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라를 구한 톱스타-189화 (189/250)

제49장. 투잡 (3)

나빈이를 보자마자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단지 기분만 그런 건 아니었다.

실제로도 그랬으니까 말이다.

물론 이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리스는 굳은 표정으로 저 멀리서 걸어오는 홍나빈을 쳐다보…… 아니, 노려봤다.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 원인이 나라는 것도 아주 잘 안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지금 이 상황은 최악이었다.

“아, 갑자기 볼일이 생겨서, 나 잠깐만 자리 좀 비울게.”

“어디 가세요, 선배님.”

내가 먼저 장소를 이탈하려고 하는 순간, 나빈이가 그보다 더 빠르게 나를 불러 세웠다.

망할.

나빈이도 나와 같은 헌터라는 걸 잠깐 망각해 버렸다.

“저 일부러 피하시는 건 아니죠?”

“그, 그럴 리가. 아까 감독님이 나 찾으시는 거 같아서. 그래서 잠깐 가려고 했던 것뿐이야.”

그러나 때마침 근처에 있던 오 감독이 나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요. 저, 태오 씨 찾은 적 없습니다. 태오 씨가 다른 스태프하고 저를 헷갈렸나 보네요.”

이 눈치 없는 양반아.

오 감독이 영화 제작에 대한 재능은 상당히 뛰어난 편인데, 이런 방면에서는 그렇게까지 눈치가 빠르진 않은 모양인가 보다.

뭐…… 나와 나빈이 그리고 아이리스, 이 삼각관계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나빈이 언니 정도나 알까.

알고 있는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현 상황의 문제 해결이 먼저다.

아이리스가 표정을 풀고서 나빈이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에요, 나빈 씨.”

“아이리스 씨도요. 활동 많이 하시더라고요. 방송 여기저기에 많이 출연도 하시고.”

“네. 저를 찾아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요. 덕분에 좋은 프로그램에 이곳저곳 출연할 수 있는 기회가 꽤 생겼죠.”

“다행이네요.”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나빈 씨.”

과연 정말로 다행이고 과연 정말로 고마워하는 걸까.

두 사람의 눈빛만 보면,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처럼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거 같은데.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게 절대로 아니다.

가운데에 스파크가 튀길 정도로 서로를 향한 눈빛이 너무나도 사납다.

그리고 하필이면 이 중간에 선 나는 참…… 다시 생각해 봐도 불쌍한 녀석이다.

“그, 그렇지. 나빈아, 어쩌다가 오늘 카메오로 출연하게 된 거야?”

아이리스는 드라마나 영화 곳곳에 가끔씩 얼굴을 비쳤으니까 주연 배우까지 따내게 되었다는 건 이제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나빈이의 경우에는 이 현장에 오기까지 어떤 일련의 과정을 거쳤을지 전혀 상상이 안 간다.

이에 대한 대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작가님이 저한테 먼저 연락을 해 주셨거든요. 혹시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저희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해 주실 수 있겠냐고.”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에요. 저, 이 드라마 영화 OST 부르기로 했으니까요. 그래서 아예 뜬금없는 제안은 아니었어요.”

“아, 그래?”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HTG한테 드라마 OST 의뢰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거 같기도 하다.

근데 그게 이 영화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빈이도 당시에는 몰랐다고 한다.

“선배님하고 아이리스 씨가 캐스팅되기 이전부터 음악감독님하고 미팅 가지고 곡 작업에 대한 논의를 어느 정도 마쳐 둔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저도 뉴스 보고 많이 놀랐어요.”

물론 나도, 아이리스도 놀랐다.

의도치 않게 우리 회사 소속 아티스트들이 영화 ‘사랑길’ 현장에서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그래도 낯선 현장에서 이렇게 한 명이라도 아는 얼굴을 보게 되니까 안심이 되긴 한다.

“대사 연습은 잘해 왔지?”

“연습이라고 해 봤자 두 줄이 다던데요.”

“그것만으로도 어디야. 보통 다른 배우들은 대사 한 줄조차 못 받는 경우가 수두룩한데.”

무명 배우의 설움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게다가 나는 나빈이가 연기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빈이가 소화해야 할 대사량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만 이름 없는 엑스트라 배역에 관심이 쏠렸다.

“셋이 모였으니까, 같이 리딩이라도 한번 해 볼까?”

“좋아요. 저, 메이크업만 받고 올게요.”

“그래, 알았어.”

사실 나빈이 정도면 굳이 메이크업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래도 카메라 앞이니까, 최대한 멋있게, 예쁘게 사람들 앞에 서고 싶은 욕심은 연예인으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빈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리스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나빈 씨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알았더라면 나빈이한테 붙들리기 전에 일찌감치 자리를 비웠을 것이다.

그래도 나빈이하고 아이리스가 예전처럼 막 서로 은연중에 쏘아붙이고, 보이지 않는 전쟁을 펼치는 수준까진 아니게 되어서 참 다행이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니까 나빈이하고 아이리스도 서로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나름 많이 친해졌나 보네.”

“저하고 나빈 씨가요?”

“어, 친해진 거 아니야?”

“친해졌다기보다는 그냥 이런 상황에 적응해 버린 거 같은데요.”

심지어 던전 탐험대 때 둘이 같이 출연하기도 하고 말이다.

시간이 해결해 준 게 아니라, 둘이 같은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우리 회사 관계자들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 * *

“카메라 롤! 레디…… 액션!”

