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화
[형. 여기 페어 안무 저랑 할래요?]
[……내가 왜?]
촬영 중이지만 연찬은 싫은 걸 앞에 두고 내내 싱글싱글 웃을 성격은 되지 못했다.
뉴레인은 그런 성격을 감안해서 그를 할 말 다 하는 캐릭터로 미는 거겠지.
그래서 연찬은 보현이 다가올 때면 자주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그나마 방송이라 짜증을 내지 않고 길게 대화라도 해 주는 것 같았다.
[형 또 싫다고 할 거죠? 다 큰 새, 놈이 징그럽다고.]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아니, 야, 너…… 또 울기만 해 봐.]
보현이 울상을 짓자 연찬이 질색하면서 얘기 좀 하자며 그를 구석으로 끌고 갔다.
카메라 앞에서 대화를 나눴다간 자신이 말려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 이후엔 대화로 풀어보려는 듯한 모습만 배경처럼 작게 나올 뿐,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방송에 나오지 않았다.
‘……먹이는 건가?’
아마 연찬이 ‘싫어.’라고 말한 적은 있겠지. 그러나 ‘다 큰 새X가 징그럽게.’라고 한 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보현은 상대방이 정말로 그런 말을 한 것처럼 교묘하게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게다가 보현의 과한 감정 표현은 상황을 조금 가식적으로 연출된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 때문에 시청자들은 ‘저런 건 대본 아냐?’라며 두 사람의 갈등을 실제 상황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청했다.
그리고 이게 시청자들에게는 재미 포인트로 다가갔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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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펙트 뉴레인 서바는 이걸로 요약됨
에이펙트 연생들:연생 생활 오래해서인지 딱 데뷔한 신인 같음. 좀 지루한 모범생.
뉴레인 연생들:약간 오합지졸 시트콤 재질. 안 맞는 바퀴로 얼렁뚱땅 굴러가는 수레같음.ㅋㅋ
└에이펙트 연생들은 다 예상가는 얼굴들인데 뉴레인은 방송하려고 여기저기서 모아둔 느낌이 있음ㅋㅋ애들끼리 아직 덜 친해진 상태로 나온듯
└친해지길 바라부터 찍고 나왔으면 좋았을텐데
└ㄴㄴ에이펙트의 노잼을 상쇄하려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에이펙트 연생들이 눈치보고 중재해보려고 하는 것도 웃김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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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돈된 에이펙트 엔터 연습생들의 분위기와 달리, 연찬과 보현을 필두로 이리저리 분위기와 감정에 휩쓸리는 뉴레인의 연습생들 덕분에 뉴레인은 최근 콩가루 집안이라는 타이틀을 얻어낸 듯했다.
‘방송이라 그런지 다 컨셉처럼 받아들여지는구나.’
연찬과 보현은 정말로 사이가 안 좋은 건데 사람들은 콩트 콤비처럼 생각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쨌든 데뷔라는 명확한 목표와 프로그램의 기본 틀 덕분에 우왕좌왕하면서도 어떻게든 방송은 진행되고 있었다.
앞을 모르고 굴러가는 방송과 될 대로 되어가는 것을 즐기는 시청자들.
‘……처음에 우리가 생각한 그림은 이게 아니었는데.’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청춘을 뒤에서 지지해주고, 열정이 있는 자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그런 캠페인 같은 취지만 생각했지, 이렇게 시트콤 콩가루 집안을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뭐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바에 가까워지는 것 같긴 하지만.
그리고 뉴레인이 원하던 바는 아니었는지, 모노크롬의 출연 일정을 조율하기 위해 뉴레인에 들렀을 때 진명희 기획팀장이 이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촬영 시작하고 연습생들 분위기가 많이 흐트러진 것 같더라고요. 혹시 이사님은 어찌 된 일인가 아시는지…….”
“글쎄요. 분위기가 흐트러졌다니 큰일이네요.”
“저희 연습생 중 보현 군이 이사님을 많이 따르는 것 같다고 하던걸요?”
