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9화
지오엘의 느닷없는 출격 후, 더씬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더씬은 수준이 안 맞아서 같이 못 놀겠다며 서림과 해랑을 디스했다.
그러나 래퍼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심사위원도 맡던 지오엘은 어린이 취급을 하기엔 어려운 인물이었다.
‘지오엘한텐 딱히 할 말이 없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무시로 일관하면서 더씬이 정신 승리를 할 여지가 있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정신 승리는 지오엘의 몫이 되었다.
커뮤니티에서는 이를 두고 ‘씬스틸러가 아니라 막타 스틸러’라고 표현했다.
막타를 빼앗겨서 어리둥절하긴 하지만 우리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담배꽁초의 불을 꺼트리기는 했어도 혹시나 불씨가 남아 있을까 봐 찜찜하던 차에 찬물을 뿌려서 확실히 처리한 기분.
그렇게 디스전의 여파도 잠잠해진 어느 날, 나는 궁금해져서 해랑에게 물었다.
“요즘도 피처링 연락 와?”
해랑이 계속 무시로 일관하니까 몸을 사린다며 은근슬쩍 흑화하는 래퍼들이 있다고 했었는데.
지오엘 이후로 끼어드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그들도 아이돌 래퍼와 전면전을 펼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럼 애초에 시비를 걸지를 말지.
아무튼 흑화한 래퍼들 외에도 의도를 판단하기 어려운 래퍼들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만일 그 사람들이 화제성을 노리고 싶었다면 이번 일이 커졌을 때 바로 연락해왔겠지.’
반대로 디스전이 지나간 일이 된 지금까지 연락이 없었다면 ‘이제 관심을 끊었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었다.
해랑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목덜미를 쓸었다.
“피처링 연락은 아닌데…….”
“아직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어?”
사실 정말로 해랑과 작업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지오엘처럼 더씬을 놀리고 싶어서?
그러나 해랑은 지금까지 받아오던 관심과는 다른 종류의 관심을 받고 있는 듯했다.
“계속 연락하던 분들은 아니고요. 제 SNS를 팔로우하시거나 제 작업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가는 래퍼분들이 많아졌어요.”
피차 누군지도 잘 모르는데 같이 작업부터 하자고 들이미는 게 아니라 그냥 관심만 보이고 가는 거면…… 친해지고 싶다는 건가?
이전처럼 다른 목적을 우선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해랑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생긴 모양이었다.
‘사실 해랑이는 크게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진 않았는데.’
커뮤니티에서 해랑을 힙합씬의 흑막 롤로 밀고 있던데 그게 힙합계에도 퍼져나간 건 아니겠지?
어쨌든 이건 일방적인 관심이니까 해랑이 일일이 반응을 해 줘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정도의 관심이라면 나쁘지 않았다.
‘가만히 있는데 디스를 당하거나 관심을 받는 것도 매력 레벨의 영향인 건 아닐까…….’
해랑의 매력 레벨은 아이와 동물에게 잘 안 통할 뿐, 남자에게 안 통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해랑과 대화해 본 남자 아이돌 후배들이 해랑을 바로 따르는 것을 보면 그건 확실했다.
별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했는데, 해랑이 뭔가 떠오른 것처럼 다시 입을 열었다.
“아, 피처링해 달라는 사람 한 명 있었어요.”
“누군데?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야?”
“하범이요.”
하범……이면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확실히 괜찮은 사람이지.
선배들과 작업했으니 이번엔 절친인 자기와도 한번 같이 작업하자는 건가.
하범은 보컬로 솔로 데뷔도 마쳤으니 솔로곡을 내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해랑이 피처링으로 참여하면 잘 어울릴 듯했다.
“생각 있으면 하범이랑 둘이서 얘기해보고 말해 줘. 회사끼리 조율할 일 있으면 해줄게.”
“네.”
태풍의 눈 특성도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해랑이의 바운더리가 좋은 쪽으로 넓어지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이 사건으로 가장 분노하던 준해도 재민의 말대로 춤으로 스트레스를 풀다가 신기술 연구에 착수했다는 듯하고.
