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21 장 화광충천(火光沖天) (22/32)

제 21 장 화광충천(火光沖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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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의 밤은 깊었다.

만물이 잠들고 모두가 조용했지만 여기 사성곡(四聲谷)만은 달랐다.

백여 명이 내지르는 고함 소리가 곡구(谷口)에서  회성(回聲)되어 들려 오며, 흡사 

수천 수만의 군사가 부르짖는 착각을 낳게 했다.

비응방의 백여 무사들이 흑회의 총단을 기습하고 있었다.

"우와와!"

함성(喊聲)은 왜 지르는 걸까? 

 혹, 적에게 겁을 주기보다는 자신의 무서움을 떨어버리려고 지르는 것은 아닐까? 

사성곡은 외곡(外谷)과 내곡(內谷)으로 되어 있었다.

외곡은 현령과 황령이 맡았고, 내곡엔 존령, 지령, 화령이 거(居)했다.

화령이었던 진짜 화선과 지령이었던 고숭무가 죽었으니, 지금 내곡에는 존령과 그 

수하들만 있었다.

천령은 사성곡에 살지 않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진소백과 섭수진은 신주낭객을 구하기  위해 외곡까지 들어왔었고, 그때는 

마침 내곡에 아무도 없었다.

외곡엔 현, 황의 이 령이 있어 위기도 있었지만 진소백은 어렵지 않게 신주낭객을 

구할 수 있었다.

엽혼은 내곡(內谷)에까지 들어갔었다.

그는 화령을 고문하여 흑회의 비밀을 알아 내었으며 나올 때도 들키지 않았다.

하나 엽혼의 잠입술이 진소백에 비해 월등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건 아니다. 엽혼

은 혼자 들어갔다가 혼자  나왔지만, 진소백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신주낭객을 

구출하여 왔으며 그가 달아날 시간을 벌어 주어야 했던 것이다.

어쨌든 지금 비응방이 공격하는 것은 외곡이었다.

단숨에 외곡을 돌파하고 그 기세를 몰아 내곡마저 공격하는 것이 독소명의 계략이

었다.

기습 공격에 놀란 흑회가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이 되면 후발대가  다른 방면에서 

공격해 올 것이다.

독소명(獨蘇冥)은 자신의 계획에 자신이 있었다.

전열(戰列)의 가장 앞에서 달려가는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이 사공두였다.

그는 전투에 임해서 결코 겁을 먹거나 꽁무니를 빼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항상 싸움에서 능력 이상을 발휘하는 비결이었다.

먼저 앞으로 돌격한 것은 사공두가 이끄는  검대(劍隊)와 도대(刀隊), 그리고 창대

(槍隊)였다.

그러나 흑회의 외곡 건물을 가장 먼저 공격한 것은 이들이 아니었다.

슈우`─`욱! 

휘파람 소리 같은 소성(簫聲)을 꼬리에 달고  암천을 가른 철시대(鐵矢隊)의 화살! 

꼬리에 화탄(火彈)을 매단 화살들이 검, 도,  창의 삼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흑회의 

건물들을 때리며 폭발(爆發)했다.

꽈`─ 꽝! 

흑회의 건물들이 삽시간에 터져 나가며 불길에 휩싸였다.

넘실대는 화마(火魔)의 혓바닥 사이를 뚫고 사공두의 삼대가 도착했다.

"불길을 피해 나오는 적을 하나도 남기지 말아라."

적들은 새벽에 기습 공격을 받았으니 아직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정신없이 이어진 화탄의 공격과 불이라면 어지간한 사람이라도, 다만 불길

을 피하기에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아무도 나오지 않습니다."

검대(劍隊)의 대장(隊長)을 맡은 안검(安劍)이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고개를 갸웃

거리며 말했다.

사공두도 이미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건물이 불에 타는데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당연히 사람이  없다는 소리였

다.

기습적인 방화(防火)였음에도 흑회가  이미 피해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아무리 머리 회전이 느린 사공두였지만 기습에 대한 정보가  어디선가 샜다는 

의미임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곡을 따라 난 좁은 길 사이로 보이는 사성곡의 내곡(內谷)을 쳐다보았다.

흑회의 인원은 저곳에 모여 있을까? 

만일 내곡에 모여 비응방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만반의 준비 또한  갖추었을 것이

다.

