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화
“블랙 앤 화이트! 모노크롬입니다!”
모노크롬이 컬러즈가 있는 관객석으로 올라왔다.
작년엔 네 명으로 줄어든 인원으로 인사하느라 안타까운 분위기가 흘렀는데 오늘은 다섯 명이었다.
컬러즈도 다들 쌩쌩했으며 작년보다 인원도 많았다.
그룹의 인지도에 따라 방청 인원이 달라진다는 것은 멤버들도 음악 방송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1년 만에 이렇게 바뀌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왠지 시작부터 기분이 방방 뛰던 것에는 이런 이유들이 있었다.
“탁구 수고했어!”
컬러즈 한두 명이 먼저 한이와 재민에게 말하자 다들 수고했다며 한마디씩 건넸다.
한이와 재민은 아직 유니폼 차림. 그 위에 멤버들과 맞춘 후드 점퍼만 걸친 상태였다.
두 사람은 유니폼 하의의 바짓단, 상의의 가슴 부근에 모노크롬 로고가 인쇄로 들어갔다며 컬러즈에게 보여주면서 자랑했다.
“유니폼도 따로 만들었는데 너무 빨리 탈락했나?”
컬러즈는 한이가 탈락을 신경 쓰는 줄 알고 “괜찮아!” 하며 그들을 격려했다. 그러나 한이는 바로 검지를 세우며 말했다.
“안 아쉬워해도 돼요. 원래 저희는 예선 탈락이 목표였거든요.”
“이 아이돌 탁구 기술이 한 번 하고 나면 꽤 힘이 들어서.”
재민이 예선만 하고 나온 이유를 덧붙여 설명했다. 현란한 움직임으로 시선을 교란하다 보니 기술을 시전하는 본인들도 어지러워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컬러즈도 멤버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게 중요할 뿐, 경기 결과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았기에 바로 “잘했다, 잘했어.” 하면서 칭찬했다.
멤버들이 만족하는 데다가 탁구 유니폼 모습을 본 것만 해도 소득이 있었으니 안타까울 일은 없었다.
“힘은 들지만, 이 아이돌 기술이란 건 어디든지 활용이 가능해요.”
“달리기도 아이돌 달리기로 할 수 있어?”
“아니. 그건 좀 어려울 듯.”
준해가 질문하자 재민은 자신이 방금 꺼냈던 말과 모순되는 대답을 했다. 달릴 땐 달리는 것 외의 행동을 하면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한이가 아이디어가 번뜩인 듯이 손뼉을 짝 치면서 해랑의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었다.
“아! 아이돌 달리기 할 수 있어. 지금 형 머리가 밝으니까 왁스를 엄청 발라서 더 반짝거리게 만드는 거야. 머리로 조명을 반사해서 트랙이 잘 안 보이게 하는 거지.”
“그건 반칙 아냐?”
방금 한이와 재민이 펼친 아이돌 탁구도 심판이 너그럽게 허용해 줬을 뿐이지, 실은 반칙에 가까웠다. 해랑이 그 점을 꼬집었으나 한이는 웃음으로 무마했다.
그리고는 왁스를 이렇게 발라야 한다며 해랑의 앞머리를 은근슬쩍 2대8로 나눴다. 그러다 해랑이 박치기하듯이 고개를 확 기울이자 바로 손을 떼고 재빠르게 피했다.
준해는 그런 그들은 무시하고 한 손을 들고 컬러즈를 전체적으로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달리기 빠른 사람 있어요? 운동회에서 반 대표로 나가본 사람 손!”
“이렇게 많이 나가봤다고?”
반 이상이 손을 드는 것을 보고 한이가 시켜보겠다고 하자 그중에 또 반 이상이 다시 손을 내렸다. 잠시 화제에 끼고 싶은 마음에 손을 들었지만 양심이 있는 컬러즈들이었다.
멤버들은 잠시 후 있을 달리기 종목에서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지 컬러즈와도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편한 마음으로 출연한 것이라 꼭 이길 필요는 없지만 이기면 좋긴 할 테니까.
“뒤에 좀비가 쫓아오는 상상을 하면서 달리라고요?”
“헐. 재밌겠다.”
한 컬러즈의 의견을 듣고 우형은 끔찍한 상상부터 했는지 눈을 살짝 찡그렸다.
반대로 재민은 좀비란 요소에 꽂혔는지 창의력을 발휘했다.
