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화
‘나를, 알고 있었다고.’
방금까지 우울한 감정이 들어찼던 머리가 서늘하게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잠깐 사이에 머릿속에서 최 비서의 태도에 관한 많은 퍼즐 조각이 맞춰지고, 또 그만큼 의문이 생겨났다.
‘애초에 내가 대표의 딸이고 외국에서 왔다는 걸 알려준 게 최 비서였는데.’
그가 임의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공적인 정보들을 확인해 봤을 때 실제로 내 신분은 설정대로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최 비서는 나를 안다는 것을 숨기고 나의 새 신분에 맞춰 행동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런 얘기들을 전해준 거지?
“그런데 왜 지금까지 나한테는 아무 말을 안 했어? 아니, 잠깐.”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여 잠시 그의 말을 막았다.
이 세계엔 뭔가 비정상적인 힘이 개입하고 있다. 나를 멋대로 이곳으로 불러오고 퀘스트를 부여했던 것처럼.
‘좀 더 시스템에 가까워 보이는 대표에 관한 정보를 모으면, 어쩌면…….’
스마트폰은 부서졌지만 뭔가 다른 방향으로 해결책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들어서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그러나 이 시간에 최 비서보고 갑자기 들어와서 얘기하자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나는 그의 상사니까 최 비서는 불편해도 거절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깨진 액정을 맨손으로 만지는 것을 저지하던 최 비서는 내가 일어서자 따라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지금은 나한테 대표에 관해 말해줄 수 있어?”
“……이사님이 물으신다면.”
“그럼 잠깐 차로 내려가서 얘기해.”
왜 갑자기 그가 말할 마음이 들었는지도 들어봐야 했다.
***
최 비서는 운전석에, 나는 뒷좌석에 앉아 서로 마주 보지 않고 대화를 나눴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차라리 이 구도가 나았다.
“……대표가 나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거지.”
“네.”
“처음부터?”
“처음엔 닮은 분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저는 대표님을 몇 년이나 봐 왔으니까요.”
그때의 신 대표와 지금의 신주인은 차이점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표는 내 아버지라는 설정이다. 남자라는 말이지.
아마도 그 이유는…….
‘게임에서 대표 캐릭터가 남자여서.’
정말 단순한 이유였다.
게임을 처음 시작할 때 스쳐 지나가듯이 작은 대표 캐릭터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직원들이나 멤버들은 머릿속에 연막이라도 쳐진 것처럼 대표를 잘 기억하지 못했고 그저 ‘남자 대표’로만 생각했다.
‘한이가 귀신이라고 했던 것도, 어쩌면 나일지도 몰라.’
녹음실 앞을 지나가던 게 대표인 줄 몰랐기 때문에, 대표가 아니라 모르는 여성으로 인식하는 바람에 어렴풋이 기억에 남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딱 한 명, 최 비서는 대표가 젊은 여성인 나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내가 외국에서 왔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최 비서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설정을 받아들인 걸까?
그런데 최 비서의 대답을 들어보니 그게 아닌 듯했다.
“저도 처음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건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저 하나만 이상함을 느낀다면, 누구나 ‘이상한 건 반대로 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멀쩡하게 고등교육을 마치고 문제없이 살아가던 사람인데 딱 한 사람만 이상하게 보인다면 ‘내 정신이 이상해졌나?’ 싶었겠지.
혹여나 NPC 같은 말을 할까 봐 긴장했는데, 최 비서는 현실적인 고민을 할 줄 아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유능하려면 열심히 살아왔을 텐데, 내가 그 인생의 오점이었다니.’
하필이면 대표의 비서가 튜토리얼 캐릭터라는 이유로 그는 비현실적인 상황을 맞닥뜨려야 했다.
의도치 않게 최 비서를 고뇌하게 만든 점을 사과해야 하나.
대화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라는 점에 긴장이 풀렸는지 이런 잡다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계속 일했던 이유는 뭐야? 대표 옆에만 있지 않으면 최 비서는 평범하게 살 수 있었던 거 아니야?”
“대표님 업무 스타일이 옆에 누군가는 꼭 있어야 해서…….”
“그건 아는데 최 비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남아 있던 이유가 궁금해서. 중간에라도 회사를 나가고 새 사람에게 인수인계했을 수도 있잖아.”
최 비서는 잠시 예전 일을 떠올리는 듯 말이 없더니, 5년 넘게 대표를 보좌해왔던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제가 이상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해 보니 제게만 대표님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제외하면 업무 환경에는 문제가 없어서 조금 더 일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요.”
대표의 정체가 가장 중요한 건데 그걸 제외하고 생각하다니.
너무 비현실적인 일을 겪은 탓에 상대적으로 정상적인 부분이 도드라져 보인 게 아닐까.
“대표님은 업무 지시 외에는 일절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감정을 전혀 내비치지 않으셨습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그런데 그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최 비서가 어떤 마음으로 일해왔는지 듣다가 대표에 관한 정보가 나와서 나는 귀를 기울였다.
“대표님이…… 어느 날 2주 정도 집에서 나오지 않으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아니, 대표가?”
“네.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전화를 걸어봐도 일부러 끊으시더군요.”
기계처럼 일만 하던 대표의 갑작스러운 이상 행동.
그리고 나는 2주간 집에 틀어박힌 적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건 현실의 내가 한 행동이었다.
‘설마 그때 내가 마이 엔터를 포함해서 아무것도 안 한 게…… 이 세계에선 그렇게 표현된 거야?’
게임 속 시간은 현실 시간보다 빠르게 지난다.
