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7화
주인이 안지택 PD를 조종한 것이 아니라 안지택 PD가 본인이 좋을 대로 아이디어를 묻고 가져다 쓴 것이었다.
그러나 류현의 머릿속에는 예전부터 ‘뉴마 이사님은 무서운 사람’이라는 필터가 씌워져 있었다.
‘그 이사님이 나서면 힘든 일뿐이었어.’
박형주의 곡이 신셋 타이틀곡 후보에서 탈락하고, 위기감을 느껴서 제오와 뒷말을 하려고 했던 것은 충분히 반성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후 몸이 힘들어지는 댄스 트레이닝에 정신이 힘들어지는 납량 특집의 반복.
귀신과 함께하는 공포 영화 감상을 마치고 얼이 빠진 신셋 멤버들에게 안지택 PD는 똑똑히 말했었다.
[내가 여러분을 힘들게 하려는 게 아니고, 다 프로듀싱 팀의 아이디어입니다. 허허.]
신셋 멤버들이 제작진에게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내니 책임을 회피하고자 한 말이었으나, 류현에게는 이 모든 일의 배후가 주인이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이런 류현의 오해가 굳어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쉰셋돌> 뒤풀이 때도 그 이사님이 계셨는데요.”
“뒤풀이? 그때 나도 갔었지. 뉴마 사람들은 못 봤던 것 같은데.”
“그때 모노크롬 선배님들이 활동 중이어서 먼저 가셨거든요. 그런데…….”
류현은 무서운 광경이라도 떠올리는 것처럼 얼굴이 허예졌다.
박형주도 그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덩달아 진지해졌다.
“만호 선배님이 그분한테 허리 숙여서 인사하는 걸 봤어요.”
“뭐?”
“시끄러워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못 들었는데요. 이사님이랑 라솔 선배님이랑 같이 앉아 계셨는데, 만호 선배님이 거기로 가셔서 인사하시더라고요.”
“이라솔 씨한테 인사한 게 아니고? 아니지.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한데.”
“이사님한테 인사하러 가신 게 맞아요. 두 분이 대화 나누다가 만호 선배님이 그렇게 인사하고 자리를 옮기셨거든요.”
박형주도 이 말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원만호 씨가 그럴 사람은 아닌데?’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박형주도 연예계에 오래 있었기에 원만호의 본래 성격 정도는 알았다.
그는 윗사람이라고 대놓고 옆으로 가서 아부를 떠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허리 숙여 인사할 정도의 사람이라.
‘PD 수준이 아니라 더 높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나?’
그런 사람이 왜 엔터사에서 일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박형주는 이게 전부 류현의 오해인 줄도 모르고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실 원만호는 주인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것이 아니었다.
주인에게 비밀스럽게 조언을 해주고자 잠시 자세를 낮췄을 뿐이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류현은 크게 충격을 받았지만 동시에 납득했다.
‘아, 그래서.’
주인은 자신을 뉴마 엔터테인먼트의 이사라고만 소개했지만, 사실 엄청난 신분을 숨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모노크롬과 무서운 팀 미로, 음악대상인 라솔. 거기에 안지택 PD와 원만호까지.
모두가 그녀의 말을 듣고 의지하는 것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쉰셋돌>을 촬영하며 봐왔던 사실들은 류현의 머릿속에서 이렇게 잘못 연결되고 말았다.
“잘은 모르겠는데 되게 무서운 분 같아요. 정신을 차려보면 다 그분 말을 듣고 있더라고요.”
“흐음…….”
이런 말을 하는 류현의 표정이 진심이었기에 박형주는 이 이야기를 어느 정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뉴마가 자신을 방해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는 혹여나 뉴마의 뒤에 있는 누군가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안 PD는 별말이 없었는데.’
그도 <쉰셋돌>을 촬영하며 뉴마의 이사라는 사람을 자주 만났을 텐데 말이다.
아이리스의 그린이 최종 섭외되었을 때도 뉴마에 관한 언급 없이 단지 다른 동료 PD에게 추천받아서 섭외했다고만 지나가듯이 말했다.
과연 아무것도 모르는 건지, 자신에게 숨기는 게 있는 건지.
박형주도 안지택 PD와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협업하는 관계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얼마 전만 해도 자신과 상의하지도 않고 방송의 포맷을 예능 위주로 바꾸지 않았던가.
‘일단 뉴마 쪽은 놔둬야겠어.’
