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쇼케이스 팬미팅에서 진행했던 무대 이후로 처음 공개되는 해랑의 자작곡.
저번처럼 기존에 작업된 것 중에서 골라 수정을 거친 후 낼 줄 알았는데, 기존의 작업물을 재구성하거나 아예 처음부터 다시 짜는 등 새로 만드는 부분이 꽤 많았다.
이전에 곡을 공개하는 데 회의적이었던 만큼, 해랑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완성된 곡을 들어보니, 그에게 약간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 곡을 통해서도 전해져 왔다.
‘지금도 다크한 건 여전하지만.’
그간의 작업 스타일이 갑자기 바뀔 수는 없는 일.
믹스테이프로 묶어서 내기로 한 세 곡 중에 타이틀곡만 유독 순화된 편이고, 나머지는 거친 스타일이 그대로 남아 있긴 했다.
“어, 어떠세요?”
최종 완성된 곡을 들어보기 위해 작업실로 내려왔을 땐 옆에 우형도 함께 있었다.
내 반응을 지켜보던 그는 마치 시험 합격 결과를 기다리듯이 양손을 맞잡고 슬며시 물었다.
나보다도 더 해랑이 믹스테이프를 내기를 간절히 바라던 이였으니.
자신의 자작곡을 처음 들려줬을 때만큼이나 초조한 얼굴이었다.
“좋아. 괜찮아. 이대로 가자.”
심사하러 온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긴장된 얼굴로 쳐다보기에 웃으며 오케이 하자 우형은 가슴에 손을 얹고 크게 안도했다.
작곡가인 해랑 또한 그만큼은 아니어도 조금 어깨에 힘이 풀린 모습이었다.
“어느 쪽이 더 낫다는 건 아닌데. 확실히 전보다 정제된 느낌이긴 해. 조금 더 듣기 가벼워졌다고 해야 하나.”
꾸덕꾸덕하고 쓰디쓴 카카오매스가 씁쓸한 다크 초콜릿이 된 느낌.
아예 우형이 편곡을 맡았던 쇼케이스 팬미팅 곡보다는 덜하지만 확실히 듣기 편해졌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느낀 그대로 어설프게나마 곡에 대한 감상을 내뱉자 우형이 옆에서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맞아요. 해랑이가 가장 공들인 부분이 그거였거든요. 전에 쇼케이스 무대 준비할 때 이사님이 하셨던 말씀도 생각나서.”
“내가? 무슨 얘기를 했더라?”
“노래를 넣으면 어떻겠냐고 하셨던 얘기. 들으셨듯이 정말 노래를 넣은 건 아니고…… 리듬보다 멜로디를 좀 많이 강조했어요.”
나로서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한 소리였는데 음악을 하는 두 사람에겐 음악적으로 해석이 되었던 모양이다.
우형은 전문 분야가 나와서 할 말이 많았는지 저음부가 어쩌고 무슨 효과를 어떻게 해서 어떤 느낌을 줬다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문외한인 나에겐 무슨 소리인지 잘 와닿지 않았지만 너무 열성적으로 설명해 주기에 모른 척하기에도 민망하고 ‘그렇구나. 그런 장치를 해두었구나…….’ 하고 대충 이해한 척했다.
“그래서 그런가. 가사 내용도 전처럼 막 무겁게 다가오진 않더라고.”
“그렇죠? 그것도 해랑이가 신경 쓴 부분인데 알아봐 주시니까 의도한 대로 완성된 것 같아서 더 마음이 놓이네요.”
우형은 무슨 아들 칭찬을 듣는 학부모처럼 뿌듯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잠깐. 그렇게 보지 마. 안목 있는 프로듀서 보는 듯한 눈으로 보지 마!
괜히 아는 척해서 전문가처럼 보이고 말았나. 민망해서 그의 시선을 슬쩍 외면하자 이번엔 해랑이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 들을 걸 생각하고 작업해 본 적은 없었거든요. 지금까지.”
그의 대답에 곡의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진 이유를 알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가 일기였다면 이번엔 수필을 썼다, 이건가.’
지금까지는 그의 폐쇄적 성향처럼 혼자 만들고 혼자 들었지만, 이제는 자연스레 자기가 아닌 청자까지 고려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적극적으로 말을 걸며 응원하는 건 아니고 그저 본인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하는 것뿐이었지만.
그가 믹스테이프를 내는 목적이 그것이었으니 이 정도면 더할 나위 없었다.
‘해랑이 작업을 마쳤으니 이제는 회사가 나설 차례지.’
이번 믹스테이프는 유료 음원 사이트에 발매하지 않고, 무료로 음원 공개만 할 예정이었다.
