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몰랐던 재능 (2)
회의가 끝나자마자 나는 양석정 팀장을 따로 불렀다.
“양 팀장님, 승훈이 형 오면, 나 이번에 다큐 제작하기로 한 자료 보내 주기로 했다고 내일 저녁까지 진행해 달라고 대신 전해 주세요. 그대로 말해 주면, 승훈이 형이 잘 알아들을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오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집에 가서 좀 쉴까 했었는데.
복도를 나오자마자 최용하 프로듀서가 나를 불러 세웠다.
“이사님, 혹시 안 바쁘시면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저요?”
“네, 해피모드 신곡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사님한테 보여 주고 허락 맡고 싶다고 해서요.”
“굳이 제 의견 없이 멤버들이 좋다고 하면, 그대로 진행하셔도 되는데.”
우리 HT 엔터테인먼트는 다른 연예 기획사와 다르게 많이 특이한 부분이 있다.
성공 하나만을 위해 활동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가수가 부르고 싶은 노래, 부르고 싶은 콘셉트, 그리고 부르고 싶은 무대가 있다면 웬만하면 다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해 주는 편이다.
우리 회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미 내가 이사로 있다는 것만으로도 HT 엔터테인먼트의 주가는 계속해서 고공행진을 이어 가고 있는 중이다.
소속 연예인들의 활동을 대외적으로 계속 보여 주지 않아도 우리는 알아서 잘 생존할 수 있는 구조가 이미 완성되어 있다.
그래서 굳이 내 의견은 필요 없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프로듀서는 어떻게든 나를 멤버들에게 데려가고 싶어 했다.
“일단은 한번 봐주세요. 멤버들도 그걸 원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야…… 네, 알겠습니다. 가시죠.”
나도 오랜만에 해피모드 멤버들과 만날 겸, 최 프로듀서와 같이 안무 연습실로 이동하기로 했다.
연습실에 들어서자, 여덟 명의 해피모드 멤버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내게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오랜만에 뵙네요!”
“네. 그러게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최 프로듀서님이 막 힘들게 하거나 그러진 않았죠?”
최 프로듀서가 멋쩍은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멤버들 역시 밝은 표정으로 내 물음에 답했다.
“너무 잘해 주셔서 오히려 저희가 부담스러울 정도예요.”
“바슬라에 있었을 때에는 맨날 눈치만 보면서 앨범 준비했었는데, 여기 오니까 너무 편해요.”
“감사합니다. 다 이사님 덕분이에요.”
그날, 진주 씨가 내게 출연 제의를 하지 않았더라면.
해피모드는 여전히 바슬라 엔터테인먼트에서 고통받으면서 가수 생활을 이어 나갔을 것이다.
“최 프로듀서님한테 들었습니다. 저한테 이번 신곡 준비하고 있는 거 보여 주고 싶으시다던데.”
“네, 맞아요!”
“그래도 대표님이…… 아니, 이사님이 먼저 봐주셨으면 해서요.”
내가 실질적으로 대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보니, 간혹 회사 내에서도 나를 ‘이사님’이 아닌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중간에 영입된 해피모드 멤버들이라 해도 예외는 없었다.
“그럼 한번 볼까요?”
“네!”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서 멤버들의 안무가 시작되었다.
노래는 이미 최 프로듀서를 통해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해피모드가 여태껏 팬들에게 선보였던 특유의 청량감이 가득한 노래 콘셉트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래서일까, 멤버들은 우리 회사에서 처음으로 받은 신곡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안무는 어떨까.
이번에도 센터를 맡은 진주 씨가 화려하게 오프닝을 장식했다.
흔들리는 너의 그 눈빛.
붙잡기 위해 난 이렇게 춤을 춰.
다른 여자는 보지도 마.
Only love you.
노래도 직접 라이브로 소화했다.
나도 가수이기에 안무를 펼치면서 노래까지 부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가끔은 몬스터와 치고받고 싸울 때보다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게 더 힘들 때도 있었다.
아무래도 긴장감, 그리고 무대가 주는 특유의 중압감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이 방면에서 해피모드는 능숙한 경험자라 할 수 있다.
디테일한 손짓이라든지. 시선 처리 방식 같은 걸 보면 역시 베테랑은 다르다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진다.
팀워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진주 씨가 센터에서 빠지고, 뒤이어 리더인 연해 씨가 빈자리를 채웠다.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면서 손과 발은 계속 쉴 틈 없이 움직였다.
후렴 구간에 접어들자, 다시 진주 씨가 센터에 섰다.
안무 난도가 꽤 높은데도 불구하고 해피모드 멤버들은 무대가 끝날 때까지 미소를 잃지 않다.
마무리 동작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도 모르게 그녀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좋네요. 훌륭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어서 기쁜 모양인지, 멤버들은 다시 연습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습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나는 최 프로듀서와 같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프로듀서님이 왜 해피모드 멤버들 안무 연습한 거, 꼭 보라고 말했는지 알 거 같네요.”
최 프로듀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한 이유가 있었다.
회의 당시, 나는 직원들에게 분명 이렇게 말을 했었다.
전수조사 결과에 따라 헌터들만 따로 묶어서 그룹 활동을 할 수도 있다고.
물론 이 그룹 프로젝트는 내가 주축이 되어 진행될 것이다.
내가 있어야 버프를 받을 수 있는 최대치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노래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연습생 시절을 제외하고 한 번도 그룹 활동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최 프로듀서는 내가 그룹으로 제2의 가수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알려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룹이라는 게 어떤 건지에 대해서 말이다.
“솔로 활동과 그룹 활동은 그야말로 천지 차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사님이 간접적으로나마 이에 대해 알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해피모드의 안무 연습을 봐주셨으면 했습니다.”
