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22 장 연정애사(戀情哀詞) (23/32)

제 22 장 연정애사(戀情哀詞) 

"어서 오게."

들어오는 엽혼의 검은 옷은 뿌옇게 먼지에 덮여 있었고, 그의 뺨은 핼쑥하여 한시

도 쉬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금청청은 이미 진소백을 통해 엽혼에 대해 들었다.

엽혼이 동생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했었던 것과 그의 생명이 사나흘에 불

과함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남지 않은 자신의 시간을 빚을 갚고자  뛰어 다니는 엽혼

의 초췌(憔悴)한 얼굴 앞에 

그녀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엽혼 또한 음모의 희생자일 뿐이지 않은가? 한때 죽이려 했던 엽혼이

었지만 이제 그녀는 다만 한마디밖에 꺼낼 수 없었다.

"앉으세요."

엽혼은 자리에 앉았다.

금청청을 보는 그의 눈에는 감사의 염(念)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용서했음을 안 까닭이었다.

용서를 받더라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생과 사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편안함이었다. 아무런 빚이 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복이 아닐까? 

이윽고 엽혼이 입을 열었다.

그의 입을 통해 놀라운 음모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진소백과 섭수진의 얼굴은 굳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심화절을 의심하고 있었으므로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금청청이 오히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비응방을 물려받은 심화절마저  그런 음모를 꾸민  자라면 금사진의 기업(基業)은 

모두 악한(惡漢)에게 

넘어가고 만 것이 아닌 

아니, 이것은 비단 비응방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산의 거대한 광산에서 나오는 막대한 이익은 비응방의 힘을 일취월장(日就月將)

시킬 것이고, 심화절이 악한 마음을 갖고  있는 자라면 무림 전체에도 큰 위협(威

脅)이 될 것이다.

더한 놀라움은 흑회 천령(天領)의 정체였다.

이번에는 진소백조차 놀랐다.

"그가 정말 풍운(風雲) 진인(眞人)이 틀림없는가?"

엽혼이 고개를 끄덕이자 좌중은 말을 잃었다.

적염(狄艶)이 흑회에 속했다는 사실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설마 구대문파에 속하는 

천하대파(天下大派)의 주인이 흑회란 사도(邪道) 방파에 속하다니! 

모든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싶었다.

"혹시 그녀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없는 거요?"

매일도의 말에 엽혼이 고개를 저었다.

"죽음에 이르러 거짓말을 할 사람은 많지 않소."

한참 동안을 중인들은 경악 속에 침묵했다.

문득 진소백이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섭수진에게 물었다.

"아까 그 명단 속에 분명히 풍운 진인의 이름도 있었지요?"

섭수진은 그의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그건 왜……?"

진소백이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고개를 들고 힘차게 말했다.

"자, 이제 한번 정리를 해봅시다."

진소백이 일어서더니 왔다갔다하며 말을 시작했다.

"금 방주는 백회를 만들어 암중에 고숭무의 힘을 견제했었소. 그것을 안 심화절은 

오히려 두 세력을 역이용하여 금 

방주를 살해하고 그 혐의를 고숭무와 흑회에 뒤집어씌운 뒤 자신은 방주위에 올랐

소."

진소백이 머리를 치며 말했다.

"그리고 흑회와의 싸움을 이용해서  비응방 내에 있는,  금 방주가 남겼던 백회의 

남은 힘마저 제거하려 하고 있소.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가정이 있지만."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말하는 듯하던  그의 말투가, 점점  몰입하며 혼잣말로 변해 

갔다.

"금 방주와 흑회, 백회를 모두 없애고  자신은 광산의 부를 이용해 새로운 비응방

의 방주로서 군림한다. 좋은 계략이지만……  아니야, 뭔가 이상해. 이상하단 말이

야……"

진소백이 계속 자신의 머리를 치며 '이상해'를 연발하자 섭수진이 말했다.

"무엇이 이상하단 말인가요? 제 생각에는 앞뒤가 잘 맞는 것 같은데요."

"아니, 아니오. 뭐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으니 그만 합시다.  중요한 점은, 어쨌든 

심화절이 방주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니 의견들을 내어 보시오."

섭수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일 흑회가 풍운 진인 적일수까지 포함한다면 오히려 심화절이 그들에게 당하게 

되지 않을까요?"

매일도가 동의했다.

"섭 소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오. 비록 비응방이 거대하고 심화절의 능력이 뛰어

남을 알고는 있지만, 구대문파의 저력(底力)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소. 

공동파만도 심화절은 당해 내지 못할 거요."

진소백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공동 전체의 힘이라면 심화절도 어렵겠죠. 하지만……"

"다른 변수가 있다는 겁니까?"

"글쎄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최근 몇 년간 공동파의 강호 활동이 눈에 띄게 줄어

든 것으로 보아…… 어딘가……"

진소백이 말을 하다 어두(語頭)를 돌렸다.

"어쨌든 지금 비응방과 흑회가 한창 공방을 벌이고 있으니  결과를 지켜보도록 합

시다."

나머지 사 인이 동의했다.

이미 진소백은 개방의 정보망을 통해 비응방과 흑회의 싸움 결과를  즉시 알려 올 

것을 지시했으니 문제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결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다리는 동안 진소백이 금청청에게 물었다.

"심화절이 더 이상 자격이 없음을 알았으니  남는 건 금 낭자뿐이오. 비응방의 방

주로서 방을 이끌어 나갈 의향이 있으시오?"

금청청은 고민했다.

이윽고 그녀는 말했다.

