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94화
제194화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약속시간보다 일찍 1층으로 내려왔다.
아직 조용한 것이 아직 다들 오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곳엔 한 사람만이 조용히 명상에 잠겨 있었고, 나는 그의 명상을 깨트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가부좌를 튼 채, 명상에 집중하는 견소룡.
꽤 집중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옆에 놓인 차를 조용히 홀짝이기만 할 뿐.
"……."
그렇게 5분쯤 흘렀을까.
견소룡이 눈을 뜨며 말을 걸어왔다.
"일찍 오셨군요."
"그래. 꽤 집중하는 것 같아서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셨군요. 잠시 레이트라랑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으음, 이젠 자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모양이구나."
"예. 그날 이후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그날'은 아마 북극으로 수련을 떠났던 그때를 말하는 것일 거다.
새삼 녀석과의 대결이 기대 된다.
과연 얼마나 강해졌을지가 궁금하군.
"좋은 일이지."
"결승전에서 뵙고 싶습니다."
"그래. 그럴 생각이다."
나는 다시 차를 홀짝이며, 조용히 향을 음미했다.
그때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더니, 하나둘씩 8강전의 선수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역시나 가장 시끄러운 건 라인하르트였다.
"우하하! 우승은 나의 것이다!"
라인하르트는 마치 챔피언이 된 것처럼 양팔을 들더니, 소리를 지르며 들어왔다.
그리고는 곧장 구석에서 우드득- 하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요란하다니까.
이어서 들어온 것은 매드독이라는 이름을 가진 망할 삐에로 놈.
녀석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핏발 서린 눈으로 강하게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아직 나한테 맺힌 게 많은 거겠지.
뭐, 그건 나도 피차일반이라 애써 무시했다.
어차피 저놈은 오늘 손 볼 것이니까.
준비는 이미 마친 상황이다.
그렇게 휴톤이라는 놈과 김현우까지 들어왔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미도와 백무열밖에 없었다.
"으음, 대체 무열이 녀석은 뭘 하는 게야."
어제 제일 먼저 와서 같이 얘기나 하자더니, 왠지 제일 늦게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빠른 속도로 내려온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손녀인 미도.
그녀는 내려오자마자 두리번거리더니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곤 나와 눈이 마주치며 이곳으로 걸어왔다.
그 모습이 제법 다급하기도 하고, 귀여워 보여서 가면 속에서 피식 웃었다.
"저기 드릴 말씀이 좀 있는데, 잠시 저 좀 보시겠어요?"
입을 우물거리는 모습마저도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대충 미도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기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 2층으로 올라오자마자, 미도가 말했다.
"할아버지한테 얘기 들었어요. 제 과제를 도와주셨다구요. 정말 감사드려요. 덕분에 점수를 많이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미도가 고개를 푹 숙였다.
꽤 예의 바른 모습이라, 역시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녀 하나는 정말 잘 키웠다.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변조하듯 낮게 깔았다.
근엄하고 진지하게.
그리고 들키지 않도록.
"별것 아닙니다."
사실 더 길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왠지 들킬 것 같아서 일부러 단답을 했다.
미도는 내 눈치를 보더니 약간의 뜸을 들이며 물었다.
"저기…. 그런 정보는 어떻게 얻으신 거세요?"
"우연히."
이 또한 길게 말해야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처지라서 그냥 짧게 말해야 했다.
미도는 무안했는지 말을 얼버무렸다.
"그, 그러셨구나. 저기 또 궁금한 게 있는데요."
사실 궁금한 건 내가 더 많았다. 나는 아까부터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매만지며 '판결의 눈'을 사용할 틈을 노리고 있었다.
지금 내 머릿속엔 솔로몬의 반지를 쓸 생각밖에 없었다.
지금 미도의 마음 속에 과연 누가 있는 건지 세상에서 제일 궁금했다.
나는 곧장 정신을 집중하며 솔로몬의 반지에 숨겨진 힘을 느꼈다.
반지에서 빛이 퍼져 나오….
"저 좋아하세요?"
려다 말았다.
"……?"
"저 좋아하시냐구요."
갑자기 이게 무슨 막장 전개지.
전에 챙겨보던 막장 드라마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전 이상형이 확고해요. 우리 할아버지처럼 잘생기고 자상한 분이 좋거든요. 죄송하지만, 마음을 받아줄 순 없을 것 같아요."
"아니…."
"그래도 우리 친하게 지내요. 앞으로 게임 속에서 종종 봤으면 좋겠어요. 그래주실 거죠?"
그 말과 동시에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럼 전 내려가 볼게요. 오늘 파이팅 하세요!"
별안간 미도가 손을 흔들더니,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갑자기 지나가 버린 폭풍에 뭐라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잠시 뒤, 빙그레 미소 지어졌다.
"내가 이상형이라고…?"
갑자기 터져버린 웃음에 한참이나 꺽꺽거렸다.
그러다 문득, 2층 계단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매 왔냐?"
백무열이었다.
* * *
-오늘은 8강전에서 4강전까지 한꺼번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저번에는 갑작스럽게 데스 매치로 진행됐지만, 이번에는 정말 1대1의 대결로 진행될 예정이니 참가자분들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저번에 갑작스러운 룰 변경으로 카이단 님의 손해가 제법 심했거든요.
8강전의 참가자들이 모여 사회자의 말을 들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지만, 제일 반가운 것은 저번처럼 갑작스러운 룰 변경은 없을 것이라는 거였다.
아마 저번에 된통 당했으니 다른 방법을 쓰지 않을까, 하는 추측만 할 뿐.
