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컴백 (1)
시간이 지나면 데이브가 알아서 우리 회사로 먼저 찾아올 거란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일이 추진될 줄은 몰랐다.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데이브와 마주 앉은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아이리스가 재촉하기라도 했어?”
“아니, 내 의지로, 내 발로 직접 온 거다.”
“정확히 말하면 승훈이 형이 운전하는 차 타고 온 거지.”
“……나, 그냥 집에 간다?”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그냥 웃자고 해 본 말이야. 사람이 왜 이렇게 빡빡하게 굴어.”
아따, 농담도 안 먹히는 녀석일세.
일단은 진정부터 시키고.
“네가 말했던 ‘원하는 조건’들은 계약서 조항에 다 넣었으니까, 직접 확인해 봐.”
“…….”
데이브는 의심이 많은 성격이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 온 지인 관계라 할지라도 계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게 되면, 무조건 신중하게 검토를 해야 한다.
나도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래서 데이브에게 계약서를 천천히 살펴볼 수 있도록 최대한 시간을 많이 줄 생각이었다.
내용을 쭉 훑은 데이브는 ‘칫’ 하고 짧게 혀를 찼다.
“기가 막히게 다 넣긴 했군.”
“그렇지?”
만약에 뭐 하나 안 들어가 있다? 그러면 데이브가 또다시 난리 칠 게 뻔했기 때문에 하나도 빠짐없이 데이브가 요구한 것들을 다 수용하라고 했다.
우리 계약 담당자가 일을 잘해서 참 다행이다.
데이브가 펜을 쥐면서 내게 누차 경고했다.
“나중에 계약 조건 바꾸자고 딴소리하기 없기다.”
“그럴 일 없으니까 안심해.”
일방적으로 데이브에게 좋은 조건은 맞다.
하지만 나는 이보다도 더한 득을 얻을 자신이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데이브를 우리 회사로 데려오는 일 아닌가.
데이브 본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대한민국에서 녀석의 입지는 대단하다.
게다가 데이브는 나와 같이 출연하면 충분히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방송인이다.
우리 둘은 공통점이 상당히 많으니까.
지금 당장에야 우리 회사의 손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무조건 우리가 이득이다.
물론 데이브한테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다 이득을 보게끔 해야지.
그래야 계속 우리 회사에 남아 있으려고 할 테니까 말이다.
사인을 모두 마친 데이브가 내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오케이. 고생했어. 그리고 혹시 원하는 타입의 매니저 있으면 선정해서 붙여 줄게.”
“너처럼 말 많은 성격만 아니면 된다.”
“알았어. 그러면 그렇게 말 전해 둘게. 중요한 일은 다 끝났으니까, 밥이라도 먹으러 갈까?”
“…….”
데이브는 말 대신 고개만 아주 작게 끄덕였다.
어디 보자.
저번에 아이리스가 마음에 들어 했던 삼겹살집이라도 데려갈까?
아니면 귀한 손님을 모시게 되었으니까 비싼 거라도?
늘 생각하는 거지만, 오늘 점심, 저녁을 뭘 먹을지가 제일 고민되는 거 같다.
* * *
최재현 보도국장을 비롯해서 우리 HT 엔터테인먼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데이브의 영입 소식을 기사로 내보내 달라고 보도 자료들을 일부러 뿌렸다.
자료들을 보낸 지 1시간도 안 되었을 무렵.
인터넷에 데이브와 관련된 기사들이 수십 개도 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데이브, HT 엔터테인먼트와 손을 잡다!]
[특종! 헌터 랭킹 1위와 2위가 한솥밥을?]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 특급 헌터들의 연예계 도전기!]
역시, 기자들은 참 빠르다.
이럴 때에는 참 도움이 많이 된다.
반면, 우리 아이리스가 그토록 바랐던 나와의 스캔들 기사는 단 한 개도 올라오지 않았다.
아이리스의 매니저를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오늘도 아이리스는 계속해서 연예계 관련 소식을 다루는 언론 매체들을 모니터링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본인이 슬쩍 기삿거리를 제공하려고 했던 정황까지 포착되었다.