어느 면으로 보나 기습이 실패했다면 물러나 다른 기회를 노리는 것이 정석(定石)

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사공두의 기질(氣質)은 달랐다.

'후퇴라니…… 있을 수 없다!' 

생각은 빨랐고 행동은 더 빨랐다.

"목표는 내곡(內谷)이다. 가장 빠른 경공으로 단숨에 돌파한다."

그의 손이 두 번 허공을 감았다가 내곡을 향해 내려졌다.

신호를 알아들은 삼대의 대장(隊長)들은 각각 명령을 내렸고, 삼대 칠십오 명의 무

사들은 내곡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어쩌면 이것은 부나방 같은 행동일지도 모른다.

이런 일은 사공두(司空斗)이기에 가능했다.

그는 임무를 부여받으면 다만 그 자체(自體)에 충실할 뿐, 다른 생각은 할 줄 몰랐

다.

칠십오 명 무사들의 모습은 썰물과 같았다.

불빛에 반사된 그 썰물은 붉고 또한 검었다.

가장 앞서 달리는 사공두의 손에서 신호전(信號箭) 하나가 하늘로 올랐다.

신호전은 십 장 상공에서 터지며 화려한 오색을 수놓아 독소명에게 사공두의 뜻을 

전해 주었다.

'내곡을 공격하오. 화탄을 쏘아 주시오.' 

신호전이 전하는 말이었다.

독소명은 사공두와 지금 사십 장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내곡(內谷)과의 거리는 이백사십여 장! 

화탄을 실은 철시(鐵矢)가 미치지 못할 거리임은 당연했다.

"이런 미친!"

신호탄에 담긴 사공두의 뜻을 이해한 독소명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철시의 최대 거리는 기껏해야 백여 장.

하지만 이미 최고 속도로 내곡을 향해 달려가는 사공두와 칠십오  명이의 삼대 무

사들이 보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독소명은 급히 철시대(鐵矢隊)에 신호를 보냈다.

"지급(至急)! 전속으로 달려가 삼대(三隊)를 엄호(掩護)한다."

하나 철궁(鐵弓)은 무거웠다. 

 그들은 삼대의 무사들처럼 빨리 달릴 수 없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하더라도, 무거운  병기를 많이 든  철시대의 기동력이 떨어짐은 

당연지사(當然之事)였다.

사공두는 이런 점을 잊었단 말일까? 

그의 급한 성격은 어쩌면 전비응방의 무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었다.

한 명의 실수로 엄청난 인원에게 닥쳐 오는 재앙을, 그는 왜 모르는 것일까? 사공

두는 진정 백회(白會)의 인물인가? 

그렇다면 백회의 목적은 오로지 흑회를 없앰에  있으니, 급한 마음에 앞뒤 가리지 

못하고 달려들었다는 가정이 가장 설득력(說得力)을 가졌다.

어쨌든 사공두의 뒤를 따라 독소명이 이끄는 철시대마저 사성곡으로 들어갔고, 이

로써 비응방의 백여 무사들은 모두 사성곡으로 들어갔다.

독소명은 어지간히 마음이 급했었나 보다.

"나는 먼저 가서 사공 당주를 돕겠다. 철시대의 지휘는 네가 다시 맡아라."

철시대(鐵矢隊)의 대장(隊長)으로 임명된 두철심(斗鐵心)에게 이렇게 외치고,  독소

명은 최대한의 경공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쑤앙! 

그가 최선을 다하자 신형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었다.

독소명은 비응방의 선발대 최고고수였다.

사공두보다도 강했다.

평소의 사공두보다도. 

 사성곡(四聲谷)은 사방이 산으로 막혀 소리가 울린다는  뜻! 들어가는 길도, 나오

는 길도 곡구의 좁은 길밖에 없으니, 이것이 병가(兵家)에서 극구 피하는 진퇴양난

(進退兩難)의 지세(地勢)임을 비응방 무사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비응방 무사들이 모두 사라진 곡의 입구, 아니, 주위의 넓디넓은 구역에 걸쳐 소리

없는 움직임이 있었다.

아무도 없던 것처럼 보이던 풀숲 사이, 바위 아래, 나뭇등걸 등에서  검은 옷에 검

은 복면을 한 무사들이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나타난 무사들은 곧 일정한 격식을 지니고 도열(堵列)하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신호도 없었지만 익숙하게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그들은 바로 흑회

(黑會)의 무사들! 