물론 아직 추측뿐이지만, 에이단의 성정으로 보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이제 8강전의 대진표를 짜겠습니다. 다들 올라오셔서 상자 안에 있는 공을 뽑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각자 한 명씩 올라가 공을 뽑았다.
내가 뽑은 것은 숫자 '1'이 적힌 공.
잠시 뒤 펼쳐진 대진표의 상황은 이랬다.
-콜로세움 대진표
1경기: 잭슨 vs 라인하르트
2경기: 미도 vs 매드독
3경기: 견소룡 vs 김현우
4경기: 백무열 vs 휴톤
"으하하! 우리 또 만나는군! 잘 부탁한다!"
거대한 몸집의 라인하르트가 다가와 등을 두드리려 했다.
나는 괜히 생명력이 닳기 싫어서, 옆에 있던 견소룡과 자리를 바꿨다.
몇 번 맞던 견소룡은 녀석의 손을 막으며 라인하르트를 째려봤다.
"그만해라."
"음? 또 너냐. 이거 미안하게 됐군! 하하하! 있다가 보자고!"
라인하르트가 물러가자, 견소룡의 귓속말이 도착했다.
- 견소룡: 형님. 조심하십시오. 라인하르트는 강합니다.
- 잭슨: 안다. 저번에 보니 네 녀석과 호각인 것 같더구나.
- 견소룡: 그의 방패는 스타 피스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습니다. 고대 거인들이 쓰던 방패라더군요. 제 번개로도 뚫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 잭슨: 으음, 그래?
지금 녀석의 말이 맞다면, 라인하르트가 들고 있는 방패의 재질은 내가 가진 알렉서스의 포크 숟가락과 같은 재질일 것이다.
거인의 광물 엘바프리움.
이거 어쩌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는데.
- 백무열: 쯧쯧. 첫 경기로군. 맞고 다니지나 마라.
- 잭슨: 썩을 놈.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게야.
- 백무열: 하하하! 그렇지. 천하의 최춘택을 누가 걱정해. 이기고 와라.
- 잭슨: 그래야지.
나는 곧장 무대로 올라가는 입구를 향해 섰다.
아직 철창이 있어서 올라가지는 못했고, 내 옆에는 거대한 라인하르트가 함께 서 있었다.
새삼 이놈과 붙게 되다니, 세상사 참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을 보니 손녀인 미도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응원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응원을 받았다.
잠시 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철창의 문이 열렸다.
나와 라인하르트는 성큼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발, 또 한 발.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관객들의 함성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저 중에는 내가 아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시간에 맞춰서 보러 온다고 했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지하에서 무대가 있는 지상으로 올라왔다.
와아아아아아!
쏟아지는 관객들의 함성.
저번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콜로세움은 만석인 듯했다.
방송국에서 생중계를 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고, 저번과 다른 것은 오직 무대에 오른 사람이 나와 라인하르트 뿐이라는 것이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8강전 첫 경기의 주역들을 소개합니다!
또 한 번 관객들의 함성이 터졌고, 나와 라인하르트는 무대 위로 올랐다.
가볍게 손을 흔들자, 관객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라인하르트 화이티이이잉!"
"라인하르트 이겨라!"
"팬이에요! 라인하르트!"
"제우스 길드! 응원합니다! 꼭 이기세요!"
…이게 뭔 염병할.
어째 관객들 중 내 편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들은 모두 라인하르트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망할 놈들 같으니라고.
-먼저 경기 시작 전 선수들의 각오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라인하르트 선수? 첫 경기이신데 어떻게 싸우실 생각이신지 여쭤 봐도 될까요?
사회자가 라인하르트를 향해 마이크를 내밀었다.
"우하하! 다들 응원해줘서 고맙다! 내 싸움은 별거 없다! 난 그저 때리고 부술 뿐이다! 이 친구도 곧 그렇게 되겠지!"
라인하르트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건방진 말이었다.
감히 누가 누구를 때리고 부수겠단 건지 모르겠네.
갑자기 열 받는군.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을 봤나.
-어, 이름이…. 잭슨 선수? 라인하르트 선수가 각오를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어떤 경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십니까.
라인하르트에게 갔던 마이크가 사회자를 거쳐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나는 그가 건네주는 마이크를 거머쥐었다.
물론, 목소리는 약간의 변조가 필요했다. 조금 걸걸하면서도 거칠게.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이놈은 불 싸대기를 처맞고 날아가게 될 거다."
그 말과 동시에 곳곳에서 관객들의 폭소가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내 말이 겁먹은 약자의 객기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하하. 그것 참 재밌는 농담이었습니다. 자, 그럼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경기를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법사분들은 나오셔서 결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사회자가 무대 밖으로 나가자, 익숙한 마법사들이 나타나 무대 주위에 결계를 치기 시작했다.
2층의 귀빈석에 에이단과 최불룡은 없었다.
콜로세움의 주인이라는 카이단 또한 마찬가지.
어째 없으니까 더 불안하다.
…일단은 경기에 집중해야겠군.
어느새 결계가 모두 쳐졌고,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그럼 8강전 첫 번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과앙-!
울리는 징 소리와 관객들의 함성.
그 속에서 나는 태양의 춤을 췄다.
라인하르트는 목을 매만졌고, 어깨를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후후, 그건 뭐냐. 준비 운동이 꽤 요란하…."
화르륵!
양다리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녀석의 품으로 파고든 나는 옷자락을 펄럭이며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라인하르트의 얼굴에 1080도 회전 돌려차기를 꽂았다.
콰아아앙-!
거대한 라인하르트의 몸체가 폭발로 인해 가볍게 나가 떨어졌고, 나는 조용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고요하게 나부끼는 담배 연기 사이로 나는 입을 열었다.
"싸가지 없는 놈은 매가 약이지."
관객석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