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라를 구한 톱스타-99화 (99/250)

제26장. 카메오 (3)

촬영장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들.

스태프들은 우왕좌왕하고.

마 PD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준서가 목소리를 낮추면서 나한테만 작게 속삭였다.

“형, 무슨 문제 터진 거 같은데요?”

“그러게.”

굳이 누구를 붙잡고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 PD한테 인사만 슬쩍 하고 빠지려고 했는데.

현장이 어수선해져 버린 탓에 그러기가 애매해졌다.

어쩐다.

“오늘은 그냥 갈까?”

“그러는 게 좋겠죠?”

우리는 어디까지나 잠깐 현장을 견학하러 온 사람들일 뿐이다.

괜히 여기서 어물쩍거리다간 스태프들이 더 신경 쓰이게 만들 거 같아서 일부러 자리를 비켜 주려고 했다.

그런데.

“어? 태오 씨!”

눈썰미 좋은 스태프 한 명이 우리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준서가 내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형, 어쩌죠?”

그냥 튈까?

이런 생각이 아주 잠깐이나마 들었다.

하지만 마 PD까지 우리가 왔음을 알아차려 버린 탓에 냅다 도망칠 수도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태오 씨하고, 옆에 계신 분은…… 준서 씨 아닙니까?”

“아, 안녕하세요.”

이 어수선한 상황 속이라 할지라도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나.

나와 준서가 멋쩍은 미소를 보내면서 마 PD와 짧게 인사를 나눴다.

마 PD가 계속 준서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내게 ‘설마?’하며 말했다.

“그…… 저의 팬이라는 분이 혹시…….”

“네, 맞습니다.”

원래는 마 PD를 놀라게 해 주려고 일부러 팬의 정체가 준서임을 감춰 왔었는데.

현장 분위기가 굉장히 애매모호해서, 나의 작은 서프라이즈 계획도 무의미하게 돌아가게 되었다.

마 PD가 아쉬운 마음을 토로했다.

“그러면 미리 저한테 말씀해 주셨어야죠. 준서 씨 올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제대로 맞이해 드렸을 텐데…….”

“아닙니다. 그보다 촬영에 문제가 생긴 거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아, 네. 아니, 괜찮은 건 아닙니다. 오늘 단역 맡기로 했던 배우가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어 버려서…… 골치 아픕니다.”

마 PD가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다시 침울해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딱 봐도 많은 고충이 느껴지는 그런 반응이었다.

하기야. 드라마 한 편 한 편 촬영하는 데 막대한 제작비와 시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소모된다.

그런데 갑자기 배우가 무단결근했다고 한다면.

아예 오늘 촬영을 접어야 한다.

하루가 통째로 날아가는 것이다.

몇 시간째 계속 딜레이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데, 하루 단위를 낭비한다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이다.

게다가 OST에 관한 건으로 회의할 당시, 음악감독이 분명 나한테 이렇게 이야기를 했었다.

촬영 일정이 많이 빠듯하게 잡혀 있다고.

마 PD의 속이 얼마나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을지, 쉽게 예상이 된다.

“당장 연락 가능한 배우는 없습니까?”

“지금 저희 스태프들이 연락을 쭉 돌리고 있는데, 아직까지 괜찮다고 하는 배우가 없는 거 같습니다.”

촬영지가 서울도 아니고.

지방에서 이루어지는 야외 촬영이다 보니 바로 이곳에 올 수 있는 배우가 과연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마 PD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제 실수입니다. 사실 그 단역배우, 업계 내에서도 이런 식으로 가끔씩 잠수 탄 적이 몇 번 있었거든요. 그거 보고 단호하게 쳐 냈어야 했는데…… 하아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마 PD를 보고 있자니 마치 내 일처럼 안타까웠다.

내 팬임을 자처하면서 나한테 메인 테마 OST곡까지 맡겼는데.

마 PD와 음악감독이 나한테 말하지 않았나.

나도 엄연한 출연자라고.

가만, 출연자?

“PD님, 혹시 그 배역, 대사가 얼마나 됩니까?”

“네? 그건 갑자기 왜요?”

이유야 뻔했다.

“제가 대신 그 배역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마 PD가 다른 의미로 경악했다.

* * *

이런 말을 하면 좀 그렇지만.

사실 내가 연습생 시절 때, 그러니까 헌터로 각성하기 전에 가수로서는 데뷔한 적이 없었지만 배우로서는 데뷔한 적이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아마 처음 듣는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한창 안무 연습실에서 연습에 매진하고 있을 당시.

잠깐 쉬기 위해서 휴게실에 있는 자판기를 찾아 음료수를 뽑으려고 할 때였다.

마침 휴게실에 먼저 와 있던 매니저가 누군가와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매니저의 대화 상대였던 한 중년 남성이 갑자기 이야기를 중단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거였다.

왜 저러지? 싶을 때.

갑자기 나보고 내일 촬영장에 나오라고 말을 했다.

무슨 촬영장인가 했더니, 아침 드라마 현장이었다.

그 자리에서 왜 갑자기 이런 캐스팅이 성사되었나.

촬영이 예정되어 있던 단역배우 한 명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서 입원을 하게 된 거였다.

그래서 그 단역배우의 이미지와 비슷한 배우를 급하게 찾다가 결국 나한테 그 기회가 넘어온 거였다.

결과는?

나름 PD한테 칭찬을 받을 정도로 잘 마무리가 되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마 PD에게도 알려 줬다.

“한 번뿐이지만, 그래도 나름 카메라 앞에서 대사 몇 번 해 본 경험이 있어서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말씀드려 본 겁니다.”

