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283화 (283/430)

# 283화

신뢰라는 것은 단기간에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노크롬도 처음에는 날 믿지 못했다고 하잖아. 여러 활동을 함께 해오고 나서야 신뢰 관계가 구축됐고.

나는 지금 아이리스를 위해 움직이고 있지만 아이리스 멤버들에게 내 진심을 이해시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처음엔 좀 편한 관계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의도치 않게 지금 아이리스는 나를 기준으로 양분화되어 있다. 내게 마음을 연 멤버와 아닌 멤버로.

연장자인 레드와 오렌지가 특히 그랬다.

오렌지는 아무나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고, 레드는 그런 오렌지에게 ‘왜 이사님을 못 믿냐’고 하며 의견 충돌을 보이곤 했다.

‘레드가 날 믿어주는 건 고맙지만…….’

지금은 아이리스가 둘로 갈라설 때가 아니다. 더 뭉쳐야 할 때지.

내가 모두에게 인정받기는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하지만 아이리스를 뭉치게 만드는 건 쉽지.

의견 충돌의 원인인 내가 아이리스와 거리를 조금 두면 되니까.

내가 아이리스와 허물없는 사이가 되고 싶어 할수록 날 믿는 멤버들과 경계하는 멤버들 사이에 갈등이 심해질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 비즈니스 관계로 간다.’

나도 사실 퀘스트 달성으로 원하는 게 있었고, 아이리스 멤버들도 나를 통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테고.

누군가는 계산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서로 이득이 되어서 붙어 있는 관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과가 모두에게 좋은 방향이라면 더더욱 괜찮지.

특히 사람 좋아하는 레드는 내게 무한한 신뢰를 보이는 바람에 오렌지를 섭섭하게 만들 정도였다.

나는 한발 물러서 있을 테니 나 때문에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렴.

그런 생각으로 나는 멤버들을 속여서 공포 영화 상영관에 몰아넣은 배신자가 되기로 했다.

“꺅!”

“아악!”

이 영화를 조금이라도 본 적 있는 멤버들도 있었지만, 나온 지 10년도 넘은 영화여서인지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덕분에 다들 처음 본 것처럼 영화에 한껏 몰입했다.

“이 팝콘 누가 던졌어?!”

“아하하하하!”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서로의 반응이 재밌는지 웃기도 하며 마음껏 즐기는 모습이었다.

역시 공포 영화는 다 같이 보는 게 재밌는 법이지.

‘나도 따라오길 잘했어.’

사실 오늘 나까지 동행할 필요는 없었지만 따라온 이유가 있었다.

공포 요소를 추가하기로 한 후, 모티브로 삼으면 어떻겠냐고 이야기가 나온 것이 바로 이 <마지막 수업>이라는 제목의 영화였다.

참고하려면 영화를 직접 봐야 하는데, 집에서 혼자 보면 무섭잖아.

옆에 다른 직원들도 있고, 아이리스 멤버들의 비명과 웃음소리를 배경 삼아 나도 안심하고 감상할 수 있었다.

‘퇴근하고 혼자 남으면 생각날 것 같지만…….’

이번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안 볼 수도 없고.

나는 열심히 ‘이건 인풋이다. 나는 지금 일하고 있는 거다.’를 머릿속으로 되뇌며 영화를 감상했다.

***

<마지막 수업>은 한 학교의 폐쇄된 구교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였다.

수십 년 전 이 학교의 학생들이 연신 실종되는 사고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학교에는 특정일, 특정 시간에 구교사로 가면 실종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괴담이 이어져 내려온다.

그리고 하지 말라는 것은 꼭 하고야 마는 공포 영화 주인공들답게, 주인공 일행은 호기심으로 폐쇄된 구교사를 방문한다.

‘그리고 갇혀버리지.’

아무리 기다려도 누군가 도와주러 오거나 동이 틀 기미는 보이지 않고, 주인공 일행은 끝없는 밤에 갇혀버린다.

결국 일행은 뭔가에 홀리거나 쫓기면서 뿔뿔이 흩어져 온갖 공포 현상들과 조우한다.

그러다 주인공은 한 영혼과 만나게 되는데, 구교사에 남은 기록으로 그녀가 오래전 실종되었다는 막내 이모의 영혼임을 알게 된다.

수십 년간 학교에 갇혀 있느라 여느 귀신들과 마찬가지로 악한 기운에 물들었던 영혼은 생전의 기억을 되살리고, 학교를 벗어나고 싶어 하며 같은 목적을 지닌 주인공 일행을 돕는다.

