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014화
제14화
왜 나는 전직을 할 수 없는 것인가.
내 눈앞에 있는 이 메시지는 무엇이며, 나는 왜 또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 것인가.
의심하지도 않았다.
나는 무조건 격투가로 전직하여 손녀에게 찝쩍대는 그놈들의 엉덩이를 걷어차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랬었다. 그런데,
[System.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해당 직업으로 전직할 수 없습니다.]
"이게 대체…."
순간 욕지거리가 나올 뻔 했지만 꾹 참았다.
옆에 수정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삑-
[System.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해당 직업으로 전직할 수 없습니다.]
삑삑-
[System.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해당 직업으로 전직할 수 없습니다.]
[System.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해당 직업으로 전직할 수 없습니다.]
…염병하네.
도대체 이 게임은 나에게 왜 이런단 말인가.
처음 튜토리얼 할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혹시 나는 이곳의 개발자에게 미움을 산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도 들었다. 심지어,
[사도, '앞을 보는 불도둑'이 낄낄거리며 웃습니다.]
…이 망할 놈이.
갑작스런 두통에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왜 그러세요?"
"전직이 안 되는구나."
"예…? 그럴 리가요??"
그녀의 눈은 이미 커져있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
나도 믿기지 않는데 그녀는 오죽할까.
"개발사에 건의사항을 보낼 수 있는 기능이 있는데 그걸 보내보는 게 어떨까요?"
…건의사항?
순간 화색이 돌았다.
그런 방법이라면 지금 내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재촉했다.
"어떻게 하는 거냐."
"우선 설정창에 들어가보세요."
곧장 설정창을 열었다.
"편지 모양 보이세요? 그거 누르시면 돼요."
…생각보다 쉽네.
편지 모양의 버튼을 누르자 눈앞에 창이 하나 나타났다.
새하얀 백지와 함께 가상으로 만들어진 키보드가 공중에 떠 있었다.
나는 화면 옆에 써진 글을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희 아크스타 개발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거나 문의사항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글로 써서 보내주십시오. 버그를 발견해서 보내주시는 분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드립니다. -유니온 전략기획실-]
"버그가 무슨 뜻이냐?"
"게임 상에서 벌어지는 오류 같은 것을 버그라고해요."
…버그가 그런 뜻이었군.
지금 내 상황도 버그가 맞겠지?
나는 양 검지를 들어 독수리타법으로 어렵게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분이 흘렀다.
[사도, '앞을 보는 불도둑'이 지루해서 하품을 합니다.]
불도둑의 하품 메시지와 함께 글이 완성되자, 아래에 있는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전송중이라는 메시지가 잠깐 뜨더니 바로 전송완료라고 떴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글을 쓰는 건 참 어렵구만.
"다 끝나셨어요?"
수정이는 차마 지루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는지 쿤타에게 받은 목도로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었다. 지루하다고 투덜거릴 수도 있었을 텐데, 정말이지 마음씨 착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오래 기다렸니?"
"아니에요. 허수아비 때리니깐 능력치도 올라서 좋았어요!"
내심 내가 마음 상할까 봐 돌려 말하기는, 역시 예비 며느리 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떡한다.
나는 마지막으로 전직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이번에 눌러볼 것은 '암살자'였다.
삑-
[System.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해당 직업으로 전직할 수 없습니다.]
…우라질.
그래, 포기하자. 건의사항도 보냈으니 내일쯤이면 해결되어 있겠지.
마침 포만도가 떨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참에 맛집을 찾아보는 것도 좋으리라.
나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맛있는 거 먹으러갈까?"
"좋아요!"
그렇게, 뮬란의 맛집을 찾기가 시작됐다.
* * *
저녁을 먹기 위해 돌아다니기 전 우리들은 잠깐의 시간을 내 스미르 산을 올랐다.
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똑똑-!
"……."
반응이 없자 나와 수정이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아무도 없는 거 같은데요?"
"그럴 리가."
나는 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소리를 경청했다.
그러자 옅은 망치질 소리가 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끼익.
노크도 없이 문을 연 우리들은 안쪽 에서 열심히 망치질 중인 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집중하고 있는지 코앞에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다.
열정적으로 망치를 두드리는 그의 모습에 아까 있었던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그의 망치질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첸이 고개를 들어 우리들을 발견했다.
"응…? 자네 잭슨 아닌가. 이런이런, 미안하네. 집중하느라 누가 온지도 몰랐구만. 껄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말 편하게 하게. 겉모습을 보니 자네나 나나 동년배로 보이는데 말이야. 하하하."
첸이 호탕하게 웃으며 시원하게 먼저 말을 틀 것을 권했다.
그 모습에 절친한 벗인 '백무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 짓고 말았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그보다 나한테 줄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안 그래도 지금 그걸 만드는 중이었어. 자네를 위한 무기 말이야."
아, 직접 주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였나…?
그러고 보니 얼핏 기억이 난다.
그래, 분명히 만들어주겠다고 한 게 맞군. 젠장.
"내가 잠시 착각을 했나 보네. 난 지금 주는 줄 알았지 뭔가."
나는 넌지시 첸에게 지금 무기를 받고 싶다는 것을 어필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가차 없었다.
"하하하, 조금만 기다리게. 내가 이번에 좋은 늑대 뼈를 하나 구했거든. 기대해도 좋아."
…눈치 없는 놈.
[사도, '앞을 보는 불도둑'이 웃음을 참습니다.]
"안녕하세요. 크리스탈이에요."
