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화
한이가 드라마 촬영을 하고 오더니 내게 기념품을 가져왔다.
“뭐야, 이게……?”
“한문호 선배님 사인이요.”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저 캐스팅 들어왔을 때 한문호 선배님도 같이 작품 들어간다는 이야기 듣고 좋아하시길래 팬이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요?”
나는 잠시 기억을 되새기다가, 한이가 말하는 상황이 언제인지 떠올렸다.
‘아, 그때. 한문호 배우도 나온다는 소리에 좋아하긴 했었지.’
한문호. 그의 이름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출연하는 작품마다 ‘한문호의 차기작’이란 문구를 내세우며 홍보할 정도의 대배우였다.
하지만 아이돌도 겨우겨우 외운 내가 특정 배우를 잘 알 리가 없다. 당연히 팬일 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작년 연기대상이었으니까!’
음악대상인 라솔, 연예대상인 만호와는 제법 긴 활동을 함께했다.
그러면 다음은 연기대상인가? 하는 생각을 하던 참에, 그가 한이와 드라마를 함께 한다기에 ‘왔구나!’라고 생각했었지.
드디어 남몰래 모으던 ‘대상 컬렉션’을 완성한 순간이었다.
‘아니, 대상 컬렉션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모노크롬에게 대상의 기운이 흐른다는 증거인 것 같아서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그게 한이의 눈에는 내가 한문호의 팬이어서 기뻐한 것처럼 비쳤던 모양이다.
“헐. 부럽다.”
옆에서 재민이 사인을 부러워했다. 영화와 드라마를 즐겨 보는 재민은 한문호가 얼마나 대배우인지 잘 알고 있겠지.
사실 나는 한문호가 연기대상이란 것 외에 어떤 사람인지, 무슨 작품에 출연했는지 잘 모르지만.
‘이 상황에선…… 받아야겠지?’
한이는 촬영만 해도 정신없었을 텐데 굳이 날 생각해서 챙겨와 준 거니까.
고이고이 들고 왔는지 사인 종이는 구김 하나 없이 빳빳했다. 여기서 내가 ‘팬 아닌데?’라고 하면 쓰레기겠지.
“고, 고마워. 안 구겨지게 잘 보관해 둬야겠다.”
순서가 바뀌었지만 한이의 정성을 봐서 이제부터 한문호의 팬……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시청자가 되기로 했다.
피차 민망해지는 일 없도록 대표작 정도는 찾아봐야지.
‘아무튼 한이는 사인을 전달해주려고 이사실로 온 거고, 재민은…….’
내가 시선을 재민에게로 돌리자, 재민도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저 요새 기타 배우잖아요.”
“응.”
“잘하면 커버 영상 찍어도 된다고 하셨고요.”
“그랬지.”
비활동기에 뭘 하고 싶은지 멤버들에게 물었을 때, 재민은 악기를 배워보고 싶다고 대답했었다. 자신만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다면서.
그의 댄스 실력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고 팀 미로와 함께 안무가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는데도 가수로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모노크롬의 타이틀곡은 무조건 댄스곡이지만, 곡 전체 비율로 따지자면 안무가 없는 곡이 더 많으니까.
그리고 그가 배울 악기로 선택한 것은 기타였다.
‘ 라이브 클립 찍으러 갔을 때도 재민이는 기타에 관심 가졌었지. 기타보다는 멋있는 포즈에 더 관심 있어 보였지만.’
이번엔 멋이 아니라 정말 기타를 치고 싶어서 배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근엔 기타 강습과 함께 보컬 트레이닝도 받으며 댄스 외의 다른 분야 실력 향상에도 힘쓰는 중이었다.
직접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커버 영상을 찍는 것이 그의 이번 목표였다.
“한 곡을 계속 연습해서 마스터했거든요?”
“벌써?”
“네. 이 정도면 커버 영상 찍어도 되겠냐고 여우 형이랑 준오 피디님한테 먼저 들려줬더니, 주인 님한테 보여주고 허락받으래요.”
현재 뉴마에서 가장 음악 경력이 긴 게 송준오 피디고, 현역으로 가장 작곡을 많이 하는 게 우형이다.
음악 부문에서 빠지지 않는 두 사람이라면 괜찮으면 ‘괜찮다’, 부족하면 ‘조금 더 연습하는 게 좋겠다’ 하며 대답해 줬을 텐데.
내게 판단을 미룬다는 건, 그들끼리 판단하기 어려운 수준이란 뜻이었다.
“그래서 지금 보여주려고?”
“시간 되시면요.”
