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17화
제217화
그녀를 보는 순간, 엄청난 압박감이 전신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백무열과 마이클은 알 수 없는 중압감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여인이 입을 열었다.
"…설마 인간 두 명이 헤스페리데스를 이 정도로 헤집어 놓을 줄이야. 정말이지 이런 일은 수백 년 전 '그 사건' 이후로 처음이군."
그녀의 말에 마이클이 물었다.
"우리를 인간이라고 칭하는 걸 보면 당신은 인간이 아니군요. 혹시 성좌입니까?"
라레투사는 자신에게 말을 건 인간을 보았다.
꽤 잘생겼다고 할 수 있을 조각 미남.
동생인 아이글레나 에리테리아가 함께 왔었다면 그를 살리자고 했을 테지만, 아쉽게도 라레투사는 그런 것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었다.
"성좌라…. 오랜만에 듣는군. 난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유피테르의 별자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그들을 싫어하는 편이지. 내가 믿는 신은 구름과 형벌의 신이신 아버지와 태초 신이신 가이아님 두 분뿐이다."
라레투사는 오래된 옛 기억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지는 가이아님의 은혜로 구름의 신이 되었지만, 유피테르는 가이아님이 사라지자마자 아버지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또한 하늘의 구름을 짊어지는 고통스러운 형벌을 내렸다.
그 덕분에 아버지는 구름을 포함해 '형벌'을 관장하는 신이 되어버렸지만, 그것은 라레투사의 입장에선 매우 가슴 아프고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자상했던 아버지를 정말 좋아했었다.
"…잡소리가 길었군. 너희들은 어째서 이곳을 침략한 것이냐."
라레투사가 손에 쥔 구름의 검을 인간들을 향해 뻗으며 물었다.
마이클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으려 했다.
하지만 또다시 주변을 포위하는 몬스터들 때문에 그만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마이클은 긴장된 표정으로 경계를 풀지 않았고, 언제고 몬스터들을 썰어버릴 수 있도록 만전을 기했다.
"에리테리아!"
하지만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이 하늘을 향해 외치자, 주변의 안개가 휘돌며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몬스터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모습을 감추었고, 그 기상천외한 광경을 보면서 마이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백무열 또한 마찬가지였다.
'휴우, 다행히 말은 통하는 처자인 듯하군.'
백무열은 아까 그녀가 나타나자, 쥐 죽은 듯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아까 전 그녀가 얘기했던 '그 사건'이란 것이 헤라클레스와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가 인간이었을 적 이곳에 들어와 라돈을 죽이고 황금 사과를 훔쳐간 일이 있었고, 그렇기에 백무열은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마치 죄지은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이랄까.
"이제 말해봐라. 이곳에 온 이유가 뭐지? 합당한 이유가 아니라면, 너희를 이 자리에서 베어버릴 것이다."
그녀의 말과 동시에 백무열과 마이클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나선 것은 백무열이었고, 그는 최대한 공손한 어조로 그녀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말했다.
잘못하면 진짜 죽는 수가 있으니.
"저희는 이곳에 있는 스타 프루츠를 찾으러 왔습니다."
* * *
채비를 마친 나와 에드워드는 성내에 위치한 마법진 위에 몸을 올렸다.
전속 마법사가 마법진을 운용하는 것이 보였고, 에드워드는 익숙한지 여유로워 보이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긴장하지 마. 별거 아니야. 그냥 처음 타면 약간 구역질이 나는 정도?"
태연하게 말하는 에드워드의 말에 더욱 불안감이 샘솟는다.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슈우욱-!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찰나의 섬광이 주변의 정경을 잠식하더니, 몸이 붕 뜨며 세상이 빙글 도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약 10초가 지나자, 나는 땅을 짚고 엎드려 있었다.
"우웁. 이런 제기랄."
빌어먹을.
이게 대체 무슨 조화람.
"에휴. 이해해. 나도 처음 탔을 때 그랬으니까."
에드워드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내 등을 두드렸다.
한참이나 헛구역질을 하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아마 에드워드가 말했던 이곳의 관리인이라는 NPC일 것이다.
"신분증을 보여주십시오."
에드워드가 품에서 영주를 상징하는 신분증을 그에게 내밀었고, 관리인이라는 남자는 그것을 힐끗 보더니 다시 돌려주었다.
"오르비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영주님."
여행자들의 쉼터, 오르비스.
이곳은 영주들이 마법 포탈로 단숨에 날아올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여행자들이 오르카 왕국으로 들어서기 전 말과 마차를 대여해 가는 중간 지점으로도 유명했다.
물론, 우린 당연히 마차를 대여하러 왔다.
"이제 좀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에드워드의 부축과 동시에 일어선 나는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정말 괜찮은 거 맞지?"
"글쎄요."
"이게 다 내 기사를 안 해서 그래."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거지.
나는 마지막을 무시하며 마법 포탈이 설치된 곳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왔다.
시원한 바람을 코로 빨아들이니 한결 나아지는 듯했다.
에드워드가 쫑알거리며 뒤따라 나왔다.
"아니, 내 기사 하자고오!"
아오, 시끄러워 죽겠네.
"오셨군요."
마침 익숙한 복장의 남자가 이곳으로 걸어왔다.
그는 내가 그토록 찾았던 케레노스. 오랜만에 본 그는 한결 얼굴이 좋아 보였다.
"바빠 보이는구나."
"뭐, 저야 기사단장이니까요."
"아직도 도박은 하고?"
"큼. 그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십니까."
"뭘, 새삼스럽게."
"아니, 진짜 내 기사해주면 안 돼? 응?"
