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8화
“주원이 너 카메라 켜져 있는데 그런 얘기 해도 돼?”
한이가 들고 있던 셀프캠을 가리키며 주원에게 물었다.
원래 한이는 아역들을 선배라고 불렀으나 오늘은 촬영 중이기에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얘기하는 게 왜요?”
“그 여자애가 나중에 볼 수도 있잖아.”
너무 불시에 나온 질문이라 연애 고민을 꺼내는 장면이 카메라에 그대로 담기고 말았다.
모노크롬을 좋아한다는 여자아이라면 오늘 촬영한 영상이 모노크롬 채널에 올라갔을 때 보지 않을까.
아는 사이인 주원까지 출연한다면 보지 않을 확률이 더 적었다.
그러나 주원은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군지 말 안 하면 돼요.”
그걸로 정말 괜찮은 건가.
해랑과 한이의 머릿속에 동시에 같은 의문이 들었으나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어쩌겠는가.
사실 이건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었기에 한이도 일단 셀프캠은 켜진 채로 놔두기로 했다.
편집하기 전에 주원에게 한 번 더 물어보고, 이런 이야기가 공개되는 게 싫다고 하면 잘라 달라고 하면 되겠지.
이 타이밍에 연애 고민을 꺼낸 것은 아마도 남자들만 남아 있을 때 물어보고 싶어서인 듯했다.
“그래서 그 애가 모노크롬을 좋아하니까 모노크롬에 들어오고 싶다고?”
“형이 전에 모노크롬 하자고 했잖아요.”
“그……랬지.”
“그랬어?”
한이가 그런 말을 했다는 소리에 해랑이 책임을 떠넘기듯이 한이를 바라봤다.
한이도 본인이 한 말이라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유니온맥스와 달리 모노크롬 멤버는 홀수니까 주원이 들어와서 짝수로 인원을 채우면 롤러코스터 탈 때 유리하다는 소리까지 했다.
그때는 시큰둥한 듯하더니 관심 있는 아이가 모노크롬을 좋아한다고 직접 모노크롬에 들어올 마음을 먹다니.
낭만적인 이야기였으나 모노크롬 멤버 당사자로서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어어…… 일단 모노크롬이 되려면 우주 최강 잘생겨야 해. 우리는 우주로 진출할 거거든.”
“에이. 우주로 어떻게 나가요?”
옆에서 또 다른 아역인 수민이 한이의 말을 듣고 웃었다.
추상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나머지는 아이들의 상상력에 맡길 생각이었는데,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면 이 정도의 과학적 사실은 어느 정도 분간이 가능한 듯했다.
“아냐. 이 형을 봐. 우주로 나가려고 열심히 준비한 얼굴이야.”
한이가 해랑을 가리키자 아이 둘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아이에게는 잘 먹히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잘생겼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지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런데 주원이 너는 아직 성장기니까 지금은 너무 귀엽고…… 초등학교 3, 4학년쯤 되면 우주 최강 잘생겨질 수가 있을 거야.”
“그렇게 오래 걸려요?”
“응. 원래 아이돌이 되려면 준비 기간이 좀 있어야 해.”
실은 10살이 넘으면 그룹에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테니까 한 소리였다.
당장 그룹에 넣어달라는 요청을 자연스럽게 미루면서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떠올린 답안이었다.
“이다음은 이 형이 알려줄 거야!”
한이는 몇 년의 유예기간을 벌어놓고 더 생각나는 게 없는지 해랑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해랑은 황당해했으나 옆에서 주원이 기대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으음. 그리고 노래, 랩, 춤 중에서 하나는 잘해야 해.”
“저 노래 잘해요!”
“그래?”
“네! 음악 시간에도 제가 앞에 나가서 노래 부르고 그랬어요.”
주원의 귀여운 자랑에 해랑이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보컬 포지션에 가깝다는 이야기에 한이가 관심을 가지며 질문했다.
“오오~ 메인보컬이네? 그럼 모노크롬 노래도 알아?”
“네.”
“무슨 노래?”
“<생각이 안 나>.”
최근 곡 제목이 나오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을 뚫고 나온 곡 제목에 해랑과 한이는 잠시 멈칫했다.
