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장. 익숙한 컴백 (1)
영화 ‘사랑길’ 크랭크인이 엊그제인 거 같은데.
순식간에 몇 달이 지나가고 말았다.
그동안 영화 촬영도 촬영이지만, 우리 HTB의 세 번째 앨범 역시 빠른 속도로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지난번에 최용하 프로듀서가 추가 녹음을 진행했으면 하는 부분까지 전부 레코딩을 마치고, 컴백 일정이 확정됨과 동시에 앞으로의 스케줄 역시 하나하나씩 잡혀 가고 있었다.
승훈이 형이 나와 멤버들을 회의실로 집합시킨 뒤에 앞으로의 활동 방향성에 대해 물었다.
“혹시 ‘이건 반드시 출연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프로그램 있어? 만약에 있다면 여기서 바로 말해 줘.”
이때, 준서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어, 준서, 말해 봐.”
승훈이 형이 준서가 말하는 프로그램을 수첩에 바로 받아 적을 준비를 했지만.
준서는 원하는 프로그램을 말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다른 질문을 꺼내기 위해 손을 든 거였다.
“궁금한 게 있어서요.”
“뭔데?”
“저희가 나가고 싶다고 하면, 그 프로그램에 나갈 수 있는 건가요?”
프로그램 출연은 결코 쉽지 않다.
물론 프로그램에서 해당 연예인을 게스트로 섭외하고 싶어서 먼저 출연 요청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섭외 요청을 받는 게스트는 생각보다 꽤나 한정되어 있다.
대부분은 활동이 왕성하고 잘나가는 연예인들이 나오기를 원한다.
무명 가수나 배우가 나와도 시청률에 큰 도움이 안 될 테니까 말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프로그램을 보게 만드는 것. 그리고 이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는 것이 바로 게스트다.
승훈이 형이 어깨를 한 차례 으쓱이면서 말했다.
“너희 정도 되면, 원하는 프로그램은 언제든 나갈 수 있는 급은 돼.”
“정말요?”
준서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승훈이 형은 오히려 준서의 이런 반응이 더 놀랍게 느껴지는 모양인 듯했다.
“너희도 다 알고 있던 거 아니냐.”
나와 데이브는 알고 있었다.
HTB로 활동하기 이전부터 이미 연예계에 발을 들인 상태였고. 솔로로 움직일 당시에도 우리들의 출연을 원하는 프로그램은 상당히 많았다.
나나 데이브를 어떻게든 모셔 가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제작진의 모습을 너무 자주 봤었다.
HTB도 마찬가지다.
세계에서 제일 잘나가는 보이 그룹인데, 우리가 먼저 나가겠다고 하면 그쪽 제작진은 이게 웬 횡재냐 할 것이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 기분일 수도 있다.
우리가 그 정도의 영향력은 된다.
승훈이 형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기던 준서가 추가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저, 거기 나가 보고 싶어요.”
“뭐?”
“예전에 태오 형이 나갔던 방탈출 예능 있잖아요.”
“‘위대한 탈출’ 말하는 거야?”
“네. 그거, 1화부터 정주행하면서 보고 있는데, 엄청 재미있더라고요. 그리고 거기 나오는 장치들도 신기하고. 보니까 저도 출연해 보고 싶어졌어요.”
승훈이 형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생각을 듣고 싶어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이미 거기에 한번 출연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으니까. 준서하고 나는 같은 그룹의 멤버이기도 하고, 잘되라는 뜻으로 경험자로서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흘려 주기로 했다.
“거기, 머리보다는 눈치가 빨라야 활약할 수 있더라.”
“그래요?”
“어. 그리고 누가 퍼즐을 많이, 빠르게, 잘 푸느냐에 따라 활약상이 늘어나고, 그만큼 출연 비중이 늘어날 테니까 그런 거 잘 계산해 둬.”
“알겠습니다. 명심할게요.”
기왕 나가기로 한 거, 우리 그룹 멤버가 맹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더 좋지 않겠나.
