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화
“그래도 꽤 괜찮은 방법이었어.”
“이게 괜찮으시다고요……?”
해랑이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반영해야지.
소문이 도는 대로 놔둔 데다가 이제는 반대로 이용하고 있던 참 아니던가.
멤버들까지 나서서 아티스트팀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그, 그럼 저희도 한이 형처럼 해야 해요?”
준해는 생활 연기에는 자신이 없는지 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하긴 연기 레벨이 천차만별인데 멤버 모두에게 한이만큼 자연스러운 연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
“연기까지 할 건 없고 약간 거리가 있는 느낌을 내 보면 어떨까. 내가 여기 부임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처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의문을 섞어 말하는데 눈을 끔뻑이는 재민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낯을 별로 안 가리던 멤버들이 있었지. 특히 날 주인 님, 두목님이라고 부르는 두 사람.
그런데 우형은 갑자기 진지한 얼굴이 되어선 멤버들을 둘러봤다.
“생각해 보니까 요즘 우리가 너무 예의 없이 군 것 같기도…….”
“아니, 아니. 너희는 지금 그대로 괜찮고. 그냥 시늉만 좀 내자는 거지.”
초반에 날 마주치면 깜짝 놀라거나 하던 일도 멈추고 벌떡 일어나 인사하던 우형은 과거와 달라진 지금 상황을 깨닫고 괴리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불편한 상하 관계로 돌아가자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나한테 거하게 한 소리를 들었다고 치자.”
“무슨 소리요?”
“……밥 좀 알아서 잘 챙겨 먹고 다녀! 라고.”
“그건 덕담이 아닐까요?”
준해가 내 질타를 덕담으로 분류했다. 내 생각에도 방금 그건 너무 한국인의 인사말 같았어.
혼낸 척을 하려고 해도 쉽지가 않아서 고민하고 있자 재민이 좋은 방법을 제시했다.
“팀 미로에서 로아 누나가 화나면 다 90도로 인사하고 그랬는데. 신경 거스르지 말자고.”
맞아. 예전엔 멤버들이 나만 보면 직각에 가깝게 허리 숙여서 인사했었지.
재민의 말을 듣고 곧바로 한이가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각 잡아 인사했다.
“저희도 이제 이렇게 인사할까요, 두목님?”
“그렇게 인사하면서 두목님이라고 부르면 이상하게 들리지 않아?”
상황극 같아서 웃음이 나오려는데,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멤버들도 그에 맞춰서 내게 90도로 인사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직원은 이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는지 멈칫하더니 우리에게서 최대한 멀어지려는 듯 벽에 바짝 붙어 이동했다.
“그럼 저흰 이만 연습실로…….”
“알았어. 가 봐.”
“네. 좋은 하루 되십쇼.”
굽실크롬은 꾸벅거리며 우르르 계단이 있는 곳으로 몰려갔다.
‘아티스트팀이 아니라 어둠의 조직이 되어 버렸잖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윤희가 내게 ‘신 이사가 멤버들 기강을 잡고 다닌다.’라는 소문이 돈다는 정보를 알려줬다.
***
신셋 타이틀곡 후보 표절 건은 신중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확인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우형에게 확인을 부탁하고 얼마 후, 나는 우형과 함께 성운을 만나기로 했다.
내게 음악대상 이야기를 전해줬던 라솔도 같이 대화를 하고 싶다고 해서 통화가 아니라 직접 만나서 대화하기로 했다.
‘그런데 라솔 씨도 우리가 어둠의 조직처럼 변한 걸 보면 놀랄 테니까…….’
우리는 지금 회사에서 이상한 캐릭터를 구축 중이었기에 외부인을 초대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 때문에 나와 우형은 라솔의 회사로 직접 찾아왔고, 나는 이곳에서도 여러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제가 전에 아이돌 기획사에서 연락이 온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네. 제가 아이리스 타이틀곡 부탁드릴 때…….”
성운이 이전에 했던 이야기를 꺼내서 나도 과거 기억을 떠올렸다.
