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5화 (5/430)

# 5화

“이건……?”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아무리 봐도 봉투에 적힌 글씨는 사직서.

안에 든 종이를 꺼내 봐도 분명 사직서.

각 잡혀 접힌 종이엔 상투적인 퇴사 사유가 적혀 있었다. 일신상의 이유.

‘난 이제 회사에 들어왔는데……?!’

일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직원이 나가다니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내가 뉴마 엔터테인먼트에 들어와서 처음 하는 일이 퇴사 처리가 될 판이었다.

나는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어 눈앞의 팬매니저, 윤희를 쳐다보았다.

표정 변화도 없이 주저하지 않고 내민 것을 보면 굳게 결심하고 찾아온 듯했다.

나도 사직서를 내 본 입장이라 그녀의 심정이 어떨지 대강 짐작이 갔다.

‘미련도 없고 당장이라도 짐 싸서 나가고 싶었지.’

전 회사는 내가 사직서를 제출하자 그만둘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더 나아가서는 그만두길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 내겐 그녀가 필요했다.

“꼬치꼬치 묻는 것도 불편하겠지만, 혹시 뭐 때문에 나가려는 건지 말해 줄 수 있나요?”

“……하아. 나가는 마당에 눈치 볼 것도 없겠네요. 물어보셨으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한숨을 쉰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바로 말을 이었다.

“아티스트 담당 인력 대부분이 뉴레인으로 옮겼는데 제가 여기 남아서 무슨 비전을 느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시겠지만 지금껏 업무 환경이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개선된 적이 없었고요. 지금까지 회사가 돌아간 꼬라지…… 아니, 모습을 생각해 보면 앞으로도 비슷할 것 같아서, 입니다.”

윤희는 마치 준비라도 한 듯이 다다다다 쏘아냈다.

‘일신상의 이유’라는 여섯 글자에 담기에는 억울할 정도로 마음에 쌓아둔 말 같았다.

내가 예상치 못한 태도에 어버버 하는 동안 그녀는 부족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말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더 해도 될까요?”

“네? 아, 네!”

눈빛에 쫄아 대답했지만, 안 듣겠다고 했다간 머리를 붙잡아서라도 듣게 할 기세였다.

한 마디라고 했는데 한 마디도 아니었다.

아담한 첫인상과는 달리 그녀는 마치 폭주 기관차처럼 말을 쏟아냈다.

***

뉴마 엔터테인먼트에서 뉴레인이란 레이블이 분리되었다.

일부 직원들은 인사 개편을 개편이 아니라 마치 해고 통보처럼 받아들였다.

아이리스를 담당하던 사람들은 뉴레인으로 옮겨갔고, 모노크롬을 담당하던 사람들은 남았다.

입 가벼운 직원들의 말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뉴레인에게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이렇게 뒤숭숭한 와중에 이사 자리에 새로 온다는 사람은 낙하산에 엔터 업계 경력 무.

뭐 하던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모노크롬의 모든 일을 총괄한다니, 윤희의 눈엔 회사가 완전히 모노크롬을 포기한 것으로 보였다.

12월. 연말.

좀 이름 있는 아이돌 소속사라면 연말 무대 준비로 분주해야 할 시기.

연말 무대를 준비하고 있을 아이리스는 이미 새 건물의 연습실로 옮겼고, 뉴마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실은 지난 연말들과는 달리 한산했다.

윤희는 조용한 복도를 지나 연습실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예상했던 대로 모노크롬의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최근 화제라는 해외 댄서의 영상을 보며 분석하는 등,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모두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알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당분이라도 충전하라고 조용히 음료수를 챙겨주고 나오던 참이었다.

“윤희야.”

다시 조용한 복도를 걸어 나가려는데, 리더인 여우형이 따라 나왔는지 뒤에서 윤희를 불렀다.

한솥밥을 먹은 지도 몇 년. 동갑인 두 사람은 이제는 거의 친구 같은 사이였다.

“남 생각할 것 없어. 네 생각만 해.”

“…….”

“네 인생, 남이 대신 안 살아준다?”

