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060화
제60화
딸랑-!
익숙한 종소리와 함께 '신세계 캡슐방'의 문을 여는 사람이 있었다.
찰랑거리는 머릿결.
우윳빛 피부.
섬세한 이목구비.
연예인 뺨치는 외모를 가진 그녀의 이름은 '최미도'였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오, 미도로구나. 한동안은 안 오더니 어쩐 일이냐."
그의 이름은 김성철.
신세계 캡슐방의 주인이었다.
"학교 과제 때문에 조금 바빴어요. 조별 과제라 빠질 수가 없더라구요."
"하하, 그랬구나. 난 또 단골이 없어지나 했지 뭐냐."
"아저씨도 참. 호호."
"늘 하던 대로 후불제로 하면 되지?"
"아, 죄송해요. 오늘은 지갑을 놓고 와서요. 용돈 받아서 하는 거라 선불로 할게요."
생각보다 캡슐방의 이용요금은 비쌌다.
하긴 캡슐 한 대당 오백만 원씩이나 하는 데다가 매달 10만 원씩 나가는 요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돈 걱정은 없으니까.'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탓도 있었지만, 그녀는 대학 들어가고서 거의 손을 벌려본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녀가 아크스타에서 제법 인기 있는 크리에이터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국에서 최고 명문이라고 불리는 한국 대학교의 재원이었고, 학과는 '가상현실 학과'였다.
처음 아크스타의 크리에이터를 시작한 건 용돈을 벌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한 학기 등록금을 간신히 버는 정도였다.
"한 달 만에 하는 것 같네."
미도는 익숙하게 문을 열고 캡슐에 몸을 뉘었다.
시작 버튼을 누르자, 문이 닫히며 소리가 들렸다.
[아크스타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점멸하는 시야와 함께 눈을 감았다 뜨자, 익숙한 곳이 나타났다.
이곳은 바로 무역도시 포트렌.
그 이름에 걸맞게 주변은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외침으로 가득했다.
"윈디아로 가실 분 구합니다!"
"현재 두 자리 남았습니다!"
"원거리 딜러 분 안계신가요?!"
'역시 이곳은 벌써 윈디아에 대해 알고 있구나.'
하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상인 유저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기도 하니, 소문이 빠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두 자리 남았다고 외치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저 혹시 파티 할 수 있을까요?"
"아, 네 어떤 직업… 헉?"
새삼 놀랍지도 않다.
아이템을 거래할 때도, 파티를 구할 때도, 남자들은 자신의 외모에 깜짝 놀라며 허둥대고는 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아, 예. 그… 직업은 상관없습니다. 어서 파티를…!"
'하여튼 남자들이란.'
사실 좀 귀찮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예쁘게 태어난 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부모님께 감사드려야 할 일이었다.
[유저 데럴 님이 파티신청을 했습니다.]
승낙을 누르자 파티창이 떴다.
그녀의 레벨은 151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80~90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깜짝 놀란 데럴이 말했다.
"생각보다 높은 레벨을 가지고 계셨네요. 그런데 직업이…?"
"화가예요."
그녀의 직업은 화가였다.
사실 이 직업을 선택한 것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원래는 미술에 관심이 있어서 미대를 가려고 했지만, 부족한 그림 실력 탓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취미로 남아버렸지만, 이곳 아크스타에서 화가라는 직업을 가지며 다시 한번 꿈을 가져보고 싶었다.
물론, 사람들은 아직 자신의 그림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내 그림을 팔려고 이곳에 왔는데, 아무도 안 사갔었지….'
"그렇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멀어진 데럴이 누군가와 귓속말을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하는 얘기는 뻔할 것이다.
생산 직업을 왜 파티에 받았냐고 묻는 것이겠지.
데럴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여인이 다가왔다.
"반가워요. 티나예요."
"미도라고 해요."
"죄송한데, 저희가 화가랑 파티를 한 게 처음이라 그런데,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실 수 있으신가요?"
티나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미도는 한두 번 겪어본 일이 아닌지라 익숙하게 대처했다.
"저는 이런 능력이 있어요."