더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라고 말을 하자, 준서가 내게 추가 질문을 건넸다.
“거기 프로그램, 전부 다 리얼이에요?”
원래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건 대본이 존재하는 법이다.
물론 위대한 탈출 역시 그런 게 존재한다.
그러나 추격자들이 우리를 보고도 못 본 척하면서 일부러 극적인 상황을 만들기 위한 연출을 한다든지, 이런 것들을 제외하고는 딱히 뭔가가 구체적으로 짜여 있진 않았다.
촬영이 시작되고 중반도 안 지났는데 추격자한테 잡혀 버리면, 그대로 방탈출도, 방송도 전부 끝나 버릴 게 뻔하지 않은가.
약간의 봐주기식이 존재한다는 말을 듣고 준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방송 보는데, ‘어? 저 각도에서 저게 안 보인다고?’라는 생각이 몇 번 들 때가 있었거든요. 역시 방송은 방송이네요.”
“그렇지 뭐, 근데 예능 프로그램치고는 웬만하면 다 실제 상황처럼 움직이니까 출연해 보면 일하고 있다는 느낌은 거의 안 들 거야. 친한 지인들끼리 방탈출 게임 하러 왔다는 생각이 더 진하게 들걸.”
“그럼 꼭 나가야겠네요. 매니저님만 믿고 있을게요!”
준서가 다시 한번 위대한 탈출에 나가고 싶다고 승훈이 형에게 어필했다.
승훈이 형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들려주면서 준서의 이름 옆에 ‘위대한 탈출’이라는 글자를 적어 뒀다.
“그 밖에 다른 멤버들은? 준서처럼 개별로 나가도 되니까 원하는 프로그램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말해도 돼.”
그러자 준서에 이어서 니암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면 저, 거기 나가 보고 싶습니다.”
“어디?”
“‘랩스타’요.”
랩스타라면, 나도 알고 있다.
래퍼들이 나와서 랩 배틀로 대결을 펼치는, 서바이벌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기억한다.
승훈이 형이 니암의 랩스타 참가 의사에 크게 놀랐다.
“거기 생각보다 많이 빡셀 텐데, 괜찮겠어?”
“네, 예전부터 제 실력이 어디까지 왔는지 한번 검증을 받아 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거든요. 근데 노래라는 건 주관적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나마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건 대중의 시선이라고 보고 있어서…… 이번 기회에 저 스스로를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서바이벌 오디션은 몸도, 마음도 상당히 지치는 콘셉트를 지닌 프로그램이다.
예전에 해피모드 멤버들 중에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이 몇 명 있어서 같이 식사하는 자리를 통해 당시의 일화를 몇 차례 접했었는데,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젓곤 했었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내 능력을 보여 주고, 그걸로 평가를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부담이 될 텐데.
여기에 조금만 실수하거나, 아니면 제작진이 악의적인 편집을 할 경우에는 자신이 죽을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만큼의 악플을 받을 수도 있다.
안 그래도 경연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데, 이런 반응들이 참가자의 멘탈을 더욱 박살 내곤 한다.
그래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준서나 기타 다른 멤버가 이거 하고 싶다, 저거 하고 싶다 말을 할 때에 단 한 번도 반대 의사를 드러내지 않았던 승훈이 형이 처음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을 보였다.
“괜찮겠어? 많이 힘들 텐데.”
승훈이 형도 나와 똑같은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니암은 결심을 굳힌 모양인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어떻게든 해내겠습니다.”
이 와중에 유일하게 니암의 랩스타 출연 의사를 응원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데이브였다.
“그래,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직접 확인하고 부딪친 다음에 그것을 극복해야 강해질 수 있는 법이지. 잘 생각했다. 나는 너 거기 나가는 거 찬성이야.”
“감사합니다, 형.”
데이브다운 말이었다.
하기야,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계속해서 깨뜨려야 강해질 수 있는 법이다. 그 한계에 계속 갇혀 있다면, 결국 그 사람의 역량은 거기까지밖에 안 되는 것이다.