보는 내내 나는 감탄을 삼켜야 했다.
여럿이 하나인 것처럼 딱딱 들어맞는 안무.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멋있다고.
“오늘 보니까 그룹 활동도 한번 해 보고 싶어지긴 하더라고요.”
“이사님이라면 잘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솔로로 첫 데뷔 무대를 가질 때에도 어떻게든 보컬 능력을 끌어올리시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그 짧은 기간에.”
“제가 독기가 있는 편이거든요.”
좋은 말로 말하면 승부욕이다.
이게 좀 있다 보니 어떻게든 노력은 할 것이다.
이철민 소장이 진행한다는 조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 * *
협회 측에서 비밀리에 전수조사를 진행하는 중에도 나는 내 할 일을 계속 이어 나가야 했다.
먼저 문체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내 다큐멘터리부터.
내 인터뷰를 따기 위해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일찌감치 스튜디오를 찾았다.
현장에 도착해서 메이크업과 헤어 스타일링을 받은 나는 오랜만에 입는 제복에 어색함을 느꼈다.
“헌터 활동 접은 이후로 이 옷 한 번도 안 입었는데.”
뒤에서 코디들이 호호 웃으면서 내 말을 받아 줬다.
“어머, 그래도 여전히 잘 어울리시는데요?”
“맞아, 맞아. 핏도 살아 있고요.”
“공식 행사 때는 그 제복 입으셨죠? 저, 예전에 태오 씨 TV 나오는 거 봤어요.”
그때 참…… 행사가 있다면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그랬었지.
나이가 들고, 어느 정도 짬이 찼을 때에는 적당히 핑곗거리를 둘러대면서 불참하곤 했다.
내가 땡볕 아래에서 제복 입고 국가 수뇌부랑 하하호호 웃으면서 수다를 떤다고 게이트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럴 시간에 몬스터 한 마리라도 더 때려눕히고 말지.
아무튼 이 옷에는 그런 시절의 추억이 묻어 있었다.
제복을 입고 높이가 제법 되는 의자에 착석했다.
조명 오케이.
카메라 오케이.
그리고 내 마음가짐, 오케이.
“슛 들어가겠습니다.”
슬레이트 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앞에 앉아 있는 작가의 신호에 맞춰서 자기소개를 이어 갔다.
“안녕하세요. SSS랭크 헌터, 강태오입니다. 오랜만에 가수라는 직업을 떼고 헌터로 여러분들에게 인사드리네요. 반갑습니다.”
뒤이어 PD가 미리 준비한 질문들을 내게 하나하나씩 건넸다.
“처음 각성했을 때에는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뭐…… 기분이랄 것 없이 그냥 얼떨떨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가수를 꿈꾸는 연습생 신분이었거든요. 꿈을 포기하고 강제로 헌터가 되었다는 사실이 좀 슬프긴 했는데, 그래도 인류를 대표해서 몬스터와 싸우는 일이잖아요? 영광이었죠.”
……라는 속에도 없는 거짓말도 꺼내 봤다.
내 이미지를 호감으로 만들기 위해 제작하는 다큐멘터리니까.
말도 최대한 유의해서 해야 했다.
그렇게 내 본래 성격과는 맞지 않는 쇼(Show)라는 이름의 인터뷰가 계속 진행되었다.
30분 정도 지난 뒤.
“고생하셨습니다, 태오 씨!”
“많이 불편하셨죠?”
자세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불편한 것투성이었다.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아쉬운 소리를 낼 수는 없었기에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온 나에게 PD가 다음 일정을 알려 줬다.
“현장 검증하는 영상도 찍을 예정입니다. 다음 주쯤에 갈까 하는데, 그때 시간 조율 가능하실까요?”
“예. 한동안은 앨범 작업 때문에 방송 활동을 많이 줄이기로 했으니까 시간은 언제든지 낼 수 있습니다.”
“아, 두 번째 앨범 나오시나요?”
“지금 당장은 아니고요. 그래도 최대한 빨리 앞당겨서 낼 예정이긴 합니다.”
“그럼 컴백하시는 시기에 맞춰서 다큐멘터리도 방영될 수 있게끔 준비해 둬야겠네요. 그래야 같이 시너지가 나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컴백과 동시에 대대적인 다큐멘터리 방영까지.
가수들 중에서 과연 이런 대접을 받은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라를 구한 연예인 정도 되면 이런 대접도 받나 보다.
구체적인 일정은 나중에 따로 맞춰 보기로 하고.
나는 일단 승훈이 형을 기다리기로 했다.
‘근처에 볼일 있다고 하고서 잠깐 나갔다 온다더니, 꽤 걸리나 보네.’
연락을 해 보니 바로 근처까지 와 있다고 한다.
저 멀리 승훈이 형이 평소에 내가 일정이 있을 때 끌고 다니는 SUV 차량이 보였다.
주차장 안까지 들어올 것 없이 내가 먼저 도로변으로 이동했다.
비상 깜빡이를 켜고서 내 앞에 차가 멈췄다.
문이 열린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데이브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냐, 너. 왜 여기에 있어?”
설마 승훈이 형이 볼일이 있다고 했던 사람이 이 녀석이었나?
승훈이 형은 나보고 일단 타라고 손짓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회사로 갈게.”
“회사? 나 오늘 그냥 집에 들어가서 쉴 생각인데.”
“계약서 써야지.”
“……?”
계약서라는 말에 데이브 쪽으로 절로 시선이 갔다.
팔짱을 끼고서 다리를 꼰 자세로 앉아 있던 데이브는 살짝 화가 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계약 조건은 무조건 높게 부를 거니까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다, 강태오.”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하여간 이 녀석, 미워할 수가 없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