"전 생각이 없어요. 다만 적당한 인물은 생각이 났어요."

"누구 말인가, 사매(師妹)?"

매일도가 물었다.

"바로 사공두예요."

매일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면 비록 부족한 점은 있어도 잘 해낼 것이다. 무엇보다 성실한 사람이니까."

섭수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진소백이 나직이 말했다.

"만일 그가 살아남는다면 가능하겠죠."

비응방과 흑회의 일전(一戰) 결과는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엽혼을 안내하고 밖으로 나갔던 백의개 구정이 다시 허겁지겁 들어왔다.

"광풍개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구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종쾌가 지친 얼굴로 들어왔다.

광풍개(狂風 )란 별호가 말해 주듯 그의 경공은 일절(一絶)이었지만, 먼 거리를 급

히 달려와 지친 것이다.

먼 거리에서 비응방과 흑회의 싸움을  지켜보다 결과가 나오자 바로  달려온 그였

다.

"싸움은 끝이 났습니다. 심 방주가 이끄는 비응방의 무사들이 흑회를  초토화(焦土

化)시켰습니다. 흑회의 존령(尊領)과 

몇몇 수하만이 어디론가 달아났을 뿐, 나머지 

흑회의 인물들은 모두 죽거나 사로잡혔습니다."

숨이 찬 듯 말을 잠시 쉬었다가 계속하는 사종쾌! 

"안타까운 일은 심 방주가 뇌정구(雷霆球)를 개량한 화탄을 주로 사용했는지라 사

망자가 너무 

많았다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흑회의 고수들도 심화절이 데리고 나타난 세 노인을 

당해 내지 못했습니다."

"세 노인…… 이라 했소?"

진소백이 물었다.

"예, 공자. 분명 비응방의 인물은 아니었는데 무공이 가공스러웠습니다."

"좋소. 계속 말해 보시오."

"뭐, 더 이상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사공 당주가 죽고, 심 방주는 그를 비응방 제

일의 충렬지사(忠烈志士)로 치켜세웠습니다."

사공두가 죽었다는 소리에 금청청은 아연했다.

이제 비응방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 

심화절은 자격이 없었다.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할까? 진소백이 사종쾌에게 물었다.

"혹시 흑회의 무사들 중 공동파의  무공을 쓰는 자들은 없었소?  아니면 공동파의 

제자를 근처에서 봤다든가."

사종쾌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없었습니다."

진소백이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풍운 진인이 흑회의 천령이라면 당연히 공동파가  나타나 흑회를 도와야 했다. 하

지만 공동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고, 흑회는 멸렬했다.

무슨 다른 사정이 있는 걸까? 아니면 풍운 진인이 마음대로 공동을 움직일  수 없

는 걸까? 모두의 눈이 진소백에게 모였다.

은연중에 진소백이 모든 결정을 내리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흠, 흠, 우선 두 가지 의문을 풀어야 하오. 첫째, 왜 풍운 진인이 움직이지 않았느

냐는 점. 둘째, 심화절이 데려온 세 명의 노고수(老高手)가 누구냐는 점!"

그는 좌중을 둘러보다가 섭수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우선 나와 섭 소저가 공동파로 가겠소. 그리고……"

매일도를 보는 진소백! 

"매(梅) 형은 금 낭자와 같이  비응방으로 한 번 더 가주시오.  금 방주의 유품(遺

品)을 가지러 왔다는 핑계를 대고 심화절이 끌어들인 세 고수의 정체를 탐문해 주

시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엽혼이 입을 열었다.

"난 무엇을 하면 되겠나?"

 엽혼은 지금 잠력이 사라지는 주기(週期)가 되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자신이 할 일을 물었다.

진소백의 눈이 흔들렸다.

"자네는……"

"당신은 그냥 쉬도록 하세요. 이미 당신이 진 빚은 충분히 갚았어요.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실 거예요."

금청청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엽혼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처지에 감사했다.

자신은 죄를 지었으되 용서를 받았으니 이제 빚이 없었다.

빚이 없이 죽을 수 있다니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가? 문득 한 여인이 떠올랐다.

그녀에게도 빚이 있었다. 아니, 빚이 아니라 어쩌면 다른 감정인지도 몰랐다.

엽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아직 하나의 빚이 더 있소. 그 사람에게 가도 좋겠소?"

금청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당신의 삶은 오로지 당신 거예요."

엽혼은 진소백을 보았다.

진소백이 그에게 말했다.

"자네는 평아(枰兒)를 한 번 더 보려는 겐가?"

엽혼은 고개를 흔들었다.

"난 그애를 다시 볼 생각이 없네. 오히려 그의 마음만 상하게 할 뿐이겠지. 자네가 

있으니 난 걱정하지 않겠네."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보지 않는 편이 서로를 위해 나을지도 몰랐다.

"평아(枰兒)…… 의 치료는 언제라던가?"

진소백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오늘밤이라 들었네. 치료만 끝난다면 정상인과 다름이 없을 거라 하였네."

엽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음으로 진소백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그애가 건강을 되찾거든 부디 잘 돌봐 주게. 평아의 재질(才質)은 못난 형보다 뛰

어나니 꼭 부모님의 억울함을 풀 수  있을 것이네. 그리고 무엇보다…… 자네에게 

감사하네."

진소백은 눈을 크게 떴다.

눈물이 흐를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급히 전음을 전했다. 시간이 흐르면 말조차 떨리지 않겠는가?  "평아는 걱정 말게. 

그분이 돌보기로 하셨다네."

엽혼이 몸을 떨었다.

"그분이라면……?"

