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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 젊은이-31화 (31/375)

나 빼고 다 젊은이 031화

제31화

순간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설마하니 그 이름이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진지해진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플로라 님의 연인을 죽이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통일 제국. 아틀란의 왕.

추측 할 수 있는 건, 잘머거스가 말해준 그 제국의 이름이 '아틀란'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동료이자 제 연인인 그 분을 죽였습니다."

어느새 붉어진 그녀의 눈시울은 내 마음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하는 듯.

분노와 자조가 뒤섞인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때였죠."

눈앞에 영상이 스치기 시작했다.

화려한 꽃이 피어있는 가게에 독특한 복장의 남자 한명과 백발을 가진 청년이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딸랑-!

"여기가 바로 아네모스의 숨겨진 맛집이라던데, 맞소?"

"네! 맞아요. 제가 이곳의 요리사 플로라예요!"

가게의 주인은 바로 플로라였다.

그녀의 젊은 시절은 마치 백합처럼 하얗게 빛나는 모습이었다.

새삼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 것을 떠올리니 세월이 야속했다.

"잘 찾아왔군. 여기서 제일 맛있는 메뉴가 뭐요?"

"음, 글쎄요? 저는 다 맛있는걸요?"

"하하. 그럼 요리사가 추천해주는 걸로 먹어야지. 아무거나 주시오."

그들은 가게의 구석에 앉았다.

플로라는 곧장 요리를 준비했고, 바람꽃 수프와 바람꽃 무침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노련한 그녀의 요리 솜씨를 보며 감탄을 하고 있었다.

근데 저 사람은 누구지…?

독특한 복장을 한 남자의 얼굴은 흐릿하게 보였다.

백발의 미남자는 얼굴이 드러났지만 그의 얼굴은 계속 깨져서 보이지가 않았다.

알 수 없는 이유와 함께 정체가 궁금했지만 화면이 이어졌다.

"자, 드세요."

어느새 완성된 요리가 그들의 식탁에 올라갔다.

코를 찌르는 냄새가 여기까지도 느껴졌다.

새삼 유니온의 기술력에 혀가 내둘러졌다.

설마하니 냄새까지 느낄 수 있을 줄이야.

나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영상에 집중했다.

요리를 먹는 두 사람은 연신 맛있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플로라는 그들에게 서비스를 내어주며 미소짓고 있었다.

갑자기 스파크가 튀었고, 순간적인 파노라마가 지나가며 화면은 어느새 다음 날을 비추고 있었다.

그곳은 플로라의 집.

"오늘은 이 정도면 되겠어."

그녀는 아기를 돌보는 손길처럼 부드럽게 아이올리아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올리아는 고맙다고 말하는 듯 흔들렸고 싱그럽게 움직였다.

그때 누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세요?"

문이 열리자, 방금 전까지 플로라의 요리를 먹었던 백발의 미남자가 나타났다.

그의 위에는 '아이올로스'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떠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저기 이걸…."

그는 무지개 꽃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부끄러움을 타는지 그의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했고, 전달하는 손은 수줍게 떨리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걸 왜 제게…?"

"당신에게 반했습니다."

"어머."

대담한 녀석이네. 저렇게 대놓고 고백을 할 줄이야.

그 뒤로 이어지는 영상은 아이올로스가 매일 플로라에게 고백을 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플로라는 계속해서 그를 밀어냈다.

"전 하이엘프예요 당신과 난 이루어 질수 없는 운명이라구요."

하이엘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아이올로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그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나 또한 인간이 아니라오."

허어. 둘다 다 인간이 아니었다니.

그럼 내 앞에 있는 플로라도 인간이 아닌 건가?

머리위로 물음표를 띄우는 사이 시간은 흘렀고, 두 사람은 어느새 연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말한 연인이 아이올로스였구나.

그들은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서로를 사랑하고 사랑했다.

인간이 아닌 그들이었지만, 더 인간처럼 보였다.

하지만 분위기가 반전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미안하오. 플로라. 난 이제 떠나야만하오. 그것이 나의 운명. 하지만 약속하겠소. 꼭 다시 돌아올 것이오. 내가 죽더라도 당신의 곁에서 평생 함께하겠소."

아이올로스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약속을 했고 플로라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그에게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그의 얼굴에 물음표가 스친다.

"바람꽃 씨앗이에요. 당신의 이름을 따서 꽃의 이름을 아이올리아라고 지었어요. 멋진 이름이죠? 기다릴게요. 10년이든 100년이든 당신을 기다릴게요. 그러니 당신도 날 잊지 말아줘요."

그렇게 아이올로스는 떠났다.

플로라는 울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은 채 멀어져야만 했다.

점멸하는 스파크와 함께 다시 파노라마가 스쳤다.

10년이 흘렀다.

강산이 변하는 세월에도 플로라의 미모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는 빨래를 정리하며 집안일을 하는 중이었고,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마중을 나갔다.

"누구세요?"

문을 열자보이는 것은 어딘가 익숙한 복장의 남자.

그의 얼굴은 가려져 있었고, 플로라는 알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으며 어렴풋이 기억을 되짚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플로라. 절 기억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알렉서스…?"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플로라가 얼굴이 흐릿한 사내를 향해 '알렉서스'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플로라의 동공은 커졌고, 그녀와 나의 얼굴이 지금 같은 표정이었다.

"아이올로스 님은 어디에…?"