황당한 일도 많았지만 결국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각자의 위치에서 발전하는 좋은 결말을 맞이했다.
***
상상 카페는 첫 촬영을 마쳤지만 아직 손님을 맞이하지 않은 가오픈 상태였다.
정식 오픈 전, 사장님 역할인 배명희와 아르바이트생 역할인 모노크롬은 할 일이 있었다.
“메뉴를 저희가 정하나요?”
“네. 여긴 상담소가 아니라 카페니까요. 카페 컨셉은 제대로 살려봐야죠.”
“오. 재밌겠다!”
재민이 눈을 반짝이며 곧바로 흥미를 보였다.
출연진들에게는 이 상상 카페의 메뉴를 정하라는 미션이 쥐어졌다.
명색이 카페인데, 게스트가 왔을 때 시판 음료를 대접하면 너무 심심하니까.
아르바이트생이 다섯 명이나 있는데 따로 바리스타를 고용할 이유도 없었다.
작가는 출연진들에게 이 메뉴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저희가 힐링 예능을 표방했잖아요? 삶이 팍팍할 땐 사람들이 그런 걸 찾거든요. 먹방, 쿡방, 여행 같은 거. 그러니까 이 ‘쿡방’ 부분을 담당해 주셨으면 해요. 음료 만드는 장면이 은근 또 인기거든요.”
데이드링크 광고 촬영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
음료를 만드는 홈 카페 영상이 젊은 층에서 유행한다고.
‘그러고 보니 방송에는 보통 식사류를 요리하는 장면이 주로 나오지, 음료를 만드는 장면은 별로 안 나오니까.’
그쪽 수요를 노리는 것은 괜찮은 방법인 듯했다.
호스트들이 뭔가를 만들고, 게스트들이 시식하고 평가하면서 요리 예능을 보는 듯한 재미도 노릴 예정이라고 한다.
“특별히 모신 게스트분들이 마시고 먹을 건데 아무거나 드릴 순 없잖아요? 상상 카페만의 특별 메뉴로 잘 부탁드려요.”
임주미 PD가 특별에 강조를 넣으며 부담을 줬다.
‘특별이라……. 독특한 요리 실력을 지닌 멤버는 있는데.’
음료 제조와 요리 실력은 크게 상관없으려나?
배명희는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내릴 줄 알았으나 모노크롬 멤버들은 카페에서 커피를 사 먹는 타입이었다.
커피를 내리는 것부터 배워야 하는지 걱정되었는데, 제작진이 준비한 것은 기계가 알아서 해주는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이었다.
멤버들은 커피 기계 사용법을 숙지한 스태프가 방법을 알려주자 다들 자신만의 레시피 연구에 돌입했다.
“재민이 또 아무거나 다 섞는다, 어떡하냐.”
한이가 재민이 하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재민은 준비된 재료를 전부 한곳에 섞어버리려는 습성이 있었다. 차분차가 그렇게 발명되었지.
회의적인 한이와 다르게 우형은 재민을 응원했다.
“아냐. 특별 메뉴라면 재민이처럼 특이하게 생각하는 애가 더 잘 만들 수도 있어. 차분차에 이어서 시그니처 메뉴가 나올 수도 있고.”
“차분차에 이어서? 커피…… 피커피?”
“그게 뭐야…… 피커피면 커피에 피를 넣어?”
재민은 우형의 말에 메뉴의 이름부터 만들어냈다.
준해가 그 이름을 듣고 머릿속으로 상상했는지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어감을 살리려다가 힐링이 아니라 킬링이 되어버렸잖아. 설정이 뱀파이어 카페가 아닌 이상 나오면 안 될 음료였다.
멤버들이 레시피 연구에 집중하는 사이, 작가가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리고 베이킹 담당도 두어 분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오, 베이킹!”
음료 제조에 열중하던 재민은 여기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렇지. 카페에 음료만 있으면 조금 아쉽지. 커피나 차에는 티푸드가 필요하다.
그리고 베이킹이라는 말이 나오자 해랑이 바로 우형을 지목했다.
“형이 하면 되겠네.”
