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162화 (162/430)

# 162화

이는 메인 작곡팀으로 이미 내정되었던 우형과 성운을 무시하는 언사였다.

증거라도 남기듯이 카메라가 돌아가는 상태에서 한 말이라 내가 당장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 상태에서 안 PD가 타이틀곡을 공모해야 하는 이유를 먼저 나서서 설명했다.

“시청자들도 같이 만들어가는 그룹이란 게 방송의 취지라고 미리 말씀드렸었죠. 그룹의 정체성과 컨셉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게 타이틀곡일 텐데, 공모받아서 시청자 투표로 진행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라는 논지.

방송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인데, 사전에 우리와 상의하지 않은 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나는 안 PD에게 다가갔다. 물론 비즈니스 미소는 장착하고.

“저희는 전달받지 못한 내용인데……. 타이틀곡만 있는 싱글이 될지, 수록곡을 넣은 미니앨범이 될지도 아직 안 정해지지 않았나요?”

“전에 데모곡을 수록곡으로 넣을 수 있다고 하셔서 당연히 한 곡이든 두 곡이든 수록곡은 있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수록곡이야 그런데-.”

“아! 거기 조명은 제일 나중에 빼고 카메라부터!”

안 PD는 양심에 찔리긴 하는지 갑자기 적극적으로 나서서 바쁜 척을 하며 촬영팀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말을 피하는 걸 봐선 뭔가 우리가 모르는 속셈이 있긴 한가 보네.’

제작진끼리는 이미 확정이 된 내용 같으니, 우리가 뭐라고 한다고 그 말을 철회시킬 수는 없었다. 아마 공모한다는 정보까지 어딘가에 미리 뿌려놨을지도.

졸지에 우형과 성운이 메인 작곡팀이 아니라 공모 참가자가 되어버린 상황.

우리는 촬영팀이 철수한 후 긴급회의 시간을 마련해야 했다.

참가자는 나, 모노크롬, 송 피디, 그리고 성운.

“일단, 프로젝트 그룹 멤버들이 각자 원하는 컨셉으로 말했던 건 친근한 이미지, 발랄한 컨셉, 기왕 하는 거 센 컨셉, 젊은이 느낌, 파워풀한 거.”

우선 촬영하며 메모했던 것을 차례대로 읽었다.

이제 이것을 토대로 어떤 곡을 만들어서 공모에 넣을지를 논의해 봐야 했다.

“친근하고 발랄한 컨셉이랑, 파워풀하고 센 컨셉이 동시에 나오면…….”

“취사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한이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하자 해랑이 이어서 말했다.

상반되는 컨셉을 동시에 하기엔 어려울 테고, 이 중에서 몇 개를 선택해 중점을 둬야 하지 않을까.

그럼 아마 공모에도 다양한 컨셉의 곡이 나올 것이다.

‘이거 거의 기획력 승부 아니야……?’

다행인 것은 어두운 컨셉을 하고 싶다는 사람이 없단 거려나.

예능으로 기획된 그룹이어서인지 전부 그 테두리 안에서 가능할 만한 것들이었다.

“청량이 좋지 않을까요? 만호 선배님이 그런 거 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던데. 예전에 데모곡을 엄청 마음에 들어 하셨잖아요.”

“그냥 데모곡을 쓰면 안 되나?”

준해의 의견에 이어서 재민이 가장 심플한 답을 내놓았다.

타이틀곡은 시청자 투표도 있지만 멤버 투표도 따로 할 예정이었다.

멤버 중 한 명의 마음을 확실히 사로잡을 수 있다면 단연 원만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이득. 다섯 명의 의견이 동일한 비율로 들어가겠지만 그가 특히 한 곡을 열렬히 지지하면 멤버들도 제작진도 영향은 받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미 다른 곡 드리겠다고 말씀드려 놨는데……. PD님도 그렇게 알 테고. 너는 혹시 생각나는 거 있어?”

우형이 성운에게 질문하자 성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이렇게 그룹 노래 기획하는 건 처음이라.”

아이돌에 특화된 부분은 우형에게 맡겨야 할 것 같다는 얘기였다.

타이틀곡의 컨셉이 앨범 컨셉이 될 테고, 하나뿐인 앨범이 그룹의 컨셉으로 직결되니 이는 작곡만 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룹의 컨셉을 정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출연진들이 논의해서 뚜렷한 컨셉을 정하고 작곡에 들어간다면 성운도 문제없었겠지만, 이런 식의 회의가 열릴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뭐라도 도움이 되고자 나도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아니, 딱 하나 떠오르는 게 있긴 한데.’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더 좋은 의견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머릿속에만 담아두고 있었다.

