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젊은이 009화
제9화
찌르고 베고.
걷어차고 두들겨 패고.
고블린들을 헤치며 용감하게 달려가던 나는 놈들의 부락이 보이는 산까지 3분의 1지점을 남겨두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벌떼처럼 나타난 고블린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기 때문이다.
"끙, 숫자가 너무 많은데."
나는 그제야 이 퀘스트가 왜 4인 파티를 권유했는지 알 것 같았다.
놈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리고 아까보다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하나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레벨업은 잘된다는 것.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한번 나올 때마다 20마리씩 나오니 경험치가 쭉쭉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올라가던 내 레벨은 어느새 7레벨이 되어있었다.
어느새 고블린을 정리한 나는 허리를 두들기며 포션을 꺼내 마셨다.
"아이고 힘들다."
[하급 생명력 포션을 복용하셨습니다.]
[100의 생명력이 회복됩니다.]
"캬아. 역시 운동하고 나서 먹는 음료수가 제 맛이라니깐. 껄껄. 근데 이거 맛있네. 딸기 맛이 썩 괜찮아."
잠깐이지만 현실에서 이런 음료수를 판다면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인들에겐 인기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이가 어린 친구들에겐 꽤 잘 팔릴 것 같은 맛에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남아있는 포션을 확인해보니 120개정도가 있었다.
…괜히 혼자 한다고 그랬나?
약간의 후회가 밀려왔다.
이대로 가다가는 분명 산에서 포션을 다 써버릴게 자명했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산에 들어서면 얼마나 많은 고블린들이 나올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에휴, 차라리 물약이라도 많았으면 좋으련만…."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건 그때였다.
"꺄악!"
"엥. 무슨 소리지?"
"꺄아악!"
여자의 비명소리.
아무래도 혼자인 것 같았다.
"저리 가 이 나쁜 놈들아!"
왼쪽에 있는 숲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위험에 처한 것 같아서 수풀을 헤치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내 누군가 싸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얀색 옷에 하얀색 후드를 쓰고 있는 가녀린 여인.
그녀는 나무를 등지고 고블린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지팡이 같은 것을 휘두르고 있었다.
"다가오지 마! 다가오면 때려버린다!"
"키륵! 인간! 맛있다! 먹는다!"
…진짜 혼자네?
그 많은 고블린들을 눈앞에 두고도 기죽지 않는 여인이 꽤나 흥미로워서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위기를 보고 모른 척하기엔 조금 양심이 찔려 왔다.
그래서 나는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부스스스-
"키륵…?"
제일 가까이 있던 고블린이 뒤돌자, 나는 재빨리 녀석에게 돌멩이를 던졌다.
[1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악! 인간이다!"
역시 무기가 아니라 그런지 큰 데미지는 주지 못하는구만. 쯧.
돌멩이에 맞은 녀석이 크게 외치자 앞에 고블린들도 하나, 둘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니들 평소에 잘 씻고 다니냐?"
"킥! 고블린 씻는다! 잘 씻는다!"
"고블린! 청결하다! 깨끗하다!!"
"인간! 고블린 놀린다! 잡아먹는다!"
"씻는데 왜 냄새가 그 모양이냐. 똑바로 씻는 거 맞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고블린들은 나와 말장난을 주고받다가 제 분에 이기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제일 먼저 덤벼온 건 역시나 돌멩이에 맞은 녀석이었다.
"입을 찢어주겠다! 키이익!"
나는 검을 휘둘러 오는 고블린에게 뒤돌려차기를 날렸다.
그것이 신호탄이 된 듯.
모든 고블린들이 일제히 덤벼오기 시작했다.
그래, 이 맛이지…!
"드루와, 드루와!"
빠악! 퍽! 빠아악! 우드득!
나는 고블린들과 17대 1로 맞짱을 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이 흡사 제철에 낚은 잉어처럼 파닥거리며 날아다녔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개멋있어…."
방금 전까지 위험에 처했던 하얀 옷의 여인.
그녀는 백마탄 왕자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고블린들이 잿빛으로 흩어지자, 나는 여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데.
"응?"
"어?"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 * *
나의 아내, 유선영은 위암이었다.
그것도 꽤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아버려서 걸리면 시한부 선고나 다름없다고 여겨지는 말기 암 환자.
원래는 6개월이라는 시간을 선고 받았었지만, 2년이나 가까이 투병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내 앞에 있는 이 여인의 덕분이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아버님. 1년만이죠?"
김수정.
아내를 담당하고 수술해주었던 마음씨 따뜻한 여의사였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넌… 잘 지냈니?"
"저야 뭐, 보시는 것처럼 즐겁게 살고 있어요."
…즐겁게 살고 있다라.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너도 이 게임을 즐기는 모양이지?"
"네, 오랜만에 휴가라서 들어왔는데 이 모양이 됐네요. 하하…."
그녀가 멋쩍은 듯 웃음을 짓더니 화제를 돌렸다.
"아크스타를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으세요. 아까 고블린들과 싸울 때 저는 멋진 백마탄 왕자님이라도 나타난 줄 알았다니까요?"
김수정이 살짝 볼을 붉히며 말하자, 나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백마는 무슨, 내 흰머리를 보고 착각한 모양이구나. 껄껄껄."
