는 최미도 선수군요!
- 이번에는 선전을 좀 했으면 좋겠는데요.
- 한국팀이 시작부터 빠르게 달립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요?
- 아무래도 섬 가운데 있는 황금 깃발을 노리는 듯합니다.
- 무리수가 아닐지 모르겠군요. 설령 황금 깃발을 차지하더라도 한국팀에겐 그것을 지킬 힘이 부족할 겁니다.
- 최미도 선수가 허공에 그림을 그리며 선수들에게 이속 버프를 겁니다. 한국팀이 더욱 빨리 피라미드를 향해 달립니다!
아무래도 이번 기수가 된 것은 내 손녀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더욱 망설일 이유가 없다.
어찌 되었든 저 망할 놈의 적들은 미도를 집중공격 할 테니 말이다.
나는 신태용에게 말했다.
"선수 교체해주게."
"네? 요, 요리사는 안 됩니다! 그리고 지금 경기 중이라 교체를 할 수가 없다구요. 그리고 누군지도 모르는 검증도 안 된 사람을 어떻게 경기에 내보냅니까? 다음 경기에 나가시죠. 그게 더…."
유민석이 신태일의 말을 끊었다.
"조커 선수로 들어가면 됩니다."
"조커요? 아니 그것도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아무리 유니온의 직원이셔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제가 그래도 감독의 자존심이 있지. 요리사라니요. 들어가서 할 수 있는 게 없다구요! 지금 장난합니까!"
아무래도 눈앞의 감독은 꽤 옹고집을 가진 사람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 한국팀이 운 좋게 들키지 않고 피라미드에 도착했습니다! 한국 팀이 피라미드를 오르기 시작합니다!
이미 한국팀은 피라미드를 오르고 있었다.
아마 미도는 곧 황금 깃발을 얻게 될 것이고, 그 사실이 다른 나라에게 전체 메시지로 알려지면서 모든 나라들이 한국팀을 집중공격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선명했다.
그것은 곧 미도가 다치게 될 것이라는 얘기.
그렇다면 나는 이제부터 물불을 가리지 않아야겠다.
마침 든든한 뒷배인 유니온 직원도 있으니 잘 됐군.
나는 유민석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든 자네가 잘 막아주리라 믿네."
"예? 그게 무슨…?"
머리에 물음표를 띄운 유민석을 뒤로하고 나는 신태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내려다보면서 얘기했다.
"선수 교체를 부탁하네."
"아니, 이 사람이…. 당신 누구야? 나 대표팀 감독이야! 왜 반말이야! 어? 당신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신태일이 흥분된 목소리로 주먹으로 내 가슴을 밀치며 시비조로 소리쳤다.
그가 짓누르듯 친 명치 부분이 얼얼하게 아려왔다.
"분명 자네가 먼저 쳤다네."
"뭐?! 무슨 개소리…."
그 순간, 머리에 있는 뚜껑이 완전히 열려버렸다.
아무리 내가 가면으로 정체를 숨기고 있다고 해도 그렇지.
다짜고짜 주먹으로 명치를 때리고 욕을 지껄이다니.
이런 썩을 놈을 봤나.
"…이노무 짜슥이."
짜악!
나는 찰지게 신태일의 뺨을 후려쳤다.
너무 세게 후려쳤는지 신태일이 한 바퀴 나뒹굴고는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그 표정이 꽤 볼만하다.
"큭. 너 뭐하는 새끼…!"
"예끼 이놈!"
짜악!
"억!"
신태일 감독이 따귀 두 번 만에 바닥에 '大'자로 뻗으며 기절해버렸다.
좀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도 시간이 별로 없거든.
나는 벤치에 앉은 후보선수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물었다.
"또 불만 있는 사람."
벤치의 모두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 * *
임사라가 빠진 대표팀의 사기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져 있었다.
미도는 언니인 그녀를 대신해 팀 내의 유일한 홍일점으로서 막중한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캐리한다.'
그런 생각으로 그녀는 스스로 기수가 되길 자청했다.
어느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그저 저 김동현이 또 꼰대 기질로 사고를 쳐서 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미도는 주장인 임창용에게 시작하자마자 빠르게 피라미드를 올라 황금 깃발을 차지하는 수비 위주의 작전을 제안했고, 임창용은 그것이 우리 같은 약자가 싸우는 방식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국 팀은 빠르게 달려 지름길로 피라미드에 가장 먼저 닿을 수 있었다.
