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카메오 (4)
암기 자체는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가사나 안무를 외우는 것 자체도 기본적으로 암기력을 요하는 것들이었기에 대사도 예상했던 것보다 쉽게 외울 수 있었다.
문제는 이걸 연기로 어떻게 표현하느냐였다.
옷을 갈아입은 나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복장을 점검했다.
“옷이 딱 맞네요. 마치 제가 이 배역을 맡을 줄 미리 알고 준비한 것처럼.”
내 말에 의상팀이 호호 웃으면서 말했다.
“촬영장에는 오늘처럼 어떤 판타스틱한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의상을 전문으로 수선해 주는 분들도 따로 계세요.”
“그랬군요.”
어쩐지. 갑자기 내 신체 사이즈를 측정하길래 나는 내 사이즈에 맞는 옷을 골라 주려고 그러나 했다.
그게 아니라 아예 옷을 내 몸에 맞추려고 수선하기 위해서 그런 것일 줄은 몰랐다.
역시 현장이라는 건 참 대단하다.
양복을 갖춰 입고, 여기에 안경까지 착용한 상태로 마 PD와 스태프 앞에 섰다.
나를 보자마자 사람들이 감탄했다.
“잘 어울리시는데요?”
“진짜로 젊고 유능한 변호사처럼 보여요.”
“감사합니다.”
내가 뭘 하든, 스태프들은 오구오구 해 주는 그런 느낌이었다.
저들 입장에선 내가 구세주로 보일 테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리딩부터 해 보실까요?”
“예.”
내가 어디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동선 체크를 하는 김에 상대 배우와 연기 호흡도 같이 맞춰 보기로 했다.
‘너의 나그네’에서 여주인공 역할을 맡고 있는 윤소형 씨가 나를 보면서 밝은 미소로 인사했다.
“태오 씨랑 같이 연기하게 되어서 너무 신기하네요. 오늘 녹화,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많이 부족하겠지만, 부디 너그럽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어머, 괜찮아요. 이렇게 옷 갖춰 입고 서 있는 모습만 봐도 50퍼센트는 먹고 들어가겠는데요? 비주얼이 너무 좋으셔서 제가 만약 시청자라면 무조건 좋다고 했을 거예요.”
스태프뿐만 아니라 배우들도 내게 용기를 심어 주기 위함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열심히 칭찬을 해 주고 있었다.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 좌석에 탑승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첫 리딩에 들어갔다.
그 전에 마 PD가 먼저 내게 말했다.
“태오 씨, 리딩이니까, 대본집 보고 하셔도 됩니다.”
“하는 김에 제가 잘 외웠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대본 안 보고 해 보겠습니다.”
마 PD가 알겠다면서 리딩의 시작을 알렸다.
미리 알려 준 대로 걸음을 옮기면서 소형 씨가 앉아 있는 나무 그늘 아래 벤치 쪽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여긴 무슨 일이야?”
감정을 잡아 대사를 소화하는 윤소형.
리딩은 지금처럼 굳이 감정을 실어서 연기를 할 필요가 없다.
서로 대사를 한번 맞춰 보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냥 국어책 읽듯이 대사를 쭉 읊어 내려가기만 해도 상관없다.
그럼에도 윤소형이 저렇게 실전처럼 연기를 펼치는 이유는 내가 한 말 때문이었다.
내가 리딩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리허설 같은 느낌으로 해 달라고 먼저 부탁했기 때문이다.
실전처럼 한번 해 보고 나야 나도 제대로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선배님께서 부탁하신 사건, 검사 측에서 항소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
“예, 언론도 이 사건 어떻게 끝날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심신미약이라는 점과 자수했다는 것을 근거로 계속해서 감형을 요청하고 있는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거 같습니다. 검사 측에서도 뭔가 우리를 더 몰아붙일 증거를 찾아낸 거 같은데…… 이대로 가면 우리가 패소하게 될 겁니다.”
“패소는 안 돼. 그 사람, 무조건 무죄 만들어야 해.”
“감형만으로도 빠듯한데, 무죄라고요?”
“어.”
“그건 불가능합니다.”
딱 잘라 말하는 나를 향해 윤소형 씨가 매섭게 노려봤다.
“하기도 전에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마.”
“선배님, 선배님이 그 사람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검사와 판사는 모릅니다. 법정 싸움에서 사적인 근거를 들어 봤자 무의미하다는 거, 선배님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를 토해 내듯, 윤소형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소리쳤다.
분명 본촬영 전에 가볍게 거치는 리딩 과정일 텐데도 불구하고.
현장은 어느새 우리 두 사람이 펼치는 연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말할게. 그 사람, 무죄 만들어 줘. 부탁이야.”
“…….”
말없이 윤소형을 바라본 나는 한숨을 삼키면서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움직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카메라 밖으로 퇴장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소화해야 할 장면이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았던 정적도 내 퇴장에 맞춰서 사라졌다.
갑자기 마 PD가 나와 윤소형을 향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 소리가 다른 스태프들의 동참으로 인해 더욱 커졌다.
가까이서 내 연기를 지켜보던 준서도 스태프들과 함께 큰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윤소형도 내 연기에 대해 높은 평가를 들려줬다.
“연기 잘하시는데요? 깜짝 놀랐어요.”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좋게 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 PD도 내 연기를 보고 잔뜩 흥분한 모양인지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에 땀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나저나 아깝네요. 방금 그 장면이 본촬영이었더라면…….”
마 PD가 원하는 장면 그대로 나왔나 보다.
그래서인지 유독 아쉬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카메라 돌리게 할걸.
후회를 하는 마 PD를 위해서 나는 위로 아닌 위로를 해 줬다.
