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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269화 (269/430)

# 269화

남이 본다면 평범한 형제의 대화 같겠지만, 두 사람에겐 이렇게 추억 얘기하듯이 떠올릴 기억이 아니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카메라 앞에서 그 어색한 친한 척 그만하면 안 돼? 그것 때문에 내가 뭘 못 하잖아.”

해랑은 항상 한발 양보하며 연찬의 말을 들어주었고, 연찬은 그것을 이용해왔다.

그러나 지금 해랑은 이 요청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연찬도 이런 간단한 말로 해랑이 태도를 바꾸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형은 내가 데뷔하는 게 싫어?”

“네가 진심으로 성실하게 하려고 하면 응원할 거야.”

방송 조작이나 데뷔조 내정과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바뀐 데뷔조 구성도 알고 있다는 사실은 뉴레인에 숨기는 중이니까.

연찬은 해랑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 질문한 게 아니었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런데 형이랑 엮인 사람들은 날 싫어하거나 방해하려고 하더라. 왜 그럴까, 생각해 봤는데 역시 형이 나를 별로 안 좋아하는 티를 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더라고.”

“…….”

연찬은 모든 원인을 해랑에게서 찾으려 했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은 연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동생의 그런 성격을 아는 해랑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너 정말 이 일을 하고 싶은 거 맞아?”

“아니라면? 그냥 발판으로 삼고 싶은 거라면 어떡할 거야? 회사에 말해서 떨어트리라고 할 거야?”

간단한 마음으로 몇 년 동안 기획사에 들어가 연습생 생활을 해 온 것은 아니겠지만, 해랑은 동생의 마음이 붕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도 그간 말없이 동생의 요청대로 정보를 알려주고 도와줬던 것은 본인이 몸소 체험해 보고 결정하기를 바라서였다.

다른 이들의 노력을 밟고 올라가고 싶을 정도로 절실하다면, 다른 방향으로 꿈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계속할 수 있는 일 아냐.”

“그럼 무슨 사명감이라도 가져야 해? 그러는 형도 그냥 편한 데로 도망친 거면서.”

연습생을 하겠다고 집을 나온 것을 도망쳤다고 표현하는 이 애에게 자신의 말이 통하기는 할까.

막막해졌지만 해랑은 차근차근 설명하려 했다.

“그룹은 팀플레이잖아. 너 혼자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면 오래 못 이어가.”

“회사 선배 보니까, 그룹으로 좀 활동하다가 따로 나가는 것도 괜찮아 보이던데.”

“…….”

뉴레인에 있는 윤환 이야기였다.

모노크롬과 윤환이 특별 케이스인 건 둘째 치고, 가족이라고는 해도 외부인인 연찬에게 이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장소 선정부터, 불만을 내뱉는 것까지. 연찬은 계속 해랑을 도발했다. 그게 해랑을 따로 불러온 목적인 듯했다.

더 대화를 이어나가봤자 아무 득도 없으리라 생각한 해랑은 대화하려 했던 의지를 잃고 말았다.

“박연찬. 이런 소리 할 거면 촬영 장소로 돌아가. 더 들어줄 얘기 없어.”

어릴 적 동생이 성씨로 투정을 부렸던 일 탓에 해랑은 연찬을 ‘연찬’이라고 부르지, ‘박연찬’이라고는 잘 부르지 않았다.

호칭이 달라졌다는 것은 확실히 연찬의 도발이 통했다는 것.

그러나 해랑이 더 화내지 않고 돌아가자는 듯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연찬은 그를 붙잡으려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알았어. 요즘 누구 때문에 방송이 자꾸 이상해져서 이슈를 좀 만들어 볼까 생각했던 것뿐이야. 그 정도는 해야 살아남는다더라.”

“……넌 뭘 하고 싶은 건데?”

“형이랑 나는 어차피 엮일 사이인데…… 사이좋은 거 재미없잖아. 사람들은 한쪽을 편드는 상황이어야 더 관심을 보이잖아? 그러니까 불화를 좀 만들어보자는 거지.”

대체 이런 생각들은 어디서 배워왔는지.

제대로 연예인이 되기 전에 방송의 안 좋은 점부터 배운 동생을 보며 해랑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 서로 방송을 위해서 섭외된 위치 아니야? 좀 도와줄 수 있잖아.”