소리도 없이 사공두와 비응방 무사들은 포위(包圍)되고 있었다.

시각은 이제 오경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심화절과 비응방의 후발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심화절의 내상 때문에 지체(遲滯)했다.

잠시의 지체는 싸움의 양상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싸움의 승패(勝敗)가 갈리는 순간은 바늘 틈 하나보다도 작은, 아주 짧은 시간으로

도 족한 것이다.

사공두의 삼대가 내곡에 거의 달했을 때, 철시대는 겨우 외곡(外谷)을 지나 이십여 

장을 전진(前進)했을 뿐이다.

아직 내곡(內谷)은 사정 거리 밖이었으므로 철시를 쏠 수는 없었다.

앞서갔던 독소명조차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두철심은 다만 수하들을 독려하며 최고의 속력으로 전진하기를 다그칠 뿐이었다.

"어서 움직여라. 하지만 아직은 사정 거리 밖이니 결코  철시(鐵矢)를 쏘아서는 안 

된다. 여기서 쏘면 아군(我軍)이 다친다. 어서 움직여라."

그러나 거대한 쇠 덩어리인 철궁(鐵弓)이  쉽게 움직이겠는가? 마음만 초조할  때, 

두철심은 불현듯 뒤에서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

철시가 허공을 가르는, 귀에 익은 소리! 

"어느 놈의 자식이 내 허락도 없이 철시를……"

눈썹을 역 팔 자로 올리며 몸을 돌린 두철심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허공 가득, 철시가 비처럼 쏟아져 왔다.

좀 전의 소성(簫聲)이 비응방의 철시와 달랐음을  그제서야 깨달은 두철심의 눈에 

절망이 서렸다.

허공을 덮은 철시의 비! 

'피할 곳이 없다.' 

오히려 앞서간 삼대가 유리했다.

그들은 철시의 공격 거리 밖에 있으니까.

두철심은 이를 악물고 품에서 신호전을 꺼내 하늘로 올렸다.

사력을 다해 던진 신호전(信號箭)은 평소보다 삼사 장 높은 곳에서 터졌다.

자신은 어차피 살아남을 수 없지만 다른 비응방의 방도들에게 흑회가 기습을 알고 

있음을 알려야 했다.

노란색과 붉은색이 어울린 신호탄은  '위기'를 뜻하고 있었다. 신호탄이  허공으로 

오름과 얼마의 시차를 두지 않고, 꽈`─ 꽈`─ 꽝! 

땅이 흔들렸다.

새벽이 환하게 밝아지도록 많은 양의 화탄(火彈)이 동시에 폭발했다.

본래 철시대는 화약(火藥)을 가득 싣고 다녔다. 

 적을 공격할 그 화약이 공격을 받자 오히려 아군을 해쳤다.

흑회의 철시에 붙은 화탄과 비응방의 화탄이  합쳐져 폭발의 힘은 배가(倍加)되었

고, 철시대(鐵矢隊)는 아비규환 

속에서 시체조차 남기기 힘든 폭발에 휘말렸다.

살가죽이 하늘로 날고,  튀어오른 핏줄기는 화염  속에서 어느새 증기(蒸氣)로  화

(化)했다.

뼛조각 하나 온전히 남기기 힘들었다.

동쪽으로 난 창문이 서서히 밝아 오기 시작했다.

엽혼이 들어왔을 때가 오경 무렵, 다시 말해 인시였으니 줄잡아도 두 시진이 지났

다.

조삼은 취했다.

그는 안심하고 있었다.

음모의 완성 시점에서 긴장이 풀린 걸까? 

항상 결말 일보 직전에 음모가 무너지는  일이 많음은 호사가(好事家)들의 말장난

만은 아니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음모를 만들고 그것을 진행하는 주체(主體)가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음모의 진행은 끊임없는 긴장과 주의를 필요로 한다. 실패는 곧 모든 것을 잃음을 

의미하므로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된다.

그러다가 완성을 눈앞에 두게 되면 모든 긴장(緊張)이 풀어지고 방심(放心)하게 된

다.

방심은 필연적으로 실수를 낳는다.

