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214화
제214화
수많은 몬스터들이 한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춤을 추는 것처럼 몬스터들을 베어내며 전진했다.
양손에 하나씩 거머쥔 스콜피온 소드가 움직일수록 몬스터들의 시체는 산처럼 쌓여갔다.
모래와 독이 뒤섞이며 한바탕 피의 축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춤이 멈추었을 때, 주변에 살아있는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곳엔 오직 마이클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환영 인사가 제법 거칠군."
아무래도 결계가 쳐져 있었던 걸 보면 정체 모를 누군가가 자신이 이곳에 들어오는 것을 꺼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의 눈앞에는 한 메시지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미지의 힘으로 인해 당신은 바깥과의 연결이 단절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지."
처음엔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이클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늘 이렇게 한바탕 싸우고 나면 말을 걸어왔던 안타라스의 메시지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타라스."
대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설마…?
- 마이클: 데미안.
[미지의 힘으로 인해 당신은 바깥과의 연결이 단절되었습니다.]
"…이런 거였나."
그는 아까 전 부쉈던 결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은 이미 수복된 거대한 구름의 벽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것이 다시 수복되면서 바깥과의 연결이 끊어진 것 같았다.
'갇혀버렸군.'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파아아아앙-!
"……!"
귀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힘의 파동이 이곳을 덮쳤다.
깜짝 놀란 마이클은 모래의 벽을 만들어내 그 힘을 받아냈다.
어마어마한 바람이 숲 일대를 뒤흔들었고, 이내 힘이 갈무리되어 잦아들자 모래의 벽을 해제했다.
'누군가 있다…?'
아니, 어쩌면 몬스터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비밀스러운 곳이라면 당연히 보스급의 몬스터 또한 존재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마이클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본 광경은 생각보다 처참했다.
각종 몬스터들의 잔해가 주변에 널려져 있었고, 그 중앙엔 웬 남자가 앉아서 태연하게 나무를 깎고 있었다.
마이클은 그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누구신데 여기에 계십니까."
그리고 그가 뒤돌자 눈앞에 메시지가 떴다.
[미지의 힘으로 인해 대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마이클은 눈앞의 남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뿌연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고, 남자라는 것 말고는 알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이 사람이 유저인지, NPC인지 그의 입장에선 알 길이 없었다.
"넌 누구지?"
얼굴 없는 남자가 물었다.
마이클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약간은 나이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NPC일 확률이 높았다.
아크스타에 이 정도 나이를 가진 유저는 거의 없을뿐더러 이곳은 꽤 강한 몬스터들이 들끓었으니까.
더군다나 이곳은 자신 말고는 온 사람이 없는 미개척지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하나뿐이다.
'NPC다. 그것도 엄청 강한 히든 NPC일 확률이 커.'
마이클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앞의 남자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몬스터를 이 지경으로 만들 정도의 강자라면 분명 배울만한 것이 있을 게 분명했다.
가령 스킬이라던가, 마법이라던가 말이다.
보통 이런 기연을 통해 많은 이들이 히든 직업이나 히든 스킬을 얻곤 했다.
마이클 또한 그런 것에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 바깥에서 온 불사의 인간입니다."
"불사의 인간? 그게 뭐지?"
역시.
그는 NPC가 틀림없다는 사실에 더욱 확신이 생겼다.
불사의 인간이란 단어는 유저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그는 진정 히든 NPC가 맞는 것 같았다.
"몇 년 전부터 나타난 다른 세상의 인간입니다. 저희들은 죽어도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나지요."
"흠…."
"혹시 성함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알아서 뭐하게."
백무열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웬 젊은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굴이 뿌옇게 되어서 보이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갑자기 나타나 불사를 논하며 이름을 물으니 이상한 녀석처럼 보였다.
잠깐이지만 사이비 종교를 가진 녀석인가 싶었다.
'혹시 이놈도 몬스터인가?'
옷차림새를 보아하니, 그건 아닌 것 같다.
옆에 찬 검이 제법 좋은 걸 보면 레벨이 높은 녀석 같았다.
하지만 놈의 주변에 떠다니는 저놈의 악령은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미지의 힘이 대상을 왜곡하여 보여줍니다.]
'왜곡이라….'
분명 이건 미지의 힘이 우리를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 이상한 모습으로 서로를 보여주는 것일 거다.
그리고 그건 자신뿐만이 아닐 것이다.
지금 저 녀석도 자신을 이상한 모습으로 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공격하지 않는 걸 보면 일단은 아군이라 봐야겠지.'
생각과 동시에 몬스터의 괴성이 들려왔다.
"크워억!"
숲에 있던 까마귀들이 푸드득 거리며 날아올랐다.
"…빌어먹을. 벌써 오려는 모양이군."
"또 몬스터인가 보군요."
백무열은 손에 쥔 나뭇가지를 들어 힘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아직 완성된 아이템이 아니라 그런지 몽둥이의 가호를 쓸 수 없었다.
마이클은 곧장 허리춤의 쌍검을 빼 들었고, 백무열은 그의 악령이 더욱 사납게 날뛰는 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윽고,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무기가 없는데 어쩐담.'
그 순간 백무열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이보게."
"예?"
"검집은 안 쓸 거지?"