해랑도 그렇기에 큰 부담 없이 내 보고 싶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난 얼마 전에 머릿속으로 세운 구상안을 떠올리며 말했다.
“타이틀은 뮤직비디오를 찍어서 같이 공개하면 어떨까 하는데…….”
“……뮤직비디오까지요?”
원래 이야기가 되었던 것은 음원 공개뿐이었는데, 내가 갑자기 뮤직비디오 얘기를 꺼내니 해랑은 예상 못 했다는 듯이 반응했다.
모노크롬의 곡이거나 원래 내려고 했던 곡이라면 뮤직비디오까지 제작해 주겠다는 것은 반길 만한 소리였지만, 해랑은 원래 안 하겠다는 걸 설득해서 내게 한 것이 아니던가.
이제 한 발짝 내디딘 사람한테 ‘내디딘 김에 한 발짝만 더 걸어 봐’ 하고 갑자기 말을 바꾼 것이나 마찬가지라 나는 조금 민망하게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모노크롬에서 처음 나오는 믹스테이프라 음원만 공개하고 넘어가기엔 아쉽단 말이지.’
한이의 드라마 OST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상태라, 따지고 보면 이게 모노크롬의 첫 솔로 음원이었다.
……물론 솔로 활동을 계속 진행했던 윤환을 제외하고.
제대로 시간 들여 준비한 솔로 앨범까지는 아니지만 이번 믹스테이프 발매는 나름 모노크롬에게 기념비적인 활동이었다.
거기에 해랑이 한 말도 있었고.
“누군가 듣고 공감하길 바라서 만든 곡인데. 사실 음원 공개만으로는 접근성이 부족한 것 같아서.”
무료 음원을 공개할 장소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유료 음원 사이트가 아니라 마이너한 플랫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가장 메이저하고 사용자가 많은 동영상 플랫폼을 이용해보자는 거지.
“그렇게 거창하게 안 찍어. 라이브클립이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 거기에 편집만 조금 더 들어갈 뿐이지.”
“으음.”
해랑은 뮤직비디오까지는 부담감이 느껴졌는지 조금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생각한 게 있는데……. 우리 다음 앨범 있잖아. 그거랑 좀 이어서 가볼까 해.”
나는 곧바로 생각해 둔 구상안을 설명했고, 해랑도 조금 더 생각하더니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뮤직비디오 촬영일이었다.
믹스테이프가 러프한 형식의 앨범이다 보니 뮤직비디오도 조금은 러프한 느낌으로 만들 예정이었다.
모노크롬 단체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처럼 여러 세트가 준비된 게 아니라 딱 세트 하나.
하나의 방처럼 만들어진 세트장이 준비되었다.
비치된 가구라고는 침대, 의자, 책장이 끝. 하얀 벽에도 정중앙에 빈티지한 창문이 하나.
가구와 창문이 나무로 되어 있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그보다는 휑하다는 인상이 더 강렬했다.
믹스테이프 타이틀인 ‘미드나잇 블루’에 맞춰, 미미한 푸른 조명만이 세트를 비췄다.
어둑한 밤. 달빛만이 들어와 방을 비추는 느낌.
해랑의 믹스테이프 뮤직비디오에서는 이 ‘달’이라는 키워드를 표현할 예정이었다.
의상 교체 후 슬리퍼를 신고 온 해랑은 맨발로 세트에 입장했다.
그가 바로 이 방의 주인이었다.
“오늘…… 화보 촬영이 아닌 거죠?”
세트장에 들어선 해랑을 본 감독이 당연한 것을 물어보았다.
분명 촬영장에 도착해서 인사도 나눴건만, 모든 세팅을 완벽하게 마치고 나니 비주얼이 다시 한번 눈에 강렬하게 들어온 모양이었다.
“네. 멋있게 나오면야 당연히 좋겠지만 뮤직비디오이니만큼 곡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그렇죠……. 거참. 밝은 데서도 다양하게 한번 찍어보고 싶은데.”
오늘 촬영의 중점은 비주얼이 아니라고 대답하자 어쩐지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매력 레벨 10이 발동한 건가.’
차라리 조명이 어두워서 다행일지도 몰랐다. 그나마 어두워서 얼굴이 가려지니.
이름부터가 ‘뮤직’비디오인데, 얼굴이 너무 강렬해서 그 ‘뮤직’이 화보의 BGM처럼 전락해 버리면 안 되지 않겠는가.
……아니, 저 우수에 찬 눈빛이 이 분위기에 어우러져서 더 강조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해랑이도 피곤하지 않을까. 뭘 하든 비주얼이 제일 강조되어서.’
잘생겨서 피곤하다니 남이 들으면 무슨 재수 없는 소리냐 하겠지만.
