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화
하필이면 오늘은 금요일. 그리고 쭉 주말이 이어진다.
주말에 집에서 쉬어야 하는데 못 들어가면 더 스트레스를 받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런데 주말에 숙박비가 더 비싸단 점은 생각 못 했겠지.’
내가 문을 못 연다고 집에 안 들어갈 줄은 몰랐을 테니까.
나는 계획에 없던 호화로운 호캉스를 즐기게 되었다.
집에서 옷을 챙겨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갈아입을 옷도 사야 했다.
물론 대표가 절약해서 쓰라고 했던 나의 사이버머니 같은 재산으로.
‘이런 걸 두고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고 하던가.’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나 본데, 한순간의 유치한 행동으로 돈이 얼마나 새어 나가는지나 지켜보라고.
‘내가 네 돈을 펑펑 쓰고 있다’는 사실을 대표에게 어떻게 전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누가 봐도 호텔 룸서비스로 보이는 사진을 찍어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으로 등록했다.
내 업무용 핸드폰 번호는 회사에 오픈되어 있으니까 대표는 내 연락처를 알 테고.
대표는 자신이 벌인 일에 내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궁금하지 않을까.
‘같은 신주인이라 행동 범위가 어느 정도 유추 가능하다는 게 장점이지.’
영화 같은 것을 보면 모든 일의 근원인 배후는 쉽게 범죄에도 손을 대고는 하던데, 대표는 이곳을 게임으로 보기 위해서인지 웬만하면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는 듯 보였다.
덕분에 사람을 써서 위험한 짓을 시킨다든가 하는 감당 못 할 일은 벌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대표가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생각보다 사회적 강자가 아니야…….’
내가 회사에서나 이사로 권력을 휘두르지, 방송국에 가면 을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임 설정에 충실하게도 대표는 정말로 한 중소 엔터사의 대표일 뿐, 사회에서는 그저 한 명의 소시민인 거지.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집 비밀번호와 대표의 연락처를 알아낼 수 있었다.
핸드폰이 울려서 확인해 보니 등록되지 않은 번호로 [너 지금 어디야?]라는, 마치 약속 시각을 앞둔 친구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대표가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번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니라면 또 할 말이 있을 때 다른 번호로 연락하든 하겠지.
나는 번호를 연락처에 등록하고 메시지들을 확인한 후…… 씹었다.
‘이미 늦었어.’
그리고 나는 간간이 들려오는 메시지 알림 소리를 배경음 삼아 돈 많고 우울한 부자처럼 호텔 고층 객실에서 고독을 씹었다.
***
난 대표에게서 비밀번호를 받고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외박을 했다.
그리고 주말이 지나 월요일. 집 대신 호텔 앞으로 온 최 비서의 차를 타고 바로 회사로 출근했다.
“오늘은 퇴근 시간에 맞춰서 도어락 수리 기사를 부를까요?”
“아냐. 비밀번호는 진즉 알아냈어. 그냥 평소대로 퇴근하면 돼.”
“그러면 왜 집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기선제압이지.”
대표가 날 협박할 수단으로 사용하기에는 집이란 곳이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괜찮은 기선제압이었다고 생각해.
한쪽이 확실한 우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대표도 체감하지 않았을까. 내가 은근히 고집이 센 스타일이라는 것도.
또 다른 내가 등장한 덕분에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깨달아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뜻하지 않은 자아 성찰을 하게 되었지만 지금은 대표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내가 대표보다 뉴레인에 더 많이 오지 않았을까.’
대표의 생각을 알게 된 후 아이리스에게 긴히 할 말이 있었기에 나는 뉴레인에 오자마자 레드와 오렌지를 불렀다.
“이사님, 오늘 스타일이 조금 달라지신 것 같아요.”
“응. 주말에 다른 데를 갔다가 바로 출근했거든.”
레드는 나를 보자마자 내 헤어스타일의 차이를 집어냈다.
역시 긴 머리를 관리해 본 여자애라 그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참고로 아침에 먼저 만난 모노크롬은 내게 ‘머리카락이 길어졌다.’고 말했다.
당연히 주말 며칠 새에 갑자기 머리카락이 길어질 리는 없다.
호텔에서 나오느라 평소 쓰던 고데기를 사용하지 못한 탓에 컬이 풀려서 처지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듯했다.