“걱정하지 마세요. 촬영 때에는 이거보다 더 잘하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태오 씨!”
“예.”
방금의 리딩을 통해서 내가 어떤 식으로 연기하면 좋을지, 마 PD가 바라는 장면이 무엇인지 대충 감을 잡았다.
녹음할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마 PD가 나한테 어떤 식으로 노래를 불러 줬으면 좋겠다고 즉각적으로 피드백을 줬다.
그게 가이드가 된 덕분에 쉽게 녹음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방금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스태프들의 호응이 내게 길라잡이 역할을 해 줬다.
‘좋아, 한번 해 보자!’
가수, 헌터에 이어서 세 번째 도전, 배우.
인생의 제3막이 시작된 느낌이다.
* * *
리딩이 끝나고 마 PD에게 본촬영 때에는 이것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듯이, 나는 단 한 번의 시도만으로 오케이 사인을 받아 냈다.
“좋습니다! 현장 정리한 다음에 바로 #23으로 넘어갈게요!”
“네!”
내 분량은 이제 끝났다.
연기하는 내내 NG 내면 안 된다는 긴장감이 들어서인지 안 나던 땀이 다 났다.
스태프들이 다음 촬영을 분주히 준비하는 사이, 마 PD가 나한테 다가와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태오 씨는 제 은인이세요!”
“은인이라니요.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PD님 덕분에 저도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연기에 새로운 눈을 뜬 그런 기분이다.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나를 보면서 준서가 고생했다는 말을 들려줬다.
“형,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시고. 연기까지 잘하시면 어떻게 해요.”
“뭐, 다 잘하면 좋지.”
“아까 PD님이 그러셨는데, 형 나온 거 7화에 나온다고 하니까, 나중에 꼭 챙겨 보라고 하셨어요.”
“그래? 알았어. 알려 줘서 고마워.”
‘너의 나그네’ 7화라.
잊지 말고 기억해 둬야겠다.
아무튼 촬영도 끝났으니까.
“좀 더 구경하다가 갈래?”
준서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렸다.
“충분히 다 본 거 같아요. 그리고 현장 보고 있으니까, 드라마 나올 때까지 오히려 더 못 기다릴 거 같더라고요. 방영되려면 한참 멀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 10화 촬영될 때쯤에 1화, 2화가 방영될 거라고 들었다.
멀긴 멀었네.
그래도 크게 상관은 없다.
스케줄에 따라 바쁘게 활동하다 보면 시간 금방 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
모처럼의 비번을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나온 김에 밥이나 먹으러 갈까?”
“형이 쏘시는 거죠?”
“내기는 저번에 끝났잖아.”
“농담이에요. 형 고생하셨으니까, 이번에는 제가 살게요.”
그렇게 나와야지.
문제도 잘 해결되었으니까,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차로 향했다.
* * *
다시 시작된 스케줄 지옥.
데뷔한 지 한 달은 넘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들을 찾는 곳이 많았다.
오늘은 멤버들과 단체로 커피 광고를 찍게 되었다.
특히나 커피를 좋아하는 데이브와 니암은 시종일관 밝은 얼굴을 유지했다.
영업 담당이 촬영 중간에 우리들에게 새로운 제품을 가져다주면서 말했다.
“이거, 이번에 저희가 출시하게 될 신제품인데, 한번 맛보세요.”
“감사합니다.”
인스턴트라서 직접 원두를 갈아서 만드는 만큼의 진한 풍미는 없다.
하지만 그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려는 노력의 흔적이 보여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자칭 커피 마니아인 데이브와 니암도 나와 같은 생각이 든 모양인지,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맛 괜찮군요.”
“이거 나중에 판매되면, 저는 계속 이것만 마실 거 같습니다.”
데이브와 니암의 칭찬이 이어지자, 영업 사원이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기쁜 마음을 표현했다.
“필요하시다면, 저희가 몇 박스 선물로 보내 드릴까요? 숙소 생활하시면서 마음껏 드실 수 있게요.”
“저희야 감사하죠.”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해서 내일 중으로…… 아니, 오늘 받아 보실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HTB가 애용하는 커피 제품.
이 타이틀만 달아도 마케팅은 대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도 부정은 하지 않겠다.
실제로 우리가 사용하는 제품들이 방송만 타면 죄다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곤 했으니까.
커피로 잠시 지친 몸을 달래는 동안, 준서가 스마트폰을 들고서 내게 화면을 보여 줬다.
“태오 형, 어제 드라마 출연했던 거, 반응 엄청 좋은가 본데? 악플이 거의 안 보여.”
내가 갑작스럽게 단역으로 출연했던 ‘너의 나그네’ 7화가 바로 어제저녁, 시청자들의 안방을 찾았다.
나도 어제 급하게 스케줄을 끝내고 실시간으로 드라마를 챙겨 보긴 했었다.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하게 나올 줄 알았는데.
내가 봐도 딱히 불편한 것 없이 자연스럽게 잘 나왔다.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할 무렵.
승훈이 형이 잠깐 나를 불렀다.
“태오야, 둘이서 이야기 좀 하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승훈이 형과 함께 잠깐 촬영 장소를 벗어났다.
승훈이 형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네가 연기하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본 사람들이 꽤 많은 거 같더라.”
“아, 나도 알아. 인터넷에서 보니까 반응 좋더라고.”
“아니, 내가 말한 건 시청자들이 아니라 드라마, 영화 쪽 관계자들이야.”
승훈이 형이 들려준 말은 내게 꽤나 신선한 충격을 줬다.
“이번에 너한테 정식으로 캐스팅 제의 들어왔는데, 대본 한번 볼래?”
잠시 맡았던 단역 일이 설마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될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