궁지에 몰려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게 된 희생자는 그  실수에서 역전의 길

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음모는 실패로 끝이 나는 것이다.

지금 조삼은 이러한 과정을 그대로 밟고 있었다.

심화절이 조삼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심화절은 조삼을 써서 처음에는 성공했지만 지금은 거의 실패했다고 할 수 

있었다.

엽혼의 손을 묶은 쇠줄을 그는 너무 과신했다. 

 마음놓고 술을 마시기엔, 엽혼은 너무 위험한 인물이었다.

조삼이 술에 취해 깜박 잠이 든 순간,  엽혼의 몸에서 뼈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

려 왔다.

쇠줄은 튼튼했다.

엽혼의 능력(能力)을 충분히 감안해 만든 쇠줄을 끊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팔목과 발목을 힘껏 

죄고 있어 빼낼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엽혼의 손발이 어린아이처럼 가늘다면 빠져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엽혼은 어린애가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하지만 마음은 비록 어린애로 돌아갈 수 없더라도 몸만은 어린애와  같아질 수 있

었다.

우둑! 우두둑! 

엽혼의 몸 곳곳에서 소리가 일며 그의 몸이 어린애 크기로 줄어들었다.

축골공(縮骨功)! 

이 신묘한 기공에는 약점이 있었다.

시전하고 있는 동안은 지닌 무공을 채 반도 발휘(發揮)하기 어렵다는 것! 몸의  관

절과 혈관이 다른 형태로 이동한 상태에서 진기의 흐름이 평소와  다르게 되니 당

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만일 조삼이 잠들지 않았다면  엽혼은 축골공을 시전해 쇠줄을  빠져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삼은 잠들었고 엽혼은 탈출했다.

이제 입장이 바뀌어, 잠든 조삼의 목숨은 엽혼의 손에 있었다.

'어떡하나……?' 

엽혼은 망설였다. 지금 일격을 가한다면 조삼의 목숨을 뺏는  것은 여반장(如返掌)

이었다.

그러나 조삼을 죽일 수는 없다. 그는 살아남아 중요한 증인이 되어야 했다.

엽혼의 망설임은 조삼을 제압하여 데리고  탈출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두고 갈 

것인지였다.

최선은 데리고 탈출하는 것이나, 만일 한 명을 등에 업는다면 행동의 제약이 너무 

컸다.

그러나 엽혼의 망설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상한 낌새를 챈 걸까? 

갑자기 조삼이 눈을 뜨며 일장(一掌)을 가해 왔다.

"이런, 이게 어떻게……?"

조삼은 놀란 상태에서 일장을 날렸지만 창졸간에도  힘이 있어, 엽혼은 그를 제압

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것임을 한눈에 알았 

망설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엽혼은 급한 순간에 결론을 빨리 내리지 못했던 자신을 책망하며 오른손을 좌우로 

휘둘러 조삼의 장력(掌力)을 막았다.

엽혼의 손에는 어느새 구절검이 완전한 모습을 갖춘 채 들려 있었다.

"우욱!"

조삼이 자신이 내밀었던 우장(右掌)이 검세에 싸여 살갗이 터지려 함을 알고 급히 

뒤로 물러설 때, 

차`─`앙! 

엽혼의 신형 또한 뒤로 물러나 창문을 뚫고 사라졌다.

"쫓아라!"

깨진 창을 통해 엽혼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조삼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좌우에서 십여 명의 인영이 솟아올라 엽혼을 추격해 갔지만, 그 속도는 엽혼에 비

해 턱없이 느렸다.

조삼은 알 수 있었다.

엽혼을 잡는 일이 불가능함을! 

그는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에 세 군데의 찰과상을 입어 피가 흘러나왔다.

"엽혼의 무공이 우리의 판단보다 이렇게 높을 줄이야……"

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엽혼을 놓친 그의 얼굴은 의외로 담담(淡淡)하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

었다.

조삼의 등뒤로 흰 옷에 흰 복면을 한 인영이 하나 내려섰다.

인영은 왜소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극히 탁하여 일부러 가성(假聲)을 냄을 짐작케 했다.

"상처를 입었습니까, 오라버니?"

오라버니라니? 여인인가? 

조삼이 차갑게 말했다.

"대형이라 불러라. 난 그분이 내게 주신 이름으로 불리길 원한다."