‘역시 집이 편하긴 해.’
대표는 이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해외로 나갔지만 역시 사람은 돌아갈 집이 있어야지.
내게 집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대표에게 알려주기 위해 외박을 하고 온 참이었지만, 사실은 아무리 좋은 시설이라도 익숙한 공간이 더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대표가 알면 환장할 만한 생각을 하며 내가 불러온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이 두 사람만 콕 집어서 불러온 것은, 이 둘이 아이리스의 리더 라인이기 때문이다. 그룹의 리더인 레드, 그리고 유닛의 리더인 오렌지.
“내가 지난주에 대표님을 만났어.”
“대표님을…… 뵈셨어요?”
레드가 놀란 듯이 반문하고, 오렌지도 뭔가 불안한 눈치였다.
대표에게 뜻이 통하지 않아 아이리스의 활동이 중단된 채로 있었고, 내가 그 상황을 타파하면서 나타났다.
그런데 내가 대표와 따로 만났다고 하니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나는 대표의 딸이라는 설정이고, 세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남보다는 가족을 더 우선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내가 할 것은 두 사람이 걱정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더 심각한 이야기일 순 있지만.
“너희만 부른 건 내가 직접 말하는 것보다 너희가 멤버들한테 전해주는 게 멤버들 충격이 덜할 것 같아서야.”
멤버들에게도 전해야 할 내용이라면 아이리스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 그것도 충격을 받을 만한.
내가 이렇게 서두를 떼자 오렌지의 눈에 담긴 불안이 더 깊어졌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말뜻 그대로니까.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만료 전에 회사와 계약을 파기하는 쪽으로 얘기하는 건 절대 안 돼.”
“……네?!”
느닷없는 계약 얘기에 두 사람의 눈이 더 커졌다.
대표가 아이리스의 계약 파기를 선택지로 남겨뒀다면 직원들도 그 방향으로 움직일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회사가 원만하게 해지해줄 것처럼 계약 얘기를 꺼내면 조심해. 언제든지 돌변할 수 있다는 걸 꼭 염두에 두고. 만일 뉴레인과 함께할 생각이 없다면 만료일까지 기다렸다가 정상적으로 해지해.”
그룹을 위해 계약을 조금이라도 빨리 풀어주는 것처럼 설득했다가, 멤버들이 그 제안에 넘어가면 나중에 아이리스가 먼저 파기를 원했다면서 딴소리를 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대표는 위약금을 조금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끈질기게 책임 공방을 이어갈 것 같거든.
아이리스가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이 점을 미리 알려줘야 했다.
레드는 이 이야기를 듣고 풀이 죽어서 말했다.
“대표님은…… 저희와 재계약하실 생각이 없으시대요……?”
레드는 재계약을 앞두고 회사와 협상을 해 보겠다고 했으니, 뉴레인과 의견만 일치한다면 몇 년 더 계약을 이어나갈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먼저 재계약 의사가 없다고 말한 것처럼 들리려나.
“이건 너희 문제가 아니고 대표님 개인의 문제야. 대표님이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고 생각해. 갑자기 이상한 일을 벌일지도 몰라.”
쉽게 ‘대표가 돌았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이해가 잘 안 될 테고.
그래서 대표를 아예 이해하지 못할 부류의 사람으로 만들기로 했다.
“괘, 괜찮으신 거예요?”
괜찮냐는 게 사이비에 빠졌다는 대표를 말하는 건지, 그 대표의 가족인 나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레드는 오히려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최대한 납득할 만한 변명을 붙인 건데 너무 충격적이었나.
“지금 당장은 큰 문제가 없긴 한데…… 엔터 사업보다 다른 게 더 중요해 보이셨거든. 누가 옆에서 안 좋은 쪽으로 꾀어내려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법정 공방이 될 수 있는 문제는 최대한 피해.”
사이비 종교라는 자극적인 단어 덕분에 내 급박함이 전해졌는지 두 사람은 결국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이제 후배들도 데뷔할 텐데…….”
이번엔 오렌지가 내게 질문했다.
곧 런칭해야 할 후배가 있는 이 시점에 회사 자체에 문제가 생기리라고는 생각 못 했겠지.
재계약도 생각 중이었다면 회사가 휘청이는 것은 멤버들에게도 심각한 일이다.