대신 뉴마의 이사라는 사람은 요주의 인물로 두기로 했다.
그렇게 주인의 이미지는 뉴마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점점 곡해되어만 갔다.
***
오늘은 몬클하우스에 아역들이 놀러 오는 날이었다.
몬클하우스의 게스트 초대 컨텐츠는 편안한 모습을 담는 것이 관건.
그래서 촬영 스태프가 카메라를 들고 따라다니지 않고 거치 카메라를 많이 활용했다.
오늘도 스태프들이 이곳저곳 카메라를 설치하고 돌아다니느라 몬클하우스 안팎이 어수선했다.
나는 마당에서 촬영 준비에 문제는 없는지 살피고 있었는데, 한이가 안쪽에서 그릇을 하나 들고 나왔다.
한이는 나를 보더니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와서 그릇을 내밀었다.
“두목님, 이거 드실래요?”
그릇 안에는 방울토마토가 일곱 알 정도 들어 있었다. 방금 씻었는지 물기가 묻은 상태였다.
더우니까 수분 섭취하라고 돌아다니면서 나눠주고 있는 건가.
먹으라는 듯이 그릇을 계속 내밀고 있어서 나는 그중 한 알을 집어 들었다.
“사 온 거야?”
한이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내가 방울토마토를 입 안에 넣는 것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대답했다.
“아뇨. 방금 따온 건데요.”
“쿨럭.”
주변이 허허벌판인 이 몬클하우스에서 방울토마토를 따올 곳이라고는…… 한 곳밖에 없었다.
나는 마당 한구석에 자리 잡은 재민의 소중한 미니 온실로 시선을 돌렸다.
분명 저번에 볼 때만 해도 슬슬 익어가던 방울토마토가 몇 개 있었는데. 아마 지금쯤이면 다 익었을 텐데.
투명한 온실 벽 너머로 빨간 과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내 토마토!”
이어서 재민이 후다닥 마당으로 나왔다.
그리고 재민은 목격하고 말았다. 한이의 손에 들린 방울토마토 그릇과 그 앞에서 뭔가를 오물거리는 나를.
“주인 님…… 먹었어요?”
“…….”
나는 입 안에 남은 방울토마토를 마저 목구멍으로 넘겨야 할지 몰라서 멈추고 말았다.
재민이 자식 키우듯이 키운 방울토마토인데. 토마토 아빠 앞에서 삼키기에는 너무 잔인하잖아.
잎을 뜯어도 금방 다시 나는 상추도 못 먹게 한 재민이었다.
그런데 방울토마토는 꽃을 피우고 열매가 열리기까지 시간이 꽤나 많이 걸린다.
그 긴 시간이 담긴 방울토마토가 내 입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당연히 다시 뱉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삼키기도 뭐해서 눈치를 보고 있는데 재민이 한이에게 눈을 흘겼다.
“내가 따온 건데 왜 맘대로 가져가!”
뭐야. 재민이 따온 거였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좋다며 열매도 땅에 떨어질 때까지 따지 않고 놔둘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안심하고 입 안에 남아 있던 방울토마토를 삼켰다.
“나는 또…… 한이가 너 몰래 따온 줄 알았지.”
“에이. 그랬으면 상추도 진작에 다 따서 고기 싸 먹었어요.”
한이도 멤버의 소중한 취미 생활을 지켜줄 줄 아는 남자였는데 내가 과소평가를 했나 보다.
“제가 먼저 먹으려고 했는데……. 씻어서 잠깐 식탁에 놨는데 한이 형이 가져가 버리잖아요.”
“크흠. 그랬구나.”
고의는 아니었지만 재민의 순서를 빼앗아 버린 점은 미안해해야 하나.
“내가 나중에 방울토마토 잔뜩 사다 줄게.”
“아뇨. 괜찮아요.”
재민은 크게 개의치 않는지 그릇에 있는 방울토마토를 두 알 집어 한꺼번에 입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볼이 빵빵해진 채로 한이를 보며 무어라 웅얼웅얼 말했다.
“뭐라고? 좀 삼키고 말해.”
한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귀를 기울이자 재민은 방울토마토를 한 알 집어 한이의 입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한이의 손에 있던 그릇을 들고 다시 몬클하우스 안으로 쏙 들어갔다.
방울토마토가 멤버 수대로 남았으니 멤버들에게 한 알씩 나눠주겠다는 뜻이었던 모양이다.
