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제가 코미디언 생활을 25년 해 오면서, 연기도 해 보고 가수도 해 봤는데 아이돌을 못 해봤어요.]
작년, 코미디언 원만호가 QBC의 인기 예능 <캠핑투어>에서 한 말이었다.
<캠핑투어>는 캠핑카를 끌고 여러 지역을 소개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프로그램이었다.
활동력이 있는 원만호가 특이한 곳을 찾아다니고 해외까지 나가면서 시청률은 안정적으로 상위권을 유지했다. 그의 입담이 프로그램과 잘 맞아서 새로운 매력을 끌어냈다는 호평도 많았다.
방송이 전성기를 맞아 기분이 좋았던 안지택 PD는 그에게 ‘연예대상을 받으면 자신의 능력 안에서 가능한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라고 선언했다.
그 말에 원만호가 꺼낸 대답이 저것이었다. 아이돌을 한번 해 보고 싶다.
이 말이 방송을 탔고, 시청자들은 다들 웃었다. 평소에도 무리수를 잘 던지는 그가 웃기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안 PD, 그거 하는 거야? 원만호 씨 아이돌?]
[전파까지 탔는데 두말할 수는 없지.]
[<음악상상> 무대 한 자리 비워둘 테니까 정해지면 얘기해 달라고. 알지?]
실제로 원만호가 연예대상을 받았고, 방송국 사람들도 진짜 하냐며 궁금해했다.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공언해 놨으니 어떻게든 들어주기는 해야 했다.
안 PD는 거창하게 일을 벌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만호와 절친한 코미디언끼리 임시로 그룹을 결성할 수도 있고, 실제로 활동하는 아이돌 그룹과 콜라보 무대를 꾸밀 수도 있고.
품이야 들여야겠지만 그가 떠올린 것들은 어디까지나 단발성 이벤트에 가까운 기획이었다.
그래서 본인이 담당하는 <캠핑투어>의 특별 기획으로 진행하려고 했는데.
[안 PD. 그 기획 재밌겠던데 한번 제대로 해 봐. 편성본부랑도 잘 얘기해 볼 테니까…….]
아예 편성 시간을 따로 마련해주겠다는 예능국장의 말에 그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이거 정말 제대로 한번 해 봐야겠다.
팔자에도 없던 아이돌 기획. 가요계의 전문가부터 찾아보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원만호와 하루 차이로 다른 대상을 받은 이라솔이었다.
***
“저랑 같이 아이돌 하실래요?”
“예?! 전 점심시간이 끝나서 사무실로 돌아가 봐야…….”
“저기요! 도망가지 마세요!”
데뷔까지의 과정을 리얼리티처럼 담아낼 예정이었기에, 대상 둘 외에 캐스팅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이 먼저 시작되었다.
아이돌과는 전혀 연이 없던 원만호와 마찬가지로, 방송도 정말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단계에서부터 하나하나 쌓아나간다는 컨셉.
아이돌이 되기 위해선 오디션, 혹은 길거리 캐스팅으로 아이돌 기획사의 연습생이 되는 것이 먼저였다.
오늘 촬영할 것은 ‘보는 오디션마다 족족 떨어지며 청춘을 다 보내고 어느새 53세를 맞이한 아이돌 지망생’ 캐릭터를 부여받은 원만호가 직접 함께할 아이돌 동료를 구하는 장면.
그가 QBC 방송국 건물 앞에서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으며 길거리 캐스팅에 나서자, 연예인이 신기해서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하아. 나와 함께 아이돌의 꿈을 실현할 사람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지?”
만호는 대본에 적힌 대사를 연극처럼 내뱉으며 좌절했다.
아무렇게나 화단에 걸터앉은 그는 턱을 문지르며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정답을 찾아냈는지 카메라를 보며 외친다.
“아! 아이돌 연습실!”
그렇게 길거리 캐스팅에서 실패를 맛본 만호는 아이돌 소속사의 연습실에 직접 캐스팅을 하러 간다……라는 현실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전개로 대본이 짜였다.
데뷔 리얼리티를 표방했지만 대놓고 작위적인 전개가 들어 있는 페이크 리얼리티.
53세에 아이돌 지망생으로 남아있다는 그의 캐릭터 컨셉부터가 그러했다.
시트콤 같았던 예능 도입부의 촬영이 끝나자 만호가 제작진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잘 나왔어? 안 PD. 오늘 소속사 어디 어디 들른다고 했지?”
“베터 엔터테인먼트랑 이엠유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재밌겠구만!”
생각보다 아이돌 데뷔에 진심이었는지 만호는 의욕이 넘쳤다.