“아니. 못 도와줘.”

“형 진짜 많이 변했네.”

“내가 변한 건 네가 변하지 않아서야.”

연찬은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 화제가 불편한 것은 해랑도 마찬가지였다.

말로 그만하자고 해도 들을 것 같지 않다고 판단한 해랑은 강제로라도 대화를 끝내기 위해 몸의 방향을 틀었다.

“진짜로 이런 얘기 그만하고 돌아가자.”

“아니, 잠……!”

연찬이 해랑을 붙잡아두려고 물가 바로 옆 바위에 서 있었던 게 문제였다.

그를 붙잡으려고 섣부르게 움직이던 연찬은 이끼에 발이 미끄러져 버렸다.

해랑이 재빠르게 손을 뻗었고, 연찬 또한 몸이 기울어지자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

물에 빠질 뻔하여 놀란 마음을 잠시 진정시킨 연찬은 고개를 들었다.

우연히도 어릴 적 두 사람이 겪었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리고 해랑의 표정 또한 그때와 똑같았다. 미끄러지던 자신을 쳐다보던 절박한 표정.

연찬은 알고 있었다. 어릴 적 해랑이 자신을 밀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과 달리 어린 해랑은 힘이 부족하여 아이의 체중을 버티지 못했다.

강한 기시감을 느끼며 연찬은 맞잡았던 손에 힘을 풀었다.

“지금 여기서 내가 물에 빠지면…….”

“너……!”

“사람들이 나를 더 주목하지 않을까?”

동생의 발언에 해랑은 더 참담한 표정이 되었다.

어릴 적 병실에서 들었던 연찬의 말과 그 분위기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동생이 그렇게 말했던 이유를 지금 본인의 입으로 확인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

해랑은 말없이 연찬을 잡아당겨 똑바로 세웠다.

꽉 쥔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펜션이 있는 쪽으로 연찬을 데리고 걸어갔다.

주차된 차들과 촬영 장비가 보이는 곳까지 이르러서야 해랑은 동생의 손을 놓았다.

“위험한 짓 하지 마. 그게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건 결국 너까지 위험에 빠트리는 일이야.”

“그러니까 나는-.”

“이제 너한테 해줄 말 없어.”

방금까지 여유로웠던 연찬은 해랑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자신을 붙잡던 절박한 표정과 달리, 지금은 놀랍게도 모든 감정을 정리한 듯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이 정도 했으면 된 것 같아.”

해랑은 먼저 뒤돌아섰다.

이제부터는 누가 되돌리려 하든, 모든 게 뒤늦어 버렸다고 생각하면서.

***

멤버들은 연찬과 관련된 일에는 해랑 과보호 모드였다.

멤버를 혼자 스케줄에 보내는 것은 걱정이 없었지만, 연찬이 있는 곳에 해랑을 혼자 보내는 것에는 걱정이 많았다.

해랑은 오후에 촬영 장소로 출발했고 거리가 있었던 만큼 밤늦게 돌아왔다.

내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기에 모두가 잠들 시각.

피곤할 텐데 해랑은 잠들기보다는 거실에 나와 있기를 택했다.

평소처럼 거실 창밖으로 밤하늘을 보고 있는 해랑, 준해 왈 ‘이리 모드’의 해랑에게 우형이 다가갔다.

“웬 맥주. 형 거야?”

“내 거겠어?”

우형이 캔맥주를 두 개 들고 와서 하나를 내밀자 해랑이 잠시 쳐다보다가 받아들었다.

광고 이후로 숙소에 음료는 넘쳐났지만 알코올음료는 대부분이 한이의 것이었다.

우형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해랑의 옆에 자리 잡았다.

“무슨 일 있었어?”

“그냥. 생각이 많아졌어.”

창밖 허공을 바라보며 맥주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신 해랑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어릴 때 연찬이가 물에 빠졌던 거…….”

“동생이 그 얘기를 꺼내? 설마 카메라 앞에서?”

기어이 연찬이 해랑의 지뢰를 밟아버렸구나.

우형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으나 해랑은 고개를 작게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냥 둘만 있을 때. 그런데 나 혼자만 아직도 그 일을 마음에 크게 두고 있었던 거야. 그걸 알게 되니까 내가 바보같이 느껴지더라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해랑의 심경에 큰 변화가 생긴 것임이 틀림없었다.