진소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엽혼은 알아들었다.

그는 동생에 대한 걱정마저 모두 잊을 수 있었다.

엽혼은 떠났다.

그가 빚을 지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소화(小花)였다.

산속에서 만났던 순순한 여인! 

하지만 엽혼이 진 것은 사실 빚이 아니었다.

엽혼은 다만 그녀를 보고 싶었다.

멀리서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며 죽을 수 있다면 지금의 그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의 인생은 길고 힘든 경주였다.

그는 너무 지쳤고 너무 피곤했다.

이제 쉬고 싶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옆에 두고 다만 잠들고 싶었다.

그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부디 평아를 돌봐 주거라. 부디…… 

어머니의 깊고 맑던 눈동자는 눈물이 가득한 채 서서히 감겼었  그때 어머니의 얼

굴에 감돌던 사자(死者)의 편안함을 엽혼은 느끼고 싶었다.

소화(小花)의 곁에서.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꼭 닮았다.

공동파는 물론 공동산에 있었고, 공동산은 감숙성(甘肅省)에 있었다.

그리고 감숙성에 가기 위해 진소백이 거칠  수밖에 없는 길가에 화화루(和和樓)가 

서 있었다.

화평(和平)하다는 주루이니 조용히 쉴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진소백과 섭수진은 말

을 멈췄다.

"에구,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주루이니 어서 들어갑시다."

노인처럼 말하며 진소백이 먼저 말에서 내렸다.

섭수진도 따라 주루로 들어갔다.

자리를 둘러보기도 전에 어린 점소이 하나가 조르르 달려왔다.

연신 웃으며 그들을 창가 자리로 안내하는 것이 무척 명랑해 보이는 아이였다.

"헤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십니다. 뭘로 드릴깝쇼?"

섭수진이 얼굴을 붉혔지만 진소백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놈, 보는 눈은 있구나. 이 집에서, 그러니까……"

진소백이 잠시 둘러보더니 말했다.

"가장 비싼 술 세 가지와 가장 비싼 요리 다섯 가지를……"

'아이구, 수지맞았다!' 

 점소이의 입이 함지박이 되었다.

진소백은 말을 이었다.

"……빼버리고 나머지를 모두 가져 오너라."

주루에서 파는 술은 모두 네 가지였고, 요리는 모두 일곱 가지에 불과(不過)했다.

다시 말해 가장 싼 술 하나와 가장 싼 요리 둘을 시킨 셈이었 '이런 빌어먹을!' 

점소이가 얼굴을 구기며 속으로 욕을 하자 진소백이 그를 노려보았다.

"난 빌어먹지 않는다. 어서 가져 오지 않고 뭘 하는 게냐?"

'앗 뜨거! 어떻게 속으로 한 말을 알았지?' 

 점소이가 급히 물러가자 섭수진이 조용히 말했다.

"또 진 공자의 장난기가 발동하는군요. 한동안 조용했는데……"

진소백이 웃으며 말했다.

"섭 소저 마음에 들려고 조심했는데 이미  거절을 당했으니, 참을 필요가 없질 않

소?"

섭수진은 눈을 흘기며 입을 다물었다.

툴툴거리며 술과 음식을 들고 오던  어린 점소이는 진소백과 눈이  마주치자 억지 

미소를 지었다.

마음속의 말까지 알아 버리는 귀신(鬼神)임을 알게 되었으므로.

진소백은 음식을 식탁 위에 놓는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어디 보자. 내가 점궤를 봐주마."

점소이는 조마조마했다.

'이놈, 아니 이분이 무슨 짓, 아니 무슨 행동을 하시려고……' 한번 마음속을 들키

자 속으로 욕하는 짓마저 겁이 나는 점소이였다.

진소백이 손을 짚어 가더니 무릎을 치며 말했다.

"이런, 넌 오늘 운세가 매우 나쁘구나. 먼저 술로 목욕을 하고 이어 돈벼락을 맞을 

운세다."

이건 무슨 말인가? 

 술 목욕은 차치(次置)하더라도 돈벼락이 나쁜 운세라니.

'만일 진짜라면 횡재 수가 있는 겐가?' 

 점소이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 한 병의 술을 공짜로 더 갖다 주었다.

"헤헤, 이건 복채로 생각하시고……"

진소백이 그를 보더니 말했다.

"너는 의외로 인심이 좋구나."

점소이가 머리를 숙였다.

"헤헤, 어머니가 아프신 탓에 제가 일을 합니다만, 헤헤, 적어도 성질 나쁘단 소리

는 듣지 않고 삽니다."

진소백이 그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아까  장난을 쳤던 것이 미안했는지  등을 툭툭 

쳤다.

점소이는 등이 따뜻해졌다는 것만 느꼈지만, 섭수진 같은 고수(高手)는 알 수 있었

다. 진소백의 손에서 나온 한 

줄기의 진기가 점소이의 등을 타고 백회혈로 들어갔음을! 점소이가 물러가자 그녀

는 나지막이 물었다.

"왜 그런 거예요?"

"아마 그가 아직 죽을 때가 아닌가 보오. 내가 장난기가 들고 그의 점괘를 봐주고 

싶어진 것은 

우연이지만, 아마 하늘이 그를 살려 주고자 함인 것 같소."

섭수진은 놀랐다.

"그를 살리다니요? 진 공자는 역학(易學)까지 배우셨나요?"

진소백은 문득 옛날을 회상하는 듯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배우지 않았던 분야는 거의 없소.  철이 들고 나서부터…… 하루도 쉬질 않

았지. 그들을 상대해야 했으니까!"