제작진은 만호와 함께 아이돌 소속사를 돌며 프로젝트 그룹의 멤버를 뽑을 예정이었다. 연습실 캐스팅이란 이름이지만, 사실은 방송 출연자를 모집하는 오디션. 모집 대상은 데뷔 2년 차 이내 신인 보이그룹 멤버였다.
연차 있고 방송에 익숙한 프로 아이돌보다는 신인 아이돌이 데뷔 리얼리티 컨셉에 더 어울릴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25년 차 코미디언 만호에게 부족한 풋풋함도 채워줄 수 있고 함께 성장해가는 감동 코드까지. 그게 제작진이 노리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오디션 대상 중에는 데뷔 1년 차 신인 그룹, 이코드가 있었다.
소속사 이엠유 엔터테인먼트의 한 연습실에 촬영 장비가 들어오고, 멤버들도 촬영을 위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만일 한 명이 방송에 나가게 되면, 저희 활동 일정은요?”
멤버 중 한 명이 기획팀장에게 물었다.
출연이 결정되면 당분간 두 그룹 활동을 동시에 병행하게 되는 것이었다.
“촬영이랑 겹치지 않게 최대한 맞춰봐야지.”
최대한 맞추는 건 아마 그 멤버의 수면시간이 되겠지. 갓 데뷔한 신인이 예능 촬영 때문에 앨범 준비와 활동을 미룰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코드 멤버는 총 여섯 명. 다른 그룹에 밀리지 않는다면 이 중 한 명이 뽑혀서 출연하게 될 것이다.
기획팀장의 말에 멤버 여섯 명은 서로 눈치를 봤다. 지금은 모두가 똑같은 마음이었다.
‘나가고 싶은데 나가고 싶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돌에게 신인 시절이란 젊음을 제물로 바쳐서 연예계에 자리 잡는 시기였다. 이 시기를 놓치면 언제 다음 기회가 올지 모른다.
앨범 활동이 끝나면 곧바로 다음 앨범 준비가 이어지고, 잠 줄여가며 연습을 하면서도 이곳저곳 최대한 얼굴을 비쳐야 했다.
그 와중에 이 방송은 개인을 넘어서서 그룹 홍보에도 분명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아이돌부 방학캠프>에서 제법 선방했던 것과 다르게 개인으로 출연하는 것은 또 다른 부담이 있었다.
“지원한 그룹 중에 우리가 제일 후배는 아니겠지?”
“다른 분들도 다 신인일 거라던데…….”
“뽑힐지는 모르지만 오늘 촬영분도 방송으로 나가는 거니까 제대로 하자.”
머리를 맞대고 선 여섯 명은 똑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인 시절엔 비슷하게 데뷔한 그룹 간에 암묵적인 경쟁 구도가 있었다.
이 방송이 모집하는 대상도 신인에 한정되어 있으니 그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부담감, 거기에 묘한 경쟁심은 피할 수 없었다.
막중한 책임이 달린 오디션 자리. 섣불리 자신이 나가고 싶다는 말은 못 하겠지만 할 거면 제대로 하자는 마음에 다들 흩어져서 목을 풀고 스트레칭을 했다.
그렇게 촬영을 준비하는 와중, 이코드의 멤버 중 한 명인 도한의 귀에 제작진의 대화가 들려왔다.
“모노크롬이랑 출연 협의 중이라고?”
“라솔 씨랑 같이 나오는 거로 얘기가 됐나 봐. 거의 확정이래.”
“아-. 얼마 전에 거기 멤버랑 피처링 같이 했었지?”
라솔. 피처링. 누가 들어도 해랑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던가.
도한은 아는 얘기에 귀가 쫑긋 섰다.
자세히 듣고 싶었던 참에 먼저 질문을 꺼낸 것은 옆에 있던 한우리였다.
“모노크롬 선배님들 나오세여?”
“프로젝트 그룹 멤버가 아니라, 프로듀싱 쪽으로요.”
방송일까지 비밀에 부쳐야 하는 것은 프로젝트 그룹 멤버뿐.
라솔이 나온다는 것을 홍보 수단으로 써먹어야 하므로 프로듀싱 인원은 비밀이 아니었다.
모노크롬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도한이 몸을 휙 돌려 기획팀장에게 다가갔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저! 저 추천해 주세여!”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도한이 바로 행동에 옮기는 것을 본 한우리도 서둘러 그에게 붙었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나머지 네 멤버는 두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방금까지는 부담감이 더 컸던 출연자 오디션.