그녀는 인벤토리에서 붓과 파레트를 꺼냈다.
그리고 허공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들.
그녀는 한 달 전 예술의 도시 아티아에서 화가의 비전 스킬을 하나 익힐 수 있었다.
그녀의 직업은 [바디 페인터].
"바디 페인팅!"
촤촤촤촥-!
갑자기 그림이 달려들며 몸에 새겨지자 당황하는 파티원들.
하지만 이내, 이동속도가 올랐다는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는 이렇게 파티원들의 능력을 올려줄 수 있어요."
"그, 그렇군요. 다행이군요. 도움이 안 되면 어쩌나 했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생긋 웃으며 말하자, 티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때, 누군가가 웃으며 다가왔다.
그의 이름은 '데드아이'였다.
"이름을 보니 한국 사람같이 보이는데 맞나요?"
"어머, 한국 사람이세요?"
"네, 제 이름은 차진철이에요."
"그렇구나. 반가워요. 저는 최미도라고 해요."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는데, 데릴이 외쳤다.
"저희 파티는 이제 윈디아로 출발하겠습니다! 더 지체하다가는 늦어버릴 것 같아서요. 아시다시피 저희의 목표는…."
"야! 그럴 시간에 그냥 빨리 출발해. 바보야!"
티나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큼, 출발합니다!"
윈디아로 가는 길은 역시 몬스터들로 가득했다.
늑대의 평원이라는 이름답게 역시나 늑대 몬스터들이 많았다.
다행인 것은 이곳엔 부락이 형성되지 않아서 무리지어 생활하는 늑대들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미도는 파티원들의 버프가 끝날 때마다 바디 페인팅을 사용하며 보조했다.
선배들의 도움으로 얻은 직업이었는데,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늑대 하나가 달려들었다.
"…어딜!"
파파팍!
뒤에서 날아온 화살이 늑대인간의 머리를 꿰뚫었다.
"괜찮니 미도야?"
"고마워요. 진철 오빠."
차진철과는 금세 친해졌다.
그는 궁수였고, 왜 그 직업을 골랐냐고 물으니, 현실에서 하는 일이 눈을 자주 사용하는 일이라 적성에 잘 맞았다고 했다.
'나도 그림이 적성에 맞는데 왜 사람들이 내 그림을 안 사가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미도는 그냥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아무튼 그렇게 늑대의 평원을 지났고, 어느새 윈디아 근방에 이르렀다.
그러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카메라 팀! 녹화 잘되고 있지?"
"네! 잘 되고 있습니다!"
"그래, 곧 윈디아니깐 스탠바이 하라고!"
'방송국에서도 왔나보네.'
자신도 스타 유튜브를 생방으로 틀면 좋겠지만, 오늘은 방송을 할 수 있는 날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단 한 번. 정해진 날만 방송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부 유저들의 과도한 수익과 사행성을 막기 위한 정부의 조치였다.
주변에는 다른 파티들도 많았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윈디아로 몰렸기 때문에 군대나 다름없었다.
그때, 누군가 외쳤다.
"저기 오크가 있다!"
한 사람이 외치자, 다른 사람들도 외쳤다.
"가즈아! 윈디아를 구하자!"
방송팀은 갑자기 분주해졌다.
"어서 방송을 준비해!"
"도망치는 오크를 찍어! 어서!"
일제히 뛰기 시작하는 사람들.
미도가 속한 파티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뛰어갔다.
그렇게 그녀도 뛰었고, 곧 오크와 혈전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웬 갑옷을 입은 남자들이 자신들의 앞을 막고 있었다.
그중에 창을 든 남자가 외쳤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 * *
한편, 나는 어느새 오크마을 벨리에 도착해 있었다.
전에 보았던 모닥불에 앉아 고기구이를 뜯었고, 사색에 빠져 있었다.
…콜로세움이라.
견소룡은 내게 자웅을 겨루고 싶다고 했다. 갑작스런 제안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알고 보니 그는 중국인이었고, 무인이었다.
다투자는 것이 아닌 순수하게 겨뤄보고 싶다는 뜻이었고, 나는 그의 제안에 선뜻 동의했다.
