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20화 (20/430)

# 20화

대기실로 잠시 돌아왔다가 음료를 뽑으러 복도로 나온 나는 자판기 앞에서 아이리스 멤버와 마주쳤다.

‘옐로다!’

아이리스의 셋째인 옐로였다.

매니저와 함께 음료를 뽑던 그녀는 뒤에 사람이 다가온 것을 알아채고 뒤돌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 안녕하세요!”

한 번 본 날 기억하고 있다니!

매니저도 이전에 나와 인사를 나눴던 직원인지 나를 보고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금방 뽑고 갈게요!”

“아니, 천천히 해.”

이 세상에 와서도 아이리스를 실물로 접한 것은 저번 한 번뿐이라, 여전히 바로 앞에서 지켜보는 건 신기했다.

왜 사소한 행동까지 귀여운 거지? 이게 바로 콩깍지인가.

흐뭇하게 지켜보는데 옐로의 한쪽 팔꿈치 위가 빨개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거 아까…….’

아까 촬영 현장을 구경하면서 아이리스가 있는 방향도 같이 지켜봤다.

옆에서 재민이 “어디 보세요?” 하고 물었지만, 아이돌들이 모여있다 보니 레드의 금사빠 기질이 나타날까 봐 괜히 걱정되었던 것이다.

응. 사심이 담긴 게 아니라.

그러다 세트 소품을 옮기던 스태프와 옐로가 살짝 부딪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니. 저렇게 위험하게 옮기면 어떡하냐고!’

이전에 재민이 다친 것도 세트 안전 문제였다고 들었는데.

당시 팬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방송사는 출연진이 다쳐도 책임을 지지 않았고, 회사는 힘이 없어 방송사 탓도 못 하고, 그렇게 흐지부지 지나가느라 책임이 엉뚱하게 멤버에게 튄 것이었다.

그런데 또! 이렇게 귀한 애들을 모아두고 부주의하게 다니다니!

다행히 옐로는 다친 것까지는 아니고 피부가 조금 쓸린 모양이었다.

반소매가 끝나는 부분에 걸쳐 있어서 시야가 위에 있는 팬들에겐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팬들이 알면 속상해할 텐데.’

좋아하는 가수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그 열 배는 더 가슴이 미어지는 팬들이 아니던가.

카메라가 없는 지금 가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나는 옐로를 불러 팔 뒤쪽을 가리켰다.

“저기, 여기 팔에.”

“팔이요? 으엥? 이게 뭐야!”

그녀는 내가 가리킨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지 팔과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리고 그제야 자국이 생긴 것을 알아차렸는지 금세 울상으로 변했다.

“다쳤어?”

“아니이. 아까 살짝 부딪혔는데 그때 그랬나 봐.”

매니저에게 말꼬리를 늘어트리며 말하는 게 귀엽……이 아니라.

“나 바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데 어떡해?”

“대기실 가서 파데로……. 아. 너무 늦겠다.”

출전 그룹도 많고 대기실도 많은지라 하필 아이리스의 대기실은 거리가 좀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지갑만 들고 왔지, 파우치를 들고 나온 게 아닌데.’

도움 줄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잠깐 팔 좀 줘 볼래?”

난 마침 주머니에 들어있던 손수건을 꺼내 옐로의 팔에 묶었다.

옷 색깔과 비교해 봐도 그리 튀지 않는 색이라 다행이었다.

팔이 가늘어 두 번 둘러 묶었으니 풀리지도 않을 테고, 남들 눈엔 그냥 패션처럼 보일 것이다.

“팬들 보면 걱정할 테니까 잠깐 이거라도 묶고 있어.”

“감사합니다!”

옐로는 걱정이 해결되어서인지 표정이 환해졌다.

그리곤 음료수 일곱 개를 품에 안고 서둘러 다시 안쪽으로 돌아가면서 뒤돌아 말했다.

“나중에 꼭 돌려드릴게요!”

또 볼 수 있단 거겠지? ……계 탔다.

***

가만히 앉아있기 좀이 쑤신다며 음료수 뽑아오길 자청하던 옐로가 아이리스 멤버들 옆으로 돌아왔다.

“팔에 그거 뭐야?”

“모르고 있었는데 아까 잠깐 부딪혀서 자국 남았었나 봐.”

“다친 건 아니고?”

“응. 금방 사라질 것 같은데 지금은 빨개서.”

멤버들에게 음료수를 나눠주던 옐로의 팔을 보고 리더인 레드가 물었다.

아까 잠깐 이동하는 스태프와 부딪히는 바람에 서로 꾸벅하고 지나갔는데, 그때 생각보다 세게 부딪혔던 모양이다.

