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0화
퇴근 후, 여전히 내 집에 와 있는 대표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자 대표는 인상을 팩 찌푸렸다.
“내 말을 안 들어……?”
자기를 잘 따르던 직원들이 갑자기 말썽을 부리다니.
무슨 그런 천재지변이 일어났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표는 기획실 직원들이 말 잘 듣는다고 편을 들었는데. 그간 별다른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지금도 비슷한 생각이겠지.’
나와 레드가 ‘기획실이 아이리스의 일을 맡는 건 별로’라고 주장하니까 ‘그래? 그럼 말지, 뭐.’라면서 우리 말을 따라줬을 뿐.
기획실이 아티스트에게 얼마나 좋지 않은지 설명해도 대표는 크게 와닿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대표의 마음이 바뀔 계기를…… 그들이 직접 제공하고 말았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그들의 장점이었는데 은근슬쩍 한발 걸치려고 수를 쓴 것이 문제였다.
“네가 아이리스한테 맡겼는데 자기 그릇 빼앗길 것 같으니까 바로 끼어드는 것 봐. 지금까지는 그 사람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자기들한테 이익이 되니까 네 말을 들은 거야.”
뉴레인의 기획실 사람들도 지금까지는 대표 말을 따르는 게 편했겠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대표가 계속 일을 맡겨주고, 회사 내부에서 불만이 나오더라도 대표의 뜻이라고 대표에게 책임을 미룰 수도 있고.
대표와 기획실 직원들은 신뢰가 있어서 서로 맞추며 일한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가 맞았을 뿐이었다.
이번에 그들이 보인 행동으로 그 점이 확실해졌다.
“진짜…… 별로네.”
대표가 앉아있던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고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주방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소파는 주방을 등지고 있어서 내가 있는 쪽에선 대표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대표의 목소리에 힘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배신당한 기분이려나…….’
이 세계에서 대표의 말을 가장 잘 들어준 것이 뉴레인 기획실이었는데.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대표에게 얼마나 안정을 주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그런데 그게 전부 허상이었다는 걸 확인하게 되었다. 괜히 나도 씁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사회생활에 염증을 느끼라고 이 말을 전한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분위기를 전환할 겸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니까 전담팀을 꾸리기 이전에 교통정리가 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직원은 어떻게 잘라?”
“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대표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혼자 대표에게 이입해서 씁쓸해하고 있었는데, 그 당사자인 대표는 의외로 멀쩡했다.
잘 모르는 문제를 앞에 두고 옆 사람에게 ‘이건 어떻게 풀어?’라고 묻는 듯한 아주 평범한 표정이었다.
“방해되면 자르면 되잖아.”
“…….”
그렇지. 잊고 있었어. 대표는 이곳이 게임이라고 굳게 믿고 그룹도 쉽게 해체하려던 애였다는 걸.
‘얘는 아직 플레이어 입장에서 완전히 벗어난 게 아니라 위험해!’
대표, 그러니까 신주인은 이 세계에 오기 전에 사회생활을 안 해 본 게 아니다.
회사와 직원의 관계가 어떤지, 해고가 얼마나 숙고가 필요한 일인지를 전부 알고 있다.
그러나 대표는 아직 현실성을 덜 찾았는지 이 일을 사회생활이 아니라 회사 운영의 범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 회사 운영 경험은 전부 마이 엔터를 플레이하면서 얻은 것이었다.
‘대표의 말을 거스르자마자 자르겠다니. 말이 돼, 이게?’
온건한 방식으로 회사를 바꿔보고, 그게 안 되면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그냥 급발진이잖아.
급발진이 뉴마 종특이냐는 커뮤니티의 의견이 다시 떠올랐다.
당시엔 그냥 웃고 넘어갔는데 의외로 뉴마를 관통하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잘못된 사고방식에 매몰되어 있다 보면 짧은 기간에도 이렇게나 사람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대표를 보며 절절히 깨달았다.
나는 대표의 급발진을 억누르고자 천천히 설명에 나섰다.
“아니, 그렇게 막 자르면 다른 직원들도, 소속 가수들도 불안해한다고.”
지금은 그런 공포 정치를 펼칠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아이돌 팬들은 아이돌 기획사의 내부 사정에는 항상 귀가 열려 있다.
