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32화
제232화
미도는 나무판자에 그려지기 시작하는 자그마한 지도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아마 이것은 참가자 중 유일하게 화가인 자신밖에 하지 못하는 것일 거다.
지난 시간 동안 선발전을 준비하며 그녀가 대표팀에 뽑히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장점을 살리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그녀는 숨겨진 탐험가 NPC를 찾아 지형지물을 살피는 법을 지난 시간 동안 꾸준히 배워왔다.
그리고 그 노력의 산물이 지금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주변 지형을 보며 지도를 만들어 내는 중입니다.]
[소요되는 시간은 약 1분입니다.]
그녀는 가장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더욱 자세히 주변의 지형을 눈에 담았다.
가운데 위치한 제주도를 본 따 만들었다는 한라산과 주변의 바다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허름한 건물들을 위주로 살피며 그렸다.
현재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절반에 해당하는 섬이었다.
[미완성 나무판자 지도가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미도는 절반의 지도를 찬찬히 살피며, 우선 가까운 건물을 향해 지름길로 걷기 시작했다.
나머지 절반의 지도는 자신이 돌아다니면서 완성해야 할 터였다.
우선 그 전에 슬슬 시작될 때가 되었는데….
[섬의 가장자리부터 독 안개가 퍼지기 시작합니다.]
"벌써 시작됐구나."
짙은 독 안개가 바닷가를 넘어와 해변가부터 차츰 점령하기 시작했다.
독 안개는 초당 10%의 체력을 깎아 먹으니, 조심하라는 사회자의 말이 있었다.
미도는 미련 없이 가까운 건물을 향해 걷기 시작했고, 독 안개가 이 섬을 모두 잠식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30분이었기에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전에 미도는 상자를 하나 더 찾아보기로 하며 주변 풀숲을 뒤졌다.
주변에 매복해 있는 유저는 다행히 없었고, 그렇게 5분을 더 걸었을 즈음.
저 멀리 목표로 했던 허름한 건물 한 채가 보였다.
"아악!"
그런데 갑자기 건물에서 웬 비명이 들려오더니 약간의 소란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안에서 몸싸움을 벌이는 중인 듯 보였다.
미도는 거머쥔 목검을 강하게 쥐며 긴장감을 유지했다.
'적일까…?'
그녀는 지난 시간 수련했던 것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건물의 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안쪽을 살폈다.
안에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에이, 건질 건 파워스톤 뿐이네."
그렇게 말한 남자는 혀를 쯧 차며 문밖으로 성큼 걸었다.
미도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남자가 나오자마자 기습을 감행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이윽고, 남자가 문을 열어젖히고 나왔다.
끼익-
미도는 남자의 머리통을 향해 있는 힘껏 목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지난 수련의 시간이 응축된 회심의 휘두르기가 남자의 목에 이르렀을 즈음….
"최미도…?"
멈칫.
정확히 이마와의 거리를 1cm 남겨두고 미도의 목검이 가까스로 멈추었다.
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보며 눈을 껌뻑거렸다.
건너편에 있는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오빠였어?"
"…목검 좀 치워줄래?"
"아, 쏘리. 하하…."
미도가 머쓱한 표정으로 목검을 뒤로 감추며 웃었다.
눈앞의 그는 화살통을 등허리에 둘러맨 채 활을 거머쥔 은정혁이었다.
* * *
달그락달그락.
선반을 뒤지는 소리.
"거긴 뭐 없어?"
"응, 없네. 아무래도 이게 끝인 것 같은데?"
"그래도 더 찾아봐."
"알았어~"
미도는 은정혁과 함께 건물의 내부를 좀 더 샅샅이 뒤져보기로 했다.
다행히 아직까지 이곳을 찾아온 것은 두 사람이 끝인 듯하지만, 언제까지고 여기에 있을 수는 없었다.
아까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적이 바깥에 매복을 한 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독 안개 또한 어느새 해안가를 넘어서 슬슬 숲 안으로 진입을 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상자가 없을 리가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미도는 찬찬히 주변을 뒤졌다.
건물의 바닥에는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이미 은정혁에게 죽은 유저는 사라지고 없었다.