그런데 마땅히 이거다! 하는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 상황. 난 내가 떠올린 최선의 아이디어를 꺼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악동 컨셉은 어때?”

“허헙.”

어째서인지 한이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게다가 다른 멤버들까지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뭐, 뭐지? 나름대로 최선의 아이디어를 꺼내놓은 거였는데.

생각지 못한 분위기에 나도 덩달아 눈을 굴렸다.

그렇게 별로였나 싶어서 민망해지려는데, 우형이 슬며시 질문을 건넨 덕분에 멤버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컨셉 싫어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

내가 그렇게 티를 냈었나.

악동 얘기는 팬들 반응을 전부 파악하고 있는 윤희 앞에서만 했지, 멤버들 앞에서 질색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직접 말은 안 해도 조금 피하려고 한 적은 있긴 하지만…….’

악동 컨셉의 곡 대부분은 윤환이 있었을 때의 단체곡이었다. 그러니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건 둘째 치고.

멤버가 교체되기 전부터 악동은 시작됐었다. 바로 <생각이 안 나>가 악동의 시작점이었으니까.

1위 후보까지 올랐었으니 모노크롬의 신인 시절 가장 성적이 좋았던 곡이었고, 이땐 자가복제곡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쇼케이스 팬미팅과 얼마 후에 있을 팬미팅의 세트리스트 후보에서 가장 먼저 제외됐었다.

‘컬러즈의 악동 알레르기를 다시 마주할까 봐 무서운 것도 있었고.’

나도 악동 알레르기에 대한 알레르기가 생겨버리는 바람에 좀처럼 건들기가 무섭기도 했다.

다른 이유를 다 배제하고서라도, 모노크롬을 리뉴얼한 시점에 굳이 그 곡을 택할 이유가 없었다. 최근에 계속 좋은 곡들이 나왔으니까.

멤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악동 컨셉을 증오해서 멀리한 건 아니란 뜻이다.

컨셉은 죄가 없다. 뉴마가 죄인일 뿐.

“내가 악동을 싫어한 건 아니야. 그냥…… 그게 어울렸던 건 그때의 모노크롬이었고, 지금 모노크롬에게 어울리는 곡이 더 많이 있으니까 손이 안 갔을 뿐이지.”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대답에 멤버들은 왠지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멤버들 사이에선 그렇게까지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컨셉’ 취급을 받고 있었던 거야? 책임자인 내가 싫어하는 줄 알고……?

괜히 뉴마 때문에 홀대받게 된 악동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옆길로 샜지만, 거리낄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멤버들은 다시 회의 모드로 돌아갔다.

“그게 신인에게 잘 어울리는 컨셉이란 말씀이네요.”

지금의 모노크롬보다는 앞으로 데뷔할 신인 아이돌 그룹에게 더 어울릴 만한 컨셉.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는데 우형은 바로 알아들었는지 진지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좋은 것 같아요. 데모곡보다 좀 더 밝지만 기본적인 결은 비슷해서 아마 만호 선배님도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을까…….”

청량을 제안했던 준해도 괜찮겠다며 지지표를 던졌다.

악동도 결국은 내가 청량 컨셉을 선택해서 나온 결과물이었으니까.

“발랄한 거, 젊은이 느낌은 딱 맞출 수 있겠다. 그리고…… 친근한 이미지?”

재민이 내가 내려놓은 수첩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악동 컨셉으로 커버 가능한 것들을 골라냈다.

이어서 해랑과 한이도 컨셉에 맞출 방법을 여러모로 제시했다.

“악동처럼 힙합이 베이스면 파워풀이나 센 컨셉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 않아?”

“맞아. 곡 전체의 분위기는 하나로 정해져 있어도 중간중간 파트로 특정 포인트를 강조할 순 있으니까.”

“중간에 분위기를 반전시키거나 댄스 브레이크를 넣는 방법도…….”

막막한 상황에 악동이란 키워드가 어느 정도 방향을 제시해 줬는지, 구체적인 방안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우리의 토론을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성운이 입을 열었다.

“악동 컨셉이 뭐죠……?”

아차. 악동은 우리 사이에서나 통하던 단어였지.

악동이란 단어의 본래 뜻이 있으니 무슨 느낌인지는 대략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 안에 담긴 세세한 요소는 정확히 모를 것이다.