뉴레인의 대표가 감정적으로 사람을 마구 자른다는 소문이라도 나 봐.
팬들이 얼마나 불안해하겠어. 뉴레인이 곧 망하는 거 아니냐는 소문도 돌겠지.
이런 커뮤니티의 예상 여론은 대표에게 말해봤자 와닿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대표 말 안 듣는다고 실장을 뎅강 잘라버리는 회사에서 누가 안정감을 느끼겠어. 자기도 언젠가 걸리면 예고도 없이 잘리겠구나 하면서 덜덜 떨겠지.”
“너는 뉴마에서 누구 자른 적 없어?”
“없어.”
안 그래도 직원의 대부분이 뉴레인으로 빠져나가서 인력 부족인 상태로 시작했는데 자르긴 누굴 잘라.
지금 보니 대표는 뭔가 잘못되면 그걸 고치기보다는 버리고 새로 시작하기를 선호하는 듯했다.
과거의 뉴마를 버리고 뉴레인으로 바꾸려고 했다는 것도 그렇고, 아예 다른 곳으로 떠나서 새 삶을 시작하고 싶어 했던 것도 그렇고.
‘내가 원래 그런 타입이었나.’
대표만 보면 이런 식으로 강제로 자아 성찰을 하게 된단 말이지.
내가 해고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하자 대표는 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해고 외에 무슨 처리 방법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표정이었다.
“뉴레인에 나 말고는 기획실장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뉴마처럼 사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니까.”
뉴레인은 아이리스만 데리고 시작한 레이블이었기 때문에 회사 구조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 뉴레인의 실세를 꼽자면 첫 번째가 대표, 그다음이 허용석 기획실장이었다.
대표가 그간 기획실에 직통으로 지시를 내린 것도 기획실장에게 힘을 보태왔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회사에 가서 말 들으라고 뒤집을 수는 없잖아.”
“으음. 그렇지.”
나도 내 얼굴을 한 대표가 뉴레인에서 깽판을 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아.
게다가 재민이 대표를 만나고 나서 내게 쌍둥이가 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내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대표를 ‘뉴레인의 대표’라고 인식할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단 말이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마이 엔터 화면을 보여주지 않은 것처럼, 대표의 모습도 웬만하면 숨기는 게 좋지 않을까.
대표도 같은 생각인지 다른 방도를 찾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 비서.”
“비서?”
뉴레인에는 따로 대표의 비서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대표가 비서라고 지칭할 사람이라면…….
“최 비서 말하는 거야?”
“응.”
“최 비서가 왜?”
“비서가 나 없이도 내 대리로 처리한 적이 있었어. 뉴레인 만들 때.”
그러고 보면 대표는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그 일들을 다 진행했었지.
당시에 최 비서가 대표의 권한을 임시로 행사했다면, 지금도 같은 방법으로 대표의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뜻이다.
대표는 방법을 찾았다는 얼굴로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대표실에 있어. 내 도장이랑 위임장.”
***
대표실은 이사실보다 한 층 위. 가장 안쪽에 있었다.
대표가 오래 자리를 비워서 대표실 앞은 전등도 켜 놓지 않은 상태였다.
전등 스위치를 켜니 서늘한 느낌의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대표실에 가 볼 생각을 못 했어. 갈 이유가 없기도 했지만.”
“어차피 문이 잠겨 있어서 복도 청소해 주시는 분 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았을 겁니다.”
“최 비서는 원래 자리가 대표실 앞이었지?”
“네. 저도 자리가 바뀐 후로는 처음 오는 것 같습니다.”
하긴 아무도 없는 대표실 앞을 별다른 목적 없이 왔다 갔다 하면 수상해 보이겠지.
나는 최 비서와 함께 짧은 복도를 지나 대표실로 향했다. 마치 숨겨져 있던 보물을 찾으러 가는 기분이었다.
‘대표도 안 와 본 대표실을 내가 먼저 와 보다니.’
보안을 위해 대표실의 문은 도어락으로 잠겨있었다.
이사실 문에 달린 도어락은 내가 처음 출근했을 때 직접 비밀번호를 설정했다.