팬심 버프를 받은 두 사람은 의욕을 불태웠다.
***
“이 젊은이들이 그 작곡가 선생님들이신가.”
오늘은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조율할 사항이 있어 프로듀싱 팀을 포함한 관계자들끼리 미팅 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방송의 메인인 만호가 데모곡을 작곡한 당사자인 성운과 우형을 반갑게 맞이했다.
‘곡이 좋았다고 엄청나게 칭찬했다더니.’
확신이 안 서는 표정이던 안지택 PD가 결국 모노크롬을 섭외할 마음을 먹은 것은 바로 방송의 메인인 원만호 덕분이었다.
뉴마에서 건네받은 데모곡을 들은 만호가 ‘내가 원하던 아이돌의 느낌이 바로 이거!’라면서 엄청나게 좋아했다나.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렇게 작곡을 잘해요? 아니. 젊은 나이라 젊은이들의 감성을 아는 건가? 에너지 넘치는데 내 취향에도 딱 맞더라고. 나도 바로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실제로 만호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곡이 너무 좋았다며 칭찬부터 했다.
‘그렇지. 딱 젊은 감성! 이란 느낌이었어.’
나도 그 이야기에 깊이 동감했다. 우형의 작업실에서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우형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었다.
[같이 만들어서 그런가. 지금까지 네가 작곡한 모노크롬 곡들이랑은 분위기가 많이 다른 것 같아. 조금 더 활기차고 발랄한 느낌?]
[다양한 연령층이 듣기 편한 아이돌 노래라면 어떤 느낌일지 생각하면서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우형은 성운과 함께 어떤 지향점을 두고 작업했는지 내게 설명했다. 이번 공동 작업이 신선한 경험이었는지 즐거운 표정이었다.
다양한 연령층을 고려했다는 것은 PD도 원만호도 만족할 만한 노래를 만들려 했다는 뜻이고.
마침 만호가 한 이야기가 그에 관련된 것이어서 우형이 같은 설명을 하려나 했는데, 곡 관련 얘기엔 적극적으로 입을 여는 성운이 먼저 대답에 나섰다.
“808베이스에 신스 스트링을 활용해서 뉴잭스윙 장르처럼 조금 레트로한 사운드를 가미했거든요. 훅 멜로디가 반복적으로 들어간 것도 그렇고, 미디엄 템포인데 비트를 더 강조해서…….”
……이거 우형이 했던 설명이랑 같은 말 맞지?
우형은 음악 얘기를 할 때 알기 쉽게 해설해 주곤 했는데 성운은 전문 용어를 섞어가며 설명하는 행위에만 집중했다.
만호의 얼굴을 보니 이해하고는 싶은데 따라가지를 못하는 표정이었다. 마치 나처럼.
내가 우형의 팔을 슬쩍 톡톡 두드리자 그가 내 뜻을 알아챘는지 성운의 말을 쉬운 말로 번역해냈다.
“어……. 현대식으로 해석한 복고 스타일에 힙합 느낌이 가미되었다고 보면 돼요. 드럼 소리가 강해서 더 에너지 넘치는 느낌이고, 리듬이 어렵지 않아서 누구든 따라 부르기 쉬울 거예요.”
만호는 우형의 설명에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런 부분에서도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콤비였다.
“듣자마자 딱 이 곡이다 싶었다니까. 이걸로 당장 데뷔해도 되겠어.”
“이건 저희 작업을 들려드리기 위한 데모곡이고.”
우형이 성운과 힐끔 시선을 맞추더니 듬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룹이 완성되면 정말 그룹에 맞는 곡을 만들 예정입니다.”
이 모습을 보니 두 사람의 작업 스타일이 제법 잘 맞는 듯했다.
라솔도 성운이 이런 스타일의 곡을 만들 줄은 몰랐다며 놀라워했는데, 두 사람도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게 아닐까.
더 발전된 노래를 만들겠다는 우형의 다짐에 만호가 파안했다.
그리고 그의 관심은 이번엔 팀 미로의 대표로 출석한 민후에게로 옮겨갔다.
“관절이 안 좋아도 춤추는 데는 지장 없어요?”
“네?”
“내가 요즘 무릎이 쑤셔서.”
쉰셋이라는 나이여서 할 법한 질문.
민후는 이런 고민 상담은 처음 받아봤는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다리…… 아파도 부담 안 가게 잘 짜면 돼요.”
대답에 헤매는 민후 대신 입을 연 것은 그 옆에 서 있던 재민이었다.
부상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란 것을 알아챈 나와 멤버들, 그리고 민후만이 순간 슬픈 표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