“이런 부분은 좋았다, 더 살려보면 좋겠다 하면서 피드백 겸 잘하라고 응원해준 적은 있는데 그건 다른 연습생들한테도 다 해 준 것들이라서요. 따로 만난 적도 없고. 아마 모노크롬을 존경한다면서 따로 인사하러 온 게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에요.”
의심받을 건 자신들이면서 반대로 날 의심하다니. 하지만 난 찔릴 게 없었다.
보현이 따로 인사를 하러 다가온 적은 있었으나 그땐 전부 주변에 사람이 있었다.
남몰래 지시 사항을 전달한 적은 없단 말이지. 그냥 좀 특기를 부추겨 봤는데 보현이 알아서 해석하고 움직였을 뿐.
진명희 팀장도 별다른 정황은 찾지 못했는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다음 촬영에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해랑 씨가 출연해줬으면 하거든요. 제작진도 그쪽을 기대하는데, 이사님이 편파적으로 보일 것 같다고 하셔서 심사나 평가에선 매번 제외했던지라…….”
“그렇죠…….”
해랑이 평범한 형처럼 굴자 연찬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단 걸 바로 깨달았는지 해랑을 화제로 삼는 것은 그만두었다.
그러나 연찬은 연찬이고, 해랑이 나오는 것을 기대하는 시청자들이 있기에 출연을 계속 피할 수는 없다.
‘눈빛이…… 너무 나긋했지.’
연찬을 보는 해랑의 표정이 너무 다정했던 것이 문제였다.
한이만큼 강렬한 멜로 눈빛은 아니지만, 매력 레벨 11의 그런 눈빛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의 동생으로 사는 삶은 과연 어떤 것이냐며 연찬이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우리가 계속 이 프로그램에 개입하려면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기에 나는 진명희 팀장이 말한 회차의 촬영 내용을 확인했다.
“특별 합숙…… 이동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네요.”
“네. 그런데 멘토는 오후에 잠깐 와서 대화 나누고 깜짝 이벤트 미션을 전달하고 돌아오면 끝이라 일정에 부담은 없으실 거예요.”
깜짝 미션이란 다음 날 아침 일찍 셀프캠 제출 등 소소한 게임 같은 것이었다.
이 특별 합숙은 참가자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막간 쉬는 시간이었다.
방송을 생각해도 이런 편안한 장면이 사이사이에 들어가 있어 줘야 시청자들 피로도가 덜할 테니까.
서바이벌보다는 수학여행에 가까운 촬영 내용을 확인하고 나는 해랑의 출연을 승인했다.
***
참가자들에게 이번 특별 합숙은 마지막으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라고 보면 되었다.
다음 촬영에선 각 소속사에서 한 명씩 첫 탈락자가 나올 예정이었다.
뉴레인 연습생 중 한 명인 오지원은 그게 자신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마음껏 놀고 쉬면 된다는 소리에 모두가 들뜬 와중에 혼자 기뻐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난 아무래도 망한 것 같아…….”
몇 소속사를 전전하다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뉴레인에 들어왔는데 여기서도 좋은 결과는 기대할 수 없을 듯했다.
학생 때부터 연습생 생활만 해 왔는데 지금 와서 다른 진로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했다.
그는 원래 멘탈이 약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나이를 먹어갈수록 조급함과 초조함이 더해져 점점 위축되고 말았다.
세상이 무너진 듯이 땅을 파고들어가는 지원 옆에 보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뉴레인 처음 들어왔을 때 형이 잘 챙겨줘서 형이랑 같이 데뷔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널 보니까 나는 재능이 없었나 봐.”
가수라면 몰라도 아이돌이라면 방송을 잘하는 것도 능력이다.
지원은 보현이 카메라 앞에서 떨지도 않고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보면 부러웠다.
그건 이미 데뷔한 신인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지원으로선 같은 연습생은 잘하고 자신은 못한다는 점이 비교되기만 할 뿐이었다.
이전 미션에선 하필 소극적이었던 점을 지적당하며 프로듀서에게 혹평을 받아서 더더욱 자신감이 깎여나갔다.
보현은 포기하지 말라며 지원을 격려했지만 지원은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구석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드라마를 찍고 있네.”
아직 마이크를 차기 전. 연찬이 감흥 없는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같이 데뷔하고 싶으면 둘 다 나가는 게 빠를 텐데.