그러나 대표는 이 세계에 온 후 회사에 출근한 적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비밀번호가 무작위 숫자로 설정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대표실의 비밀번호는 특이하게도 내 스마트폰 패턴을 숫자 키패드로 변환한 것이었다.
‘이 세계가 마이 엔터랑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이렇게 또 실감하네.’
대표실에 입장하는 것은 스마트폰 패턴을 풀고 마이 엔터에 접속해서 대표가 되는 과정과 비슷했다.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온 대표실은 이사실보다 좀 더 넓을 뿐 별다를 것은 없었다.
“인감이랑 서류들은 서랍에 있다고 했지?”
“네. 저번에 사용한 후에 그대로 돌려놓았습니다.”
필요한 물건들의 위치는 최 비서가 알고 있어서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대표실에 오래 머물렀다가 ‘신 이사가 대표 자리를 노린다.’ 혹은 ‘신 이사가 빈방을 뒤진다.’ 같은 소문이 도는 것은 사양이었기에 나는 물건들만 가지고 빠르게 이사실로 복귀했다.
‘이제 또 바빠지겠네.’
뉴레인의 교통정리를 하러 갈 사람으로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적임이었다.
***
“이사님은 안 가신다고요?”
윤희가 의외라는 듯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저번에 LA 출장을 만끽하시길래 이번에도 꼭 가실 줄 알았는데.”
“그땐 해외 로케 한 번쯤은 가고 싶어서 간 김에 즐긴 거죠. 한번 즐겼으니까 됐어요.”
사실은 이번에도 가고 싶긴 했는데, 해외 출장.
모노크롬이 얼마 전에 준해 리더와 함께 안무 연습을 하며 준비하던 음악 방송 특집은 바로 ZBS의 <가요차트> 싱가포르 특집이었다.
세계로 뻗어 나가는 케이팝의 위상을 뽐내며 글로벌 팬들을 만나는 자리.
이런저런 수식어가 붙었지만 공중파 방송국이 개최하는 해외 합동 콘서트에 가까운 특집이었다.
‘모노크롬이랑 윤환이를 같이 섭외하길래 ‘이놈의 방송국들은…….’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뉴레인 상황이 이렇게 되니 오히려 잘되었다.
회사가 시끄러우면 윤환이도 괜히 눈치가 보일 거 아니야?
아이리스와 신인 아이들은 멤버들끼리 의지하면 되는데 윤환은 솔로 아티스트라서 의지할 사람도 없다.
내가 뉴레인을 정리하는 동안 윤환이는 잠시 담당 팀이랑 같이 해외로 떠나 있는 게 낫지.
내가 출장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놓았다가 빠지자 민형도 궁금해하며 물었다.
“급한 일이라도 생기셨나 봐요?”
“할 일이 있어서요. 집에도 좀 관리해야 할 게 있고…….”
“동물 키우세요?”
동물……. 사람도 동물이긴 하지.
집에 토끼 같은 처자식, 아니, 토끼 같은 분신이 있으니 혼자 해외로 나가기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것도 있었다.
“으음. 네. 임시 보호 비슷한 거요.”
“좋은 일 하시네요.”
내가 나를 돌보는 것으로 칭찬을 받자니 머쓱해져서 나는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내가 출장 리스트에서 빠졌다는 것이 바로 멤버들 귀에도 들어갔는지 얼마 후 재민이 나를 보자마자 다가왔다.
“주인 님은 싱가포르 왜 안 가요?”
“일이 있어서. 너희들끼리 잘하고 와.”
재민은 오리처럼 입술을 쭉 내밀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만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기념품 사 올게요.”
“무슨 기념품이야.”
“저번에 쇼핑 엄청 많이 하셨잖아요. LA에서.”
……그런 일이 있었지.
그게 바로 대표가 모아둔 돈을 탕진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대표에게는 재앙, 나에게는 사치의 시작.
재민은 그때의 기억이 강렬했는지 내가 해외 쇼핑 마니아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기념품은 괜찮은데…… 꼭 사겠다면 그냥 작은 거? 자석이나 열쇠고리 같은 거?”
사 오지 말고 신경도 쓰지 말라고 하는 건 너무 선을 긋는 것 같아서 부담 없는 기념품으로 범위를 정해주자 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촬영 끝나고 윤환이랑 놀아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