수확의 기쁨을 다 함께 누리는 것도 훌륭한 농사꾼의 마음가짐이지.
소소한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문제없이 촬영 준비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늘의 게스트들이 도착했다.
오늘 게스트로 모인 아역 네 명은 올해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여덟 살 시연의 또래로 전부 일곱, 여덟 살이었다.
그리고 막내로 여섯 살인 시연의 동생 시우가 함께 찾아왔다.
‘시연이가 동생이 떼를 써서 같이 놀기 싫다고 했었는데.’
시우는 낯을 가리는지 시연의 뒤에 딱 붙어 있었고, 시연은 동생의 손을 잡아 주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남매다운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데 옆에서 우형이 작게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이렇게 작지? 요정인가?”
얼마 전 시연과 촬영할 때도 ‘귀여워’를 연발하던 우형은 아이를 좋아하는 게 맞았던 모양이다. 아이들을 보는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듯했다.
우형의 말대로 시우는 여섯 살치고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오늘 모인 아역들은 한이와 준해와는 구면. 시연은 얼마 전 <세대공감 아이+돌>에서 모노크롬과 촬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시우는 모두와 초면이어서 더 낯을 가리는 듯했다.
우형이 먼저 다가가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사이, 시연은 나를 보고는 다른 아역 한 명을 데리고 다가왔다.
“이사님!”
“안녕하세요.”
공손하게 인사하는 나윤이라는 이름의 이 아역 배우도 준해와 음료 차를 끌고 갔을 때 잠시 만난 적이 있었다.
자라나는 새싹답게 그때보다는 키가 조금 더 커 있었다.
“나윤이가 에메랄드 엔터테인먼트 부사장님 할 거예요.”
“벌써 직원을 뽑았어?”
“네.”
여덟 살에 벌써 부하직원을 구하다니 대단한데.
그걸 자랑하려고 저렇게 뿌듯한 얼굴로 다가온 건가.
‘이런 아이들이 크면 엔터계의 전망은 밝을 거야.’
사장과 부사장이 된 두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힘이 넘치는 한이는 옆에서 아이들을 한 번씩 들어 올렸다 내리는 역동적인 모션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이들과의 인사는 멤버들에게 맡기고, 나는 어른 쪽을 전담 마크했다.
오늘은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데려왔다. 어머니들은 평소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인지, 오늘 아이들이 몬클하우스에 있는 동안 오붓하게 휴식을 취할 예정이라는 듯했다.
“집 안쪽도 한번 둘러보실래요?”
모노크롬의 신분이야 확실하지만 처음 보는 공간에 어린아이들을 두려면 불안할 수도 있으니까.
혹시나 아이를 둔 어머니라면 뭔가 위험해 보이거나 걸리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 확인을 먼저 받기로 했다.
다행히 그런 건 없는지 어머니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몬클하우스를 구경했다.
“전원주택 좋다.”
“나도 일 그만두면 이런 데로 내려와서 살까 봐.”
역시 전원주택을 향한 로망은 다들 조금씩 마음에 품고 있나 봐.
그런 마음이 우리 채널의 조회 수로도 이어지는 거겠지?
몬클하우스가 당초 예상보다 더 유용하게 쓰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
몬클하우스를 구경한 아이들은 간식 시간 전까지 조를 나눠서 따로 활동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아직 여름방학 중이니까, 방학 숙제를 모노크롬과 같이 하자는 취지로 초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야외 조로 배정된 멤버는 해랑과 한이였다.
이 두 사람은 남자 아역 주원, 수민과 함께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의 이름 찾기 활동을 할 예정이었다.
셀프캠과 식물도감, 시원한 음료수를 들고 밖으로 나온 네 사람은 잠시 걷다가 뒷산 아래에 있는 오래된 정자에서 앉아 쉬기로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해랑은 예상외의 질문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있잖아요, 형.”
“응?”
“모노크롬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이 질문을 한 이는 일전에 한이에게 유니온맥스가 되고 싶다고 했던 주원이었다.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질문인가?’
해랑은 자신이 아이돌이 되기 위해 거쳐 왔던 과정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이를 어린이에게 어떻게 알기 쉽게 설명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주원의 말을 듣고 그런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가 아는 여자애가 있는데요. 모노크롬을 좋아한대요.”
이것은 장래에 관한 질문이 아니었다. 이성 관계에 관한 상담이었다.
뜻밖에 연애 고민 상담을 받게 된 해랑은 당황하여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