이전에 내가 우형에게 “베이킹을 한번 배워볼래?”라고 했던 것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우형은 맛은 복불복이 있지만 보기 좋은 떡을 잘 만드는 편이라 비주얼이 중요한 베이킹에 적격인 인재였다.
거기에 몬클하우스에 작은 오븐 정도는 둘 수 있으니 취미로 몇 번 만들어봐도 좋을 것 같아서 권했었지.
우형은 자신이 베이킹을 하면 탄수화물을 좋아하는 한이가 옆에서 주워 먹다가 살찔 것 같다며 현실적인 걱정을 표했고.
내가 ‘해랑이 운동을 시키면 된다’는 해결책을 꺼내자 체중 증량과 감량을 반복할 위기에 처한 한이가 거부하면서 어영부영 지나간 이야기였다.
“형이 만들면 나는 시식단 해야지.”
당사자인 한이는 그때의 대화가 기억 속에서 사라졌는지 간식 러버 모드로 돌아갔지만.
작가는 베이킹 담당이 두어 명 필요하다고 했지만 다들 관심이 있는 쪽으로 알아서 왔다 갔다 하면서 자유 체험을 즐겼다.
“이거 잘 구워지고 있는 거 맞아?”
“맛있는 냄새 난다.”
멤버들이 오븐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자 배명희가 웃으며 그들을 말렸다.
“너무 쳐다보면 멀쩡히 구워지던 것도 타.”
“정말요?”
준해가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 탄다는 건가?’
그러나 여기에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었다.
“계속 보고 있으면 눈이 침침해져서 윗면 색깔이 바뀌는지 아닌지 긴가민가하지. 그리고 계속 지켜본다는 건 오븐을 못 믿는다는 뜻이니까.”
“오…… 그러네요.”
말 잘 듣는 모노크롬은 오븐 앞에서 해산하고 다시 음료 레시피 연구로 복귀했다.
***
<상상 카페>의 첫 게스트는 배명희 대신 호스트가 될 뻔했던 예란일 줄 알았는데,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분이 나오신다고 하셨어요?”
“그럼요. 저희가 납치해서 데려오는 거 아니에요.”
임주미 PD는 무슨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투로 농담을 했다.
“전에 손 PD님도 천상식 씨는 섭외하기 어렵다고 했는데, 어떻게 잘 섭외하셨네요.”
분명 우리를 섭외할 때만 해도 천상식을 ZBS에 빼앗겨서 예능국 꼴이 말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렇게 바로 섭외한다고?
내가 놀라워하자 임주미 PD가 당당하게 말했다.
“저희는 배명희 선생님이 계시잖아요.”
이때는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으나 첫 게스트와의 촬영일,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천상식은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배명희를 찾았다.
“선배님. 이렇게 좋은 자리가 생겨서 만나 뵙게 되다니요.”
“어머, 그래. 상식아. 참 오랜만이다.”
‘상식아’……?
대선배 천상식을 ‘상식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지금까지 본 적이 있었던가.
천상식은 트로트 관련이 아니면 방송 출연도 잘 안 하는 데다가, 그 트로트 방송조차 후배 육성 프로그램이었다.
그가 후배들과 있는 모습은 많이 봤는데 선배와 함께 있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천상식의 선배 중에 아직도 방송 활동을 활발히 하는 사람은 정말 드무니까.
‘선배한테는 이렇게 깍듯한 사람이었다니.’
이런 의외의 일면이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지. 한이의 아버지, 할아버지 얘기를 할 땐 공손했다고 했으니까 원래 이런 사람이었겠지.
임주미 PD가 배명희를 꼭 섭외하려 했던 것에는 이럴 목적도 있었던 게 아닐까.
‘선배가 출연하는데 거절하실 거예요? 정말?’이라며 게스트를 섭외하려고…….
왠지 그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해서 고개를 젓다가 문득 한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 상황이 매우 흥미롭다는 듯 씨익 입꼬리를 늘이며 웃었다.
‘오늘 촬영은 천상식 씨한테 고난의 촬영이 될지도…….’
<송투유> 촬영 때 한이를 굴린 것에 대한 복수를 오늘 제대로 하게 되는 걸까.
곧이어 촬영이 시작하고, 상상 카페는 드디어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