"오, 이 아가씨는 또 누구신가. 홀홀홀. 상당한 미인이구먼."
또 미인 소리를 들어서 기분이 좋은지 수정이의 볼이 발그레해지는 것이 보였다.
설마… 아니겠지?
"큼. 딸일세."
나는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딸이라고 해버렸다.
순간, 첸의 눈이 그리움에 사무쳐보였던 것은 착각이었을까.
김수정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고개를 돌려 또 한 번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부끄러움이 많은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구만.
"…그랬군. 아무튼 반갑네. 온 김에 차나 한잔하겠나?"
"아닐세, 다음에 하지. 배를 채우러 가야해서 말이야."
"그럼 내일쯤이면 완성될 것 같으니 그때 다시 한번 들르겠나?"
"그렇게 하지."
그렇게 우리들은 등을 돌려 집을 나서려했다.
그런데 나를 붙잡는 것이 있었다.
나는 첸에게 물었다.
"이건 뭔가?"
"아~ 그거? 우리 집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면일세. 달빛이 가득한 만월이 되면 우리 가문 사람들은 그 백호 가면을 쓰고 대장질을 하지."
"희한한 전통이군."
"왜, 갖고 싶나?"
"됐네. 대대로 내려오는 거라며."
"갖고 가게. 또 있으니까."
"엥?"
가보를 이렇게 쉽게 준다고…?
순간, 멍한 표정을 짓는 나에게 첸이 다가와 가면을 손에 쥐어주었다.
"갖고 가게. 이 가면도 자네 같은 영웅을 만나면 아주 좋아할 테지."
[백호 가면을 획득하였습니다.]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받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씨익 웃고 말았다.
"고맙네. 친구."
* * *
뮬란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우리들은 시내에 나타났고, 나는 백호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킥킥… 저 사람 뭐야. 웃긴다."
주변에 있던 유저들이 나를 보며 웃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가면을 갖고 싶었던 건 NPC들의 반응 때문이었는데, 뮬란의 영웅이란 칭호 때문인지 NPC들이 자꾸 알아보고 인사해서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면을 쓰니 그 반대가 되고 말았다.
NPC들은 무심한 반면, 유저들이 사진을 찍자고 달라붙어오며 내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헐 대박. 호랑이 엄청 귀여워."
"어흥! 호랑이 나가신다!"
"저기, 사진촬영 한번만 될까요?"
…첸, 이 자식.
쓸데없이 가면을 너무 귀엽게 만들었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김치~"
"김취~"
찰칵-!
수정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쿡쿡. 완전 인기스타이신데요?"
"난 이런 관심 싫어한다."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은 걸요?"
"뭐…?"
김수정은 웃으며 나를 앞질러 걸어갔다.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는 걸 보니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듯했다.
[사도, '앞을 보는 불도둑'이 웃음보가 터지기 직전입니다.]
"이 새끼가…."
[사도, '앞을 보는 불도둑'이 모른 척 휘파람을 붑니다.]
"하아… 내가 참자. 참아."
그렇게 다시 맛집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맛집을 찾는 일은 순조롭지 않았다.
갑자기 불도둑 녀석이 길을 안내하겠다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걸으면 걸을수록 나오는 것은 아주 후미지고 허름한 골목이었고, 우리들은 그야말로 아사하기 직전까지 걸었다.
…망할 내비 같으니. 도대체 어디로 안내하는 거야?
그때 수정이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거 마시스 아니에요?"
마시스…?
나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진짜 마시스가 서있었다.
"어딘가로 들어가는데요?"
"따라 가보자."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 한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마시스는 카운터에 있었다.
"어서오세… 응?"
그는 가게에 웬 가면을 쓴 사람이 들어오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어서 들어오는 수정이를 보자 금세 눈이 커지는 마시스.
나는 그가 알아보기 쉽도록 가면을 벗었다.
"어르신!"
"껄껄. 그래. 몸은 좀 괜찮은가?"
"걱정해주신 덕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 그리고 구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마시스가 또 한 번 깊은 존경의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사람 참. 허허. 그나저나 자네 수비대원이라고 들었네만 여기 있어도 되나…?"
"수비대장님께서 살아 돌아온 병사들에게 전원 휴가를 주셨습니다."
"음… 그랬구만. 근데 자넨 쉬지 않고 여기서 뭘 하는 겐가?"
"할아버지가 몸이 좀 편찮으셔서요. 제가 돌봐드려야 되기도 하고 가게도 지금은 제가 꾸려나가고 있어요."
"음, 그래?"
왠지 남일 같지가 않았다.
언젠간 나도 몸이 약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지금 마시스의 모습이 손주들의 모습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착잡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나타났다.
"콜록! 손님이 오신 게냐?"
알록달록한 색깔의 옷을 입은 노신사가 계단으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정장인 듯 아닌 듯, 기이한 옷을 입은 그는 연신 기침을 하고 있었다.
마시스가 말했다.
"할아버지! 이제 제가 요리하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제 무리하시면 안 돼요."
"끙, 난 아직 괜찮다 이 녀석아! 아직 청춘이야!"
마시스의 할아버지로 보이는 남자는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있었다.
건강이 많이 좋지 않은 지, 기침을 계속 했지만 마시스는 결국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마시스가 나를 소개했다.
"할아버지. 이분은 절 구해주신 잭슨 님이라고 해요."
"음?! 이 분이 혼자서 그 많은 고블린들을 쓰러트린 그 용사분…?"
"네, 맞아요."
"오오…! 반갑습니다.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잘머거스'라고 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