몇 년간 멤버들이 너무 과거 일에 매달리지 말라고 해도 듣지 않았던 해랑이 스스로 깨달을 정도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우형의 옆에서, 해랑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 말했다.

“어쩌면…… 내가 화를 안 내서 그런 게 아닐까. 내가 화를 내면, 동생을 싫어해서 다치게 만든 게 사실이 되는 것 같아서 그러질 못했거든.”

정말 한이나 준해의 말처럼 딱밤이라도 때리는 게 나았을까. 가끔 싸우고 화해할 줄 알아야 좀 더 건강한 형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처음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소리인데, 지금 그런 마음이 처음 들었다.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는 해랑을 보며 우형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왜 원인을 너한테서 찾아. 화를 내야 말을 듣는 사람이 이상한 거지.”

역시 사람은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는다.

동생에게 선을 그을 마음은 생겼는데 여전히 모질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 애를 붙잡고 있는 게 서로한테 더 안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 그만해야겠다 싶었어.”

해랑은 이전에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주인이 똑같은 말을 했었다.

예전에는 누가 뭐라 하든 마음 깊이 와닿은 적이 없었으나, 직접 겪고 나니 그 의미가 이제야 체감되었다.

해랑은 뭔가를 포기한 후에야 자신을 돌아볼 마음이 생긴 듯했다.

우형은 그 사실이 씁쓸하긴 했지만, 가벼운 말투로 그를 격려했다.

“잘했어. 사람 기억에 용량이 왜 있겠냐. 힘든 일은 적당히 잊을 줄도 알아야 자기 인생을 살지. 태어난 후부터 하나하나 마음에 두고 책임지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어.”

형으로서 희생하는 것을 그만두더라도 가족이니 어쩔 수 없이 보게 되겠지만 그럴 마음을 먹은 것 자체가 큰 성장이었다.

한동안은 마음이 복잡하겠지만 다른 일에 집중하다 보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거실에 앉아서 되는대로 천천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방문 하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준해가 졸린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

“왜 안 자? 술까지…….”

“이거 술 아니야.”

“무슨 그런 한이 형 같은 소리를 해.”

술을 마시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만 내일은 컨텐츠 촬영이 있었다.

우형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캔을 슬쩍 뒤로 숨기며 화제를 돌렸다.

“준해야. 잠이 안 와서 그런데 앞구르기 좀 보여주면 안 돼?”

“내가, 내가 맥스야?!”

맥스가 몬클 하우스에 왔다 간 이후로 멤버들의 막내 강아지 필터가 심화되었다.

준해는 물을 마시러 나왔던 건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들고는 성을 내며 다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기왕 동생을 이뻐할 거면 귀여운 동생이 낫지 않냐.”

우형의 농담에 해랑은 피식 웃었다.

***

컬러즈의 밸런타인인 한이의 생일은 밸런타인데이 다음날이다.

그렇다면 성이 백 씨인 해랑의 생일은 화이트데이에 가까워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 본 적이 있었으나 그런 우연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계절도 해랑이랑 잘 어울린단 말이지.’

안 그럴 것 같으면서 은근히 스윗하다는 점 때문에 한이와 더불어 대표 충치 유발 멤버로 꼽히는 해랑.

그의 생일은 봄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꽃이 활짝 피는 중간고사가 끝날 즈음이라 더 기쁜 날. 4월의 마지막이 해랑의 생일이었다.

생일 컨텐츠는 실제 생일보다 빨리 촬영해야 편집을 해서 생일 당일에 올릴 수 있으므로 꽃이 필 무렵에 촬영 일정을 잡아둔 상태였다.

‘그럼 꽃놀이가 어울리지 않을까?’

하지만 작년에 라이브 클립으로 꽃놀이 기획을 이미 진행했었는데.

게다가 야외 촬영은 주변 환경이 개입하기 때문에 신경 쓸 것도 많고.

그래서 고민하다가 봄이라는 계절보다는 해랑 본인에 맞춘 컨텐츠가 낫겠다는 생각에, 봄은 깔끔히 버리고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탄생한 해랑 생일 기획은 ‘강제 힐링’ 컨텐츠.

당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싫어도 억지로 힐링시킨다는 뭔가 모순적인 기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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