“으음…… 그래. 지금 보자.”
마침 점심시간이 막 끝난 참이라 뭔가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얘기가 나온 김에 한번 들어나 보자고 연습실로 함께 내려오니 우형이 있었다.
“나한테 허락받고 오라고 했다며?”
“네에? 저는 ‘이사님이 이걸 보고 괜찮다고 하실지 모르겠다.’라고 했는데…….”
“뭔데 그래?”
“그……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거예요.”
설명하기 곤란해하는 걸 봐선 또 뭔가 특이한 게 있는 모양인데.
재민은 연습실 한구석에 세워둔 기타를 집어 들고 의자에 앉아 목을 가다듬었다.
생각보다 빨리 곡을 마스터했지만 아직 기타 연주가 능숙한 것은 아니었다.
연주를 시작하려는 듯 기타 줄을 튕기다 멈추고 “잠깐만요. 다시!”를 외치기를 두어 번. 재민의 기타 라이브가 시작되었다.
“(눈이 내리는 것 같아요, 그대를 볼 때면~)”
재민이 연습하던 곡 <눈길>은 좋아하는 상대를 볼 때의 설레는 감정을 표현한 달달한 사랑 노래였다.
재민은 메인 댄서 이미지가 강하지만 모노크롬의 당당한 서브 보컬.
재민의 담백한 보컬 스타일은 풋풋한 감성이 느껴져서 이런 노래에 특히 잘 어울렸다.
재민이 신중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나도 금세 그의 라이브에 빠져들었다.
집중하다 보니 마치 이곳의 시간만 느리게 흐르는 듯한…….
‘……아니, 실제로 노래가 느려.’
기타로 한 음을 치고 손이 멈춰서 ‘까먹었나? 실수했나?’ 생각할 때쯤 다음 음이 나오고.
듣는 사람이 숨넘어갈 것 같지만 곡은 어떻게든 끊기지 않고 진행되고 있었다.
재민이 너무 진지하고 열중한 모습이라 듣는 나조차도 이 곡이 무사히 끝나기를 자연스레 응원하게 되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굉장히 흡인력이 있었다. 노래보다는 틀릴까, 말까 하는 조마조마함 때문에 집중하게 된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그리고 원곡을 궁금해하게 만드는 힘도 있었다.
“……원곡이 이래?”
“원곡이 이렇게 느리진 않은데…… 속도만 빼면 정확해요. 원곡에서 BPM만 낮춘 느낌? 이 정도면 자장가보다 느릴걸요.”
“으응. 그래도 노래는 참 좋네.”
“제가 추천했더니 재민이도 좋다고 고른 곡이었거든요. 그 후로 이 곡에 꽂혀서 하루 종일…….”
우형은 재민의 옆에서 하루 종일 같은 멜로디를 들어야 했던 고충을 말하는 듯했지만 내게는 재민이 그만큼 노력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우형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노래는 아직도 갈 길이 먼 것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재민이 열중하고 있는 게 눈에 보여서 1절만 적당히 듣고 끊을 수가 없었다.
“(그대를 보러 가는 길, 또 가는 길……)”
마지막 소절을 부르고, 기타 연주가 조금 더 이어진 후에 재민은 고개를 들었다.
본인의 라이브가 어땠는지 감상을 듣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감상보다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정말…… 신선했어. 가사가 귀에 쏙쏙 들어오고.”
보컬 스타일도 스타일이지만 한 음절 한 음절 또박또박 부르니 귀에 잘 들어올 수밖에. 최강의 가사 전달력이었다.
거기에 그 누구보다 날쌘 재민의 누구보다 느린 기타 라이브. 이건 새로운 재능이 아닐까.
“기타를 계속 배울 거면, 이걸 컨텐츠로 시리즈화 하면 어떨까 싶을 정도야.”
“정말요? 아싸.”
재민은 합격 표를 받고 기뻤는지 벌떡 일어났다.
이 정도의 흡인력을 지닌 무대를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지.
그의 기타 실력이 좋아지기 전까지만 가능하다는 함정이 있지만, 실력이 좋아지면 좋아진 대로 또 멋진 영상을 찍으면 될 일이다.
‘0.5배속을 한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옆에 시계나 움직이는 소품을 두면 좋을 것 같아.’
머릿속으로 이미 구도까지 맞춘 커버 영상 하나를 뚝딱 만들어내고 있는데, 우형은 정말 괜찮은지 의심 가는 표정으로 물었다.
“시리즈…… 자주 올릴 수 있을까요? 이번엔 재민이가 하루 종일 연습해서 그나마 빠르게 완성한 거였거든요.”