잘난 비주얼도 그의 한 부분이라지만 오늘은 얼굴을 뽐내기 위한 촬영은 아니었으니 예정대로 곡의 느낌을 살리는 데 충실할 예정이다.
세트장에 선 해랑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를 포함한 뉴마 직원들이 있는 것을 흘끗 확인하고 나서야 침대에 걸터앉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비현실적인 비주얼 때문에 다른 세상 사람 같았는데.
반대로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에 살짝 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갑자기 낯가리는 거냐고.’
항상 멤버들과 붙어 다니다가 혼자만 떨어져 촬영하는 이 상황이 낯설게 느껴진 걸까.
올해 들어 모노크롬 멤버가 외부에서 개인으로 활동했던 것은 재민의 예능 촬영, 한이의 OST 녹음뿐이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워낙 낯을 안 가려서 몰랐는데 해랑을 보니 역시 이런 것엔 익숙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무대 위에선 진짜 ‘아이돌!’이었는데.’
카메라 앞에서의 해랑은 그야말로 ‘퍼포머’라고 할 수 있었다.
평소에 무덤덤한 그이지만 무대 위에서는 비축해둔 생기를 있는 대로 발산하기라도 하는지 눈빛이 달라졌다.
그러나 지금, 어두운 조명 아래 힘을 빼고 침대에 걸터앉은 바로 이 모습이 그의 본연의 모습에 가까워 보였다.
“컨디션은 괜찮아?”
“네.”
나는 어색해 보이는 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다가가 가볍게 말을 걸었다.
“편하게 해. 다른 애들이 구경 온다는 거 우형이가 말렸다더라. 시끄러워서 촬영 못 한다고.”
그가 준비하는 동안 모노크롬 팀 메신저 방에서 멤버들이 한 얘기를 전해주니 해랑은 피식 웃었다.
같이 있지는 않지만 응원하는 마음은 전해진 것일까. 얘기를 들은 해랑은 한결 편해진 얼굴이었다.
이전에 거창하게 찍을 건 아니라고 했던 내 말처럼, 촬영은 간단하게 진행될 예정이었다.
우선은 침대에 앉아 랩을 하는 장면.
뮤직비디오에는 음원이 덧씌워질 예정이지만, 현장에 있는 나는 그의 첫 라이브를 듣게 되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이곳이 액자 속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미드나잇. 즉, ‘밤’을 소재로 한 곡이다 보니 키워드는 ‘꿈’이었다.
악몽을 꾸다 잠에서 깨 현실로 돌아왔는데 현실 또한 악몽 같을 때.
이게 현실이 아니라 꿈이었으면 하는 마음. 자신은 꿈속의 꿈을 꾼 것이고, 눈을 떠도 여전히 꿈속에 남아 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을 해랑은 랩으로 풀어냈다.
(발이 닿지 않는 바닥을 헤매어, I’ve slipped into my nightmare……)
가사 속의 화자는 악몽이 기다리더라도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잠이 든다.
이렇게 꿈과 현실 사이에서 헤매는 혼란을 이야기하는 것이 곡의 주 내용이었다.
비슷한 누군가가 듣고 공감하며 위로받기를 원해서 만든 곡.
그의 이야기에 가장 먼저 동질감을 느낀 것은, 아마도 나일 것이다.
‘……추상적인 내용인데, 뭘 말하는지 너무 잘 알 것 같아.’
처음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 이곳이 꿈속인 줄 알았던 일.
그때의 난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더욱 꿈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꿈이 아니라 현실이란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현실을 부정하는 마음은 아직도 이따금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뒤숭숭한 꿈을 꾸다 일어났을 때나, 전에 쓰러졌다가 깨어났을 때처럼.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꿈이었고 눈을 뜨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고.
‘이런 미친 일을 겪은 사람이 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있다는 거지.’
내가 했던 말 그대로였다. 비슷한 사람이 있으면 위로가 되더라는 그 말.
이전에 내가 해랑에게 이야기를 해 주겠다고 주저리주저리 했던 것과 다르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곡으로 세련되게 풀어내는 것을 보니 정말 예술가처럼 느껴졌다.
이걸 들으니 음악을 하나의 언어라고 하는 것도 납득이 되었다.
‘우형이가 말했던 그 천재성은 확실히 있는 것 같아.’
이 분위기를 끌어내는 데엔 해랑의 목소리도 한몫했다.
어두운 조명 속에 깔리는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듣다 보면 마치 깊은 바닷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듯한 감각이었다.
악기가 많이 들어가지 않아 심플하면서도 독특한 멜로디에 마치 내레이션을 하듯이 이어지는 저음.
나는 조명 빛이 미약하게 닿는 카메라의 뒤편에서 해랑의 목소리를 배경 삼아 여러 생각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