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라를 구한 톱스타-2화 (2/250)

제1장. 백수가 된 헌터 (1)

금요일 저녁 11시.

이 시간이 될 때까지 내가 한 것은 TV 시청이었다.

“TV가 이렇게 재미있는 물건일 줄이야. 생각 못 했네.”

그 전까지는 TV 볼 시간도 없었다. 밥 먹다가 몬스터 트러블 해결하러 나서고, 잠자다가 몬스터 트러블 해결하러 뛰쳐나가고.

심지어 샤워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에도 몬스터 트러블만 터졌다 하면 바로 뛰어나갔다.

그것이 헌터의 일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드래곤이 죽고 이계의 틈이 닫힌 지 이제 보름 정도가 지났다.

그동안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을 괴롭힌 몬스터는 등장하지 않았다.

“세상 참 평화롭네.”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건 내 인생에 있어서 처음이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그거 할 시간인가.”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안 그래도 봐야 할 프로그램이 있었다.

요즘 토크쇼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을 자랑한다고 알려져 있는 ‘도정수의 미팅 타임’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팬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걸 굳이 챙겨 봐야 할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가 저기에 출연하기로 했으니까.

문득 승훈이 형의 말이 떠올랐다.

-태오야, 스케줄 잡혔다. 일요일에 김청호 PD와 함께 이곳으로 찾아올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라.

도정수의 미팅 타임 연출을 맡고 있는 김청호 PD. 그가 방송작가들과 함께 내 집으로 와 사전 미팅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토크쇼라.”

예전에 아주 가끔, 몇 번 나가 보긴 했었다.

그러나 인류의 구원자라는 타이틀이 붙은 채 방송에 나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승훈이 형한테 들은 바에 의하면, 내 출연이 결정되자마자 김청호 PD는 만세 삼창을 외쳤다고 했다.

나의 썰 풀이가 그렇게나 희소성이 있는 걸까?

뭐, 출연료 많이 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나 말고 다른 헌터들도 진작부터 방송사에서 러브 콜을 받았는지 방송에 자주 얼굴을 내비치고 있었다.

어떻게 말한다면 난 약간 스타트가 늦은 셈이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방송에서 나오는 헌터들은 말 그대로 듣보잡들뿐이니까.

현역 시절의 나는 헌터 랭킹 부동의 1위였다.

SSS급 헌터, 강태오. 게다가 레이드 시대를 끝낸 남자.

김청호 PD는 이런 나의 경험담을 굉장히 귀하게 생각한 듯했다.

“이왕 하기로 했으니, 제대로 해야지.”

철저한 복습과 예습. 그것이 나의 성공 비결이었다.

비록 방송에 나가서 가볍게 입만 털어 주면 된다고 한들, 기왕 하기로 했으니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나.

“가수 지망생일 때에는 방송 한번 출연해 보는 게 꿈이었는데.”

이게 다 데이브가 나를 도발해 줘서 그런 걸까?

덕분에 연습생 시절 꾸던 꿈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된 것 같다.

* * *

이틀 뒤.

낯선 이들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바, 반갑습니다! 김청호라고 합니다!!”

“강태오입니다.”

도정수의 미팅 타임을 총괄하는 김청호 PD였다. 사전에 승훈이 형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나이는 30대 초반 정도? 그런데 왜 이렇게 말을 더듬는지 모르겠다.

같이 온 방송 작가들이 도리어 더 침착해 보였다.

승훈이 형과 내가 한쪽에, 그리고 김 PD와 작가진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내 집은 꽤 큰 편이었다. 열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와 거실에 앉아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각자 위치에 자리 잡은 상태에서 서두를 꺼낸 건 승훈이 형이었다.

“김 PD님, 제가 태오한테는 대충 일정 알려 주긴 했습니다만…… 아직 녹화 들어갔을 때 상세한 부분 같은 건 전달 못 했습니다. 김 PD님께서 직접 해 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그,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목소리에 너무 과하게 힘이 들어가 있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건가, 이 사람?

대한민국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는 토크쇼 프로그램의 PD로 보이진 않는다.

불안함과 함께 2시간가량의 사전 미팅 시간을 보냈다.

일에 대해선 대충 마무리를 지었다. 이후, 승훈이 형이 식사를 제안했다.