미수로 끝나긴 했지만 말이다.
‘남매가 참 특이해.’
아이리스와 데이브 덕분에 사람들의 관심이 우리 HT 엔터테인먼트로 쏠렸다.
이럴 때 뭐라도 하면 좋을 거 같은데.
내부 회의를 진행하던 도중에 양석정 팀장이 슬쩍 의견을 제시했다.
“이렇게 어그로 끌렸을 때 이사님 두 번째 앨범 곧 나올 수도 있다고 슬쩍 흘려보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다음 달에 컴백하시기도 하고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러고 보니 내 컴백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에 발표할 신곡은 이전에 최 프로듀서한테 요구했던 대로 발라드로 가기로 했다.
제목은 ‘결의’로 확정되었다.
내 노래는 다른 가수들의 노래와 달리 한 가지 특징이 있다.
헌터들에게 버프 효과를 줘야 한다는 게 주된 목적이다.
그렇다 보니 사랑이나 이별, 그리고 누군가를 유혹한다는 부류의 노래가 아닌 콘셉트를 추구해야 했다.
‘나의 길’처럼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 내게 닥쳐도 꿋꿋하게 나만의 길을 걷겠다는 느낌이라든지.
힘이 날 수 있는 그런 노래 말이다.
‘결의’ 역시 ‘나의 길’과 비슷한 콘셉트로 작사가 들어갈 예정이다.
양석정 팀장이 최 프로듀서에게 물었다.
“그냥 발라드는 축 처질 거 같아서 락발라드로 장르를 변경하셨다고 했죠?”
“예. 이미 이사님하고도 다 논의했습니다.”
나는 딱히 상관없다.
댄스곡이었던 ‘나의 길’과는 다른 장르면 어떤 거든 소화할 자신이 있었다.
모르는 장르라면?
그러면 배우면 된다.
이미 나를 가르쳐 줄 유명 트레이너들이 포진되어 있다.
내가 뭐 하나가 부족하다 싶으면, 트레이너들이 알아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곧바로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안 되겠다 싶으면, 데뷔 준비를 할 때처럼 탈인간적인 수련에 들어가면 그만이다.
지난번에 내가 몸소 실험을 해 보고 효과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첫 번째가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다.
이번에는 유현민 마케터가 아이디어를 냈다.
“그럼 티저 영상이라도 만들어서 공개할까요? PV 짧게 만들어서 공식 채널에 올려 두면 조회 수 폭등할 거 같은데.”
“난리 나겠죠. 사람들, 지금도 이사님 노래 언제 나오냐고 엄청 기대 중일 텐데. 이때 떡밥 한번 흘려 주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저도요. 현민 씨 생각에 동의합니다.”
연예계는 모든 계기가 다 마케팅의 수단이 될 수가 있다.
나도 그걸 최근에 알았다.
“PV 영상 작업은 얼마나 걸릴까요?”
“하루면 충분합니다.”
이미 마스터링에 녹음, 뮤직비디오 촬영까지 다 끝내 뒀으니까.
그리고 HT 엔터테인먼트는 아직까지 다른 연예 기획사들에 비해서 활동하는 연예인들의 숫자가 많은 편이 아니다.
필요할 때 오롯이 내 활동에 집중해서 서포트를 해 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내가 따로 재촉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직원들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인다.
“알겠습니다. 그럼 PV 영상 뽑히는 대로 구체적인 일정 잡아봅시다. 오늘은 더 할 이야기 없죠?”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마치도록 하죠. 저녁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중요한 일이요?”
직원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분간 방송 활동도 쉬기로 한 사람이 바쁜 일이라고 하면 뭐가 있을까,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혹시 또 몬스터가…….”
“일본 오키나와현 쪽에 몬스터가 몇 마리 출몰했다곤 하는데, 크게 위협이 될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현지 헌터들이 알아서 잘 해결할 만큼 소규모예요.”
굳이 나까지 출동할 필요는 없었다.
결론은 그쪽 일 때문에 바쁘다는 건 아니었다.