이 모두가 미도가 가진 지도 스킬과 지형지물을 파악해 지름길을 찾을 수 있는 스킬 덕분이었다.
"어이구야. 살 떨리네."
"벌써 맞붙은 팀이 있나본데."
쿠우웅!
은정혁과 김현우가 주변에서 들려오는 파공음을 들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몇몇 국가들은 벌써 마주쳐서 치열한 싸움을 펼치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규모가 거대한 싸움인지 어마어마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런 그들에 비해 한국팀은 너무나 초라했다.
"멍 때릴 시간 없어요. 빨리 올라요!"
미도가 꼭대기를 가리키자, 주장 임창용을 필두로 한국팀이 삼각형 대형으로 빠른 속도로 피라미드를 올랐다.
다행히 김동현과 한상혁 또한 염치라는 게 있는지 첫 경기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명령에만 따랐다.
그리고 이내, 꼭대기에 다다랐다.
"이게 황금 깃발이구나."
미도를 둘러싼 한국팀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장 오빠. 부탁해요."
미도가 임창용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임창용이 허공에 떠있는 미도가 만들어낸 지도를 거머쥐더니 오더를 내리기 시작했다.
"다들 적당한 곳에 자리 잡자. 철아, 너는 저기 뒤에 풀숲에서 저격을 하고, 박장소는 나랑 같이 뒤에서 팀원들에게 원거리 지원을 한다. 현우랑 해일이. 그리고 정혁이는…."
그렇게 미도가 만들어 낸 지도를 보며 약 1분 만에 자리를 잡게 된 한국팀.
임창용은 완벽하게 갖춰진 수비대형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다시 미도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준비가 되었으니 안심하고 황금 깃발을 잡으라는 뜻.
미도는 망설이지 않고 황금 깃발을 낚아챘다.
[World. 한국팀이 황금 깃발을 획득하였습니다!]
[황금 깃발의 특전인 5점이 부여됩니다.]
슈우욱-!
황금 깃발이 미도의 손에서 떠오르더니, 이내 흩어지면서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적을 기다리는 것뿐.
하지만 어느 누구도 쉽게 올라오지 못할 것이라는 게 미도의 생각이었다.
이곳으로 올라오는 계단은 하나뿐이고, 황금 깃발을 노리는 다른 국가들도 있을 테니, 미도는 계단 아래에서 다른 국가들끼리 만나 서로 치고 박고 싸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주효했다.
[아랍 팀이 탈락하였습니다.]
[아르헨티나 팀이 탈락하였습니다.]
[네덜란드 팀이 탈락하였습니다.]
벌써부터 탈락한 팀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됐어. 그래도 이번 경기는 꼴찌는 면했어.'
미도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적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 생각지도 못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후후. 멍청한 한국인들."
그런 피라미드의 하늘에 거대한 독수리로 변신을 한 브라질의 비스트 마스터.
카를로스가 부리를 비틀며 웃고 있었다.
과연 카를로스는 그 악명대로 사이코패스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오늘 첫 경기에서 일명 '한 놈만 팬다.'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 대상은 당연히 최약팀이라고 알려진 한국 팀.
"다들 준비해라. 먹잇감이다."
카를로스의 명령에 부하들이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알겠습니다. 흐흐흐."
"이거 또 미안하게 됐구만."
"또 한 번 즐겨보자고."
한국 팀의 뒤편으로 소리소문없이 독수리가 내려앉았다.
바야흐로 최악의 전개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예? 저 대신 나간다구요?"
나와 유민석은 떠들썩한 무대 뒤 편에서 한국팀 조커 안승현을 만날 수 있었다.
조커 선수가 접속할 캡슐은 무대의 뒤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조커라는 것 또한 각 나라마다 전략이 상이했기에, 이것은 관객들에게도 누가 나가는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그리고 지금 나와 유민석은 그를 설득하고 있다.
유민석이 말했다.
"이분이 나가면 한국팀을 구원할 수 있네. 도와주겠나? 난 유니온의 직원인데 말이야."
유민석이 안승현에게 직원 카드를 내밀면서 확인시키듯 말했다.
하지만 안승현은 여전히 의심스러운지 나를 곁눈질로 보았다.