“이런 거 하면 재밌을 것 같아. 뒤에 막 좀비 분장한 사람들이 쫓아오고 선수들은 도망가는 거. 마지막까지 생존한 사람한테 금메달 주는 거야.”
“너 그거…… 회사에 말하지 마. 진짜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주인은 이번 앨범 활동을 마무리한 후 비활동기에 할 자체 컨텐츠 소재를 찾는지 멤버들에게 하고 싶은 게 있냐는 질문을 자주 했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로 담력 체험 시리즈를 찍게 된 어느 그룹이 떠올라서 우형은 재민의 입을 막았다.
특히 최근에는 유아이TV와 계속 연락을 취하는 듯했다. 이전의 그 공포 탈출 게임을 기획한 유아이TV가 합세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아이디어라는 것이 문제였다.
“저 무서운 거 진짜 약해요. 다들 여기서 한 이야기는 비밀.”
우형이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쉿’ 사인을 보냈다.
만날 때마다 비밀이 늘어나서 이제 비밀 발설 엄금은 큰 의미가 없었으나 컬러즈는 정해진 규칙처럼 비밀을 지켜주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비밀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손이 재빠른 컬러즈에 의해 [재미니가 좀비 서바이벌 하고 싶다던데 재밌겠다ㅋㅋㅋㅋㅋㅋ]하는 글이 SNS에 올라간 상태였다.
뒤늦게 [아 이거 비밀이래요]라는 멘트가 추가되었지만 이미 팬들 사이에서는 이야기가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모노크롬과 컬러즈에게 비밀이란, 비밀이라는 이름으로 바운더리 내에서 마음껏 공유하는 것이었다.
“자, 육상 경기 나가는 두 사람이 지금까지 나온 방법 중에서 가장 괜찮은 마인드 컨트롤 방법을 골라 봐. 1번 좀비가 쫓아온다, 2번 사자가 쫓아온다, 3번 타조가 쫓아온다.”
“역시 타조가…….”
“그냥 응원만 해 주면 돼요.”
컬러즈의 응원만이 필요하다는 해랑의 다정한 발언에 컬러즈가 입을 틀어막았다.
옆에서 진지하게 선택하던 준해도 다른 의미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지. 좀비가 쫓아와도 응원해주면 사, 살아날 수 있겠죠?”
준해가 좀비도 사자도 싫어서 타조를 고르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컬러즈는 그가 당황하는 모습까지도 귀여워했다.
결국 해랑도 준해도 응원만 해주면 알아서 잘 달리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내가 응원단장이니까 응원을 보내줄게.”
“형 아까 보니까 응원은 뒷전이고 컬러즈랑 재밌게 놀던데.”
“뒷전이라니. 파도타기로 응원의 파장을 널리 보낸 거야.”
우형이 방금 했던 것처럼 컬러즈에게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파도타기를 시켰다. 우형이 컬러즈에게 시키는 것 같지만 실상은 컬러즈가 우형과 놀아주는 모양새였다.
응원할 때는 익룡 같던 컬러즈도 지금은 다른 팀들이 경기 중이라 조용히 반응했다.
소란스러운 경기장 내에서 모노크롬과 컬러즈는 자기들끼리 소곤소곤하며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
모노크롬과 함께 관객석 쪽에 남아 있던 윤희가 뒤늦게 대기실로 들어오며 바로 나를 찾았다.
“아까 카메라가 한이랑 재민이 인터뷰 따가더라고요.”
“정말요? 못 봤어요.”
“아까 이사님 먼저 들어가시고 난 뒤에요. 그런 탁구는 어디서 배웠냐고 물었다나 봐요.”
내가 복도에서 아이리스와 마주쳤을 때 그런 일이 있었다니!
작년에 해랑이 달리기에서 1위를 했는데도 2위인 하범보다 인터뷰 분량이 적어서 씁쓸했다는 이야기를 지나가듯이 한 적이 있었다.
윤희는 그걸 떠올리고 내게 바로 이 사실을 전해 준 듯했다.
‘오늘은 따로 인터뷰를 따가기까지 할 줄이야.’
역시 올해는 모노크롬의 위상이 달라지긴 한 모양이다. 혹은 두 사람의 탁구가 너무 이상했거나…….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대요?”
“다 회사 근처 탁구 교실에서 배웠다고…….”
“…….”
탁구는 거기서 배웠을지언정 아이돌 탁구를 거기서 배운 건 아니잖아!