다른 기획사에서 연락이 오는데 거절하기가 귀찮으니 우리와 협업하는 것을 변명거리로 삼아도 되냐고 했었지.
그 기획사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저한테 연락하던 아이돌 기획사 중 하나가 베터 엔터테인먼트였어요.”
“…….”
뭐가 이렇게 다 엮여 있어?
러너스하이, 그리고 박형주의 소속이 바로 베터 엔터테인먼트다.
“성운 씨가 <쉰셋돌> 시즌1에서 작곡을 맡았으니까 시즌2에서도 같이 작업하자고 연락한 거예요?”
우형과 성운이 만든 신셋 타이틀곡이 좋은 평가를 얻었으니 시즌2에서도 같이 작업하자고 손을 내미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질문에는 옆에 있던 라솔이 대신 대답했다.
“아니요. 방송이 아니라 차기 신인 그룹 기획에 참여해줄 수 있겠냐고요. 그리고 <쉰셋돌> 뒤풀이 때도 만났는데…….”
<쉰셋돌> 뒤풀이 당시 모노크롬은 한창 <체크메이트>로 활동 중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자리를 떴다.
라솔, 그리고 중간에 합류한 성운은 우리보다 더 늦게까지 남아 있었고.
‘그리고 우리가 자리를 뜰 때 박형주 씨가 도착했었지.’
우리가 나간 후에 라솔과 성운, 박형주는 잠시 대화를 나눈 모양이었다.
“그때도 성운이한테 관심을 보였거든요. 베터 엔터 소속 가수들도 곡이 좋다고 칭찬했다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같이 작업해 보고 싶다, 콜라보 같은 건 어떻겠느냐 하는 이야기를 좀 나눴어요.”
“스카우트하려는 건 아니었겠죠? 라솔 씨도 바로 옆에 계셨을 텐데.”
“네. 가수나 작곡가들은 원래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기는 해요. 나중에 밥 한번 먹자, 처럼요.”
그러나 성운은 좀 다른 뉘앙스로 느꼈는지 라솔의 말을 이어받았다.
“그런데 회사가 크고 유명한 가수가 많다고 자랑하는 느낌이……. 저는 그런 건 별로 관심 없어서요.”
성운이 연락 오는 게 귀찮다고 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성운 씨 스타일이랑 안 맞는 사람이었네…….’
박형주는 성운도 유명해지고 싶어서 방송에 나왔다고 생각한 걸까. 사실은 귀찮다, 싫다 하는 성운의 등을 라솔이 열심히 떠미는 건데.
라솔의 말대로 당장 스카우트하고자 한 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좋은 회사임을 어필하는 것은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성운 씨가 이 회사에 종신 계약이 된 게 아니니까.’
좋은 환경을 갖춘 회사와 연이 닿아 있으면 그쪽에 마음이 기울게 되겠지.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라솔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성운은 베터 엔터테인먼트와는 그다지 엮이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뜻이었다.
아무튼 이건 서론이었고, 오늘 우리가 모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래서 타이틀곡 후보에 나왔던 곡은 어때요?”
“딱 잘라서 말하기는 어려운데요. 그래도 작곡가마다 자주 쓰는 악기나 기법은 있기 마련이거든요.”
“미술로 치자면 사람마다 어떤 색을 많이 쓰는지, 어떤 붓을 주로 사용하는지가 다르니까요.”
성운이 대답하고 우형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서 작곡 전문가 두 사람은 어떤 결론을 낸 걸까. 나는 긴장된 얼굴로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그 곡을 박형주 그분이 만들었을 확률은 제 생각에는 한…… 60퍼센트 정도?”
“60퍼센트…….”
의심하기도 뭐하고, 의심을 거두기에도 뭐하고. 정말 애매한 숫자였다.
여기서 우형이 또 자세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오히려 원곡이 있어서 작곡가의 스타일이 덜 드러났을 수도 있어요. 그 곡이 정말 저희 곡을 따라 만들었다고 치고, 두 곡이 비슷한 부분을 배제하고 나서 다시 생각하면…….”
“한 80퍼센트 정도요?”