“가린 것 같아 보이진 않지? 급조한 건데.”

“응.”

다들 비슷비슷한 옷을 입고 있어서 오히려 발랄함을 더하는 포인트가 됐다. 특히나 귀여운 캐릭터인 옐로라서 더 잘 어울렸고.

실제로도 팬들은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손수건 있었네.”

“내 건 아니고…….”

옐로는 팔에 매인 손수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안무 영상 찍을 때 인사했던 이사님 있잖아.”

“뉴마 이사님?”

“응.”

레드도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뭔가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 후다닥 도망갔지만.

“상냥하신 것 같아.”

“쉿.”

주변에 직원은 없었지만 레드는 눈치를 보며 조용히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최근 뉴마와 뉴레인은 사이가 좋다고 할 순 없었다. 모노크롬의 멤버가 탈퇴와 동시에 뉴레인으로 소속을 옮겼으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레드는 얼마 전에 회사에서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팀장님. 저희 체면도 좀 생각해 주셔야죠.]

[아예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도 아닌데 회사가 체면 상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허용석 기획실장과 송준오 프로듀서였다.

용석은 말문이 막혔다. 얼마 전 윤환과 함께 소속을 옮긴 매니지먼트 팀장과 했던 이야기를 똑같이 돌려받았다.

어차피 연관된 회사끼리 소속 옮기는 게 뭐가 문제겠냐고.

용석은 계속 말리고자 했지만, 준오는 마음을 이미 정했는지 단호했다.

결국 용석은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돌아가고, 레드가 조용히 다가가 준오를 불렀다.

[뉴레인 떠나시는 거예요?]

아이리스는 상승세에 탄력을 받아 활동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작곡에 관심이 있던 레드는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그에게 배우고 있던 참이었다.

그가 회사를 나간다니 아쉬운 마음이 매우 컸다.

데뷔 때부터 아이리스를 맡았기에 누구보다도 자신들을 잘 알아준다고 생각했던 프로듀서이자 스승님이었으니까.

[다들 왜 이러나.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는 필요한 일이 있으면 편하게 뉴마로 찾아오란 말을 남기고 떠났다. 아마 위에 계신 분이 봐줄 거라면서.

‘바로 옆인 건 알지만…….’

아티스트의 그룹 탈퇴에 잇따른 직원 이동까지.

그녀에겐 이 두 소속사 사이에 세워진 벽이 무엇보다도 높아 보였다.

***

“야. 너 스타일 왜 이렇게 바뀌었어?”

“어. 오랜만.”

육상 100m 달리기 남자 예선전.

누군가 친근하게 해랑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인사하고 해랑도 아는 체를 했다.

모노크롬과 같은 연도에 데뷔하여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SPID’의 멤버, ‘하범’이었다.

“이젠 지나가다 보면 몰라보겠어. 예전엔 귀여웠는데.”

“무슨 소리야.”

해랑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아이돌이다 보니 바빠서……, 정확히 말하자면 한쪽만 바빠서,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알고 지낸 세월이 길어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한때 같은 회사의 연습생이었다.

현재 하범의 그룹인 SPID가 속한 회사로, 대형 소속사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해랑이 뉴마로 소속을 옮길 때 가장 거세게 반대했던 것이 바로 하범이었다.

결국 하범은 남아서 데뷔조가 되었고, 해랑은 뉴마로 들어가 모노크롬으로 데뷔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하범은 아직도 마음 한구석으론 삐져 있는 중이었다.

해랑과 같은 그룹으로 데뷔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해랑은 단호하게 소속을 옮겨 버렸으니까.

게다가 들려오는 모노크롬의 소식은 어떠하던가. 탈퇴. 영입. 탈퇴.

안 좋은 소식이 들릴 때마다 안타까웠고, 그런 회사에 있을 인물이 아니란 생각에 아까웠다.

‘열심히 안 할 건가 보네.’

경기를 앞두고도 해랑이 몸을 설렁설렁 푸는 것을 보니 예상이 갔다.

하범이 아는 그는 못 하면 못 하는 거고, 할 거면 필사적으로 하는 스타일이었으니까.

‘얼마 만에 붙는 건데 그렇겐 못 두지.’

모노크롬 멤버가 이 프로그램을 촬영하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도 알았고, 그래서 해랑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갔지만 어쩐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료애이기도 했고 경쟁심이기도 했다.

“너희 내일 음원 발매라며? 나 솔로 음원도 내일 나오거든.”

“어. 나도 들었지.”

가볍게 뛰며 몸을 풀던 하범이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늘이며 말했다.

“우리끼리 대결해서 진 사람이 하루 동안 SNS 피드 맨 위에 상대방 곡 홍보 올려두기. 어때?”

