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18화
제218화
쉬이이이익-.
으스스한 혓바닥이 전신을 옥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백무열은 말로만 들었던 잠들지 않는 용을 직접 눈앞에 마주하면서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다.
과연 헤라클레스가 말했던 대로 거대한 몸에 수백의 머리가 움직이는 형상은 기괴하다고 표현하기 충분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양손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한 기세를 내뿜고 있다.
한 마디로 눈앞의 있는 존재는 두 글자로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괴물.'
헤라클레스가 저 괴물을 한 번 죽였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물론 눈앞에 있는 것은 그때 죽였던 '라돈'의 새끼였지만, 어느새 이렇게 커서 거대한 존재감을 내비치고 있다.
도대체 헤라클레스는 어떻게 저 녀석을 상대했던 것일까.
백무열의 입장에서는 이해 자체가 불가능한 광경이었다.
"라돈~ 잘 있었어?"
"쉬이이이익-."
"우릴 보니 반가운가 봐."
"쉬이익-. 쉬이이익-."
아이글레와 에리테리아라는 여인들이 라돈에게 인사했지만, 백무열과 마이클이 보기에 라돈은 전혀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먹잇감을 눈앞에 둔 사나운 포식자의 기세랄까.
"잡아먹히고 싶지 않으면 어서 은종을 꺼내."
라레투사의 말에 아이글레와 에리테리아는 품속에서 자그마한 은종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라레투사도 마찬가지였고 세 자매는 동시에 라돈을 바라보며 은종을 흔들기 시작했다.
딸랑- 딸랑- 딸랑-.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종소리가 아름다운 음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서서히 라돈을 향해 스며들어갔다.
이윽고 그것이 초래한 결과는 놀라웠다.
"…잠들었네."
"저 종의 정체가 뭘까요."
"난들 알겠냐."
백무열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잠든 라돈을 보았다.
마이클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은종의 정체를 추측했지만, 그의 입장에서도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어서 찾아라. 시간은 오래 끌 수 없어. 원체 잠들지 않는 라돈이기에 3분 정도밖에 효력이 없으니 서둘러야 할 거다."
그녀의 말에 백무열과 마이클은 서둘러 황금 사과나무에 올라탔다.
당연히 제일 먼저 본 것은 그곳에 맺혀있는 황금 사과였다.
[비극의 황금 사과]
등급: 신화
태초 신 가이아가 인간계에 내린 황금 사과나무의 과실.
이것을 먹으면 낫지 않는 병이 없으며, 꾸준히 먹으면 불멸의 존재가 된다.
하지만 이것을 탐하는 인간들은 대부분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는 설이 있다.
-각종 질병과 상처가 온전히 회복된다.
-30개 이상 섭취 시 캐릭터의 격이 '신'의 반열에 올라갑니다.
'어마어마하군.'
백무열에게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신'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거 하나만으로도 이 황금 사과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30개 이상 먹어야 한다는 제한이 있긴 했지만, 그 정도 제한마저 없었다면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아이템이나 다름없었다.
"황금 사과를 탐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허공을 부유한 라레투사가 팔짱을 낀 채 백무열과 마이클을 내려다보며 나지막한 경고를 남겼다.
그녀는 잠깐이라도 허튼짓을 한다면 베어버릴 것이니, 그렇게 알라며 엄포를 놓고는 우리들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그렇게 스타 프루츠의 수색은 30분가량 이어졌다.
세 자매는 꾸준히 종을 흔들며 우리의 수색을 도와주었다.
"정말 여기 있는 게 맞습니까? 아무리 봐도 없는 것 같은데."
의문 섞인 마이클의 물음에 혼란스러운 것은 백무열도 마찬가지였다.
헤라클레스는 분명 황금 사과나무가 있는 곳에서 스타 프루츠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었다.
한데, 지금 나무 전체를 뒤져 보아도 스타 프루츠는커녕 그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까부터 세 자매가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리들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잘못하면 거짓말쟁이로 몰리며 개죽음 당하게 생겼다.
마침 나타난 라레투사가 노기 서린 눈으로 다가왔다.
"설마, 우리를 속인 것인가? 역시 너희 인간들을 믿는 게 아니었…."
하지만 그 순간.
"찾았다!"
백무열의 눈에 이채가 어리며 한 곳을 가리켰다.
방향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이었다.
설마 저기에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그는 재빨리 나무를 내려왔고, 스타 프루츠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은 눈을 감은 채 잠든 라돈의 품속이었다.
* * *
약 한 시간 뒤.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던 나는 마차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 건너편에 앉아서 자고 있던 에드워드도 눈을 껌뻑거리며 뜨는 것이 보였다.
"으음, 다 온 거야…?"
에드워드가 몽롱한 눈으로 바깥에 있는 케레노스에게 물었다.
"예. 다 왔습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침도 좀 닦으시구요."
"아음, 그래. 츄르릅."
에드워드가 소매로 침을 닦았다.
나는 마차의 창문을 활짝 열어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저 멀리 거대한 왕성과 도시의 시가지가 한눈에 보였다.
그야말로 왕족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곳.
순식간에 신분 확인을 마친 우리는 검문소를 통과해 드디어 마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마침 메시지도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오르카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 이 상쾌한 공기!"
에드워드가 기분 좋은 듯 기지개를 키며 만세를 했다.
나도 약간 몸을 풀기 위해 어깨를 돌렸고, 말에서 내린 실피드 기사단이 지친 몸을 이끌며 걸어왔다.
에드워드에게 케레노스가 물었다.
"바로 보증을 서러 가실 겁니까?"
"그래. 바로 가자. 그거 때문에 온 거잖아."
보증을 선다고?
깜짝 놀란 나는 에드워드를 향해 물었다.