“으음. 느린 업로드 주기도 컨셉인 거지.”
느린 라이브에 어울리는 느린 업로드라고 하면 컬러즈는 이해해 줄 것이다.
멈췄나? 싶을 때 다음 음이 이어지던 재민의 연주처럼, 이제 안 올라오나? 싶을 때마다 업로드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재민도 부담이 없을 테고.
음악 컨텐츠가 생기는 것이 만족스러웠는지 재민이 헤헤 웃었다.
“그럼 저 이거 나중에 콘서트에서도 무대 해도 돼요?”
“으응?”
올해 콘서트를 할 예정이긴 한데…….
“그건…… 조금 더 생각해보자.”
노래도 좋고 재민의 목소리도 잘 어울리지만, 시간이 정해져 있는 콘서트에서 3분짜리 곡을 6분에 걸쳐 부르는 무대를 선보여도 괜찮을지는 많은 고민이 필요할 듯했다.
우형이 말한 것처럼 자장가 급으로 느릿느릿해서 듣는 관객들이 나른해질지도 몰라.
공연이 몇 시간이나 되면 중간중간 관객들도 쉬면서 감상할 시간도 만들어줘야 하지만, 쉬는 걸 넘어서서 잠이 오는 건 위험하다.
콘서트 무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커버 영상은 빠르게 찍기로 했다.
“그럼 커버 영상은 언제쯤 찍으면 좋을까?”라고 물었더니, 재민이 “저 빨리 안 찍으면 다시 까먹을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빠르게 체득한 기술은 잊는 것도 빠르다는 단점이 있었다.
촬영 장소는 재민이 좋아하는 미니 온실 앞. 몬클 하우스가 배경이었다.
이제 확실히 봄이 오고 있어서 밖에서 촬영하기에도 날씨가 좋았다.
라이브 영상은 이리저리 잘라 붙일 필요가 없었기에, 감성 있는 색감 보정을 거친 후 빠르게 올릴 수 있었다.
갑자기 올라온 커버 영상에 컬러즈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들어왔다가 예상과는 다른 영상 내용에 허를 찔렸다.
[뭐..지..? 힐링..되고..차분..해져..]
[요즘 뷰이라이브 할때마다 옆에서 뚱땅뚱땅거리던 거 재미니 기타 배우던 소리였던 거야?ㅜㅋㅋㅋㅋㅋㅋ아 너무 구ㅣ엽네]
[재미니이 모옥소리이 너무우 좋다아..]
[눈 뜨고 있는데 명상하는 기분.. 마음의 안정이 온다..]
[설정에서 2배속 해서 보세요 원곡처럼 자연스러움]
0.5배속 노래에 0.5배속으로 댓글을 다는 컬러즈부터, 절로 차분해지는 영상에 힐링 받는 컬러즈까지.
다들 재민의 노래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컬러즈는 모노크롬의 영상을 한 번씩 보지 않았다. 최소 두세 번씩은 돌려보는 그들은 영상 구석에 배치된 요소도 금방 발견해냈다.
[아니 뒤에 집안에서 우형이랑 한이랑 싸우고 있는 것 같은데요???ㅋㅋㅋㅋㅋㅋ]
[이게 진정한 ‘집안’싸움]
[우형이랑 한이가 싸우면 준해가 이기는구나(진정한 승자:안 끼어든 해랑이)]
[이게 대체 무슨 컨셉이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영상 배경으로 삼은 몬클 하우스의 창문 안쪽으로는 우형과 한이가 식탁에 있던 음료병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과장된 몸짓으로 말싸움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비쳤다.
영상에는 재민의 노랫소리만 들리기 때문에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컬러즈는 그들의 행동을 분석하며 ‘분리수거 잘하라고 혼내는 거다’, ‘레몬 맛보다는 라임 맛이 근본이라고 싸우는 거다’라며 알아서 추측하기 시작했다.
영상이 약 4분쯤 흘렀을 땐 준해가 나타나 두 사람을 엎어치기로 제압하며 상황이 종료된다.
그 와중에 해랑은 거실 리클라이너에 앉아 헤드셋을 끼고 평온하게 음악을 들으며 하니 인형을 쓰다듬었다.
‘시계나 소품 대신에 멤버들이 자연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는데 웬 드라마가 완성됐어.’
갈등의 시작부터 준해의 물리적인 해결, 그 후 화해의 포옹까지. 나름대로 기승전결까지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재민의 커버 곡이 컬러즈의 자장가로 정착되어가려던 때.
영상에 원곡자의 댓글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