뒤돌아보니 우형이 어깨를 으쓱하며 농담이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고작 자신들과의 정 때문에 청춘을 바치지는 말라고.

현재의 모노크롬은 미래가 불안정하단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남아있는 아티스트 담당 직원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은 거의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이러다 모노크롬이 활동을 접으면 자신들은 어떻게 될까, 그런 불안.

이는 팀에 대한 애정과는 다른 사안이었다. 지금까지 봐온 회사의 행태에 대한 불신이었다.

‘그렇게 티가 났나.’

티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마음 아프게도 그걸 포착했던 모양이었다.

자신들과 엮인 직원들이 하나같이 미래를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윤희는 미처 대답도 하지 못하고, 애써 웃어 보이고는 그를 뒤로했다.

현실적으로 의리며 정을 챙기기엔 자신의 미래도 생각해야 했고, 적절한 시기란 것이 있었다.

그녀는 고민 끝에 복잡한 감정이 담긴 손길로 사직서를 꾹꾹 접어 봉투에 담았다.

새해 첫 출근 날이 되자마자 사직서를 내려고 했건만, 자신의 상사로 들어온 이사란 사람은 출근을 안 했더란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지금.

“말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더 해도 될까요?”

“네? 아, 네!”

퇴사하면서 불만 사항을 늘어놓는 건 자신에겐 득 될 일이 없었다. 이곳 직원이 아니게 되더라도 사회생활은 계속해야 하니까.

그러나 남아있을 사람을 위해 말하고 싶었다.

묻지 않았으면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가 먼저 묻지 않았는가.

한번 말문이 터지니 막을 수가 없었다.

“소속사는 소속사답게 기본적인 아티스트 케어는 마땅히 해야 하잖아요. 손해 보려고 데리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회사도 이득 볼 게 있으니까 재계약…… 후우, 재계약했을 테고요.”

재계약을 말할 땐 한 글자씩 강조해서 말했다.

그래. 이놈의 재계약! 팀의 존재를 붙잡고 언제까지 멤버들을 휘두르려고 재계약을 한 건가.

윤희는 말하다가 열이 올랐는지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고는 다시 말했다.

“왜 여기 남겨뒀는진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제 아이리스도 없겠다, 차별대우하지 말고 제발 소속사의 일을 해 주시면 좋겠네요. 이 회사가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말만 그럴싸하게 하지 말고요. 이렇게 푸대접받을 애들 아니니까.”

‘소속사의 행패라고 인터넷에 까발리기 전에.’까지 말하려다 이성을 부여잡았다.

씩씩거리며 말하고 앞을 보니 이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윤희는 이제야 상대방의 얼굴을 제대로 봤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여성이었다.

‘휴우. 그래. 이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

그녀도 이제 회사에 처음 온 건데, 상관없는 과거 일까지 화풀이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 대표’의 딸. 회사에 깊게 연관된 사람이었고 지금은 모노크롬을 담당할 그녀에게 건의할 사항이었다.

일단 할 말은 다 한 윤희는 다시 표정을 갈무리했다.

상대방도 놀란 감정은 추슬렀는지 차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얘기 하는 거 본인한텐 좋지 않은 거 알고 말씀하신 거죠?”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기껏 이 이야기를 듣고 하는 반응이 그거?

‘뭐, 업계에 블랙리스트라도 돌린다는 거야, 뭐야?’

미적지근한 상대방의 반응에 윤희는 허탈하여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런데요?”

윤희는 불쾌감이 솟아올라 미간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혹시 이직이 정해지셨나요?”

“아뇨. 당분간 쉴 건데요.”

이직 예정이면 옮길 회사에 전화라도 걸어서 막겠다고 협박하려는 건가.

윤희는 일부러 표정도 숨기지 않고 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실제로 쉴 생각이기도 했고. 자신이 쉬든 재취업을 하든 그녀가 신경 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필요한 인재야.”

***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열변에 처음엔 놀랐지만, 귀 기울여 들어보니 하나같이 다 맞는 말이었다.

내가 원흉 그 자체인지라 어디 말하지도 못하고 답답했던 것들을 그대로 표현해줘서 후련할 지경이었다.