그 영혼의 도움을 받아 주인공 일행은 학교를 탈출하지만, 끝없이 이어졌던 밤과 현실의 시간대가 달랐던 탓에 영혼은 결국 학교를 벗어나자마자 사라져 버리는 결말이었다.

“마무리가 왜 이렇게 슬픈 거야아…….”

영화 상영이 끝나고, 네이비가 울상을 지으며 코를 훌쩍였다.

상영이 시작할 땐 팝콘과 음료를 들고 있던 멤버들도 상영관의 불이 다시 켜졌을 땐 손에 티슈를 들고 있었다.

영혼은 학교를 벗어나 사라져 버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랫동안 실종 상태였던 그녀의 유해가 발견된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동생의 유해를 찾아 오열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혼 하나는 해방되었지만 구교사에는 아직도 많은 영혼이 남아 있다는 찜찜한 결말이기도 했다.

“다들 영화 잘 봤어?”

“네!”

“같이 보니까 재밌다.”

공포 영화라는 것을 알고 배신당한 표정이던 멤버들도 영화를 잘 감상했는지 표정이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며 마음껏 소리 지르고 나온 것처럼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주인공들은 왜 꼭 가지 말라는 곳에 가는 거지?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학교를 왜 가. 무섭게…….”

블루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공포 영화의 클리셰를 콕 꼬집으며 투덜거렸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양심이 콕 찔리고 말았지만. 이제 말해줄 때인가.

“한밤중에 학교…… 너희도 가게 될걸?”

“네?”

“사실 이 영화가 너희 뮤직비디오의 모티브가 될 거야. 그래서 야간 촬영을 생각 중이거든.”

“네에……?”

엔딩의 여운에 잠겨 있던 멤버들은 스릴 넘치는 공포 연출이 다시 떠올랐는지 표정이 굳었다.

우형에게는 후배들을 신셋처럼 굴리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신셋 멤버들을 친하게 만든 방법을 조금 활용하긴 했다.

로아의 하드 트레이닝도 그렇고, 방심하지 못할 스케줄도 그렇고.

평소에 정신을 쏙 빼놔서 다른 걱정보다는 공동의 목표에 더 집중하게 만드는 거지.

로아를 내가 데려왔기 때문인지, 트레이닝을 받다가 지친 멤버들은 이따금 내게 살려달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목표를 위해 슬쩍 그 시선을 외면해 버린 적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내 이미지는 좀 악랄해지겠지만 어쩌겠어.’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어야지.

뉴레인에서 이미지 좋아져서 승진할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렇게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뉴레인에서의 내 이미지는 이상한 쪽으로 바뀌었다.

***

“안녕하세요!”

“어, 보현아.”

뉴레인을 오가다 보면 자연스레 뉴레인에 소속된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리스를 제외하면 유일한 아티스트인 윤환도 멀리서 꾸벅 인사하고 지나간 적이 있었고.

요즘 가장 잘 마주치는 것은 데뷔 서바이벌에 참가한 연습생들이었다.

아직 방송은 끝나지 않았지만 촬영은 마무리 단계였다.

데뷔조도 거의 결정되어서 특별한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바뀔 일은 없다고 들었다.

‘타율이 반이라……. 딱 적당한 결과 같아.’

우리의 목표는 탈락 예정자들을 데뷔시키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것.

다시 구성된 데뷔조에는 기존 내정자 두 명, 탈락 예정자 세 명이 포함되었다.

이 정도면 다섯 명 모두 본인의 노력으로 데뷔의 기회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지.

보현은 진작에 안정권이었고, 연찬 덕분에 탈락을 모면한 지원은 뒤늦게 주목을 받은 후로 날개를 펼쳤다.

뉴마에서 넘어간 배우 지망생 중 한 명은 데뷔조에 들었고, 나머지 한 명은 다시 뉴마로 돌아와 배우 활동을 시작한다고 한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얼굴을 알린 덕분에 바로 작은 배역을 맡기로 얘기가 되어 있다나.

서바이벌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탈락자는 발생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넌 신기하게 볼 때마다 점점 연예인 티가 나는 것 같아.”

보현은 처음에 봤을 땐 학생 느낌이 강했는데 지금은 준비된 신인 아이돌 같았다.

이게 바로 카메라 마사지인가?

아니면 헤어, 메이크업 전문가들의 손길을 받으며 맞는 스타일을 찾아서 그런가. 눈도 더 반짝이는 것 같고…….

“저 정말, 모노크롬 선배님들이랑 이사님을 만난 게 천운이라고 생각해요.”

