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43화
제243화
주변에서 한숨 섞인 비아냥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하아, 그럼 그렇지."
"팀웍이 저게 뭐야."
"개판이구만 개판이야."
"한국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올해도 어김없이 꼴찌 하겠네."
"계란 투척 당하는 거 아니야?"
나지막이 내려앉은 적막을 깨고 들려오는 것은 모두 관객들의 질타가 어린 속삭임이었다.
그야말로 날카로운 송곳처럼 냉철하기 그지없는 지적에 나 또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설마 이 정도로 개판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마지막으로 들은 말을 되새겼다.
…계란 투척이라.
이곳으로 오면서 정도에게 들은 것 인데, 작년 월드 대항전은 그야말로 처참하게 지는 바람에 선수들을 태운 버스가 그야말로 계란 범벅이 되었다고 한다.
꽤 유명한 일이었는지, 정도는 그 날 일을 상세하게도 기억하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상세하게 설명을 들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거 난감하군.
만약 저런 호흡이라면 또 한 번 계란 투척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만큼 한국팀의 분위기는 개판이었다.
마침 캡슐에서 한국팀 전원이 나오자 관객들의 질타가 쏟아졌다.
"너네들이 무슨 국가대표야! 지금 장난하냐!"
"당장 사퇴해!"
"돈이 아깝다!"
이런 걸 두고 감탄고토(甘呑苦吐)라고 하던가.
관객들은 그야말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들이었다.
하나의 질타가 둘이 되고, 둘의 질타가 모여 셋이 되니, 모든 사람들이 부화뇌동(附和雷同)하며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태세전환이었다.
"사,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졌어요. 여보."
"으음…."
"내 이럴 줄 알았다."
며느리는 최강현의 팔을 붙잡으며 어쩔 줄 몰라 했고, 강현이는 그저 묵묵히 팔짱을 낀 채 무대를 지켜보았다.
정도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미 무대에서는 선수들끼리 시비가 붙고 있었다.
"당신 대체 뭐야! 어? 장난해?"
임사라가 미도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허공에 대고 발차기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 대상은 아까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던 김동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발이 계속해서 허우적거렸다.
"내 이럴 줄 알았어. 하기 싫으면 당장 꺼져! 그러고도 당신이 국가대표야?! 나 더 이상은 못 참아.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놔~!"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하필이면 전 세계인들이 보는 앞에서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내일 신문 1면에 나올 헤드라인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위이이잉-!
품속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을 울린 것은 그때였다.
나는 그것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했다.
- 유민석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경기 보셨습니까?
"…그래. 개판이로군."
-정말 생각이 없으십니까? 이대로라면 한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말 겁니다. 그 가운데는 손녀분도 끼어있을 테죠.
"……."
-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한국 대표로 뛰어주시겠습니까?
유민석의 말을 마지막으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살며시 주변을 둘러보며 관객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나 같이 거친 욕과 더불어 좋은 말이라곤 하나도 있지 않았다.
이 모든 질타가 손녀를 포함해 선수들에게 쏟아질 걸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저려왔다.
"…어디로 가면 되나."
- 잘 생각하셨습니다. 경기가 끝나면 10분의 휴식시간이 주어집니다. 그때, 1층 중앙 홀에서 뵙지요.
"그러지."
나는 곧장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내게 며느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버님 어디 가셔요?"
"화장실 좀 다녀오마."
그 한마디를 남겨놓고 나는 유유히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1층에 위치한 중앙홀.
우선 유민석을 만나기 전에 해야 할 것이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다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이내 달칵- 하는 소리가 들렸고, 곧장 "여보세요."하는 백무열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나는 수화기 너머로 듣고 있을 그에게 말했다.
"어디냐. 담배 한 대 피자."
* * *
유니온 스퀘어에 마련된 한국 팀 대기실.
한국 팀의 분위기는 거의 초상집 분위기나 다름없었다.
팀원들은 아까 전 성난 임사라를 말리느라 진이 빠진 듯 축 처져 있었고, 임사라는 그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미도는 그런 그녀의 등을 쓸어주며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
그런 대기실에는 오직 정적만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 임창용은 속으로 씁쓸한 침만 삼켰다.