듣자 하니 화살로 선빵을 날리며 견제한 다음, 마무리는 화살을 거머쥔 채 접근해 목을 찔러 넣었다고 한다.
은정혁은 궁수계열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에 시작부터 화살 10발과 활을 상자에서 얻었는데, 당연하게도 저 화살은 재활용도 가능했다.
그의 화살통엔 아직 10발의 화살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나저나 아직 근접 전투 실력이 죽지 않았나 보네.'
원래 은정혁은 처음 아크스타를 시작할 때 암살자 계열의 직업을 했었다.
그러다가 빛의 궁수라는 히든 클래스를 얻어서 중간에 직업을 바꾼 케이스였고, 그렇기에 은정혁은 근접전도 가끔 즐기기도 했다.
듣자 하니 스릴이 넘쳐서 좋다나 뭐라나.
어쨌든 그 또한 전투 센스를 타고난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러다 문득.
"어?"
숨겨진 상자를 찾았다.
"오빠, 찾았어!"
미도의 외침에 은정혁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녀는 허름한 안방에 있었고, 그곳에 위치한 침대의 밑을 가리키고 있었다.
은정혁은 차분하게 상자를 꺼내 열었다.
끼이익-
[최하급 생명력 회복 포션 x2]
[오래된 철제 단검]
"으흠. 괜찮은데?"
은정혁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오래된 철제 단검을 익숙하게 들었다.
약간의 녹이 슬긴 했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듯 보인다.
그는 허공에 몇 번 휘둘러보더니, 손에 착 감기는 것이 더욱 만족스러워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곤 미도를 보았다.
"포션은 네가 들어라?"
"응. 알았어."
평소 같았으면 "내가 왜 그걸 들어? 오빠가 들어."라고 얘기했을 테지만, 미도는 저번 콜로세움에서 자신을 대신해 독 단검에 맞아 죽은 그에게 빚을 졌다는 묘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날 이후로 가급적 은정혁이 하는 말은 잘 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웬일이야. 역정을 내면서 나한테 들라고 할 줄 알았더니?"
그런 미도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었다는 듯, 은정혁의 한마디가 미도의 가슴 정중앙에 가시처럼 박혀 쓰라렸다.
그녀는 정곡을 찔린 것처럼 말을 더듬었다.
"내, 내가 언제?! 하, 웃겨 증말."
그렇게 말하며 미도는 다급하게 포션 두 개를 챙겨 넣더니, 쿵쾅거리며 문으로 나섰다.
그 모습이 흡사 화가 난 티라노사우루스 같아서 은정혁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어 웃음을 참았다.
그렇게 문을 열어 미도가 나가려는 순간.
은정혁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엎드려!"
"뭐?"
미도가 은정혁을 향해 돌아보는 순간.
쒸이익-!
쏜살같이 날아온 날카로운 화살이 간발의 차이로 미도의 찰랑거리는 머리칼을 베고 지나갔다.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창백한 표정을 지은 미도가 재빨리 옆으로 뒹굴었다.
타탁.
그녀가 있던 자리는 순식간에 화살이 두 발 날아와 꽂혀 있었다.
미도는 황급히 문을 닫았다.
그녀는 뛰는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은정혁에게 물었다.
"오빠. 우리 아무래도 포위된 것 같은데?"
미도가 방금 전 보았던 사람의 숫자가 나무판자에 그려지고 있었다.
동그라미 세 개.
그것이 뜻하는 것은 명백했다.
은정혁도 저것이 뜻하는 바를 잘 알았다.
세 사람이 지금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는 뜻.
하지만 저것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 완전 큰일 났네."
은정혁이 재밌다는 듯 이죽거리며 웃었다.
"오빠. 지금 웃음이 나와? 어떡해?"
미도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하지만 저들은 어쩌면 잘못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최종 본선의 종목은 그야말로 은정혁 자신을 위해 준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
그의 직업은 '빛의 궁수'.
"쟤들은 다 죽었어."
은정혁의 몸이 주변의 빛을 반사시키며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이미 적들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 * *
- 아아~! 대단합니다. 은정혁 선수! 혼자서 벌써 두 명의 적들을 죽이고 벌써 4개의 파워 스톤을 모았습니다!