갑자기 보현은 자신의 두 손을 맞잡으며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카메라 마사지 때문에 눈이 더 반짝거리는 게 아니라 날 반가워하는 얼굴이었나 보다.

“회사에 들어온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몰랐거든요.”

“네가 잘한 거지. 나도 방송 쭉 봤는데 넌 정말 천생 방송인 체질 같더라. 카메라 앞에서 긴장도 안 하고.”

“아니에요. 이사님이 연기랑 비슷하게 하라고 조언해 주신 덕분이죠. 연찬 형도 이사님 덕분에 새 꿈을 찾아갔잖아요.”

“……으응?”

이건 또 무슨 소리람.

해랑의 태도가 바뀐 것 때문에 연찬이 나를 탓한 적은 있었는데, 그게 어떻게 내가 연찬에게 새로운 꿈을 찾아준 것처럼 와전된 거야? 느낌이 너무 많이 다르잖아.

“뭐랬더라. 아이돌이 진정한 꿈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댔나. 그래서 유학하러 간 거잖아요, 연찬 형.”

“나한테 비슷한 말을 하긴 했는데…….”

‘짜증 나고 하기 싫어져서 안 하겠다’라고.

보현의 머릿속에는 연찬이 아직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보니.

“다들 그 형은 진짜 데뷔할 것 같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도 미련 없이 하차하는 거 보고 연습생들이 다 엄청 놀랐잖아요. 얼마나 감명 깊은 말을 들은 거냐면서.”

“으음. 연찬이가 마음을 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나보다는 해랑이가 아닐까…….”

“아! 해랑 선배님도 진짜 대단한 것 같아요. 지원이 형이 어느 날 실력이 갑자기 엄청나게 늘었는데 선배님이랑 대화하고 난 뒤부터 그렇다는 거예요.”

……여기 연습생들은 대체 대화를 어떤 방식으로 나누고 있는 거야?

해랑이랑 대화 한 번 했다고 갑자기 실력이 늘어나는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

대화를 통해 자신감을 얻었다거나 좋은 영향을 받아서 더 노력했고, 그래서 결국 뛰어난 결과를 얻어낸 거겠지.

그런데 중간 과정을 쏙 빼고 찬양하니까 마치 사이비 종교의 간증 같아졌다.

‘이상하게 모노크롬의 판타지 특성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

처음엔 비를 불러온다거나, 태풍의 눈 정도였는데.

이제는 퇴마를 했다느니, 부적이라느니, 종교 신앙 같은 얘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괴담 주인공도 한 명 있고.

모노크롬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특성들은 아니니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그래서 저희 연습생들이 다들 모노크롬이 잘된 이유가 있구나, 하고 납득했잖아요. 이번에 아이리스 선배님들 프로듀싱도 맡으신다면서요. 진짜 대박 날 것 같아요.”

“그, 그래. 고마워.”

서로 생각하는 방식이 좀 다른 것 같긴 하지만, 대성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 내게 아주 좋은 응원이었다.

***

“다혜 씨, 이리 와 봐.”

“무슨 대화 중이세요?”

뉴레인의 휴게실 앞을 지나던 아이리스의 매니저, 공다혜는 휴게실 안에서 대화 중이던 직원들에게 붙잡혀 의자 하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이 다혜를 불러온 것은 다혜가 아이리스의 일정 대부분에 동행하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 때문에 요즘 뉴레인을 자주 드나드는 뉴마의 이사, 주인과 마주칠 일이 가장 많은 직원이라서.

“신 이사님 어때? 직원들도 잘 챙겨주셔?”

“어어……. 커피 같은 건 굉장히 잘 사주시는데. 다들 이사님 얘기 중이었어요?”

주인은 법인카드인지 개인카드인지 카드를 턱턱 내밀고는 했다.

덕분에 같이 일하는 직원끼리 ‘역시 대표님 따님이라 통이 크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다.

“아니, 그게. 되게 특이하잖아. 뉴마로 갑자기 부임하시더니 이번엔 아이리스까지 직접 맡으시고.”

주인은 이전에도 서바이벌 프로그램 때문에 종종 뉴레인을 오가긴 했으나 최근엔 아예 본격적으로 들어앉았다.

그녀가 이 회사 소속이 아님에도 뉴레인의 일에 관여하는 것은 역시 대표님의 뜻이 아닐까. 직원들은 그렇게 여겼다.

어쩌면 회사를 물려받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주인은 허용석 기획실장에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직원들은 물밑에서 그런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래서 요즘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거든. ‘이사님 라인’을 모으고 계신 게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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