"그나저나 레벨이 몇이세요? 엄청 잘 싸우시던데."
"레벨…? 7이지 않을까 싶구나."
자세히는 모른다.
상태창을 안보고 싸운 지가 꽤 되어서. 맞나? 음, 맞군.
"7…이라구요?"
그녀는 믿지 못하겠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도 그렇고, 요즘 젊은이들은 나 같은 늙은이들의 말을 잘 믿지 못하는 듯했다.
아마 내 말을 믿었다면, 벌써 아까 그 젊은이들이랑 같이 사냥하고 있었겠지.
그때, 방해꾼들이 나타났다.
"키익! 저기다!"
"인간이다! 잡아라!"
갑자기 몰려오는 엄청난 수의 고블린 떼들.
눈대중으로 어림잡았는데도 대강 60마리 이상인 것 같았다.
고블린들이 순식간에 우리를 둘러싸며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김수정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 해야겠구나."
"그래야겠네요."
그녀의 양손이 빛에 휩싸이며 내게 뻗어졌다.
갑작스런 상황에 조금 당황했지만, 나는 금세 빙긋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빛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5분간 방어력이 44% 상승합니다.]
[성스러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3분간 최대 체력이 22% 증가합니다.]
…이게 미도가 말했던 버프라는 건가.
나는 무언가 차오르는 충만감을 느끼며, 주위를 돌고 있는 2개의 빛 무리를 보았다.
그것은 나를 지키려는 듯 주변을 맴돌며 선회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라."
동시에 눈앞에 창이 떴다.
[크리스탈 님이 파티를 신청하셨습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Y/N]
나는 그것을 보며 씩 웃었다.
"충분하다."
[파티가 결성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는 가까운 고블린의 목에 단검을 쑤셔버렸다.
한 방에 절명한 고블린의 목에서 피가 울컥 솟았고, 단검을 뽑아 들며 그들의 사이를 바람처럼 움직였다.
재빠르고 날렵하게, 그러면서도 우아하고, 때론 강력하게.
그들에게 공포와 같은 움직임을 선보이며 무자비하게 움직였다.
푹!! 서걱-! 서걱! 푸욱!
주저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쓰는 칼이었지만 무자비하게 베고 찌르고 또 베었다.
들려오는 단검의 강철 같은 숨소리가 피를 머금고 울부짖었고,
나는 고요히 그것을 들으며 격정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허… 진짜 7이라고?"
뒤에서 지켜보던 김수정의 눈은 찢어져라 커져 있었다.
그녀는 내 머리 위에 떠 있는 레벨을 확인하고는 헛웃음만 짓고 있었다.
레벨 7이 고블린 60마리와 대등하게 싸운다는 게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잘못 본 게 아닌지 눈을 비비는 그녀였지만, 다시 봐도 7이라는 사실에 그녀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래도 정신은 차렸어야지.
"캬아악!"
옆에서 덤벼오는 고블린을 보며 김수정은 살짝 몸을 떨었다.
내 레벨을 보느라, 방심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칫, 덤벼…!"
그녀는 손에 들고 있는 나무 지팡이를 고쳐 잡으며 때릴 자세를 잡았고, 놈들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지팡이를 휘두르려는 순간.
휘리릭-! 푸학!
내가 던진 비수가 놈의 심장에 죽음을 선고했다. 고블린은 그대로 심장을 부여잡고 그 자세 그대로 잿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멍한 표정의 김수정에게 물었다.
"괜찮으냐?"
"네? 아, 네. 괜찮아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심장에 꽂혀있던 단검을 뽑아든 나는 휘날리는 잿빛을 온몸에 감으며 놈들의 중심부을 향해 뛰어들었다.
"와라! 이 냄새 나는 놈들아!"
* * *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모든 고블린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60마리라 쉽지는 않았지만, 김수정의 버프가 있어서 생각보다는 무난했다.
우리들은 근처에 있는 나무에 걸터앉았고, 나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후우…."
"괜찮으세요?"
김수정이 다가와 또 다른 빛을 나에게 흘려보냈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정신이 또렷해지고 생동감이 느껴지는 기분이랄까.
[슬로우 힐을 받았습니다.]
[5초간 125의 생명력이 천천히 회복됩니다.]
"음, 고맙구나."
조금씩 차오르는 생명력을 보며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나저나 이런 마법도 있었군. 신기하네.
"아버님."
"응?"
"진짜 레벨이 7이세요?"
그녀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순진하게 물어오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장난기가 발동하고 말았다.
"아닌데?"
"그쵸? 역시 뭔가가 있…."
"8이야. 껄껄껄."
"……."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그녀는 파티 창을 열어 진짜 내가 8레벨임을 확인하고는 경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뭐, 여러 가지."
시시콜콜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언제 또 고블린들이 습격을 해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나오는 고블린들도 수상했고, 나도 짐작 가는 바가 있어서 빨리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김수정에게 말했다.
"어쩔 생각이냐, 난 이대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갈 생각인데. 너만 괜찮다면 함께 가면 좋을 것 같구나."
"저야 물론 대찬성이죠!"
김수정이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저 '크리스탈' 님이 당신을 친구로 등록하셨습니다.]
…친구로 등록했다라. 이따가 나도 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해야겠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슬슬 움직여볼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