옆으로 고개를 내리니, 사슴 같은 눈망울로 눈빛을 발사하는 에드워드가 보였다.
이젠 하다 안 되니 귀여움을 보여주는 작전으로 변경한 모양이었다.
물론 나한테는 안 통한다.
"싫습니다. 때려 죽어도 안 할 겁니다."
"제길."
에드워드가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가시죠. 마차를 대여해두었습니다."
나는 그의 안내에 따라 에드워드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케레노스는 실피드 기사단을 이끌고 저번처럼 호위를 하며 따라왔고, 나는 마차 안에서 바깥의 풍경을 감상했다.
이곳 오르비스는 지금까지 봐왔던 곳 중 유저들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뭐가 이렇게 많지?"
"에헴."
에드워드가 또 한 번 어깨에 한껏 힘을 주었다.
나는 한눈에 그가 또 설명을 해주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 오르비스는 불사의 인간들이 나타나며 유일하게 평화지대로 설정된 곳이야."
"평화지대요?"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불사의 인간들이 나타난 후로 오르카 왕국은 그들을 통제하고 회유하기 위해 이곳 오르비스 주변에 성들을 가득 세웠어. 그리고 서로 경쟁하게 만들었지."
"공성전을 말하는 거군요?"
"맞아. 잭슨도 이제 영주가 되면 얼마 뒤에 공성전을 해야 할 거야."
"윈디아는 안합니까?"
"난 불사의 인간이 아니니까."
"아…."
누가 했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영악한 발상이다.
갑작스레 나타난 불사의 인간들은 오르카 왕국의 입장에서도 불안 요소였을 것이다.
유저들은 죽지 않고 끝없이 성장하니까.
…어쩌면 왕국의 입장에서도 난감했겠지. 한편으로는 두려웠겠고.
아마 그래서 이런 정책을 냈을 것이다.
성을 내리면서 회유도 하고, 경쟁을 시켜서 우리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겠지.
"근데 이런 걸 저한테 말해줘도 됩니까?"
"어차피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데. 뭘."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이곳 오르비스는 공성전의 결과를 놓고 불사의 인간들이 회담을 갖는 곳이기도 해. 전쟁에 진 쪽이 이긴 쪽에게 일정 세금을 바치는 대신 영주의 지위를 유지를 할 수도 있고, 또는 아예 성 자체를 빼앗길 수도 있지. 어떻게 하든 그건 승자의 마음이야."
나는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평화지대로 설정된 곳이 한 곳이 더 있는데…. 마침 들어섰네."
에드워드가 보는 방향으로 나도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잘 닦인 돌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왕국으로 향하는 길이야. 이곳을 침해하거나 부수게 되면 왕국에서는 강한 제재를 가하게 될 테니 잭슨도 알아둬. 마법이 걸려있어서 금방 알 수 있거든."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을 마친 에드워드는 또 한 번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엔 또 뭐 어쩌란 거지.
"설명해줬으니까 내 기사 할래?"
"……."
거미줄로 입을 틀어막아 버릴까.
* * *
긴 시간 끝에 백무열과 마이클은 라레투사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을 설득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녀와는 말이 통했고, 우리는 황금 사과나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는 우리의 목적이 황금 사과가 아닌 스타 프루츠라는 것을 알고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천박한 별자리들의 전유물이 정말 이곳에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직접 보기라도 했나?"
"그건…."
백무열이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더듬거리자, 마이클이 나섰다.
"저희 인간들은 그것을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호오. 너희 인간들은 참으로 신비한 종족이로군. 정말 알면 알수록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단 말이지."
라레투사가 우리들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보았다.
다행히 위기는 잘 넘긴 것 같다.
옆에서 마이클이 다가와 속삭였다.
"사부님. 잘했습니까?"
"아니, 내가 왜 네 녀석 사부야?"
"이제 그만 운명을 받아들이시죠."
"허허. 날강도가 따로 없군."
백무열은 자꾸만 치고 들어오는 마이클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하마터면 진짜 저 녀석의 사부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 뻔했다.
"다 왔군."
앞서 걸어가던 라레투사가 멈추자 우리도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백무열과 마이클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라레투사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아이글레. 결계를 열어."
우웅.
그 순간 눈앞에 무언가 물결처럼 번지더니, 구름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순식간에 구름이 갈라지며 세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라레투사는 익숙한 듯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백무열과 마이클도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저벅저벅.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허공에서 누군가 선녀처럼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언니. 어떻게 된 일이야?"
"왜 인간들을 데려온 거야."
라레투사와 꼭 닮은 외모인 그녀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자매처럼 보였다.
그들은 이야기를 몇 번 주고받더니 이곳으로 날아왔다.
전부 키가 2미터가 넘는 여인들이다 보니 올려다보기가 민망했다.
"안녕. 난 아이글레라고 해. 넌 왜 구름을 얼굴에 붙이고 다니니?"
"난 에리테리아. 어머, 멋있게 생긴 인간이 하나 있는데?"
"엇, 정말이네? 너 우리랑 같이 살지 않을래?"
아이글레와 에리테리아는 마이클에게 유독 관심을 보였다.
그 사실이 백무열은 슬프게 다가왔다.
'내가 조금만 젊었어도…. 끙.'
라레투사가 두 사람을 제지했다.
"그만해. 황금 사과나무가 있는 곳으로 갈 거야."
"알았어. 어서 가자."
"따라오렴. 인간들아. 후훗."
이번엔 세 자매가 앞을 이끌었다.
주변은 천국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싱그러운 열매들과 꽃들이 가득했다.
잠깐이지만 말년을 이곳에서 보내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금 사과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음….'
하지만 그곳에서 반기는 것은 머리가 백 개 달린 거대한 용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