이번엔 성운의 입에서 나온 숫자가 확 올라갔다.
사람의 귀로 듣고 내린 판단이기에 이 말을 듣고 그를 표절범으로 결론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여러 정황상 그가 주의해야 할 인물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우형과 성운의 결론을 듣고 생각에 빠져 있는데 이번엔 라솔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쉰셋돌> 시즌2에 관해선 연락을 받은 게 없다고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네.”
“그런데 이사님이 박형주 씨 이야기를 하셔서, 시즌1에 참여했던 스태프분께 넌지시 물어봤거든요.”
방송 일을 오래 해 오다 보면 자주 보는 스태프와 친분이 생기기도 한다.
그녀가 알고 지내는 스태프라면 믿을 만한 이야기를 들려줄 가능성이 컸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시즌1 촬영 후반에 시즌2 제작 얘기가 나왔는데, 그때는 제작진 사이에서도 ‘음악대상이 있는 게 그림이 좋다’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고 해요. 저나 천상식 선배님 같은 분이요.”
“안 그래도 QBC에서 천상식 씨를 놓쳐서 아쉬워한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네. 천상식 선배님은 일반 예능에는 잘 안 나가시기로 유명하고. 그래서 제가 다시 섭외를 받았는데 거절해서 다른 사람에게 자리가 돌아간 줄 아셨다더라고요.”
“원래는 음악대상을 두려던 자리였다는 거네요.”
의미심장한 정보였다.
음악대상을 두려고 했던 자리에, 미래의 음악대상 내정자를 둔다……. 그럴싸하잖아?
게다가 <쉰셋돌>은 안지택 PD가 원만호의 연예대상 수상을 축하하며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해서 완성된 기획이었다.
안지택 PD가 담당한 방송에서 연예대상에 이어서 음악대상까지 나온다면, 안 PD의 이름값은 천정부지로 오르지 않을까.
음악대상 내정이라는 위험한 일을 꾸밀 이유가 너무나도 많았다.
“사실,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도 컸는데 하나같이 잘 맞아떨어지네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음악으로 멋지게 예술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생각보다는 낭만적이지 않은 세계예요.”
그 낭만적이지 않은 세계를 걸어온 라솔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
<쉰셋돌> 시즌2에 출연하게 된 그린은 아직 촬영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내부 정보를 캐내기에는 어려운 위치였다.
그래도 안지택 PD와 박형주가 단둘이서 대화를 많이 나누더라는 이야기는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임 PD님이 말씀하신 기획에 참여할 수밖에 없겠네.’
우리가 할 수 있는 교차검증은 전부 거쳤다.
그 결과, 임주미 PD가 내게 한 말들이 전부 사실일 확률이 크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의 음악대상 목표가 크게 위태롭다는 것도.
왠지 불편한 사람이라 내키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골라가면서 일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그녀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 기획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잘 결정하셨어요. 이게 그렇게 이상한 기획이 아니라니까요? 시청자들 인상에도 남을 거고요. 연말 시상식에는 하반기 활동이 중요한 거 아시죠?]
“그럼 촬영 일정은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계세요? 저번에 뵀을 땐 길지 않을 거라고 하셨는데…….”
[프로그램 하나 종영하고 잠깐 비는 시간대가 있어서 그때 들어간다고 말해놨거든요. 그런데…….]
기본적인 질문이었는데 임주미 PD는 왠지 뜸을 들였다.
[배명희 씨께 연락은 드렸는데 아직 출연 확답을 못 들어서. 같이 설득하러 가 주시면 안 될까요?]
“…….”
아직 섭외 안 됐냐고!
내게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겠다길래 나름대로 배려해주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배려가 아니라 메인 출연진 섭외도 안 돼서 어차피 바로 제작을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우리는 이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여러 사람한테 신중하게 묻고 다녔는데 이렇게 어이없는 대답이 돌아올 수가 있나.
그러나 이미 함께하겠다고 밝힌 이상 무를 수는 없었다.
‘뒤통수 전개에 또 당했어.’
나는 물리적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착각이 들어서 뒷골을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