마지막 말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섭수진은 가까이 앉은 탓에 들을 수 있었다.

"도대체 그들이란 누구죠?"

진소백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요. 섭 소저도 인연이 있으니 곧 알게 될 거요."

그는 또 말머리를 돌렸다.

"자, 한잔합시다! 오늘은 전번에 알려 준, 주기를 배출시키는  구결(口訣)을 기억하

면서."

섭수진은 이것이 생애의 두 번째 술좌석이었으며 두 번 모두 진소백과 마셨다.

첫 번째에 그녀는 몹시 취했고, 또 술집에서 격투가 벌어지는 바람에 무척 시끄러

웠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또다시 술집 입구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 올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

까? 웅성거리는 소리에 둘러보니 건장한 체구의 중년사내 넷이 입구를 막고 서 있

었다.

그 중 황색 옷을 입은 자가 우렁차게 외쳤다.

"우리는 공동의 동심사걸(同心四傑)이라 하오. 결례가 되겠지만 본(本) 파(派)에 침

입했던 도적(盜賊) 하나가 

이 술집으로 숨어들었으니 부득이 수색을 해야겠소."

공동의 동심사걸이라면 장문인 풍운 진인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그들이 쫓아올 정도라면 도적이란  자의 중요도가 매우 큰  것인데…… "실례하겠

소."

공동의 위세는 크다. 

 그 때문인지, 말로는 예의를 차리는 동심사걸의  태도는 지극히 오만하여 주루의 

손님들이 정말 죄인이라도 된 듯했다.

"이봐! 얼굴을 들란 말이다."

고개를 수그린 채 술만 마시고 있는 주정뱅이의  목뒤를 난폭하게 잡으며 이걸(二

傑)이 말했다.

그 바람에 주정뱅이가 잡고 있던  술잔이 허공을 날았다. 속에  담겼던 술도 같이 

날아 점소이를 젖게 했다.

'어, 이것 봐라? 정말 술로 목욕했네!' 

점소이가 신기해할 때, 그의 생각이 어떻건 이걸(二傑)은 계속  주정뱅이를 흔들어

댔다.

하지만 주정뱅이는 이미 취한 듯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다.

이걸은 마침내 그를 다시 내려놓았다.

탁자 위에 어지럽게 놓여진 술병과 술잔들은 보았기 때문이다.

섭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들의 태도는 너무 오만하여 전혀 정파의 제자라 볼 수 없군요."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구려. 어쩌면 풍운 진인의 인물됨이 전혀 정파의  그것이 아닌지도 모르겠소. 

수하를 보면 주인을 아는 법이니……"

나직이 말했지만 멀리서 일걸(一傑)이 보고 외쳤다.

"이봐, 거기! 뭘 떠드는 거야?"

섭수진이 다시 아미를 찡그렸다.

같은 구파(九派)의 제자라 하나, 그녀는 금정 신니의 직전  제자였으니 동심사걸과

는 배분이 달랐다.

그들은 공동의 삼대 제자이니 따지자면 섭수진에 비해 두 배분이나 아래에 있었는

데…… 섭수진이 노하여 외치려 할 때, 그녀의 귀로 진소백의 전음이 들렸다.

"잠깐 나에게 맡겨 주시겠소?"

무슨 숨은 뜻이 있겠거니, 섭수진은 화를 억눌렀다.

"아아, 우리 말이오?"

진소백이 일걸(一傑)을 보고 되물었다.

"그래! 너희가 수상하구나. 흥! 남자 놈에 비해 여자가 너무 예쁜 것도 이상하고…

…"

'이놈의 자식이! 넌 죽었다.' 

진소백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겉으로는 웃었다.

"의심 마시오. 우린 단지 유람차 지나가던 사람들인데 내  내자(內子)가 귀가 어두

워서 말이오."

"그래서 떠들었느냐?"

"그렇소. 주루가 시끄러운데 어디서 개가 짖느냐고 묻기에 큰일날 소리 말라고 대

답해 주었소."

개 짖는 소리란 말에 사걸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진소백의 귀에 섭수진의 전음이 들렸다.

"시비를 걸어서 허실을 알아 보려는 거예요?"

진소백이 크게 말했다.

"그렇소. 큰일날 소리는 처음부터 말아야  하오. 개는 사람을 물기도  하니 피하는 

것이 상책 아니겠소?"

사걸은 그제서야 진소백이 시비를 걸고 있음을 눈치채었다.

"크흐흐, 네놈이 감히 시비를 거는 게냐?"

그들이 흉흉한 눈으로 다가올 때, 진소백의 귓전에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 왔다.

"젊은이! 어쩌려고 그러나? 그놈들의  행동은 전혀 정파인의  것이 아니니 조심하

게."

굵고도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진소백이 눈에 이채(異彩)를 띠며 말했다.

"아니오. 다만 우리 내자가 시끄러운 걸 싫어하니 강아지 네 마리만 몰아 내면 그

뿐이오."

손마디를 우드득 꺾으며 말하는 품이,  뭔가 있어 보여 사걸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색 옷을 입은 대걸(大傑)이 막내인  삼걸(三傑)에게 조심스레 눈짓을 했

다.

"이 자식! 받아 보거라."

삼걸이 외치며 주먹을 뻗어 진소백의 가슴을  찔러 갔고, 진소백은 싸늘히 코웃음

쳤다.

대걸은 어쩐지 그의 웃음 소리를 듣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펑! 

가죽북이 터지는 소리가 나며 누군가의 신형이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더니 벽면에 

부딪혔다.