슬레이트 신호와 함께 나와 아이리스는 서로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엉거주춤 카페 안으로 발을 옮겼다.

우리가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카페 알바생을 연기하고 있는 나빈이가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채 환하게 미소 지으면서 말을 붙였다.

“어서 오세요!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클레이 씨, 뭐 드실래요?”

“저요? 저는…… 카페라떼 마실게요.”

“카페라떼 한 잔하고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클레이 씨, 사이즈는요?”

“보통으로요.”

“둘 다 그렇게 해 주세요.”

나빈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겠다고 답했다.

이때, 오 감독이 ‘컷!’을 외쳤다.

“세 분 다 잘하셨는데, 뭔가 좀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요. 나빈 씨, 혹시 대사 몇 줄 더 추가해도 될까요?”

“저요?”

“네, 보니까 카메라 앞에서 긴장 안 하고 잘하시는 거 같아서요. 연기 실력도 괜찮고. 대사 좀 추가해도 문제없을 거 같은데, 어때요?”

아주 짧은 연기임에도 불구하고 실력을 인정받은 나빈이는 오히려 얼떨떨한 반응을 보였다.

이때, 내가 나빈이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오케이하라는 뜻이었다.

나빈이가 나와 시선을 교차한 직후, 짧은 고민 끝에 알겠다고 답했다.

“네, 그러면 대사 조금만 더 붙일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오 감독이 작가들을 불러 빠르게 대본 수정에 나섰다.

나는 이 현상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잘했어, 나빈아.”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런데 정말 오 감독님 말대로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저, 연기해 보는 거 오늘이 처음인데.”

“그런 것치고는 잘했는데? 아이리스도 그렇게 생각하지?”

두 사람이 서로 ‘친해지길 바라.’라는 느낌으로 일부러 아이리스에게 말을 붙여 봤다.

처음에는 나빈이를 보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아이리스지만, 그래도 맞는 걸 아니라고 우기는 여자는 아니었다.

“네, 저도 나쁘지 않게 보였어요.”

“……감사합니다.”

아이리스한테 인정을 받아서 그런 걸까, 나빈이는 굉장히 미묘한 표정으로 아이리스에게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 감독이 직접 나빈이에게 수정된 대본을 건네줬다.

대본을 확인한 나빈이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조금 추가된 게 아닌데요?”

2배가량 늘었다.

그러나 기존에 나빈이가 소화해야 할 대사량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두 배라고 해도 엄청 많이 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기 초보자인 나빈이가 보기에는 이것도 많아 보일 것이다.

그래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였다.

오 감독은 놀라는 나빈이를 애써 진정시켜 주면서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나빈 씨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방송도 아니고. NG 여러 번 내도 상관없어요. 저희가 알아서 잘 편집해 줄 테니까요.”

편집의 힘을 빌리면, 아예 못 써먹을 영상조차도 명장면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만큼 편집의 힘은 위대하다.

나빈이는 오 감독의 말을 한 번 더 믿어 보기로 결심한 모양인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시작된 촬영.

우리가 가게에 들어서자, 나빈이가 아까처럼 같은 대사를 반복했다.

“어서 오세요!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클레이 씨, 뭐 드실래요?”

“저요? 저는…… 카페라떼 마실게요.”

우리가 음료를 주문하는 부분까지는 동일했다.

이다음, 나와 아이리스가 자리를 잡고 앉는 동안에 나빈이가 목소리를 다시 한번 높이면서 이전에 음료를 주문했던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65번 손님!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흑당라떼 한 잔 나왔습니다!”

엑스트라 배우가 음료를 찾으러 오자, 나빈이가 활짝 웃으면서 ‘맛있게 드세요~.’라는 말을 건넸다.

오랫동안 카페를 드나들면서 직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는 그런 퀄리티였다.

‘나빈이가 예전부터 관찰 능력이 굉장히 좋은 편이었지.’

자연스러운 연기 덕분에 이번에도 NG 없이 계속해서 촬영을 이어 나갔다.

잠시 뒤, 오 감독이 확성기를 들었다.

“네, 좋습니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게요. 나빈 씨, 방금 연기 굉장히 나이스였습니다. 혹시 연기 학원 같은 거 다니시나요?”

나빈이가 오 감독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따로 연기를 배워 본 적은 없어요.”

“그래요? 근데 이 정도라면…… 나빈 씨, 재능이 있으시네요.”

머쓱한 미소를 짓는 나빈이를 보고 있자니 괜히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나빈이가 우리 소속사 아티스트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내 후배라서 그럴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 되었든, 나빈이가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 * *

무사히 촬영을 마친 나는 늦은 시간에 다시 회사로 복귀해야만 했다.

최용하 프로듀서가 내 파트 레코딩을 다시 했으면 좋겠다고 연락을 해 와서였다.

“계속 듣다 보니까 아쉬운 점이 몇 개 보여서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이런 부탁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영화 촬영 때문에 한창 바쁘실 텐데.”

“아닙니다. 힘든 일도 아니고. 그리고 우리 앨범 퀄리티에 관한 중요한 문제이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 일도 아닌데, 무조건 해야죠.”

“피곤하진 않으세요?”

“네, 멀쩡합니다. 목도 다 풀었으니까 바로 레코딩 시작하면 될까요?”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 차례 고개를 숙이면서 굽신거리는 최 프로듀서를 향해 나야말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부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영화 촬영에 앨범 작업까지.

‘이러다가 몬스터라도 나오면, 투잡이 아니라 쓰리잡이겠어.’

몸이 한 개라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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