두 사람의 존재가 자신에게 피해를 줄 일은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왠지 짜증이 났다.
“너넨 요즘 왜 한보현한테 자꾸 붙는 건데?”
연찬은 고개를 돌려 한 발짝 뒤에 있던 데뷔조 두 명에게 시선을 보냈다.
두 사람은 같은 배우 지망생 출신이란 점을 이용해서 요즘 보현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우리도 방송엔 잘 나와야 할 거 아냐? 쟤 옆에 있으면 카메라 잘 따라오는데 피해야 하나?”
“그렇다고 다른 연습생이 주목받게 놔둬? 계획 바뀌면 어쩌려고.”
“뭐야. 진짜로 둘이서 메보 경쟁하는 거야?”
한 명이 연찬을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연찬은 반대로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쟤랑 경쟁을 왜 해?”
“그러니까. 그럼 견제는 왜 하는데. 5인조로 확정됐다며. 인원이 깨지지 않는 이상 별문제 없을 것 같은데?”
연찬은 속 편한 소리만 내뱉는 그를 상대하려니 답답해졌다.
혹시나 나중에 ‘왜 보현을 안 뽑고 쟤를 뽑았나’ 하는 식의 반응이 나오면 심사가 뒤틀릴 것 같았다.
게다가 뉴레인이 보현을 마지막 탈락자로 둔 점도 거슬렸다.
‘혹시 간 보는 거 아냐?’
뉴레인은 같은 일을 꾸미는 사이지만 뒤가 구린 것을 알기에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이런 짓을 꾸밀 줄 아는 그들이 고작 연습생인 자신과의 신의를 지키려 할까? 아니, 아마 득실을 따져서 행동하겠지.
마지막까지 연찬과 보현을 경쟁 구도로 두다가 뉴레인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어 버리면?
자신은 예고도 없이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될 터였다.
‘뭔가 확실히 인상을 남길 만한 큰 한 방이 필요해.’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패가 뭘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마침 그 패가 이곳으로 올 예정이었으니까.
***
“아마 다른 연습생들이 생각보다 많이 튀어서 너를 더 불러내려고 한 것 같아. 네가 있으면 동생이 같이 주목을 받을 테니까.”
“그럼 전 어떻게 할까요?”
“크게 할 건 없어. 너는 그냥 제작진들이 정해준 대로 하고 오면 돼.”
주인은 해랑이 무리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지시했다. 그게 자신을 위한 배려라는 것을 해랑도 알고 있었다.
자신만 너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려던 찰나 주인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연찬이가 방송을 위해서 따로 뭔가 하려는 것 같으면 웬만하면 협조하지는 마. 네 판단이지만.”
조작의 공범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로 이해하고 해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촬영은 다른 멤버들이 없었다. SPID 멤버도 한 명 올 예정이지만 그는 뉴레인의 일과는 무관했다.
촬영장 도착 후, 잠시 촬영이 비는 사이에 연찬은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얘기하고 싶다면서 해랑을 불러냈다.
‘……이건 이사님이 말씀하신 상황이라고 봐야 하나?’
연찬이 뭔가 다른 일을 꾸민다면 협조하지 말라는 말을 지금 적용해야 할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카메라가 없다면 그냥 개인적인 일이 아닐까.
결국 해랑은 연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지냈기에 버릇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평범한 형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가 계속 마음속에 있었거나.
선배로서는 거절했을지도 모르지만, 형으로서는 거절하지 못하는 신세였다.
이곳에서만큼은 마음 놓고 쉬라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다행히도 촬영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단체 촬영으로 모이기 전, 두 사람은 잠시 촬영지인 펜션을 벗어났다.
“아까 돌아다녀 보니까 뒤에 이런 데가 있더라고.”
연찬이 좋은 장소를 알려주겠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으나, 해랑은 그게 아마 좋은 의도는 아니리란 것을 직감했다.
그런데도 해랑은 말없이 그를 따라갔다. 좀 더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기회는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좁은 오솔길을 빠져나가자 나무로 가려졌던 시야가 걷혔다.
하필이면 그곳엔 작은 계곡이 있었다.
“옛날 생각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