사람들은 눈을 부릅떴다.

뭔가 보여 줄 것 같았던 진소백이 일격에 격퇴당해 벽에 처박힌 채 기침만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콜록! 이럴 수가…… 이렇게 강하다니, 콜록!"

섭수진은 그의 모습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이 남자가 또 장난을 시작하는 것인가? 

"크흐흐, 허풍만 있는 놈이었구나. 크흐, 죽어 봐라."

대걸이 괴소하며 일장을 들어 진소백의 명문을 내리치려 할 때였다.

휘잉! 

돌연 바람이 일며 어디선가 술잔 두 개가 허공을 날아 대걸의 손목과 허리를 노리

지 않는가? "누가 암습하느냐?"

동심사걸이 동시에 외치며 술잔을 쳐갔지만 술잔은 믿을 수 없게도 허공에서 방향

을 바꾸며 여전히 대걸의 손목을 노렸다.

휘이잉! 

술잔의 회전은 마치 돌개바람 같았다.

허공에서 술잔이 회전했다.

대걸은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후방위를 밟아 가며 급히 외쳤다.

"도적이 나타났으니 어서 신호를 올려라."

그러나 남은 삼걸은 그럴 수 없었다.

다시 세 개의 회선풍(回旋風)이 그들을 공격하고 있었으므로, 피하는  것이 우선이

었다.

진소백은 술에 취해 뻗었던 주정뱅이의 품에서 동전 세 개가  허공을 가르며 회선

풍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았다.

'회풍전(回風錢) 풍호진(風浩眞)!' 

회풍전은 그의 동전 암기 이름이기도 했으며  별호이기도 했다. 정사 중간의 인물

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마음이 정대한 군자였다. 

 진소백은 알고 있었다. 

 그 또한 분면음마(扮面淫魔)의 제거에 일조했던 사람임을.

물론 사걸은 회풍전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문제는 그들이 신호를 울리면 오게 될 고수들이었다. 풍호진은 마음이 급했다.

이미 내상을 입어 지닌 무공을 십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어찌 세 개의 회풍전을 조종하는  것만으로 진기(眞氣)가 달림을 느끼겠

는가? 하지만 지금 풍호진은 삼걸을 향해 펼쳐진 회풍전 세 개를 동시에 조절함애

도 힘겨움을 느꼈다.

게다가 대걸(大傑)이 남아 있지 않은가? 

풍호진은 대걸이 품에서 호각(號角)을 꺼내 불려는 것을 보았다. 그의 마음이 급해

지며 회풍전이 어지러워졌다.

삼걸은 여유를 찾았다. 일단 여유를 찾자 검을  꺼낼 수 있어 한결 대항하기 수월

했다. 그들의 검이 회풍전을 힘차게 쳐냈다.

창! 창! 창! 

물론 이 소리는 풍호진이 위기에 빠졌음을 의미했다.

호각은 대걸의 입에 물렸다. 

 대걸은 힘차게 숨을 내쉬었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어느 틈에 진소백이 손바닥으로 호각을 막고 있었으므로.

뿐만 아니라 힘주어 안으로 밀어 넣자 호각이 이빨을 부수며  들어가 엄청난 고통

을 대걸에게 안겨 줬다.

하지만 대걸은 움직이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이미 아혈(啞穴)과 마혈(痲穴)이 동시에 제압되어 있었으니, 움직이고 싶어도, 비명

을 지르고 싶어도 결코 그럴 수 없었던 것이 

이 모습을 보고 놀라 입을 벌렸던 이걸과  삼걸 역시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들도 

등이 따끔거리며 전신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그들의 뒤로 섭수진의 모습이 드러났다.

남은 일걸 혼자서 풍호진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는 삼 초가 지나기 전에 제압되었다.

회풍전(回風錢) 풍호진은 놀란 눈으로 진소백과 섭수진을 바라보았다.

"자네들은 만용(蠻勇)을 부렸던 것이 아니로군!"

진소백은 동심사걸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어느 놈을 데려다 괴롭혀 줄까?"

그는 지금 공동의 풍운 진인에 대해 물을 사람을 하나 고르는 중이었다.

풍호진이 다급한 신색으로 말했다.

"그럴 시간이 없네. 곧 저들의 주력(主力)이 들이닥칠 것이네. 어서!"

그의 재촉에 진소백은 빨리 선택했다.

"요놈이 낫겠다. 차근차근 괴롭혀 주어야지."

진소백이 고른 자가 일걸임을 본 섭수진이 말했다.

"그보다는 대걸이 낫지 않아요? 아까 일장의 빚도 있으니."

그러나 진소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요놈이 아까 나와 소저가 어울리지  않는다 했으니 빚을 톡톡히 갚아 주

겠소."

그는 불현듯 대걸을 보았다.

"이놈도 용서할 수는 없지. 이렇게!"

말을 하며 그가 발로 허리를 걷어차자 대걸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자, 이제 갑시다. 풍 선배님도 어서."

풍호진은 진소백이 자신을 알아보자 놀랐지만 서둘러 뒤를 따라갔다.

바닥에 앉은 점소이는 목을 만져 보았다.

또 머리도 만져 보았다. 동심사걸이 쳐낸 회풍전 중의 하나가 그의 머리 백회혈에 

명중했던 것이다.

그는 다른 두 개의 동전이 돌로 된 벽에 그대로 박힌 것을 보며, 다시 한 번 머리

를 만져 보았다.

말짱했다.