“뭐?”

“그래야 서로 좀 할 의욕이 나잖아. 어?”

객관적으로 봐서, 이것은 해랑에게 유리한 내기였다.

SPID와 모노크롬의 인지도 차이는 크다고 할 수 있었고, 해랑과 하범 개인 또한 팔로워 수에 차이가 있었으니까.

두 사람도 그 점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인기도를 비교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 또한 알았다.

하범은 예전부터 이렇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내세우며 해랑에게 치대곤 했기에.

“…….”

순간 해랑은 고민에 빠졌다.

촬영 시작 전에 얘기한 ‘다치지만 말자.’를 지키려면 어디까지 열심히 해도 되는지.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오케이.”

내기를 받아들인 해랑은 몸 푸는 자세가 본격적으로 바뀌었다.

하범도 그 모습을 보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의욕을 불태웠다.

준비 시간이 길 뿐이지, 실제 경기는 시작하고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해랑과 한 조로 함께 예선전에 참가한 한이가 몇 초 더 늦게 결승선을 통과해 멤버들 옆에 섰다.

“와. 나 옆에서 형 갑자기 튀어 나가서 깜짝 놀랐네.”

오늘은 다치지 않을 만큼 적당히 하자, 가 모토 아니었나?

“무슨 치타인 줄 알았잖아.”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아무것도.”

이유를 모르는 멤버들은 의아해했지만 해랑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예선전은 몇 조로 나눠 진행했고 여자 예선전도 있었기에 결승전까지는 또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결승전.

1, 2위가 거의 나란히 결승선에 들어오고 팬석 두 구역에서 동시에 환호성이 터졌다.

손꼽을 정도로 좌석 수가 많은 팬덤, 그리고 컬러즈였다.

***

한 자리에만 갇혀 있는 팬들과 달리, 관계자가 움직일 수 있는 곳은 한 곳뿐만은 아니었다.

아래에 있다가 아는 아이돌에게 들킬 뻔한 재민과 나는 이번엔 아예 팬석 위층으로 올라와서 구경했다.

앞에 사랑하는 가수가 있는데 굳이 뒤쪽을 올려다볼 팬은 없었기 때문에 들킬 염려도 더 적었다.

‘멀기는 하지만.’

전광판에 비춰주기도 하고 옷 색깔로 구별할 순 있어서 전체적인 상황을 보는 데는 큰 지장 없었다. 관계자로서는 말이다.

솔직히 얼마 전까지 이쪽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반인이었던 나는 가까이서 보는 게 더 신기해서 흥미로웠는데……. 어쩔 수 없지.

자리를 잡으니 남자 100m 달리기 결승전이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활동량이 많고 평소에 운동하며 관리하는 아이돌이라서 그런지 다들 빨랐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해랑이 단연 눈에 띄었다.

이 먼 거리에서도 키가 크다거나 외적인 부분이 눈에 띄어서가 아니라, 시작하자마자 앞으로 치고 나와서였다.

다리가 길어서인지 달리기도 빨랐다.

‘아니, 열심히 안 해도 된다니까 왜 저렇게 열심히 해?!’

순식간에 결승선을 통과한 해랑은 숨 돌릴 시간을 아주 잠깐 가지고 바로 인터뷰를 했다.

그 옆엔 거의 동시에 들어온 아이돌이 함께였다.

아는 사이인 듯 가볍게 포옹을 하며 인사를 나눈 후, 해랑은 멤버들과 합류했다.

땀을 닦으며 메이크업도 조금 닦여나가는 바람에 멤버들은 잠시 대기실로 돌아왔다.

‘정돈된 모습만 보여줘야 하는 운동회라니, 아이돌도 참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금메달을 들고 돌아온 해랑은 먼저 대기실로 돌아온 나를 보고 잠시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이건…….”

“아니. 잘했어. 네가 제일 눈에 띄더라.”

1등을 하고도 변명을 하려던 해랑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열심히 안 해도 된다고 했지, 열심히 하면 안 된다는 얘긴 아니었으니까.

1등 인터뷰도 했겠다. 다치지만 않았으면 잘된 거지.

‘그나저나 이제 촬영도 얼마 안 남았네.’

난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일찍부터 모여서 시침은 정오를 넘긴 지도 한참 되었다.

모노크롬이 참가하지 않는 몇 종목은 내일 다른 곳에서 촬영이 진행될 예정이라 그나마 이것도 빨리 끝나는 것이었다.

촬영 예정 시간을 조금 넘길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큰 딜레이가 생기지 않았고.

촬영이 끝을 보인다는 것은, 재민의 티저 이미지 공개도 얼마 남지 않았단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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