거절해도 상관없다.

내 입장에선 그래도 마 PD를 도와주고 싶다는 성의 표시 정도는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사실 내가 말만 이렇게 할 뿐이지, 마 PD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중히 거절하는 쪽으로 결과가 나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마 PD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나왔다. 마 PD의 전매특허, 갑작스럽게 손잡기.

이번이 두 번째 경험이었기에 첫 번째에 비해서는 그래도 크게 놀라진 않았다.

“정말 저희 드라마에 나와 주실 수 있습니까?”

“네, 뭐…… 소속사랑은 한번 통화를 해 봐야겠지만요.”

내가 이사직을 맡고 있다 보니, 내가 하고 싶으면 알아서 하라는 대답이 돌아올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드라마에 단역으로 딱 한 번 출연하는 건데.

이거 가지고 내 연예계 생활에 크나큰 위기가 도래할 일도 없을 테고 말이다.

그리고 나도 오랜만에 옛날 기억을 떠올리면서 연기라는 것도 해 보고 싶었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말하긴 했는데, 마 PD가 이렇게 격하게 환영하는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

“알겠습니다! 태오 씨가 맡아 준다면, 저야 당연히 환영이죠! 통화해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 언제든 기다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가벼운 걸음으로 스태프들에게 돌아가는 마 PD.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편, 준서가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형, 괜찮겠어요?”

“괜찮다니, 뭐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거요. 그거, 보통 일 아니잖아요.”

짧게 나오는 단역이라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대사를 암기하고, 그것을 연기로 풀어낸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나도 예전에 한번 경험해 본 적이 있기에 잘 안다.

그래도 뭐.

“재미있어 보이잖아. 안 그래?”

준서기 피식 웃었다.

“하여간 형도 참.”

원래 연예계 일도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했다.

이런 건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하면서 할 필요가 없다.

“일단 전화 좀 하고 올게.”

“근데 형, 누구한테 전화하려고요? 사실 형 정도면, 그냥 전화 안 해도 알아서 하시면 그만이잖아요.”

난 소속사한테 허락 맡아야 할 사람이 없다.

준서도 이걸 잘 알고 있어서 이런 말을 한 거였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 내가 단독으로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좀 그렇잖아. 우리 회사도 과정이라는 게 있다는 걸 보여 줘야지.”

“형, 진짜 보여 주기식 엄청 좋아하시네요.”

“적당한 허세는 몸에 이로운 법이거든.”

고민해 본 결과.

나와 같이 자주 움직이는 승훈이 형에게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여보세요?”

-……뭐냐…… 태오냐……?

“형 목소리가 왜 그래? 자다가 깬 사람처럼.”

-……점쟁이네, 점쟁이야. 아주 정확하게 잘 맞히네.

그냥 찍어 본 건데. 뭐야, 정답이었어?

-왜. 비번일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냐? 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생겼지. 실은 말이야.”

승훈이 형에게 지금 현장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빠르게 설명했다.

“……대충 이렇게 해서 내가 단역으로 출연하게 되었는데, 괜찮지?”

-니가 언제 우리들 허락 맡고 행동하던 녀석이었냐.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해. 괜찮으니까.

“땡큐. 알았어, 형. 자던 거 마저 자.”

-됐다. 잠 다 깼는데, 다시 자기도 아깝고. 슬슬 일어나야지. 아무튼 촬영 고생하고. 내가 해 줘야 할 일 있으면 연락해라.

“오케이, 알았어.”

승훈이 형하고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와서 그런지 대화도 짧게 끝났다.

저 멀리서 내 눈치만 살피는 스태프들.

과연 소속사(승훈이 형)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지, 매우 관심 있게 지켜보는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동물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미어캣들이 단체로 서서 한곳을 응시하는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는가.

마치 그 장면이 연상되었다.

간절한 스태프들을 향해 나는 양팔로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제야 스태프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나 저지르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 * *

대본을 받아 보고 나서야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PD님, 아까 분명 ‘단역’이라고 하셨죠?”

“예, 맞습니다.”

“그런데 대사량이 어마어마한데요?”

나는 단역이라고 해서 대사가 있어 봤자 한두 줄 정도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두 줄 수준이 아니었다.

대본 한 페이지를 거의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다.

“아, 거기에 등장하는 캐릭터 직업이 변호사거든요. 주인공한테 법적인 문제에 관한 내용을 설명해 줘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걸 한두 줄로 함축해서 표현하기가 어려워서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이렇게 대사 길이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법적 용어들도 심심치 않게 포함되어 있었다.

갑자기 괜히 맡기로 했나 하는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안 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스태프들이 오직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이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한단 말인가?

“알겠습니다. 일단 해 볼게요.”

“네! 시간은 넉넉히 드릴 테니까 한번 해 보시고, 배우들하고 리딩한 다음에 바로 촬영에 들어가죠. 그리고 출연료에 관한 건 저희가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단역배우 출연료 그대로 맞춰서 드리진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되고요.”

내 급에 맞춰서 주겠다는 말을 남긴 채, 마 PD는 다른 스태프들과 같이 남은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내가 소화해야 할 대사를 내 어깨 너머로 슬쩍 훔쳐본 준서가 기겁을 했다.

“우왓, 어지러워.”

“왜, 갑자기.”

“저는 긴 글만 보면 어지럼증이 몰려오는 병을 가지고 있거든요.”

도대체 공부하는 걸 얼마나 싫어하길래 저러나 모르겠다.

“근데 형, 이거 다 외우실 수 있겠어요?”

“해야지.”

가사라고 생각하고 외우면 빨리 암기할 수 있지 않을까?

일단은 시도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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