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288화 (288/430)

# 288화

뉴레인에서 날 ‘주인 님’이라고 부를 사람은 없는데. 그것도 여자 목소리로.

환청이 들렸나 했는데 뒤돌아보니 옐로가 서 있었다.

아랫입술이 위로 솟아 마치 어디서 괴롭힘을 당하고 온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누가 괴롭혀?!”

“아뇨오…….”

옐로는 점점 거리를 좁혀 거의 몸을 밀착할 정도로 다가오더니 내 팔을 붙잡았다.

모노크롬만 보고 지내와서 이 정도의 거리감은 낯설었다.

“로아 선생님이 엄청 무섭게 하시길래, 전 저희를 엄하게 대하시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

사전 준비 없이 갑자기 팀 미로의 트레이닝을 받으면 대개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나 보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부터 되돌아보게 만드는 훈련이라니…….’

트레이닝하는 장면을 보기만 많이 봤지, 얼마나 힘든지 체감은 못 해봤기에 그 정도인지는 잘 몰랐다.

“로아 씨가 너희 잘해서 좋다고 그랬어. 무섭게 하는 게 아니라…… 잘 따라오니까 재밌어서 더 열심히 가르치는 거일걸?”

“그게 재밌어하신 거라고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너희 잘한단 소리야.”

안심시켜주려고 말했는데 오히려 무섭게 만든 모양이었다.

옐로도 로아 이야기를 하러 온 건 아니었는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언니들한테 얘기 들었어요. 계약 얘기 하셨던 거.”

“놀랄까 봐 나 대신 전해달라고 했는데 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고 오해하지는 마. 정말 내가 아는 대로 최대한 말해준 거니까.”

“네! 알아요. 사실 비슷한 말을 들은 적 있어서 놀랐어요.”

“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어? 계약을 쉽게 해지할 수도 있다고?”

작은 목소리로 묻자 옐로는 고개를 끄덕거려 대답했다.

아이리스를 계약 파기로 몰아넣을 생각이 있었다는 건 알았는데, 진짜로 실행하려고 움직이고 있었냐고.

“뉴레인은 해외 진출을 노리는 레이블이라서, 해외 활동이 어려우면 지원이 힘들 수도 있겠다고요. 얼마 후에 뉴마에 남은 아티스트 쪽도 독립해 나올 예정인데 그쪽으로 옮겨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냥 사기 치려고 한 거잖아!

지금 뉴마 아티스트팀의 책임자는 나다.

모노크롬이 탈뉴마를 준비 중이긴 하지만 회사 차원에서 다른 레이블을 만들 계획은 물론 없었고.

‘그런데 내가 최근에 뉴레인을 오갔으니, 신빙성 있게 들렸을 수도 있어.’

그래서 옐로는 나를 더 믿지 못한 모양이었다.

내가 아이리스를 데려가기 위한 포석을 깔고자 이번 싱글 제작을 맡은 줄 알고.

“좋은 제안인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이번에 다시 활동 준비하게 되어서 생각을 미루고 있었거든요.”

순간 심장이 덜컹했는데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퀘스트 발생이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큰일 났을 수도 있었는데, 타이밍이 잘 맞았다.

위기 직전에 멤버들한테 주의 사항을 전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뉴마 아티스트팀 독립은 나도 처음 듣는 소리야. 그 말 한 직원 예의주시해. 멤버들한테도 주의하라고 얘기해 두고. 회사 직원들도 사이비 종교에 물들었을지도 몰라.”

“저희를 종교의 본거지로 끌고 가려고 한 걸까요?”

“……그럴 수도 있지. 막 돈 뜯어내려고 할 수도 있고.”

이야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렀지만, 직원이 아이리스를 등쳐먹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 건 좋은 현상이었다.

“너희한테 좋은 쪽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믿어. 갑자기 잘해주는 사람은 조심하고.”

“이사님도 처음부터 믿을 걸 그랬어요. 저 지금까지 막 피해 다니고 그랬는데에…….”

옐로는 방금 날 불렀을 때의 표정으로 다시 복귀했다.

“사회가 험난하니까 그럴 수도 있지. 괜찮으니까 그렇게 울상 짓지 마.”