사실 진소백이 심어 두었던 진기가 회풍전을 밀어 낸 것이었지만 점소이는 짐작조

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목이 붙어 있음을 감사하며 줄행랑치고 있었다.

'아이고 엄니, 나 살았어요!' 

한참 지난 후 네 명이 주루 안으로 들어왔다.

둘은 늙었고 둘은 젊었다. 

 둘은 키가 컸고 둘은 키가 작았다.

네 명이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키 큰  노소(老少)가 서로 닮았고, 키 작은 노소(老

少)도 서로 닮아 마치 부자지간 같았다.

그들은 화화루(和和樓)를 둘러보았다. 

 화화루의 실내는 지금 조금도 화기(和氣)스럽지 않았다. 곳곳에서 부서진 탁자 부

스러기가 보였고 바닥에는 세 명의 대한이 쓰러져 있었다.

동심사걸 중 일걸을 제외한 세 명이었다.

그 중 대걸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멍청한 놈들!"

키 크고 늙은 이가 냉소하며 손을 휘젓자 두 줄기 지풍(指風)이 허공을 격하고 대

걸의 마혈과 아혈을 풀었다.

그러자 별안간 대걸이 미친 듯이 웃어대는 것이 아닌가? "크하하하, 하하하`─`"

노장(老長)이 얼굴을 찡그리며 허공을 격해 손을 좌우로 휘둘렀다.

짜짝! 

직접 손이 닿지 않았는데도 대걸의 뺨이 빨개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래도 이놈이!"

노장이 다시 뺨을 치려 하자 작고 늙은 자가 나섰다.

"소혈(笑穴)을 짚혔나 보다. 잠깐!"

그가 말하자 노장이 물러서는 것으로 보아 오히려 노단(老短)의 신분이 더 높음을 

알 수 있었다.

노단은 대걸(大傑)을 유심히 보더니 갑자기 발을 들어 그의 가슴을 들이찼다.

대걸의 몸이 허공을 한 바퀴 돌더니 다시 땅으로 내려와 정신없이 피를 토했다.

비록 웃음은 멎었지만 지독한 해혈법(解穴法)이었다.

노단(老短)은 냉혹한 눈으로 대걸에게 물었다.

"풍가는 어디로 갔느냐?"

대걸은 다시 피를 토하며 동쪽으로 난 창문을 가리켰다.

"저, 저리로."

대답도 없이 네 명이 즉시 창문을 통해 동쪽으로 날아갔다.

대걸은 한숨을 쉬었다.

비록 가슴에 통증이 있고 조금씩 핏물이 올라왔지만 그에게 그  정도의 고통은 너

무나 상쾌했다.

고통이 상쾌하다는 건 이전에 비교가 안 되게 큰 고통을 겪었다는 의미.

소혈과 아혈이 동시에 짚혀 웃음이 나와도 웃지 못하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

람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대걸은 좀 전의 폐의청년의 손속이 이처럼 잔인(殘忍)할 줄 몰랐다.

"이놈의 자식, 다시 만나기만 하면……"

 그는 기어가 다른 두 동료의 혈도를 풀어 주며 이를 갈았다.

대걸의 귓가에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 온 것은 그때였다.

"누구를 가만 안 둔다는 거지?"

대걸은 가버린 줄 알았던 진소백과 풍호진 등이 주방에서 나오자  기절할 듯 놀랐

다.

"아, 아직 안 갔느냐?"

진소백이 눈을 부라렸다.

"반말…… 이라는 건가? 아직 혼이 덜 났다는 말이구나."

대걸은 입이 떨렸다.

"아, 아니, 아직 안 가셨습니…… 까?"

그제서야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하는 게냐? 네놈들 때문에 주루의 점원이 모두 도망갔으니  어서 술과 안주를 

날라 오너라."

대걸은 최면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만큼 좀 전의 고통은 무서웠다. 

 일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진소백이 대걸의 혈도를 짚는 것을 보았다.

몸을 부들부들 떨었던 것으로 보아 극심한 고통을 당했음도 짐작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대걸이 저처럼 진소백의 말을 잘 들을까? 

일걸은 무서웠다. 고통은 막상 직접 당할 때보다  당하기 전 기다릴 때가 더 무서

운 것이기에.

"그러니까 네놈이 우리 둘이 어울리지 않는다 했느냐?"

일걸은 대답이 없었다. 아혈까지 봉쇄되어 있으니 당연한 일! 그러나  진소백은 그

걸 모르는 듯 인상을 썼다.

"오호, 감히 이 공자의 질문에 대답하기조차 싫다는 게로구나. 요놈의 자식!"

진소백은 일걸의 소혈(笑穴)을 눌렀다.

'빌어먹을! 아혈을 풀어 줘야 말을 하지.' 

속으로 백번 천번 외쳐 대던 일걸은 좀 전에 대걸이 당했던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

다.

예상보다 훨씬 심한 고통이었다. 

 그는 욕할 시간도 없었다.

하나에만 충실하기에도 벅찬 고통이었다.

"술은 아직이냐?"

진소백이 외치자 대걸이 급히 달려왔다.

이미 진소백이 기해혈(氣海穴) 주위를 봉쇄하여 내공을 끌어올릴 수  없으니, 도망

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공자님, 우선 이것이라도……"

그가 비굴하게 웃으며 두 병의 술을 내밀자 진소백은 향내를 맡아 보며 말했다.

"좋아, 좋구나. 술값은 두고 가져 왔겠지?"

대걸이 급히 품에서 돈을 꺼내었다.

"헤헤! 제가 깜박했습니다."

