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153화
제153화
왜 진작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미노타를 잡고 얻은 전리품을 고를 때, 만약 내가 이 생각을 떠올렸다면, 나는 뿔 따위가 아니라 폭염 심장을 골랐을 것이다.
그럼 지금처럼 번거로운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솔라는 한층 더 강해져 내게 커다란 힘이 되었을 텐데.
뭐, 그래도 지금 떠올렸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돈으로 질 것 같진 않거든.
- 110코인입니다. 혹시 더 부르실 분 계십니까?
마담 라냐의 목소리가 방안 가득 울린다.
이곳 귀빈실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가까이 있는 것처럼 들을 수 있었는데, 옆에 있는 에이단의 입꼬리가 찢어질 것 같다.
내가 돈 쓰는 게 그렇게 좋은가.
[어이, 지금 내 밥을 그딴 불덩어리에게 주겠다는….]
'이따가 막창이랑 양깃머리 구워줄 테니 참아라.'
[크흠. 그렇다면 좀 참아보지. 하지만 약속을 지켜야 할 거다.]
'알았다. 이놈아.'
다행히 무두르는 조금 진정된 듯하다.
이 녀석이 막창이랑 양깃머리를 좋아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어휴. 상상도 하기 싫다.
- 없으십니까? 없으시면 낙찰을…. 아, 있으시군요. 120코인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1층이 술렁거렸다.
도대체 누가 120코인을 부른 거지?
곧장 커다란 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객석 중앙에 번호판을 들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저놈은….
익숙한 뒤통수다.
그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실소를 머금었다.
"허, 참. 이것도 인연인가…."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에이단이 묻자,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아닙니다. 그보다 코인을 더 불러야겠군요. 121코인."
지금 아래쪽에서 나를 올려 보고 있는 남자는 최불룡이다.
참으로 질긴 악연이다.
이젠 하다하다 경매장에서까지 만나냐.
염병하네.
- 귀빈실의 손님께서 121코인을 부르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1층의 객석이 모두 술렁거렸다.
갑자기 아래쪽에서 엄청난 시선이 느껴진다.
그들 모두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가면을 써서 진짜 다행이구만.
"하하, 이거 재밌군요. 과연 얼마까지 갈지 궁금합니다."
에이단은 이 상황이 흥미진진한 듯 턱을 문질렀다.
나도 가면 속에 손을 넣어 턱수염을 쓸었다.
흥미진진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 130코인! 130코인이 나왔습니다!!
허허. 이놈 보게.
제법 흥분한 라냐의 목소리.
이젠 그녀도 이 상황이 놀라운 듯하다.
하긴 130코인이면 꽤 천문학적인 금액이긴 하지.
1300만 달러라니. 뭐, 그래도 아직 나는 여유가 넘친다.
"131코인."
또 한 번 라냐의 목소리가 울리며 131코인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경매는 점점 과열되면서 최불룡과 나. 둘의 싸움으로 치달았다.
지켜보던 관중들은 흥미진진하게 이 상황을 지켜보았고, 아래쪽에 있던 최불룡은 이쪽을 노려보면서 다시 중얼거렸다.
썩을 놈이 째려보기는.
- 1, 140코인! 140코인입니다!
흐음, 저놈한테 저런 돈이 있었던가…?
순간 의문이 들었다.
140코인이면 1400만 달러.
그동안 나도 게임을 해보면서 느꼈지만, 정말 벌기 쉽지 않은 돈이다.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유저들 삥 뜯다가 비싼 거라도 건졌겠지.
"141코인."
경매장이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밑에서 "와~" 하는 탄성이 들려왔다.
에이단과 직원의 대화가 귀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이봐, 여기 경매장 최고 입찰 코인이 얼마지?"
"2등성의 스타 프루츠가 500코인이었습니다."
"음. 이 정도면 2번째로 높은 입찰 코인 아닌가?"
"조금 못 미칠 겁니다. 아마 제 기억으로는 150코인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악기처럼 생긴 스타피스였는데, 아마 별명이 '천상을 연주한 악마'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음. 그럼 새로운 기록 갱신을 기대해 봐도 되겠지?"
"그래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천상을 연주한 악마라….