'사기가 완전 바닥에 떨어졌군.'
이대로 가다가는 다음 경기마저도 망쳐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자, 주장인 임창용은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때, 대기실에 있는 TV에서 우렁찬 함성이 들려왔다.
- 와아아아아!
- 역시 미국이 최강이다!
- 마이클! 데미안!
"역시 미국이 1등을 한 건가."
임창용의 말과 동시에 화면에는 각국의 순위표가 떴다.
[월드 대항전 각 나라 별 순위]
1위. 미국 - 5점
2위. 스페인 – 4점
3위. 러시아 – 3점
4위. 중국 – 2점
5위. 독일 - 2점
…
16위. 한국 – 0점
그것을 보는 순간 대기실에는 또 한 번 깊은 한숨이 내려앉았다.
빵점이라니.
한국은 또 한 번 작년의 악몽을 되풀이할 모양이었다.
벌컥-
대기실의 문이 열렸고, 선수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태일 감독이었다.
"잘하는 짓이다."
"……."
"임사라."
"…네."
임사라가 힘없이 고개를 돌려 신태일 감독을 쳐다보았다.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얼이 빠진 그녀에게 신태일은 나지막히 말을 내뱉었다.
"회의 결과 물의를 일으켰으니 넌 징계를 먹기로 했다. 감봉 2개월이야."
"네?"
"그리고 넌 다음 경기에서 빠진다."
"뭐라구요? 그럼 김동현은요? 그 사람은…!"
"먼저 물의를 일으킨 것은 너다. 동현이는 가만히 있었어."
"…아니! 그럼 저 사람은 잘못이 없다는 거예요?!"
임사라는 얼척이 없는지 다시 한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런 그녀를 무시하며 신태용은 무표정한 얼굴로 안승현을 돌아보았다.
"임사라 대신 전력 보강을 위해 김해일이 들어간다. 김해일은 팀원들의 생명력을 책임지면서 기수를 보호한다."
"……."
"왜 말이 없나."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조커는 안승현으로 한다."
"…네."
김해일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감독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대표팀의 주장이자 합숙을 하며 친해진 형인 임창용이 참는 중인데 그가 나서는 것이 너무 앞서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씹…! 야. 감독. 내 말 씹냐?! 씹냐고!"
"임사라. 그만해라."
"아니. 오빠도 그래! 대체 왜 그래?! 어? 저 사람한테 뭐 책잡히기라도 한 거야? 응? 그런 거야? 와, 진짜 오빠도 그러는 거 아니야. 어떻게 동생한테…."
"임사라!"
임창용의 날카로운 외침이 대기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기세가 너무나도 서늘해서 누구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지금 그의 눈은 잠깐이라도 건드렸다가는 폭발할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마치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기 직전이랄까.
"그, 그럼 다들 나갈 준비해라. 벌써 휴식시간이 끝나가는군. 잘들 쉬고,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신태일이 말을 더듬으며 허둥지둥대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대기실이 정적에 휩싸였다.
"…화내서 미안하다. 사라야."
"…아니야."
"그리고 미안하다. 얘들아. 주장으로서 못난 모습을 보였다."
"아니에요."
"저희는 괜찮아요."
"그래도 오빠가 생각이 있었겠죠."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우선 우리는 경기에만 집중하자. 그리고 내가 이렇게 참고 있는 이유는…. 아니다. 나중에 다 끝나고 한 잔들 하자. 그때 얘기해주마."
"오, 우리 회식이에요?"
마지막으로 말한 미도의 말에 대표팀에 다시 자그마한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게 휴식시간인 5분이 모두 지나갔고, 조커 선수인 안승현과 후보 선수로 전락한 임사라만이 대기실에 남아있었다.
안승현은 그저 임사라에게 자그마한 호감을 갖고 있었기에, 그저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어서 함께 있는 것이었다.
"…힘내요. 누나."
"응? 어어, 그래. 고마워. 아직 안 갔었니?"
"이, 이제 갈려구요. 갈게요!"
안승현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경기가 진행될 무대를 향해 뛰어갔다.