몬스터 때려잡는 것 이상으로 내게 중요한 일이 하나 있다.
“오늘이 저희 누나 생일이거든요.”
하나밖에 없는 가족의 생일인 관계로 오늘은 누나와 간만에 둘이서 식사라도 할 예정이다.
* * *
누나가 고정으로 출연하는 뉴스 프로그램이 끝날 때를 맞춰서 일부러 차를 끌고 방송국 앞에서 대기했다.
스태프들과 ‘수고했어요.’라는 식으로 인사를 나눈 누나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누나!”
손을 흔들어 보이는 내 모습을 보면서 누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그 차 뭐야?”
“이거?”
누가 봐도 새거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해 보이는 차 한 대.
“어때, 좋아 보이지?”
“설마, 산 거야?”
“어.”
“너, 이미 차 여러 대 가지고 있으면서, 그새를 못 참고 또 질렀다고?”
“이번에는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야.”
누나한테 차 키를 건네줬다.
그러자 누나가 쀼루퉁한 표정으로 물었다.
“막 일 끝나고 온 사람한테 운전까지 맡기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아무리 막 나가는 녀석이라고 해도, 누나한테까지 설마 그런 짓을 할까. 그런 거 때문이 아니고.”
나는 내가 기대고 있는 차를 손으로 퉁퉁 가볍게 치면서 말했다.
“생일 선물이야.”
“선물? 이게?”
“응. 언제까지 10년도 더 된 차 끌고 다닐 거야. 이제 새걸로 바꿀 때도 됐잖아. 안 그래?”
낡은 차를 타고 다니는 누나가 매번 신경이 쓰였다.
누나가 돈이 없어서 차를 안 바꾸는 게 아니다.
돈은 충분하다. 현재 공중파 채널의 간판 앵커로 활약 중인데, 설마 차 한 대 살 돈이 없을까.
단지 어려웠던 시절에 절약하던 것이 습관이 되어 버린 탓에 안 사고 있던 거였다.
애초에 누나는 차 욕심이 없다시피 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칼을 뽑기로 했다.
“이거, 얼마 주고 샀는데?”
“2억 5천.”
“그 돈이면 차라리…….”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난 똑같이 이 차 살 거야. 그리고 지금처럼 누나한테 선물로 주겠지.”
“…….”
“이미 환불도 안 되는 거니까, 그냥 얌전히 받아.”
이렇게 질러 줘야 누나가 겨우 받을까 말까 한다.
한숨을 푹 내쉰 누나는 마지못해 내가 내민 차 키를 받았다.
그동안 바빠서 누나 생일도 제대로 못 챙겼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통 크게 챙겨 주려고 이런 서프라이즈를 준비해 뒀다.
뒷좌석과 트렁크에 뭔가가 가득 실려 있음을 확인한 누나가 나에게 물었다.
“이건 뭐야? 네 짐이야?”
“아니, 연 대표님하고 승훈이 형, 우준이, 그리고 아이리스가 주는 선물들.”
“아이리스까지? 아, 맞다. 앞으로 한국에서 활동할 거라고 했지.”
“어, 우리 회사에서. 데이브도 그렇고.”
“데이브가 너희 회사 들어갔다는 소식 듣고 내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알아?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누나도 나와 데이브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다.
데이브가 우리 회사와 계약을 맺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목소리에 담긴 힘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된 게 아니다.
아무리 누나라 할지라도, 알려 주면 안 될 게 있다.
그래서 누나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오랫동안 지내다 보니까 나하고 친근감이라도 생겼나 봐.”
여기선 선의의 거짓말을 택하기로 했다.
누나도 이에 대해선 깊게 추궁할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알겠다고 하고서 가볍게 넘겼다.
“근데 이 차 선물해 준 건 좋은데, 운전은 네가 하면 안 될까? 나, 오늘은 피곤한데.”
“알았어. 어디로 모셔다 드릴까요, 여왕님?”
“그런 닭살 돋는 멘트 좀 하지 마. 어휴!”
누나의 반응을 보니까 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