아마 2등성의 성좌였던 걸로 기억한다.
묘족 출신이었는데 그 별명처럼 천상의 연주를 해서 지어진 별명이다.
뒤에 '악마'라는 단어가 붙은 것은 녀석이 악마들처럼 마약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캣닢이라는 거였던가….
아무튼 제법 강한 능력을 가진 녀석이다.
- 150코인! 150코인입니다! 저희 경매장에서 두 번째로 높은 입찰 코인과 타이기록입니다!
무대에 설치된 전광판에 150코인이라는 숫자가 뜨자, 곳곳에서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했는데, 기자들이 있었을 줄이야. 이거 난감하네.
빨리 저거만 사고 튀어야겠군.
"151코인."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전광판 일의 자리 숫자가 0에서 1로 바뀌었다.
그 순간 이쪽으로 엄청난 플래시가 터졌다.
…끙. 더럽게 눈부시네. 이쪽 세계는 선글라스도 없는 건가.
혹시나 있다면 꼭 사야겠다고 나는 다짐했다.
- 151코인! 더 없으십니까! 151코인. 151코인~ 151코인! 축하드립니다!
땅땅!
라냐가 이곳을 향해 우아한 손짓을 보냈다.
어쩌다 보니 나는 두 번째로 높은 코인 입찰자가 되었다.
저 밑에 최불룡이 분통을 터트리는 것이 보인다.
짜식. 까불기는.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빨리 물건을 받고 싶군."
* * *
"하하. 이거 내가 져버렸네?"
"우하하! 라인하르트가 이겼다!"
데미안과 라인하르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아까 전 폭염 심장의 입찰액이 130코인을 넘는 순간 내기를 했었는데, 데미안은 150코인을 못 넘는다는 것에 걸었고, 라인하르트는 넘는다는 것에 걸었다.
뭐, 결과는 보는 대로 라인하르트의 승리.
"데미안이 맥주를 사는 거다!"
"쳇. 어쩔 수 없지. 내기는 내기니까. 그래. 내가 쏜다."
"음하하! 기대하겠다!"
레이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라인하르트가 물었다.
"레이나. 어딜 가냐?!"
"무대에 나가야 하지 않겠어? 물건도 팔고, 마침 기자들이 있으니 내 드레스 입은 모습도 좀 보여주고 말이야~"
허벅지를 살짝 드러내자, 라인하르트의 양 눈이 '♡'로 변했다.
그리고 곧장 코피가 콸콸 흘렀다.
정말이지 저 코피는 주체가 안 되는 모양이다.
흘리는 피의 양을 보면 뱀파이어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야, 라인하르트 코피부터 막아라."
데미안은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인벤토리에서 자연스럽게 붕대를 꺼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이나는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어쨌든 여기 있어~ 금방 갔다 올 테니까~"
또각또각.
레이나는 곧장 무대로 향했다.
그러자 새하얀 플래시 세례가 그녀를 향해 터졌다.
팡팡!
그녀는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했고, 흡사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한 배우들처럼 우아하게 자세를 잡았다.
'이참에 광고라도 들어오면 좋겠는데.'
사실 그녀가 찍은 광고는 2개나 있다.
하지만 갑자기 큰돈이 생기니 펑펑 쓰게 되었다.
돌아보니 남아 있는 것은 텅 빈 잔고.
'며칠 전 출시된 신상 구두가 이쁘던데….'
그렇게 몇 번 포즈를 취하고 돌아서자, 무대 중앙에 가면을 쓴 남자가 보였다.
검은 늑대의 가면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다.
그 옆에는 괜스레 짜증나는 여자가 서 있다.
마담 라냐.
괜히 보는 순간 라이벌 의식이 샘솟는다.
"에헴!"
레이나는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하고, 그녀의 앞에서 허리를 곧추세웠다.
조금 더 볼륨 있어 보이기 위한 몸부림.
'분명 저거 눈코입도 했을 거야.'
그렇게 자기 위안을 하며 라냐를 보는데, 별안간 앞에 있는 남자가 악수를 청해왔다.
레이나는 빙긋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파파파파팟.
수많은 플래시의 세례 속에서 가면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꽤 중후한 목소리다.