플로라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아이올로스를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알렉서스의 뒤로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는 병사들 뿐이었다.

"그 녀석은… 없습니다."

"네? 그게 무슨…."

어느새 다가온 병사가 푹신한 방석을 그녀에게 내밀고 있었다.

그 위에 놓인 것은 갈색의 거친 면을 가진 둥근 알.

플로라의 눈동자가 불길하게 흔들렸다.

"…받아주십시오."

"아이올로스 님은요…?"

"죄송합니다. 녀석은 이렇게 알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길….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플로라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하나뿐인 세상이 무너진 표정으로 울음을 터트리며 통곡하고 있었고,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미안합니다. 아이올로스는 절 구하려다가 그만…."

알렉서스의 주먹이 터질 듯이 떨려오고 있었다.

그 또한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목소리에는 후회와 슬픔이 젖어 보였다.

"그 녀석이 제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곁에 있고 싶다고… 자신이 죽어 알이 된다면 당신과 있고 싶다고, 늦어서 미안하다고… 나는 죽어서도 그대 옆을 지키겠다고… 사랑한다고…. 그렇게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알렉서스는 조심스럽게 아이올로스의 알을 내려놓았다.

플로라는 계속해서 통곡만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조만간 큰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곳까지 내려와 당신들의 사랑을 짓밟도록 하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것이 당신과 그를 향한 저의 속죄이니깐요."

영상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나는 눈을 감은 채 아내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이올로스와 지금의 내 마음이 다르지 않았다.

만약 내가 아내를 떠나 먼저 죽게 되었다면 아마 똑같이 행동했을 테니까.

나는 아이올로스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띠링-!

[플로라와 아이올로스의 사랑]

바람꽃 아이올리아에 대한 비사!

슬픈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는 음유시인에게 이것을 들려주면 그들은 당신에게 보답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연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것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도 그분은 제 곁에 계시니까요."

순간, 그녀의 시선이 벽난로 위를 향하는 것이 보였다.

"저건…?"

"맞아요. 아이올로스 님의 알이에요."

마치 커다란 타조 알을 보는 것 같은 짙은 갈색의 알.

멀리서 보면 그저 둥근 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것은 플로라의 보물이었고 그녀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녀의 눈엔 어느새 이슬이 맺혀 있었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측은한 눈빛으로 알을 바라봅니다.]

그녀는 애증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움, 슬픔, 사랑, 모든 것이 뒤 섞인 그 모습에 나는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의 후인이란 것을 알게 되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쩌면 화를 내며 쫓아낼지도 몰랐다. 하지만 얘기하고 싶었다.

알렉서스가 걸었던 길을 걷기로 결심한 나에게 이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였다.

"플로라 님."

"네."

"사실 전 요리사 알렉서스의 후인입니다."

공기를 타고 정적이 흘렀다.

플로라의 어깨가 잠시 움트는 듯.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더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세월의 탓이었을까.

아니면 아이올로스의 알 탓이었을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저는 그가 남긴 일기를 통해 그의 요리술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후인으로서 깊이 사죄드립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알렉서스가 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녀를 만난 것은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제1사도, 프로메테우스가 당신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짓습니다.]

플로라는 눈을 감고 침묵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전 그분을 앗아간 알렉서스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

"하지만 그것이 잭슨 님의 탓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밤이 깊었군요. 오른쪽에 아들이 쓰던 방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은 그곳에서 주무시고 가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플로라는 곧장 자신의 방에 들어가더니 문을 닫아버렸다.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말한 아들의 방이 있었다.

- 케레노스의 방

나는 말없이 그곳으로 들어섰다.

고고한 달빛이 창을 향해 지쳐들어 오고 있었고, 은은한 선율이 차분히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나는 뒷짐을 진 채 달빛을 올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것 또한 내가 짊어져야 할 업보겠지…."

다음 날.

어느새 이곳 세상은 아침이 밝아 있었다. 방문을 여니 플로라가 인사를 해왔다.

"일어나셨군요."

"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근처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흔들의자에 앉아 어제처럼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앉자마자 플로라가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 우리 엘리자베스를 데려다주셨는데, 제가 보답이 없었어요. 이거 받으세요."

[<길 잃은 강아지>   완료]

[200달러를 획득하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뭔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는데.

어느새 다가온 케르, 아니 엘리자베스가 내 손을 핥았다.

"잘 잤냐. 요 녀석아."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나를 째려보는 엘리자베스.

새침떼기 같은 표정을 짓는 녀석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제 주인을 찾았으니 모른척하겠다 이거냐?

"콸."

…귀여운 놈. 마음 같아선 내가 기르고 싶네.

그때, 플로라가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

부탁이 있다는 그녀의 말에 고개가 돌아갔다.

"알렉서스의 후인이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사실 저는 아이올로스 님이 돌아가시고 단 한 번도 바람꽃으로 만든 요리를 먹지 않았어요."

나는 어렴풋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아이올리아로 만든 요리를 먹으면 그분이 생각날 것 같았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 저는 그 요리를 다시는 하지 않았답니다."

…역시 그랬나.

"어쩌면 잭슨 님이 이곳에 찾아온 것도, 이렇게 우연히 알게 된 것도 아이올로스 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그녀가 넌지시 아이올로스의 알을 흘겨보며 말했다.

"저에게 당신이 만든 바람꽃 요리를 해주지 않겠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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