“꼭 회사가 망한다는 건 아니고 대표님이 정신을 차리든지, 마음 맞는 직원들이 합세해서 잘 이끌어나가든지 하는 방법을 기대해 볼 수 있긴 한데……. 불안하겠지만 여러모로 분기점에 있다고 생각해. 일단 대표님이 안 좋은 길로 빠지는 건 내가 막아보려는 중이야.”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너무 불안함만 심어준 것 같아서 희망적인 전망도 말해줬다.
아이리스에게 계약 파기 위약금을 받는다는 선택지가 없어진다면 대표도 좀 더 멀쩡한 방법을 고려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무튼 너희가 해야 할 일은 그거야. 만일 너희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겠다 싶은 직원이 있으면 가까이에 두고, 회사에서 뭔가 더 뜯어먹을 게 있으면 계속 붙어 있어. 적어도 계약 만료일까지.”
“뜯어먹어요……?”
레드와 오렌지는 내 이야기를 들을수록 걱정, 당황 등이 섞여 점점 오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 싱글 결과가 대표님의 마음을 돌리는 데 중요하게 작용할 것 같거든. 잘해 보자.”
내 이야기 전개에 따라오지 못하던 두 사람은 ‘싱글 성공’이라는 확실하고 절실한 목표를 다시 상기하고는 다시 리더의 얼굴로 돌아갔다.
***
“대표님이…… 사이비 종교에?”
주인은 멤버들의 불안을 줄이기 위해 레드와 오렌지에게 내용 전달을 부탁했지만, 같은 멤버의 입을 통한다고 그 충격적인 내용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사님 말씀으로는 작년쯤부터 사람을 잘못 사귀어서 이상한 사상에 물든 것 같다고 하시는데…….”
주인은 대표의 이미지를 이상하게 만드는 데에 가감이 없었다.
그리고 레드와 오렌지는 주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멤버들에게 전했다.
“그러고 보니 작년부터 많이 달라지신 것 같긴 해.”
그린이 작년부터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
레이블을 분리하고, 해외로 나가고, 선배 그룹에서 멤버를 한 명 빼 오더니 아이리스를 빡빡한 해외 스케줄로 몰아넣는 등.
작년부터 대표의 회사 운영 방식이 바뀐 것은 사실이었기에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는 이야기에 신빙성이 생겨났다.
멤버들은 연예계에 있으면서 별별 성향의 사람들을 다 봐왔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 어떡해, 그럼?”
“이사님이 대표님은 잘 설득해 보겠다고 하시는데. 절대로, 계약 만료 전에 파기하는 일은 없게 하라고 당부하셨어. 법적으로 분쟁이 생기면 우리 책임이 될지도 모른다고.”
오렌지의 입에서 나온 노골적인 계약 이야기에 멤버들은 숨을 삼켰다.
“이사님은 정말 우리를 도와주시려는 건가? 계속 우리한테 좋은 쪽으로 말씀해 주시려는 것 같은데…….”
블루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블루는 아직 주인에 대한 평가를 내리지 못했다. 믿어도 될 사람인지, 아닌지.
뉴마에서 주인이 모노크롬을 맡아 순식간에 정상 궤도로 끌어올리는 것은 봤지만, 대표 딸이라는 타이틀을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아이리스에게는 뉴마에서의 기억이 그리 나쁘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최근이 되어서야 대표와 뜻이 맞지 않는다고 느껴서 불신이 심해졌고, 그래서 주인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우리한테 해가 될 얘기를 하시는 분은 아닌 것 같아.”
가장 외부인을 경계하던 오렌지의 이 한마디는 멤버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한때 주인을 외면했던 옐로는 울상이 되었다.
누군가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는데, 그 호의를 의심하는 것은 너무나도 미안한 일이었다.
상황이 자신을 그렇게 몰아간 탓에 어쩔 수 없었지만, 주인은 자신의 그런 행동에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계속 마음이 무거웠던 옐로는 회사에서 주인을 마주쳤을 때 먼저 그녀에게 다가갔다.
“주인 니임…….”
이전에 방송국에서 만났을 때, 선배인 재민이 주인을 친근하게 부르던 게 왠지 부러웠는데.
이 상황이 서러워서 감정이 터져 나온 나머지 그 호칭이 같이 나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