 말하던 그가 일걸을 보았다. 떨고 있는 일걸을 보며 대걸의 등으로 한 줄기 오한

이 스쳐 갔다.

'에구, 불쌍한 놈!' 

진소백이 노하여 외쳤다.

"이 자식아, 안주는 왜 안 나오는 것이냐?"

대걸이 다시 주방으로 달려갔다. 

 뭉그적거리다 다시 일걸처럼 당하면 어떡해! 

 "자, 이제 천천히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풍 선배!"

풍호진은 이 청년에게 감탄했다.

적절한 손속으로 단숨에 동심사걸을 굴복시키다니.

그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 젊은이들이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누구에게든 기대야 했다. 몸의 내상이 

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청년의 능력으로 보아 반드시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이야기는 다시 옥산의 한 목옥으로 옮겨 간다.

작은 오솔길! 

엽혼은 비록 두 번째 오는 길이었지만 눈에 익었다.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침나절부터 그는 나무 위에 올라 갈등하고 있었다.

이미 오후의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으니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그로서는 엄청

나게 중요한 시간을 보낸 셈이었다.

소화(小花)가 밖으로 한번 나오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엽혼은 마침내 들어가 보기로 작정했다.

"계시오?"

자신의 목소리가 떨려 나올 때도 있음을 엽혼은 처음으로 알았 잠시 후 대답도 없

이 문이 열렸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소화가 아니었다.

사냥꾼 차림의 중년인! 

"뉘시오?"

"소화…… 낭자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녀의 친구입니다. 사냥 가셨다던 그녀

의 부친이십니까?"

사냥꾼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문을 열었다.

"들어오구려. 그녀는 조금 전  잠깐 볼일이 있어 나갔으니,  곧 돌아올 것이오. 난 

그애의 아비라오."

사냥꾼은 차를 내왔다.

엽혼은 일전에 소화가 약을 가져 왔던 때를 기억했다.

약은 매우 썼지만 엽혼은 조금도 쓴맛을 느끼지 못했었다.

지금의 차도 향긋하면서 매우 썼지만 엽혼은 다만 향긋함만을 느꼈다.

향기는 코로 들어오고 맛은 혀에서 느끼는 까닭이었다.

차를 마시려다 말고 다시 내려놓는  엽혼을 보고 사냥꾼이 물었 "왜  마시지 않는 

건가? 남자가 타주는 차라 싫은가?"

엽혼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혼잣말처럼 조용히 말했을 뿐이다.

"난 요즘 참을성이 없어졌소."

사냥꾼의 손이 흠칫했다.

"무슨 말인가, 갑자기?"

"내 말이 끝날 때까지 소화가 어디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오른팔을 포기

하는 것으로 알아듣겠소."

사냥꾼이 다시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급히 몸을 아래로 낮추었다.

엽혼의 구절검(九節劍)이 어느새 그의 오른쪽 어깨 위를 찔러 왔기 때문이었다.

상상하기 힘든 빠른 속도였지만 사냥꾼은 가까스로 피해 내고 소리 높여 외쳤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미쳤는가? 난 소화의 아비일세."

그러나 엽혼은 싸늘히 말하며 구절검을 회전시켰다.

"흥, 사냥꾼이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종이 한 장 차이로 검을 피

할 수 있을 만큼?"

원래 처음의 일초는 사냥꾼이 무공을 지녔는지를  시험해 보기 위한 허초(虛招)였

다.

사냥꾼은 일부러 겨우 피한 듯 보이게 종이  한 장 차이로 어깨를 내렸지만, 그것

이 오히려 엽혼의 의심을 부추겼다.

구절검이 공기를 가르며 이번에는 실초(實招)로써 사냥꾼의 어깨를 노렸다.

사냥꾼은 어쩔 수 없이 허리를 비틀며 구절검을 피했다.

이번의 동작은 좀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빨랐지만 그는 어깨에 길게 검

상(劍傷)을 입음을 피할 수 없었다.

사냥꾼과 엽혼의 눈에 둘 다 놀라움이 떠올랐다.

"이렇게 강하다니, 네놈은 어떻게 알았느냐?"

엽혼이 냉소하며 다시 구절검을 휘둘렀다.

"사냥꾼의 몸에서 어찌 노린내가 나지 않을 수 있느냐? 어서  소화의 행방을 말하

라."

구절검이 빛을 뿌리며 사방을 휘감았다.

어부의 몸에서 비린내가 나고 사냥꾼의 손에서는 짐승의 노린내가 나는 것은 당연

한 이치였다.

그러나 엽혼이 눈치를 챌 수 있었던 단서는, 그보다는 사냥꾼이 무심결에 했던 변

명이었다.

'소화는 조금 전 나갔네.' 

엽혼은 아침부터 문 앞에 있었다.

어찌 소화가 좀 전에 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사냥꾼이 악을 썼다.

"네놈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외치며 구절검의 검세에 뛰어들었다.

엽혼이 급히 검을 회수했지만 이미 구절검의  검첨(劍尖)이 사냥꾼의 가슴을 찌른 

뒤였다.

사냥꾼의 입술이 겨우 열렸다.

"후후, 결코 알 수 없을 게다. 우욱!"

사냥꾼의 신형이 바닥에 쓰러질 때 엽혼의 눈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소화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도대체 이런 강호의 인물들과 소화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혹시 흑회가 자신

을 추적하는 와중에 소화가 걸려든 걸까?  하지만 옥산(玉山)에는 이미 흑회가 없

다.

존령이 달아났고, 천령은 남아 있다지만 비응방과의 전쟁에서 자신의 종적까지 쫓

을 여유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일은 소화를 찾는 것이었다.