분명 가면을 벗으면 훈훈한 중년의 남자가 나올 것만 같은 그런 목소리.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절 아시나요…?"
"알다마다. 며칠 전에도 만났는데."
지금 나누고 있는 대화는 수많은 플래시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것이다.
레이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 NPC가 아니라 유저였군요. 근데 우리가 만났었다니 무슨 말이죠? 전 당신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것 같은데."
"너무 알려고 하면 다치는데."
"…도도하군요. 뭐, 그런 남자 나쁘지 않아요."
두 사람은 서로의 물품을 교환했다.
레이나는 폭염 심장을.
가면의 남자는 정확히 151코인을 내밀었다.
곧장 맞잡았던 손을 풀자, 플래시 세례가 잦아들었다.
"또 보자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가면의 남자는 내려갔다.
기자들이 따라붙었고, 웬 병사들이 나타나 그들을 제지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레이나도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대체 누구지…?'
최근 만났던 남자 수십 명을 떠올려도 저런 목소리를 가진 남자는 없었다.
근데 다시 떠올려보니 중후한 목소리가 너무나 섹시하다.
목소리만 따지면 완전 이상형에 가깝다.
남자답고, 잘생긴, 그리고 야생마 같은….
"우하하! 레이나! 왜 이렇게 이쁜 거냐!!"
저 멀리 붕대로 코를 막은 채, 커다란 팔을 흔드는 라인하르트가 보인다.
빛나는 조명에 반사되는 대머리가 유독 빛난다.
레이나는 한숨을 쉬었다.
"…산통 다 깨네."
* * *
차디찬 겨울 공기가 폐부 깊숙이 찔러오는 밤.
포트렌의 시내를 걷는 한 남자가 고성을 질렀다.
그의 이름은 최불룡.
방금 전 미노타의 폭염 심장을 눈앞에서 빼앗긴 남자다.
"이런! 젠장! 젠장! 젠자아아아앙!!"
주변에 있던 NPC와 유저들이 자신을 흘겨보았지만, 최불룡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지금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상태다.
조금 진정된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후우우. X발 진짜 일진 뭐 같네."
분명 오늘 좋은 일이 있었다.
에이단에게 중요한 계약을 따냈고, 마지막으로 학수고대했던 미노타의 폭염심장을 얻으며, 오늘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끝이 안 좋으니, 하루가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다.
"빌어먹을. 하필 그놈이 잭팟을 터트렸던 그 개자식일 줄이야. 으으으!!"
사실 그놈을 몰래 기습해 폭염 심장을 빼앗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변엔 에이단의 병사들이 있었고, 그것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최불룡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채, 동생들이 있는 술집으로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서니 동생들은 여전히 술판을 벌이고 있다.
'이 새끼들이….'
희희덕거리는 동생들을 보니 갑자기 화가 치솟는다.
누구는 힘들게 사바사바 하면서 개고생을 했는데, 술이나 처먹고 있다니.
"야. 이 새끼들아!!"
우렁찬 고함에 술집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부두목 한불이가 눈치를 보면서 다가왔다.
최불룡은 그의 뒤통수를 갈겼다.
빡!
"으윽…."
"애들 집합시켜. 이 새끼야."
"크흠. 예."
한불이가 소리치더니, 동생들이 모두 바깥으로 집합했다.
그런데 집합하랬더니 머리를 처박고 있다.
몇몇 NPC들이 눈치를 보며 술집을 나가는 것이 보였지만, 최불룡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야 이 새끼들아!!"
"예. 형님!!"
최불룡이 품속에서 망우초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한불이가 다가와 담뱃불을 지펴주었고, 최불룡은 연기를 뱉었다.
"후우. 일하러 가자."
"목표는 누구입니까. 형님."
한불이의 물음에, 최불룡은 대답했다.
"누구가 아니다."
"네?"
사실 아까 전 에이단의 의뢰에는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에이단은 그것을 성공적으로 완료하면 추가금을 주겠다고 했다.
"목표는 쓰레기촌."
"쓰레기촌이요? 쓰레기촌이라면…."
"오늘 밤 우리는 쓰레기촌을 부순다."
그것이 아까 전 받았던 에이단의 추가 의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