"포트렌이라는 곳에 그런 게 있단 말이지."
아무래도 거기로 가면 재밌는 일이 많을 것 같았다.
콜로세움이 열리는 것은 한 달 뒤라고 했으니, 아직은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참가 제한이 100레벨이라고 하니 빨리 올려야 되겠네.
그때, 고르바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고기 맛은 좀 어떤가. 형제. 크르륵."
"곰 고기는 처음인데 맛있네."
"다행이다. 취이익. 근데 왜 생으로 먹지 않는 거냐."
"…그런 취미는 없어서. 인간은 원래 뭐든지 구워먹는다."
"크하하하, 그런가!"
지금 내가 먹고 있는 것은 이곳 뒤쪽에 서식하는 '외뿔 베어'의 고기였다.
곰 고기는 처음이라 호기심에 먹어봤는데 제법 괜찮았다.
"크르륵. 나의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 근데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취이익-"
"응…? 뭐냐."
"왜 나를 구해준 것이냐. 인간은 오크를 싫어하지 않은가."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자신도 궁금하다고 말합니다.]
흐음. 이유라. 딱히 없는데.
나는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했다.
"사실 난 여기에 온 적이 있다. 그때 너도 만났었지. 마을을 둘러보며, 너는 제법 괜찮은 지도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여기에 왔었다고? 난 그대를 본 적이 없는데."
"이러면 알려나."
나는 곧장 지그마 변신을 사용했다.
바뀐 내 모습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지는 고르바.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그대는 고블린이었나? 취이익-"
"아니, 나는 인간이야."
나는 재빨리 변신을 풀었다.
그러자, 아쉬워하는 고르바의 표정.
"크륵. 그대가 고블린이라면 좋았을 텐데."
"난 못생겨서 별로."
"크라라라!"
고르바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 자식, 왜 웃는 거지.
"못 생겼다는 것은 우리 오크들에겐 최고의 칭찬이다."
"아… 그래?"
어쩐지 저번에 오크 경비병에게 못생겼다고 했는데, 고맙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왜 그런가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군.
하여튼 이상한 놈들이라니까.
"네놈도 못생겼다."
"크라라라! 고맙다! 형제여!"
그렇게 이상한 덕담(?)을 주고받는데, 어린 오크들이 나를 힐끔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내가 어색한 모양이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고르바가 말했다.
"크륵. 아이들이 아직 어색해서 그렇다. 이해해라!"
"괜찮다. 그럴 만도 하지."
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깊었다.
불은 여전히 꺼지지 않고 타올랐고, 캠핑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뭔가를 잊은 것 같은데… 아!
"프로메테우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너 나한테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냐?"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근데 왜 말이 없냐."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단둘이?"
지금은 오크들 때문에 안 된다 이건가.
하여튼 까다로운 녀석.
근데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러는 거지.
순간, 궁금증이 들었다.
나는 이참에 빨리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르바에게 말했다.
"고르바. 쉬고 싶은데 잘만한 곳이 있나?"
"크륵. 안 그래도 미리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나를 따라와라."
잠시 뒤, 나는 조그만 동굴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푹 쉬어라. 취이익."
"고맙다."
그렇게 고르바가 사라지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은 제법 구색이 갖춰져 있었는데, 나름 신경을 써준 모양이었다.
나는 하늘을 보며 얘기했다.
"자, 이제 말해봐라."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우선 누우라고 얘기합니다.]
…누우라고? 이건 뭔 소리야.
설마 누워서 얘기하자는 건 아니겠지?
왠지 속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우선 따라보기로 했다.
나는 풍성한 짚단이 있는 곳에 누웠다.
푹신한 것이 제법 괜찮았다.
"됐냐?"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눈을 감으라고 얘기합니다.]
"아, 진짜 그냥 말해라. 이놈아!"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눈을 감으라고 얘기합니다.]
"에이, 망할 놈."
나는 툴툴거리며 눈을 감았다.
세상이 어둠에 잠겼고, 아늑한 느낌에 졸음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때,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별 다방(多房)'에 초대받았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