내가 팔을 토닥이며 말하자 옐로는 울상을 짓는 대신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로아 씨도 너희를 힘들게 하려고 마구 굴리는 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이 말에도 잠시 버퍼링이 생겼지만 끄덕임으로 대답했다.

진심은 언젠가는 결국 통하는 걸까.

목표를 생각하며 비즈니스 관계로 있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마음을 열어주니 확실히 기분이 달랐다.

“그럼 저도 이제 주인 님이라고 불러도 돼요?”

대체 그 호칭을 뭐라고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

이번 아이리스 싱글 타이틀곡 는 중간중간 포인트처럼 들어간 몽환적인 사운드가 특징이었다.

특히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오르골 소리가 곡의 분위기를 잘 설명했다.

언밸런스한 듯 오묘하게 이어지다가 후렴에서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 뚜렷한 멜로디 라인으로 전환되는데, 아마도 작곡가인 성운이 아이돌 음악임을 고려해서 그렇게 구성한 듯했다.

‘곡 자체는 몽환을 가미한 댄스곡이고, 여기에 공포 컨셉의 뮤직비디오를 곁들이면…… 잘 어울릴 것 같아.’

편곡 전 단계의 곡을 전달받아 듣자마자 역시 작곡가를 잘 골라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이리스 멤버들도 노래를 듣고 빨리 녹음을 하고 싶다며 호평이었다.

특히 블루는 가만히 생각에 빠져 있더니 이런 감상을 꺼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저희 데뷔 초 앨범이랑 분위기가 비슷한 것 같아요.”

“아, 맞아! 멜로디가 비슷한 건 아닌데 그…… 감성이?”

멤버들도 ‘다른 사람이 만든 곡인데 신기하다’라며 맞장구를 쳤다.

성운에게 곡을 의뢰하면서 아이리스의 이전 곡들 분위기에 맞춰달라고 요청하진 않았는데.

‘혹시 같은 사람이 제작을 맡아서 그런가……?’

내가 모노크롬을 키우다가 아이리스를 데뷔시켜서인지, 아이리스의 데뷔 초 곡들에는 보이그룹 특유의 컨셉추얼함이 살짝 묻어 있었다.

지금도 마침 모노크롬을 키우다가 잠깐 왔고. 컨셉을 강조하기도 했고.

아니면 성운이 원래 부를 사람에 맞춰서 곡을 만드는 스타일이라 그럴 수도 있다.

그래도 최근 곡이 아니라 데뷔 초 곡이 떠오른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멤버들의 반응도 좋으니 곡에 관련해서는 걱정 없이 성운과 송 피디에게 맡기면 될 듯했다.

‘곡이 대략 나왔으니 다음은 뮤직비디오지.’

곡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뮤직비디오다.

특히 이번엔 뮤직비디오로 스토리를 표현할 생각이라 더욱 그랬다.

이번 뮤직비디오는 오프닝과 중간 스토리 파트를 추가하여 무려 5분짜리로 기획 중이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작사가 역할을 부여받은 그린이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블루가 바이올린을 켤 줄 알거든요. 그러니까 음악실 장면은 꼭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오. 음악실 빼놓을 수 없지.”

“피아노 치는 멤버들도 있는데, 영상으로 담기엔 바이올린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바이올린의 끊어진 줄을 클로즈업해서-.”

이번 아이리스 뮤직비디오의 배경은 학교.

학교에는 교실, 교무실, 보건실 등 다양하고 많은 공간이 있다.

촬영 목적으로 사용 가능한 장소 리스트를 뽑아놓고 어느 공간을 활용하면 좋을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직원들이 모였는데, 그린이 자신도 참여해도 되냐며 먼저 손을 들었다.

‘멤버들의 의견은 얼마든지 환영이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와준다면 고맙고.’

이번 아이리스 뮤직비디오는 학교 동아리실에서 깜빡 잠들었다가 깨어난 한 소녀가 주인공.

영원한 밤의 학교에 갇힌 여섯 명의 기이한 학생을 만나게 되는 내용이었다.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무감정하게 같은 행동만을 반복하는 학생들이 무서워서 소녀는 도망치려 하지만, 우연히 이들이 무언가에 반응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들의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은 바로, 빛을 받아 작은 무지개를 만들어내는 프리즘이다.