“근처에 태오하고 제가 자주 애용하는 밥집이 있습니다. 가서 식사라도 하실까요?”

“강태오 님과 식사라니, 영광입니다!”

김 PD가 바로 승낙했다. 그러나 방송 작가 중 한 명이 김 PD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PD님, 이후에 미팅 있으시잖아요.”

속삭이는 소리가 내 귓가에 들렸다. 헌터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난 다른 헌터들에 비해서도 감각이 매우 예민한 편이었다.

그래서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았다.

다른 미팅 일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 PD는 단호했다.

“전화해서 몇 시간 미루자고 해.”

“진짜로요?!”

“어차피 별로 중요한 건수도 아니잖아.”

귓속말 나눌 때에는 말 안 더듬고 잘하네.

근데 왜 나랑 말 섞을 때만 말을 더듬는 거냐.

결국 이들끼리 타협을 봤는지 식사는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나갈 채비를 갖추려고 할 때였다.

“저, 저기, 강태오 님!”

또 나왔다. 이놈의 극존칭.

기분 나쁘거나 그렇진 않지만.

불리는 입장에선 좀 부담스러운데.

내가 포기해야지, 뭐.

“예, 무슨 일이신가요?”

“죄송한데…… 호, 혹시 사인 가능할까요?!”

“사인이요? 사인이라면 이미 계약서에 했습니다만.”

“그것 말고요. 여기에다가 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할 거 같습니다!”

흰색 반팔 티가 튀어나왔다.

이건 또 무슨 연출이래? 역시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뭔가 다르네.

그때, 승훈이 형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해 주는 게 어때?”

사인 자체야 어렵진 않은데.

일단은 펜을 꺼내 들어 슥슥슥 사인을 했다.

반팔 티를 받아 든 김 PD의 얼굴은 뭐랄까, 마치 천국행을 선언받은 망자의 표정처럼 보였다.

가수 지망생 시절 때에는 이런 스타 PD가 회사에 왔다 하면 어떻게든 얼굴도장 한번 찍어 보려고 발발 기고 그랬었는데.

설마 이렇게 입장이 바뀌게 될 줄이야.

‘사람 일이라는 게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 * *

촬영 당일.

승훈이 형의 차를 타고 가는 도중이었다.

“김 PD님 저번에 만나 보니 어떻든?”

“나쁘지 않은 사람 같던데? 근데 너무 격식을 차리더라.”

“그야 그렇지. 넌 누가 뭐래도 인류의 구원자 아니겠냐.”

“오버라고, 그 말.”

미팅 때 만났던 김청호 PD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를 눈앞에 두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나이도 나보다 훨씬 많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 뒤에는 개인 사정이 있었다.

“예전에 김 PD님이 대학원생 때, 바다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고 하더라.”

“그래?”

“어, 그때 몬스터들한테 습격받았었대.”

“저런.”

“죽기 일보 직전에 어느 한 헌터가 와서 몬스터들을 죄다 때려눕히고 사라졌다고 하더라. 마치 슈퍼맨처럼.”

“그게 설마 나라는 건 아니겠지?”

“잘 아네.”

그랬군.

왜 김 PD가 유독 나한테 그런 태도를 취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동시에 승훈이 형이 나에게 사인해 달라고 재촉한 것도 납득되었다.

운전대를 잡은 승훈이 형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목숨을 구해 준 슈퍼 히어로가 눈앞에 있으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겠지. 넌 인류의 구원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김 PD에게 있어선 히어로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그럼 직접 말하지, 왜 말 안 했대?”

“글쎄. 널 실물로 봤다는 긴장감 때문에 깡그리 잊어버린 것 아닐까?”

그런가?

이야기를 들어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김청호 PD.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이상한 사람이다.

* * *

대한민국 3대 공중파 중 한 곳인 TBV.

공중파답게 본사 건물 역시 상당했다.

낯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가수 지망생이었을 때, 이곳을 몇 차례 찾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어느 댄스 가수의 백댄서 역할을 맡았을 때였을 것이다.

“다 왔다.”

“고생했어, 형.”

“뭘, 이게 내 일인데.”

말은 이렇게 해도, 평일임에도 여의도를 지나는 도로는 평소처럼 정체 구간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운전대를 붙잡았던 형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지난 8년간 내 헌터 매니저로 활동했던 승훈이 형.