게임 속에서 대표가 칩거한 2주와 현실에서 내가 칩거한 2주는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리 설정해둔 스케줄이 자동으로 전부 진행된 후, 내가 다시 접속하기까지의 업무 공백이 우연히 이 세계에서도 2주였던 거겠지.
‘그때 현실의 나를 찾는 사람은 없었는데, 게임 속에서는 최 비서가 대표한테 계속 연락하고 있었구나.’
당연히 현실의 나는 최 비서의 연락을 받지 못했다. 게임 알림 정도는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현실의 나까지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다행히도 대표의 휴대폰이 꺼져 있던 게 아니어서 생사 확인은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대표는 갑자기 집에 틀어박힌 것처럼, 갑자기 집에서 나왔다고 한다. 아무 감정도 없어 보이는 평소 모습 그대로.
“그래도 그 일로 대표님이 기계처럼 움직이는 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관찰을 해 봤습니다.”
“관찰을 해……?”
최 비서가 가끔 내가 일하는 것을 특이하단 눈으로 볼 때가 있었는데, 설마 그게 대표를 보던 눈이었나.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해서요. 그리고 알게 된 것도 있었습니다. 가령…… 아이리스를 좋아하신다거나.”
“대표는 말을 안 했다면서 그걸 어떻게 알아?”
“스타일링을 매번 꼭 챙기시던 것도 그렇고, 성과를 보고드리면 그 서류를 계속, 몇 번이나 보셨거든요.”
“…….”
마이 엔터를 플레이하면서 아이리스의 음반 성적이나 이벤트 결과가 좋으면 그 결과창을 몇 번이나 열어본 기억은 있다.
‘그걸 최 비서가 보고 있었다고……?’
집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열창하다가 가족과 눈이 마주친 것처럼 민망한 기분이 올라왔다.
내 얼굴만 아는 줄 알았는데 나를 생각보다 잘 알고 있었잖아?
“제게만 이상하게 보이는 게 아니라 저만이 제대로 보고 있는 거라면, 이상하다기보다는 특별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룸미러 너머로 그렇게 말하는 최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계속 대표 옆을 지켜왔던 것은 게임 시스템에게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 자의였다는 사실이 왠지 안심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최 비서의 이야기는 다시 한번 반전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표님이 처음으로 지시 외에 다른 말을 하셨습니다.”
신생아가 옹알이를 했다거나 처음으로 단어를 구사했다는 듯이 들리기도 하지만 단순히 그런 얘기가 아니다.
내 플레이를 벗어나 대표가 자체적으로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그래. 내가 이 세계에 오기 전에 대표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어.’
내 마지막 플레이, 그리고 내가 이 세계에 들어온 1월 1일 사이에는 공백이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때 대표는 내 플레이를 벗어나 자아가 생긴 모양이었다.
방치했던 모노크롬의 재계약을 미루고, 뉴레인을 설립해 아이리스만 데려간 것을 보면 플레이어였던 내 습성이 반영된 것 같은데.
“기억을 잃은 것처럼 혼란스러워하시기에, 제가 대표님과 대표님이 하시는 일을 잘 알고 도와드릴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해 드렸는데 저를 보며 하신 말씀이…….”
대표에 관한 정보를 더 자세히 듣기 위해 나는 최 비서가 이어서 하는 말에 집중했다.
“기분 나빠, 라고…….”
“…….”
최 비서는 게임 속에서도, 소통이 되지 않는 플레이어인 날 이해해주려고 노력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날 알아봐 주고 걱정했다는 이야기를 고마운 마음으로 듣고 있었는데, 어째 마무리가 영 좋지 않았다.
“그 후에 대표님은 메일과 유선으로만 업무를 지시하셨고, 해가 바뀌기 전에 갑자기 해외로 나가셨습니다.”
“그, 어…….”
기분 나쁘다는 소리가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일까.
그 때문에 최 비서는 나를 안다는 것을 1년 넘게 숨겨왔던 모양이다.
‘내가 모르는 내가 한 말을 변명해야 하나……?’
그때의 대표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는 건 최 비서도 인지하고 있는 듯하니 해명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표의 행동도 이해가 된다는 점이었다.
‘만일 나였더라도 똑같이 말했을 것 같아.’
예전의 나는 사람들의 시선에 예민했다.
그런 상태에서 누가 나를 잘 안다며 아는 척을 했다면 안 좋은 생각부터 들었을 것 같단 말이지.
“그리고 이사님을 처음 뵈었을 때, 진짜 대표님이 나타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성함도 처음 알게 되었고요.”
“그렇구나…….”
출근 첫날이 떠올랐다.
나는 그때 처음 보는 최 비서의 스타일이나 훑고 있었는데.
당시엔 현실 같지가 않아서 화면 너머의 다른 세상을 보듯이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있었다.
모노크롬을 보고도 게임 속 캐릭터라 의지가 없는 건가 생각했을 정도니까.
“그래서 저는 진짜 대표님이 여기 계시기에 이전의 대표님은 해외 순방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스레 사라지셨다고 생각했는데…….”
과거도 중요하지만 이게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어쨌든 대표는 내 모습을 하고 있었고, 나보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 대표가 아닌 신주인이 이 세계에 새로 나타났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대표가 설정상으로만 존재하는 중년 남성이 된 게 아니라면.
“내 스마트폰을 가져간 게, 대표였어?”
“……네.”
스마트폰이 발견된 주차장 CCTV 기록을 확인해 보니 확실히 찍혀 있었다고 한다.
분명 최 비서가 집에 데려다 놓았을 내 모습이. 아니, 최 비서만 알고 있던 대표의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