“<생각이 안 나>…… 좋은 곡이지.”
“응…….”
한이가 하늘을 바라보며 말하자 해랑도 추억을 곱씹듯이 허공에 시선을 뒀다.
멤버들도 컬러즈가 악동 컨셉을 지겨워한 것은 알고 있었다. 주인 또한 한동안 악동을 철저히 배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곡만큼은 예외였다. 모노크롬이 처음 1위 후보에 올랐던 곡이라 모노크롬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컬러즈가 허용하는 악동 컨셉의 마지노선 같은 곡이기도 했다.
밝고 신나는 분위기의 곡이라서 의외로 아이들 취향에는 가장 잘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감상에 빠져 있는 동안 옆에 있던 수민이 박력 있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야! 그냥 걔 좋아한다고 말해!”
“그런 거 아니라니까.”
“뭐가 아니야! 으휴, 답답해.”
요즘 어린이들은 그렇게 직설적으로 고백하는 타입인가.
해랑과 한이는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세대 차이를 느끼며 동심이 상처받지 않을 방법을 고민했다.
***
식물 이름 찾기를 하러 야외로 나간 네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실내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거실에는 제이제이와 시연, 나윤이 자리를 잡았다.
시연과 나윤이 고른 방학 숙제 내용은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 따라 그리기’.
그림 미션에 낀 재민을 보며 준해가 고개를 갸웃했다.
“해랑이 형이 여기에 왔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재민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마치 거울처럼 준해와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형 그림……. 아니다.”
“시연 선생님은 내 그림의 진수를 알아봐 주셔.”
그건 진수를 알아봤다기보다는 어른스러운 대응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예술에는 정답이 없으니까 준해는 재민의 말에 딱히 반박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이들이 거실에 자리를 잡은 것은 이곳에 TV가 있기 때문이었다.
시연과 나윤은 요즘 한창 방영하는 한 아동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있었다.
준해는 리모컨을 조작하여 다시 보기 서비스로 해당 애니메이션의 제목을 찾았다.
“이게 요즘 그렇게 인기야?”
“네! 친구들 다 이거 봐요.”
시연과 나윤은 신나게 애니메이션의 내용을 설명했다.
<시크릿 히어로>라는 제목의 이 애니메이션은 국내 회사가 제작하는 아동 애니메이션이었다.
열두 살 주인공은 지구를 정복하려는 악당들이 일으킨 사고에 휘말렸다가 히어로로 변신하는 능력을 얻게 된다.
악당들에게 진짜 정체를 들키면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피해가 생기는 것은 당연.
그래서 일상에선 히어로라는 것을 숨기고 몰래 히어로 활동을 이어나가며 펼쳐지는 이야기였다.
나윤은 주인공의 반 친구 캐릭터가 나오자 최애캐였는지 화면을 일시정지까지 시키고 벌떡 일어나 소개했다.
“마리는요. 학교에서도 엄청 인기 많은 여자앤데 아이돌 멤버예요!”
“낮에는 평범한 초등학생이지만 밤에는 인기 아이돌?”
재민이 작년 준해의 학교 축제 비하인드 영상의 가제목을 변형해서 읊었다.
정확한 요약에 나윤은 고개를 크게 끄덕끄덕했다.
2D라서 차원은 다르지만 아이돌이라면 동종업계 종사자였다. 재민과 준해는 아이돌 캐릭터에 흥미를 보였다.
“초등학생이 아이돌이면 음악 방송 나갈 수 있나?”
“괜찮지 않을까? 여기도 아역 선배님들 계시잖아.”
준해의 대답을 듣고 재민은 바로 납득했다.
어른들보다 더 프로답게 배우 활동을 이어나가는 아이들이 앞에 있는데.
아이들은 환경만 받쳐 준다면 연극이나 뮤지컬 무대에도 설 수 있다. 그러니 아이돌 활동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마리가 제일 많이 나와요!”
준해가 리모콘을 조작할 때 옆에서 특정 회차를 틀어달라고 부탁하더니, 이게 나윤이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인 모양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마리의 아이돌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마리의 앞에 한 캐릭터가 등장하자 시연과 나윤이 동시에 캐릭터 이름을 외쳤다.