- 막을 수 없습니다! 강력합니다! 은정혁 선수가 날 뛰고 있어요!
- 자이언트 길드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대단합니다! 아~! 궁수가 모두 사라진 걸 확인한 최미도 선수가 가세를 했습니다! 단 두 명이서 자이언트 길드를 몰아붙입니다! 이카루스 길드의 저력이 놀랍습니다!
해설자들의 흥분한 목소리와 동시에 경기장이 과잉되며 열띤 함성이 이어졌다.
과연 그럴만한 경기였다.
은정혁은 은신으로 모습을 감추더니 순식간에 궁수들을 제거했고, 이어진 그의 공격은 그야말로 폭풍과 같았다.
"머신 에로우."
두두두두두.
은정혁의 손에 있는 화살 10발이 따발총처럼 빠른 속도로 적 탱커를 향해 내달렸다.
그 속도가 무척이나 빨라서 탱커는 그저 커다란 방패 안으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티티티티팅.
다섯 발의 화살은 방패에 가로막혀 바로 앞에 떨어졌고, 또 세 발은 미처 막지 못해 탱커의 양 어깨와 팔에 하나씩 박혔다.
나머지 두 발은 그저 뒤에 있는 나무에 박히는 사이, 은정혁은 이미 탱커의 뒤를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뒤에 박힌 나무에서 화살 하나를 뽑아내더니 단검과 교차하며 탱커의 등을 사정없이 찌르고 베었다.
그 모습이 가히 근접 딜러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고놈 제법일세."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옆에 있는 가족들은 이미 손에 땀을 쥐는 듯한 긴장감에 양손을 꽉 쥐며 경기 화면에 집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 대단합니다! 은정혁 선수와 최미도 선수가 화려한 합동 공격으로 탱커를 유린하더니, 마지막 공격은 은정혁 선수가 공격을 하는 척 최미도 선수가 탱커의 머리를 때린 것으로 끝났습니다!
- 벌써 세 명 째입니다! 남은 것은 자이언트의 길드장인 김동현 선수뿐입니다!
- 최미도 선수가 파워 스톤을 두 개째 먹습니다! 이카루스의 독주가 이어집니다!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아주 볼만하겠군요!
그 말과 동시에 각기 다른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화면에 띄워졌다.
그들은 흥미롭다는 듯 팔짱을 끼며 지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로 속닥거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미도와 은정혁이 꽤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이 어렸다.
"흐음. 저 활 든 녀석은 제법인데? 저렇게 강했나?"
"미도 누나도 못지않아요. 제가 가르친 걸 흡수해서 아주 빠르게 성장하고 있잖아요."
"뭐, 그건 내가 기초를 잘 가르쳐서 그런 거지."
"아니죠. 제가 잘 가르친 거예요."
"그럼 우리 둘 다 잘 가르친 거로 하자."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백무열과 백성찬이 사이좋게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묘하게 닮은 두 사람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거리고 말았다.
"이제 왔냐. 늦었네?"
"아아, 차가 좀 막혀서 말이지."
"아뇨. 사실 할아버지가 사인해주느라 늦었어요."
"시끄럽다. 손자야."
"시끄러운 건 할아버지거든요?"
"에이, 말버릇하고는."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보니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무열은 예나 지금이나 손자인 백성찬을 이기지 못했고, 그는 항상 손자에게는 투덜거리면서도 져주곤 했었다.
- 아아! 뜁니다! 최미도 선수가 앞에서 근접 딜러인 김동현 선수의 공격을 받아냅니다! 화가라고는 믿기지 않는 놀라운 컨트롤 실력입니다!
- 은정혁 선수가 뒤를 노립니다! 그의 화살이 김동현 선수의 등을 향해 날아갑니다!
마침 화면에는 흥미진진한 광경이 나오고 있었다.
미도가 김동현이라는 놈의 공격을 멋지게 흘리며 받아냈다.
그리고 은정혁이 뒤를 노리며 날린 화살이 그의 등에 꽂혔다.
김동현이 인상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 틈을 노린 미도의 회심의 찌르기가 김동현의 복부를 때렸다.
팍!
[최미도 2킬.]
나지막한 시스템 메시지와 동시에 관객들이 환호성이 터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