"그게 대체 뭡니까?"
대답은 케레노스가 했다.
"원래 불사의 인간이 영주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막대한 공적을 세우거나 국왕에게 잘 보여서 성과 귀족의 지위를 하사받는 것이고, 또 다른 방법은 왕국에 소속된 귀족이 보증을 서는 것입니다."
'보증'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섭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보증과 이곳 세상의 보증은 비슷하지만 다른 면이 있었다.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그러니까 어떻게 선다는 건데?"
"뭐, 간단한 겁니다. 서류로 이 사람이 오르카 왕국을 배신하지 않을 것임을 귀족이 보증을 서주는 것이지요."
"배신하면 어떻게 되지?"
"당연히 죽습니다. 보증을 선 사람도, 보증의 대상도."
"……."
…이거 어째 강제로 엮이는 기분이 드는데.
"괜찮아! 잭슨은 배신하지 않을 거니까. 그치?"
에드워드가 무한한 신뢰를 담은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신뢰해준다는 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부담스럽기도 했다.
괜스레 부담을 떨치기 위해 나는 장난을 치고 싶었다.
"글쎄요."
"헉. 날 배신할 거야?!"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안 돼! 나한테 맞는다?!"
나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케레노스에게 턱짓을 했다.
그도 알아들었는지 내 장난에 동조했다.
"그럼 보증 서러 가볼까요? 물론 죽으실 지도 모르지만요. 전 영주님이 죽는 쪽에다가 한 번 걸어보겠습니다."
"케, 케레노스 잠깐만 거기서! 어디가?!"
"절 믿어 보세요~ 제가 이래 보여도 거는 거에는 일가견이 있으니까요~"
실피드 기사단도 그 모습을 보며 쿡쿡거리며 케레노스의 뒤를 따랐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나섰고, 따라오지 않는 것은 꼬마 영주 에드워드뿐이었다.
뒤에서 낭창한 목소리와 함께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이 멍충이들아!"
* * *
백무열은 라돈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품속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용은 마치 똬리를 튼 듯이 뱀처럼 웅크리고 있었고, 백무열은 라돈이 품고 있는 것을 어렵사리 발견할 수 있었다.
"설마, 여기에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곧장 눈앞에 있는 스타 프루츠를 집어 들었다.
[스타 프루츠]
등성: 1
사용 제한: 없음.
1등성에 해당하는 성좌들과 계약을 할 수 있다. 악을 봉인하는 힘이 담겨있다.
"…맞군."
백무열은 감회에 어린 표정으로 한참이나 손에 쥔 것을 보았다.
이것을 찾기 위해 얼마나 개고생을 했던가.
그동안 때려잡은 몬스터들만 수천이었을 것이다.
백무열은 그 몬스터들의 면면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것을 느꼈다.
"설마, 라돈이 갖고 있었던 건가?"
허공을 부유한 라레투사가 백무열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백무열이 든 스타 프루츠와 라돈이 품고 있던 것을 번갈아 보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알로 착각했던 것 같군."
백무열이 스타 프루츠를 꺼낸 곳은 바로 라돈이 품고 있던 알들의 틈바구니에서였다.
확실히 이렇게 보니 라돈의 알과 백무열이 든 스타 프루츠는 여러모로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스타 프루츠가 맞다.
"어서 나가지. 라돈이 깨어날 거다."
라레투사의 재촉에 백무열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라돈의 품속을 빠져나왔다.
그는 잠들어 있던 라돈의 머리를 힐끔 보고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잘 있어라. 요놈아.'
하지만 조금 빨리 나와야 했던 것일까.
"쉬이이익!"
아직 채 시간이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라돈이 눈을 번쩍 떴다.
라돈은 백무열의 손에 쥐어진 스타 프루츠를 보고는 화들짝 놀란 기세로 백 개의 머리를 들이밀었다.
"캬아아아악!"
깜짝 놀란 백무열은 반사적으로 거머쥔 검집을 휘둘러 '몽둥이의 가호'를 사용하려 했지만, 라레투사가 나타나 구름의 채찍을 휘둘러 라돈을 막아냈다.
짜악-!
잠깐이지만 라돈의 기세가 주춤하는 것이 보였다.
"빨리 도망쳐라!"
라레투사의 외침에 백무열은 재빨리 뛰었다.
하지만 라레투사의 힘으로도 라돈을 막아내기란 역부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돈의 레벨이 너무도 높았다.
[Lv. 329 불면의 드래곤, 라돈]
"이런 제길."
잠깐 주춤하던 라돈의 기세가 다시금 백무열에게로 쏟아졌다.
백무열은 힘을 끌어 올리며, 자신에게 쇄도해 오는 수백의 머리들을 모두 쳐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때.
퍼어억!
어디선가 날아온 거대한 악령 하나가 라돈의 머리통들을 날려버렸다.
마이클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구해줘서 고맙다."
백무열이 마이클에게 감사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클은 다시금 다가오는 라돈을 보았다.
그 기세가 매우 사납기 그지없다.
"캬아아아악!!"
더욱 날카로워진 라돈의 이빨들.
수백의 머리들이 전부 거대한 화염의 브레스를 내뿜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매들은 재빨리 은종을 흔들어보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라돈은 말을 듣지 않았다.
"통하지 않아. 언니!"
"라돈이 너무 흥분했어!"
"젠장!"
라레투사는 고뇌에 빠졌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라돈에게 상처를 입혀야 하는 것일까.
하려면 할 수는 있겠으나, 온전히 막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태초 신 가이아님이 황금 사과나무를 지키라고 명한 신성한 드래곤을 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순간.
"몽둥이의 가호."
옆에서 나타난 한 인간이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라레투사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