성운의 질문에 몇 년이나 직접 해 와서 악동 전문가가 되어 버린 멤버들이 나서서 설명했다.

“힙합 느낌의 댄스곡인데, 밝은 힙합?”

“진성 힙합이라기보다는 청량 느낌에 치우쳐 있지만.”

“약간 연하남 느낌의…….”

멤버들 입으로 들으니까 새삼스럽네.

성운이 설명을 듣고 어떤 종류의 음악인지 이해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방향은 이쪽으로 잡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네요.”

성운의 동의까지 얻어 우리가 밀고 나갈 타이틀곡 컨셉은 결국 악동으로 정해졌다.

타의로 악동 컨셉을 지속해 왔던 모노크롬이 직접 제작하는 악동이라……. 어떻게 될지 상상이 안 가.

타이틀곡 공모에 참여하려면 제작진에게 가이드 버전을 제출하면 된다.

곡이 순식간에 나오는 게 아니니 1절 후렴까지의 분량, 미완성이어도 괜찮으니 곡의 내용과 분위기는 확실히 알 수 있게 해달라는 조건이 붙었다.

우형과 성운에게는 ‘작곡팀으로서의 출연 기회’를 건 퀘스트가 부여되었다.

‘어쩐지 다음 촬영 일정이 좀 멀리 잡혀 있다 싶었어.’

우리도 공모에 같이 참여해야 하니까 작곡 기간을 준 것이었다니.

다음 촬영 일정을 전달받았을 때 ‘와. 마침 이때 다른 스케줄도 있었는데 잘됐다~.’ 하면서 좋아했던 내가 바보 같았지…….

팬미팅 준비가 한창이지만, 지금껏 없었던 특이한 스케줄이 하나 잡혀 있었다.

‘바로 대학 축제.’

그것도 준해가 재학 중인 단군대 축제였다.

***

중간고사가 끝나면 대학교는 축제 시즌이었다.

가장 날씨가 좋은 봄과 가을. 시험공부에서 잠시 해방된 젊은이들의 축제.

처음 섭외가 들어온 것은 <아이돌부 방학캠프>로 모노크롬이 대중적인 인지도를 올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정규 앨범과 팬미팅 일정이 잡혀서 그쪽에 온 정신이 집중되어 있었는데, 눈을 사로잡는 섭외 건이 하나 있었다.

“단군……, 이거 준해 다니는 학교잖아?”

단군대학교. 그곳으로부터 섭외 에이전시를 통해 축제 출연 요청이 왔다.

듣기로는 보이그룹은 대학 축제에 섭외가 잘 안 되는 편이라고 한다. 팬덤이 너무 크면 팬들이 몰려서 진행이 어렵고, 대중적이기보다 팬덤형으로 치우친 경우가 많다보니 많은 학생이 함께 즐기기 어려워서.

‘멤버가 재학생이라 모노크롬을 부른 건가?’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공연 순서도 앞쪽으로 예정되어 있었고 그리 긴 시간이 할애된 건 아니었다.

알아보니 이 학교는 공연 시간을 길게 두는 편이라 인기 가수 외에도 앞쪽에 마이너한 가수 라인업을 두기도 한다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마이너하다는 것은…… 섭외비가 그리 비싸지 않은 가수들.

모노크롬은 이전에 내 플레이로 인해 축제를 가리지 않고 돈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의 섭외비 정보가 섭외 에이전시에 아직 남아있던 게 아닐까.

이번 섭외비가 그때 수준은 아니었고 모교 축제엔 재능기부로 출연하는 가수도 있으니 금액은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멤버와 상관없이 조금 인지도 있는 신인 부르는 느낌으로 섭외한 것 같기도 했다.

본인에게 물어보는 게 빠르겠다는 생각에 나는 연습실에 있던 준해를 찾아가 물었다.

“단군대에서 축제 섭외가 왔는데 혹시 들은 거 있어?”

“예에? 아뇨……?”

“너희 학교인데 미리 얘기 안 해 줘?”

내가 묻자 준해는 조금 당황한 듯이 잠시 어물어물하더니.

“저…… 사실 아이돌인 거 학교에서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해서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지금 4학년인데 아무도 준해가 아이돌인 걸 모른다는 소리야?

“누가 알아보지 않아? 출석할 때 이름도 부르잖아.”

“누가 물어보면 그냥 동명이인이라고 했거든요.”

“그럼 같은 과 동기들도 몰라?”

“네.”

아니, 예명으로 활동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허술한 변명이 통했다고? 4학년이 되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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