다 듣고 나서는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나가지 말아요.”

“예……?”

내가 대뜸 질척거리기 시작하자, 윤희의 퉁명하던 표정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변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실제로 그것 하나뿐이다. 나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줘!

일을 잘하는 새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다. 기존에 모노크롬과 같이 일을 했던 사람이 필요했다.

불합리한 일이지만, 퇴사하면서 그간의 불만 사항을 쏟아내는 것은 웬만하면 피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인맥 관리니 업계 소문이니 하는 것들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모노크롬을 위해 불만 사항을 쏟아내는 것을 보면 그들을 얼마나 진심으로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아니면 이만한 인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를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다.

“연봉 협상부터 다시 하죠.”

“저기. 제가 방금까지 한 말 들으셨어요?”

사비를 털어서라도 옆에 두고 함께 일하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내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는 몰라도 일단 월급이 나오면 어떻게든 되겠지.

윤희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하는 시선으로 날 쳐다보았다. 자신이 마음먹고 낸 사직서를 무시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모노크롬한텐 당신이 필요해요.”

“…….”

완고하던 그녀도 모노크롬의 이름이 나오자 눈동자가 흔들렸다.

“못 미덥고 부족하겠지만 저는 모노크롬에게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영광을 안겨주고 싶어요.”

“…….”

“회사의 잘못은 통감합니다. 뒤늦지만 거기에 보상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할 예정이에요. 뭔가 이뤄냈다, 하고 성취감이 들 만한 자리에 올라갈 때까지요.”

아직은 막막하지만, 이 길의 끝에 있을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말했다.

아주 짧은 대화밖에 나누지 못했지만 가감 없이 말해준 덕분에 그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상상하는 것은 아마 그녀도 바라던 일일 것이다. 절대 이뤄지지 않을 일이라 생각해서 포기했을 테고.

“제가 윤희 씨라면 그 과정을 옆에서 같이 하고 싶을 것 같은데, 어때요?”

방금까지만 해도 불만이 가득했던 윤희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번져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해도 믿기 힘든 것은 당연한 일.

방금도 ‘말만 그럴싸하게 하지 말라.’고 쓴소리를 하지 않았던가. 이 회사가 감언이설로 꾀어 붙들어놓은 게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아마 더 믿기 어렵겠지.

하지만 지금 놓치면 기회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직서를 다시 고이 접어 봉투에 담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제가 모노크롬에게 기회를 줄 수 있게 저한테도 기회를 주세요. 그래도 안 되면, 이건 그때 다시 내셔도 좋고요.”

윤희는 자신에게 다시 되돌아온 사직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다행히도, 고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말 지키실 때까지는 있도록 하죠.”

***

다음 날.

나는 다시 모노크롬을 불러 모았다.

이런 말을 하기도 미안하지만, 일부 스케줄 빼곤 일정이 전무하다시피 해서 필요할 때 모으기가 좋았다.

멤버들이 일이 없어도 항상 회사 연습실이나 작업실에 있는 덕분이기도 했다.

이것도 윤희에게서 들은 얘기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사님.”

이번에도 리더가 먼저 인사를 하자 나머지 멤버들이 우루루 함께 고개를 숙였다.

이전에 안 좋은 분위기로 첫인사가 끝난 탓인지 밝은 표정들은 아니었다.

리더와 일대일 면담을 할 때는 하고 싶은 건 다 하라느니 좋은 이야기(?)도 했지만.

‘생각해 보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었을 수도 있겠네.’

이번엔 윤희와 매니저란 사람도 함께였다.

윤희는 들어오는 우형과 눈이 마주치곤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무슨 뜻일지 대충 예상이 갔다.

‘몇 년이나 함께 일한 사이니 퇴사한단 얘기는 이미 해놨겠지.’

그런데 퇴사 무산은 둘째 치고 이사 옆에 떡하니 서 있으니.

조금 민망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됐건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임은 틀림없다.

아무튼 내가 모노크롬 멤버들을 다시 부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모노크롬에게는 변화의 첫걸음.

“프로필 사진. 다시 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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