사냥꾼이 죽으면서 단서는 끊어졌지만 여전히 작은 희망이 있었다.

만일 소화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면 사냥꾼이 여기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피할 시간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에 비밀 장소라도 있는 것인가?"

엽혼은 기관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원리가 하나 있었다. 비밀  장소의 문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 두

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을 곳이어야 했다.

엽혼은 자신이 옛날 청부 자료를 숨겼던 곳을 기억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엽혼은 서둘고 있었다. 한 번도 이성을  느끼지 못했던 청년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낯선 감정! 만일 서둘지 않았다면 바닥에 누운 가짜 사냥꾼의 손이 꿈틀거리는 것

을 보았을 것이다.

하나 엽혼은 그 모습을 놓쳤다.

 * * * 

끼이익! 

문이 열렸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비밀 장소의 출입구는 엽혼이 짐작한 곳 근처에 있었다. 주방의 난로를 치우자 작

은 사각의 문이 드러났던 것이다.

통로는 갈수록 넓어져, 처음엔 겨우 들어설 수 있을 정도이던 것이,  이젠 보통 때

처럼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넓어졌다.

사방의 벽이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져 기이했다.

통로는 길었다.

이런 길을 만드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길이 소화의 집 아래에 있을까?' 

그녀도 설마 무림에 속해 있을까? 

생각하기도 싫었다. 

 산속에서 자신을 구해 준 것이 우연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는  자신을 쫓던 천령 

일호가 다른 신호를 듣고 달려갔던 일을 기억했다.

'설마 그때 다른 자가 나타났던 것이 운이 아니었다는 말일까?' 엽혼의 손에 땀이 

났다.

그는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기 싫었다.

어쩌면 그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두 번 다시 소화를 보려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앞에 밝은 곳이 보였다.

물론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밝다는 것이지 환한 빛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엽혼은 어둠을 뚫고 두 명이 쇠사슬에 묶여 있음을 분명히 보았다.

그 중 한 명은 분명히 소화였다.

다른 한 명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엽혼은 주먹을 더욱 굳게 쥐었다.

그의 손에 고인 땀이 물처럼 바닥으로 흘렀다.

이윽고 다른 한 사람이 얼굴을 들었다.

우둑! 

더욱 굳게 쥔 엽혼의 손바닥을 손톱이 파고들었다.

엽혼의 머리가 하얗게 비어 갔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다만 정신없이 속으로 외쳤을 뿐이었다.

'나는…… 나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 * * 

진소백은 풍호진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공동의 숨겨진 비밀을 알려 주었다.

"오 년 전 난 풍운 진인으로부터 급한 일이 생겼으니  급히 와달라는 전갈을 받았

다네."

오 년 전이라면 신주낭객도 급한 일로 공동파를 향했던 때가 아닌가? 도중에 사건

을 만나 흑회에 갇히기는 했으나…… 

생각이 이에 미친 진소백이 물었다.

"혹시 신주낭객 또한…… 연락을 받았던 것이 아닙니까?"

풍호진이 놀라며 대답했다.

"어찌 알았는가? 틀림없이 그도 연락을 받았을 것이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풍운 진인이 두 분에게만 연락을 취한……"

풍호진이 잠시 망설이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세간에 알려지지는 않았네만, 우리 셋은 형제의 연을 맺었었다네."

왜 이런 말을 신주낭객은 하지 않았을까? 

 진소백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풍운 진인은 정파의 장문인이니 명성에 누가 될까 신주낭객이 조심했던 것이다. "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급히 달려간 나는 의외의 상황에 직면했다네. 용고(鏞姑)가  서슬이 퍼래져서 나

를 기다리고 있었네."

용고라면 풍운 진인이 오 년 전 결혼했다는 새부인이었다. 적염 또한 그녀가 데려

온 전 남편의 자식이라 했다.

엄청난 반대를 물리치고 기어이 자식이  있는 여인과 결혼한 적일수는  자신의 성

(姓)마저 물려주며, 그들 모녀에게 

최선을 다했었다.

"그녀의 말은 풍운 진인이 누군가에게 암습을 당했다는 것이었네. 그리고 풍운 진

인이 정신을 

잃으며 나를 범인으로 지목했다는 것이었네. 난 어이가 없었지."

풍호진은 어이가 없었지만 반항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형수였고, 의형의  공동파에서 소란을 피울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오해야 곧 풀리겠지, 하고 순순히 잡힌 풍호진은 곧 자신의 생각이 안일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난 바로 지하의 감옥으로 끌려갔네. 의형은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심문(審問)조차 

없었네. 감옥에서 시간이 지나자 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네."

그는 용고가 외인과 내통하여 적일수를 사경(死境)에 몰아넣고 광성옥패(廣成玉牌)

를 찾아 공동파를 

완전히 손에 쥐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미 많은 수의 공동  제자들이 용고의 수중에  들어갔고, 공동파에서 축출당했던 

자들이 다시 공동으로 돌아와 

실권을 장악했다는 사실도.

가장 놀라운 사실은 지금 강호에서 활동하는 풍운 진인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었

다.

진짜 풍운 진인은 사태를 눈치채고서 의형제들에게 연락을 취했다가  어디론가 유

배되었다. 이로써 진소백은 확실히 알았다.

왜 최근 공동( )의 강호 활동이 그처럼 뜸했었는지. 또한 어떻게 풍운 진인이 흑회

의 천령이 될 수 있었는지.

용고(鏞姑)! 

그녀도 흑회의 인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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