얼굴 모를 탁구 교실 선생님께 미안해졌다. 그저 뉴마와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을 뿐인데.
만일 방송에 이상하게 나오면 뷰이라이브에서 탁구 교실은 아무 죄가 없다고 해명하라고 해야겠다.
나와 윤희는 대기실에 있다가 해랑과 준해가 속한 조의 예선 경기가 펼쳐진다고 해서 다시 경기장 쪽으로 돌아갔다.
경기장으로 내려간 MC 한 명이 작년 100m 달리기 금메달, 은메달이었던 해랑과 하범에게 마이크를 들이밀며 각오를 물었다.
그리고 내가 예상했던 대로 하범은 해랑을 물고 늘어졌다.
“오늘은 백해랑을 이기는 것만 생각하겠습니다.”
“강력한 우승 후보인 해랑 씨를 이기겠다! 이번에야말로 금메달을 따겠다는 포부로 들리는데요. 해랑 씨는 이 도전장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예.”
MC가 해랑에게 마이크를 돌리자 해랑은 알 수 없는 짧은 대답만을 남겼다.
예능 레벨 2다운 대답이었으나 하범을 향한 도발 레벨은 10이었다. ‘그러든 말든 나는 상관 않는다’는 표정에 하범은 뒷목을 잡았다.
마이크는 그 옆에 서 있던 준해에게도 향했다. 출전자들의 각오를 한마디씩 들어보려는 듯했다.
“어…… 타조가 쫓아오는 기분으로 임하겠습니다. 파이팅!”
갑자기 타조는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잘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겠다는 뜻이려나.
곧바로 이어진 100m 달리기 남자 예선전. 각 조에서 상위 3명만 결승에 진출하는데 해랑은 1위, 준해는 4위로 들어왔다.
다른 멤버들은 결승선 근처에서 지켜보다가 경기가 끝나고 바로 모여들었다.
출연진이 많다 보니 개인에게는 따로 마이크가 달리지 않았다. 내가 있는 곳에서는 멤버들이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느닷없이 재민이 팔을 들더니 좀비 같은 행동을 하며 준해를 쫓고, 관객석의 컬러즈들은 마치 대화 내용이 들리기라도 한 듯이 웃었다.
‘컬러즈랑 무슨 얘기를 한 건가?’
현장의 컬러즈가 SNS나 커뮤니티 게시판에 한마디 한마디 중계해놓았을 테니 알아봐야겠는걸.
다른 조의 예선전 경기가 몇 번 더 이루어지고, 대망의 결승.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것은…… 이담의 그룹인 더클랜의 멤버였다.
오늘 돌대회엔 작년에는 아직 데뷔하지 않았던 신인들이 처음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더클랜은 이미 3년 차에 들어섰지만 올해가 돌대회 첫 출연이라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완전히 바닥에서 시작한 건 아니었어.’
3년 차 초반까지는 뉴마도 그나마 멀쩡하게 모노크롬을 굴렸기 때문일까, 돌대회에도 매년 출연했으니.
세상에는 수십 그룹이 출연하는 돌대회에도 나오지 못하는 그룹들이 있었다. ……아마 생각보다 많이.
100m 달리기 결승 2위는 해랑, 3위는 하범이었다.
하범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해랑을 붙잡고 늘어졌고, 해랑이 면식이 있는 더클랜 멤버에게 어깨동무를 한 덕분에 세 사람이 동시에 소감 인터뷰를 촬영했다.
덕분에 인기도에 따라 인터뷰 시간이 달라지는 안타까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카메라는 해랑이 트랙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제법 오래 잡았다.
‘돌대회 리벤지. 이 정도면 괜찮았다.’
이후에는 별일 없이 거의 대기 시간만 이어지다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멤버들은 모노크롬을 보기 위해 모인 팬들을 위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계속 얼굴을 비쳤다.
긴 촬영을 마무리하고 퇴근하는 길. 아무 일도 없는 평화로운 퇴근 현장을 보고 재민이 입을 열었다.
“작년에 여기서 출소 포지션 했었는데.”
“그러게. 작년엔 그랬었네.”
멤버들에게 둘러싸여 퇴근했던 기억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오늘은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우리를 특이하다는 듯이 쳐다보지도 않았고,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멤버를 감출 필요도 없었다.
정말 이 다섯 명으로 이 공간에 위화감 없이 섞여 있다는 것이 체감되었다.
재민의 말대로, 뭔가 찝찝하게 남아 있던 일 하나를 제대로 마무리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