"하지만 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어쩔 수 없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다크울프라네."
"네…?"
"내가 다크울프라고."
"……."
잠깐의 정적 속에서 안승현은 그야말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가에 홀린 듯 자신이 들은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귀를 후비적거리며 다시 물었다.
"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뭐라구요?"
"내가 다크울프다."
그리고 당당히 선언한 내 말에 이내 안승현의 동공이 확장되면서 커지더니.
"아아아…! 아아아!!!"
허공을 삿대질하며 그저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하는 안승현의 어깨를 나는 무심하게 짚으며 두드렸다.
"양보해줘서 고맙네."
그리고 곧장 캡슐에 앉았다.
마침 한국팀의 상황이 캡슐 내에 위치한 화면에 나오고 있었다.
한국의 선수들은 브라질의 기습에 당황해 허둥지둥대고 있었고, 나는 곧장 접속을 눌렀다.
뚜껑이 닫히며 잦아드는 어둠 속에서 나는 미도의 얼굴을 떠올렸다.
손녀가 위험에 빠졌는데 할아버지로서 외면하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핏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미도야. 할애비가 간다."
* * *
경기장은 그야말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 아~!! 말씀드리는 순간 한국의 최미도 선수가 황금 깃발을 쟁취합니다!
- 이로써 한국이 5점을 얻어 현재 1위로 올라섰습니다!
- 하지만 이제부터 모든 나라들이 한국을 집중공격 할 텐데요…!
"여보, 우리 미도 괜찮겠죠?"
"괜찮을 거요. 믿읍시다. 우리 딸 잘할 거요. 강한 아이지 않소."
김미경과 최강현,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경기를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긴장이 되는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화면에 나와 싸우고 있는 여인이 바로 두 사람의 딸이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아버님이 계속 안 보이시는데,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겠죠?"
"음, 아마 여기저기 손녀 자랑하시느라 늦으시는 거겠지."
"아마 무슨 일 있으시면 전화하시겠죠. 너무 걱정 마요. 엄마."
옆에 있던 정도가 그녀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미소를 지었다.
"후훗. 하긴 그렇지…?"
- 아!! 큰일입니다! 한국팀이 브라질팀의 함정에 빠졌습니다!
- 브라질의 악명 높은 카를로스가 최미도 선수를 향해 달려갑니다!
-기수인 최미도 선수 위기입니다!
- 한국팀 역시 이대로 탈락하고 마는 걸까요!
"어머, 안 돼!"
"미도야…!"
"누나!"
모두가 숨을 죽이며 위험에 빠진 그녀를 걱정했다.
이젠 끝이구나.
오래 버텼지만 잘 싸웠다.
그리 말하며 딸을 위로할 생각에 최강현과 김미경은 안타까움 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모두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한국팀의 조커가 등장합니다.]
위우우웅-!
- ……?
- ???
- 뭐야…?
해설진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경기를 관람하던 관객들도 마찬가지.
한국팀의 조커로 등장한 것은 가면을 쓴 남자였다.
그것도 매우 익숙한 가면.
전혀 예상치 못한 깜짝 등장에 경기장에는 일순 정적과 혼란이 찾아왔다.
동시에 그가 갑자기 허공에 발차기를 하기 시작했고, 마치 한 마리의 학이 춤을 추는 듯 유러한 선을 그리며 이어지던 발길질에 모두가 넋을 놓고 빠져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화면 속에서 사라졌다.
콰아아아앙-!
- 끄아아아악!!
갑자기 울려 퍼지는 카를로스의 비명소리.
- …….
- …….
- …….
해설진들이 모두 입을 벌린 채 할 말을 잃었다. 동시에.
"ㅇ…."
"우와아아아아!!"
경기장 가득 관객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 크윽, 네놈은?
카를로스가 가슴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으며, 자신을 공격한 이를 바라보았다.
그가 대답했다.
- 나 말이냐…?
스윽.
마침내 그가 가면을 벗었다.
새하얀 백발이 드러나고 멋진 흰수염을 가진 남자.
그가 고갯짓으로 미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 이 아이 할애비다. 썩을 놈아.
"아버지?"
"아버님???"
"할아버지?!"
최강현, 김미경, 최정도가 일제히 입을 쩍 벌렸다.
콰르릉-!
세 사람의 머릿속에선 일제히 천둥이 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