하지만 비까지 내려 어두컴컴한 학교에서는 빛 한 점 찾기가 어려웠고, 소녀는 고군분투하고…….

결국엔 일곱 명이 다 함께 비가 그친, 무지개가 뜬 아침을 맞이한다는 내용이었다.

‘레퍼런스로 삼은 영화에서는 학교에 갇혔던 영혼은 아무도 살아나오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우리까지 새드엔딩을 만들 필요는 없지.’

일단 해피엔딩. ‘무조건 해피엔딩!’을 외치며 완성된 스토리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멤버들은 배역을 하나씩 맡는다.

방금 이야기가 나온 것처럼 음악실에서 연주를 한다거나, 누군가는 과학실에서 해골 모형의 손을 잡고 춤을 춘다거나.

이것을 정하는 과정에서 그린이 매우 많은 의견을 냈다.

“퍼플이가 연기를 좀 하잖아? 그래서 이 주인공 역을 맡길까 했는데.”

“제 생각에 보라는 여기 강당. 강당에서 무용하는 장면을 연극으로 바꾸는 건 어떨까요? 주인공 캐릭터 자체는 네이비랑 더 비슷한 것 같아요. 아, 그런데 연기는 좀 어려울지도…….”

그 누구보다 멤버들을 잘 아는 건 역시 같은 멤버다.

그린은 정확한 정보와 캐해석으로 적재적소에 멤버들을 배치해 나갔다.

직원들은 전체적인 이미지를 생각해 큰 틀을 잡고, 거기에 그린의 의견을 반영해 더 또렷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전 옐로 언니가 가장 오싹한 장면을 맡았으면 좋겠어요. 여기 과학실 장면이라거나. 그 언니가 무표정할 때 분위기가 정말 다르거든요. 평소에 귀여운 이미지니까 뮤직비디오에서 그 이미지를 확 반전시키면……! 좋겠, 다고요…….”

청순해 보이기만 했던 그린이 은근히 말이 많은 타입이란 것을 깨달으며 그녀의 열변을 열심히 청취하고 있으니, 그린은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고 생각했는지 자세를 뒤로하고 차분한 어투로 돌아왔다.

직원이었으면 연봉을 올려주고 싶을 정도의 열정이었다.

기획 회의를 마무리하고, 나는 할 말은 다 했다는 듯이 후련한 표정의 그린에게 다가갔다.

“수고했어.”

“아, 아뇨. 이런 회의는 처음인데 혹시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한 건 아니죠……?”

“아냐. 엄청 도움 됐어. 오늘 생각보다 많은 내용을 정해서 진행이 빨라질 것 같아.”

맞아. 모노크롬은 대부분의 회의에 참여하곤 하는데 아이리스는 뉴레인에 있느라 회의에 참여한 적도 거의 없었겠구나.

뿌듯한 표정의 그린을 보니 나까지 뿌듯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작은 목소리로 슬쩍 물었다.

“너 혹시…….”

이런 질문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리스 덕후니?”

“…….”

아이리스 멤버 본인이 아이리스 덕후일 수도 있지.

덕업일치라는 말도 있잖아? 이 경우에 써도 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질문을 듣고 당황했는지 잠시 입을 뻐끔거리던 그린은…….

“더, 덕후 아닌데요?”

왠지 기시감이 드는 대답을 내뱉었다.

***

“명재민.”

비가 오는 흐린 날보다는 해가 쨍쨍한 날을 훨씬 좋아하는 재민은 카페를 다녀오는 길에 광합성을 즐겼다.

이따금 산책 겸 회사 건물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들어가는 것이 그의 취미였다.

건물 안, 햇빛이 드는 창가도 좋지만 밖에 나와 직접 바람을 맞아야 제대로 기분 전환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예상했던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주인 님, 왜 나와 있어요?”

“……주인님?”

물고 있던 빨대를 놓은 재민은 잠시 그 얼굴을 쳐다보다가 “음?” 하면서 고개를 갸웃하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주인 님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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