"예? 아, 예. 그런데…."
"나 좀 빌려줘."
마이클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다짜고짜 들고 있던 나무 막대기를 던져버리더니, 검집을 달라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였다.
마이클은 그에게 검집 하나를 빌려주었다.
그리고 그가 중얼거리는 순간.
쿠아아아앙!
이름 모를 남자의 주변으로 어마어마한 광휘가 터져 나오며, 하얀빛으로 만들어진 새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손에 든 검집을 빠른 속도로 휘두르고 있었다.
[미지의 힘이 대상을 왜곡하여 보여줍니다.]
그 하얀 새는 어마어마한 기세로 지나다니며, 무참하게 몬스터들을 쓰러트렸다.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몬스터의 시체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마이클은 생각했다.
'설마, 검성(劍聖)인가…!'
* * *
그 무렵.
나는 아렌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지정 귀환석을 이용해 다시 메테우스의 입구에 도착했다.
지금 내 손에는 그가 주었던 망토가 들려져 있었다.
[저항군의 망토]
등급: 영웅
'칼슈타인' 저항군의 일원이 되면 얻을 수 있는 망토. 파르타 공국의 마도 공학이 합쳐져 쓸 만한 성능을 가지고 있다.
-투명화[액티브]: 초당 2의 마력을 소모해 온몸을 투명하게 만든다.
-목소리 변조[액티브]: 소량의 마력으로 목소리를 변조할 수 있다.
-인식 장애[액티브 / 스위치]: 대상이 자신을 볼 때 인식 장애를 일으켜, 다른 얼굴로 보이게 만든다. 현재 적용 모습: [검은 늑대 - OFF]
"음, 아주 마음에 들어."
망토에 무려 3가지의 기능이 달려 있다.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씰룩 올렸다.
"저항군에 가입한 건 좀 그렇지만…. 뭐, 그래도 좋군."
아렌은 내게 저항군에 가입할 것을 권유하기 위해 부른 것이었다.
물론, 처음엔 거절했다.
그런 것에 가입하면 귀찮은 일이 많아질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내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어떠한 일도 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장로로 계셔 주십시오. 어차피 우리는 한배를 탄 사이가 아닙니까.'
그의 속셈은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찝찝한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거절하자 아렌은 이렇게 얘기했다.
'저는 저항군의 일원에게 어떠한 지원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돈이 필요하시다면 드릴 것이고, 구해달라는 물건이 있으면 구해드릴 것입니다.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요.'
그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이건 내게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조셉은 아렌이 다음 대 상왕으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라는 얘기를 했었고, 그를 뒷배로 둘 수 있다면 게임 내에서 돈으로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나는 그의 부탁을 수락했다.
그리고 받은 것이 지금 내가 들고 있는 망토였다.
"이제 헬륨 슬라임을 먹을 필요는 없겠어. 그리고 이 귀찮은 가면 놀이도 끝이고 말이야."
나는 곧장 가면을 벗어 인벤토리로 던져버렸다.
사실 투명화와 목소리 변조는 원래 망토에 있던 스킬이었는데, '인식 장애'라는 것은 아렌에게 부탁해 새로 단 옵션이었다.
아렌의 저택에 있는 '알프레드'라는 집사가 마도 공학에 조예가 깊었기에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바로 '목소리 변조'를 사용해 목소리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아, 아아. 아."
조정하는 방법은 쉬웠다.
마력으로 목소리의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었는데, 아까 설명을 자세히 들었기에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마음에 드는 목소리로 변조가 끝나자, 이번에는 '인식 장애'를 사용했다.
얼굴 주변으로 스파크가 일며, 가면 썼을 때와 똑같은 검은 늑대의 얼굴이 나타났다.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진짜 내 얼굴 같군.
전혀 답답한 느낌이 없다.
가면을 썼을 때는 솔직히 좀 그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이건 마치 원래 내 얼굴인 마냥 느껴졌다.
나는 내친김에 투명화도 사용해 보았다.
"투명화."
스륵.
망토에 알록달록한 빛이 아른거리더니 순식간에 내 몸이 사라졌다.
이 정도면 충분히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을 것이다.
망할 기자 놈들이 와도 이젠 손쉽게 벗어날 수 있겠지.
좋아. 좋아.
"투명화 해제."
다시 원래 몸으로 돌아온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메테우스의 거리를 활보했다.
주변에서 유저들이 알아보고 웅성거렸다.
"다크 울프다."
"그가 나타났어."
"와, 겁나 포스 있다."
"저건 가면이겠지?"
유저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인식 장애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입꼬리를 올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메테우스의 중앙에 위치한 분수대.
원래 이곳은 우물이었지만, 소도시로 격상이 되며 제일 먼저 바뀌었다고 들었다.
그곳에 도착한 나는 앉아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렸다.
주변의 유저들이 모여들었지만, 차마 다가오진 못했다.
가끔 같이 사진 좀 찍자며 달려드는 양아치들이 있었지만….
"어이. 같이 사진 좀…."
"꺼져라."
파라라락-!
뻐억!
공중 2회전 뒤돌려차기로 턱주가리를 한 번 걷어찬 후로는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기다린 사람이 찾아왔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아침에 싸웠던 미도가 환하게 웃으며 나타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