나도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 나 자신을 극복하고 극복해 온 케이스다.
그래서 이렇게 유일무이한 SSS랭크도 달성하게 되었다.
니암은 가수로 데뷔하기 위한 준비 과정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랩을 배우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랩에 관심은 많았고 본인도 그걸 즐겨 부르는 정도는 됐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무대에 서서 래퍼로서의 기량을 뽐냈던 적은 없었다고 들었다.
그런 만큼 언젠가 한 번쯤은 자신이 어느 위치까지 올라가 있는지 확인하고, 거기에 맞는 플랜을 세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보고 있다.
“승훈이 형.”
내가 형을 불렀다.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자, 승훈이 형이 마지못해 알겠다고 답했다.
“그래, 데이브도 그렇고, 태오까지 이렇게 말을 하는데, 안 된다고 할 수 없지. 알았다. 랩스타 측에다가 연락해 둘게. 그쪽 제작진은 아주 신나겠네.”
“왜요?”
“네가 나온다고 하니까.”
적어도 1, 2화 시청률은 보장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효과다.
니암의 출연만으로 유입되는 시청자 수를 확 끌어올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여태껏 우리 멤버들은 단 한 번도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아주 가끔 우리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이 인터넷 곳곳에 보일 때가 있었다.
니암의 랩스타 출연은 그런 의견을 타파할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반대도 될 수 있다.
괜히 호기롭게 나갔다 예선 통과조차 못 한다면, 방금 언급했던 그 논란의 불은 더욱 활활 타오를 것이다.
그래도 그게 무서워서 도전조차 안 해 본다는 건 더 안 좋은 일이다.
“니암, 나중에 우승하면, 우리한테 크게 한턱 쏴라.”
“태오 형 말대로 뭐든 사 드릴 테니까 제발 우승했으면 좋겠어요.”
실력자들이 많이 나오는 프로그램이지만, 그래도 내가 봐 온 니암 역시 만만치 않은 랩 솜씨를 지니고 있다.
니암이라면 틀림없이 잘 해낼 것이다.
우리 HTB의 자랑스러운 랩 담당이니까.
그렇게 HTB의 이번 앨범 활동 기간 전반에 아우르는 방향성을 정한 뒤.
컴백 쇼케이스에 관한 정보도 같이 전해 들었다.
“이번에도 MC는 유이빈 씨가 맡아 줄 거야. 다들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이빈 씨 말고는 생각도 안 해 봤어요.”
“저희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MC 맡아 주셨으니까요.”
물론 결과적으로는 이빈이가 쇼케이스 진행자를 맡아 주기로 했지만, 사실 이 과정이 평소보다는 꽤나 험난했다.
우리 측에서 조건을 너무 낮게 책정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이빈이의 스케줄 문제가 컸다.
나처럼 이빈이도 가수 활동과 배우 활동을 같이 겸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스케줄이 간당간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오랜 조율 끝에 어렵사리 우리 쇼케이스 MC를 맡아 주기로 결정되었다.
‘나중에 이빈이 만나면 조언 좀 몇 개 구해 봐야겠네.’
나보다 먼저 가수, 배우 활동을 시작한 선배니까, 도움이 될 만한 말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차올랐다.
* * *
컴백까지 이제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들은 뮤직비디오, 앨범 사진 촬영, 안무 연습, 기타 앨범 활동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우리 HTB가 세 번째 앨범을 발표하게 될 쇼케이스 현장을 방문하기로 한 날이다.
데뷔 쇼케이스 때와 똑같은 장소를 대여해서 그런지 현장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준서가 힘껏 내부 공기를 들이마시며 말했다.
“여기 보니까 강제로 초심을 되찾는 느낌인데요?”
“그러게 말이야.”
그때는 참 뭐랄까.
막 데뷔하는 그룹이라 그런지 어색한 게 한둘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다들 어엿한 가수가 되어서 그런지 초짜티가 나지 않는다.
역시 시간과 노력만큼 확실한 해결책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