임사라는 그런 안승현의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뭐야. 귀엽긴. 아, 근데 다 짜증나네~"
임사라가 대기실에 마련된 소파에 벌러덩 누워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오빠인 임창용의 제안으로 함께 아크스타를 시작했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손 떨림 증상 때문에 쉬고 있는 동생이 안쓰러워 보였을 것이다.
가끔은 투닥거리며 싸우기도 하지만 임창용은 늘 자신을 위해서라면 망가지고 희생하는 오빠였다.
'대체 뭐야. 뭐 때문에 그런 거냐고.'
그렇기에 임사라는 더욱 답답했다.
그저 오빠인 임창용이 혼자만 짊어지려고 하는 것 같았기에 마음이 아려왔다.
"……."
그렇게 1분이 흘렀을까.
벌컥-
다시 한번 문이 열리더니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임사라는 고개를 들어 찾아온 이를 보았다.
한 명은 오빠인 임창용의 또래처럼 보이는 남자였고, 또 다른 사람은….
'뭐야. 왜 뽀노노 가면을 쓰고 있지?'
이상한 사람이었다.
"벌써 무대로 간 건가?"
그나마 평범한 남자의 말에 임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근데 누구세요?"
"그건 곧 알게 될 거야. 우선 가시죠."
"음, 그래."
뽀노노 가면을 쓴 남자에게선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존대를 하는 평범한 남자가 임사라는 무척이나 이상해보였다.
이내, 그들이 사라지자 임사라가 중얼거렸다.
"뭐야 대체? 여긴 다 또라이만 있는 건가?"
* * *
백무열과 담배를 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나는 잠시 뒤 중앙 홀에서 유민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 나를 향해서 고개를 푹 숙이며 감사하다고 말했고, 그런 그에게 나는 퉁명스레 "별 것 아니네."라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조용히 그의 안내에 따라 스퀘어 내부를 걸어 다녔다.
그러다 문득, 유민석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르신."
나는 유유히 뒷짐을 지고 걸으면서 대답했다.
"왜 그러나."
"가면을 쓰시지요."
"뭐야?"
뚱딴지같은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민석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야 정체를 밝혀도 좀 더 극적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유민석은 스퀘어 내부에 위치한 가게에 들르더니 이상한 가면을 하나 사서 들고 왔다.
그것은 내게도 익숙한 외손주가 좋아한다는 뽀노노 가면.
그는 다짜고짜 내게 그것을 씌우면서 말했다.
"나중에 정체를 밝히면서 벗는 겁니다. 아시겠죠?"
"아니, 뭐, 이런…."
"자, 가시죠."
"나 참."
만족스러운 표정의 유민석이 다시 나를 이끌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선수 대기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선수들이 없었다.
그들은 이미 무대로 올라간 뒤였고, 그곳엔 웬 젊은 처자 한 명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유민석의 안내를 받아 다시 한국팀의 감독과 후보 선수들이 있는 벤치에 도착할 수 있었고, 무대를 보니 이미 두 번째 경기가 시작된 듯 보였다.
스크린에는 1분의 카운트 다운이 째깍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조금 늦은 듯하군요."
"그런 것 같구만."
그런 우리의 등장에 갑자기 누군가 다가왔다.
"누구시죠?"
질문을 한 사람은 한국 대표팀 감독 신태일.
유민석은 그를 향해 조용히 명함을 내밀었다.
'유니온의 기획 1팀장'이라는 직책이 적힌 그것은 생각보다도 높은 효력을 발휘하는 듯했다.
"어, 유니온의 팀장님이 여긴 어쩐 일로…?"
신태일이 명함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공손하게 손을 모으며 말을 건넸다.
유니온이라면 한국 게임 연맹에서도 한 수, 아니 두 수, 세 수나 접어주는 거대한 기업이었다.
당장에 유니온이 기라면 기고, 벗으라면 벗어야 하는 게 한국 게임 연맹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연맹의 소속인 신태일 또한 마찬가지나 다름없었다.
"아, 별건 아니구요."
유민석이 입꼬리를 씩 올리며 날 가리켰다.
"선수 교체 좀 부탁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