“루이!”
상냥해 보이는 눈매에 곱슬기가 있는 머리카락. 딱 봐도 인기 많게 생긴 남자 캐릭터였다.
재민이 옆에 앉은 준해에게 속삭였다.
“준해 닮았다.”
“초등학생인데?”
“초등학생 준해 닮았어.”
이런 얼굴이 요즘 여자아이들에게 먹히는 스타일인 게 아닐까.
루이는 시연과 나윤 둘 다 좋아하는 캐릭터였는지 이번엔 시연까지 나서서 캐릭터를 소개했다.
“루이는 중학생이에요!”
“오.”
“그리고 마리랑 둘이서 ‘트윙클’이라는 그룹으로 활동해요.”
마리가 속한 아이돌 그룹은 무려 2인 혼성 듀엣 그룹이었다.
재민과 준해는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서야 시연이 <세대공감 아이+돌> 촬영 때 보이그룹 제이제이에 여주인공 한이를 당연하다는 듯이 편입시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실제 연예계는 그렇지 않지만 애니메이션을 보고 혼성 그룹도 평범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마리도 히어로야?”
“네. 그런데 루이는 아니에요.”
마침 화면에선 아이돌 무대를 준비하는 두 사람의 대화가 흘러나왔다.
[어제 악당들이 나왔던 곳. 너희 학교 근처 아니었어?]
[응. 그런데 금방 히어로들이 출동해서 큰 문제는 없었어.]
[그렇구나…….]
실은 마리가 그 히어로였으나 마리는 정체를 숨기는 중이었기에 루이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마리의 대답을 듣고 루이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재민은 드라마를 보듯이 그 장면을 보며 준해의 어깨를 때렸다.
“루이가 마리 좋아하나 봐!”
시연과 나윤도 그 말을 듣고 높은 소리로 웃으며 좋아했다.
은근한 로맨스 기류까지.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캐릭터 구성이었다.
이어진 트윙클의 무대는 주 시청자층인 아이들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서인지 노래와 춤이 꽤나 잘 구현되어 있었다.
시연과 나윤은 노래를 따라 불렀으나 재민은 메인 댄서답게 자연스레 트윙클의 안무를 따라 했다.
재민과 붙어 다니다가 댄스 실력이 향상된 준해도 화면에 집중하며 안무를 분석했다.
“이거 진짜 누가 직접 춰 보고 만들었나 봐. 따라 하기 좋은 동작들로 잘…….”
‘역시 아동 애니메이션’이라는 생각으로 보던 준해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화면 속의 트윙클이 갑자기 피겨 스케이팅 경기에서 나올 법한 고난도 공중회전 기술을 선보였기 때문이었다.
안무 따기에는 자신 있는 재민도 이 안무는 미처 따라 하지 못하고 휘청였다.
“방금 그 동작에서 저 점프로 이어진다고……?!”
공중회전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던 재민은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초등학생이 아이돌 활동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어린이는 몸이 가벼우니까 저런 과감한 점프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재민의 분석을 듣고 준해는 시연과 나윤을 바라봤다.
여기서 트윙클과 체형이 비슷한 것은 당연히 시연과 나윤이었다.
“시연이, 나윤이는 저거 출 수 있어?”
“너무 빨라서 못 따라 해요. 이것만 할 수 있어요.”
시연과 나윤은 트윙클의 노래 후렴에 나오는 시그니처 포즈를 취했다.
율동 같은 깜찍한 동작에 심각한 표정이던 재민도 표정을 풀고 웃었다.
“좋아. 그러면 우리는 오늘 트윙클의 안무를 마스터해 보는 거야!”
“와아!”
“그럼 나는 마리 할래!”
좋아하는 무대 부분을 다시 돌려보자 신난 것은 아이들이었다.
재민은 뜻하지 않게 트윙클이라는 큰 벽을 맞닥뜨리고 도전정신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본래 계획되었던 만화 캐릭터 따라 그리기 활동은 퍼포먼스 유닛 제이제이에 의해 트윙클의 안무 따라 하기 활동으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