사실 형도 예전에는 헌터로 활동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큰 부상을 당한 이후, 현역 활동에 한계를 느껴 일찌감치 은퇴를 했다. 이후 나를 만나 헌터 매니저로 활동 중이었다.

지금은 그냥 매니저라고 보는 편이 좋을 거 같지만 말이다.

“어디 보자. 이쪽이었던가?”

“여기로 가야 해.”

내가 손으로 우리들이 가야 할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자 승훈이 형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기 와 본 적 있어?”

“어, 헌터가 되기 전에 나, 가수 지망생이었잖아. 그래서 방송국 몇 번 왔다 갔다 한 적 있어.”

“오, 그래?”

형의 눈빛이 반짝였다.

승훈이 형과 함께 TBV 방송국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경비원을 비롯해 길 가던 사람들이 죄다 우리를 바라봤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쪽이었다.

“저 사람, 혹시……?”

“맞아! 강태오라고, 강태오!”

“어머, 정말?!”

“와, 대박! 인류의 구원자를 직접 내 눈으로 볼 줄이야!”

“근데 여긴 무슨 일로 왔지?”

“기사 못 봤어? 강태오 씨, 도정수의 미팅 타임에 게스트로 나온다잖아! 아마 그 촬영 때문이겠지.”

내가 도정수의 미팅 타임에 출연할 거란 정보는 이미 인터넷 기사를 통해 전부 다 나간 상태였다.

정확히는 어제저녁부터.

김청호 PD가 내 쪽에 미리 양해를 구하고 보도 자료를 뿌렸다.

어차피 딱히 숨기려 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기사를 내보내야 대중의 관심을 얻을 수 있고, 시청률도 확 끌어올 수 있을 테니까.

그 부분에 대해선 당연하다 생각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들은 승훈이 형이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인기남이네, 강태오 씨.”

“그러지 마, 형. 그보다 스튜디오 어디야, 빨리 가자고.”

“그래, 그래.”

가수 지망생이었을 때에는 대중의 이런 관심에 엄청 굶주려 있었는데.

이제는 조금 귀찮다.

* * *

녹화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20분.

사전에 받은 대본을 미리 리딩하면서 대기실에서 시간을 축내던 때였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실례합니다. 강태오 씨 계신가요?”

40대 초반의 남성이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었다.

지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남성. 초면이지만, 난 저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도정수 씨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강태오라고 합니다.”

내가 먼저 일어나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도정수의 미팅 타임의 메인 MC.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진행자 순위 탑 5위 안에 드는 남자이기도 했다.

TV를 잘 안 봤던 나도 예전부터 도정수라는 이름 세 글자는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별다른 구설수 없이 괜찮은 이미지로 진행자 외길 인생을 걸어온 남자였다.

연예계 내에서도 특별히 문제 되는 소문은 돌지 않았다.

본래 자기 이미지 관리가 제일 어려운 법인데, 어떤 의미로 존경스러웠다.

‘예전에 내 소속사 사장이 연예계 활동하려면 도정수처럼 하라고 늘 강조했었지.’

옛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내 손을 마주 잡아 준 도정수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도정수입니다. 잠시 인사드리려고 들렀습니다. 오늘 녹화,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요.”

“궁금하신 점 있으면 언제든지 와서 물어보셔도 되고요. 아, 원래 진주 양이랑 같이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스케줄이 있어서 조금 뒤에 도착한다고 하더군요.”

이진주는 도정수와 같이 토크쇼를 진행하는 보조 MC의 이름이다.

8인조 걸 그룹, 해피모드의 일원이라고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잘나가는 걸 그룹은 아니었다.

데뷔는 했지만, 대중이 대다수 모르는 걸 그룹. 아마 이진주 개인의 인지도가 해피모드 그룹의 인지도보다 더 높을 것이다.

무명의 서러움은 연예계에선 빈번한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난 데뷔조차 못 했던 사람이지만, 왜인지 모르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렇군요. 나중에 이진주 양 오면 따로 인사 나눠야겠네요.”

“하하! 그때 같이 얼굴 마주하면서 합을 좀 맞춰 보도록 하죠.”

“네,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가벼운 인사는 끝났고.

이제 천천히 녹화 준비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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