"알겠습니다, 대형!"

"엽혼의 무공은 분석했던 것보다 높았다. 어찌 된 일이냐?"

"비응방에서 그가 정신을 차리도록 하고자 격잠지술(激潛之術)을 사용했습니다."

조삼의 눈에 기광(奇光)이 어렸다.

"격잠술? 잠력(潛力)으로 움직이다니…… 비응방에 그처럼 높은 의술을 지닌 의원

이 있었던가?"

"그 점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잠력을 저렇게 사용한다면 그의 생명도 며칠 남지 않았겠군!"

백의복면인이 침묵했다.

조삼이 그를 한참 보더니 말했다.

"설마 그에게 애정을 느끼는 게냐?"

"……"

조삼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너는 항상 우리 남매의 목숨을 구해 주신 그분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백의복면인이 몸을 떨며 허리를 숙였다.

"하시(何時)라도 잊지 않습니다."

조삼이 다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모두 했다. 그저 막내의 일이 걱정이로구나."

조삼을 쳐다보는 백의복면인의 눈이 떨렸다.

"대형께선 항상 형제들의 걱정만 하시고, 자신은 조금도 돌보시지 않는군요!"

조삼이 미미하게 웃었다.

"너는 내가 왜 이름을 조삼(曹三)이라 지었는지 잊었느냐?"

"그분이 대형(大兄)이시니 어떻게 한 단계만 차이날  수 있겠느냐며 두 계단을 낮

추어 스스로 삼(三)이라 이름 지으셨었죠."

조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와 내가 비록 대형과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그분의 은혜를 갚지 않을 

수 있겠느냐?"

조삼은 머리를 들어 뿌옇게 밝아 오는 동천을 보았다.

머릿속에 자신이 대형(大兄)이란 이름을 물려받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름을 물려주시면서 그분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조삼은 다시 한 번 다짐했다.

한 목숨 바쳐서라도 그분이 남긴 뜻을 이루리라고!  '우리 형제 모두의 목숨을 바

쳐서라도.' 

 * * * 

금청청과 매일도는 새벽에 돌아왔다.

진소백과 섭수진은 한숨도 자지 않고 그들을 맞이했다.

생각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심화절이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그의 행동은 완벽했다. 

고숭무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으며 흑회를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

다.

무슨 증거로 그가 음모자임을 의심할 것인가? 

"가셨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진소백이 매일도에게 물었다.

매일도가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찰 하나를 내밀었다.

"진 형이 말씀하셨던 분을 뵙기는 하였지만, 머리에 큰 갓을 쓰신 탓에 얼굴도 뵙

지 못했소. 그분은 도대체 누구시오?"

진소백은 서찰(書札)을 펴며 웃었다.

"나와 가장 가까운 분! 사부님이시라오."

"아!"

매일도와 금청청이 일제히 탄성을 발했다. 

 그들이 자신들이 만났던 기인(奇人)을 다시 한 번 떠올릴 때,  섭수진은 그보다는 

진소백이 읽는 서찰의 내용에 관심이 갔다.

그녀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진소백은 아예 서찰을 통째로  그녀에게 넘겨주

었다.

"자, 한번 보시오."

섭수진이 겸연쩍게 웃으며 서찰을 읽었다.

서찰에는 단지 강호 인물들의 명호만이 가득 적혀 있을 뿐이었  자신의 사부인 금

정(金頂) 신니(神尼)의 이름도 있음을 본 섭수진은 진소백에게 물었다.

"이 명단(名單)은……?"

"지난날 직, 간접적(直間接的)으로 분면음마(扮面淫魔)를 제거하기 위해 나섰던 강

호고수들의 이름이오."

섭수진은 의아했다.

"제 사부님도 그때 계셨나요?"

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면음마가 감히…… 손을 대었던 아미파의 제자는 바로 금정 신니가 수련(修鍊) 

시절 같은 방을 쓰시던 분이셨소. 그분은 수치(羞恥)를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고 말

았소."

섭수진은 그제서야 왜 자신의 사부가 그토록 남자를 싫어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마지막에 분면음마가 금포승(金捕繩)에 사로잡힌 후  초의(草衣) 선사(禪師)의 만

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을 벤 아미의 여걸(女傑)이 바로 금정 신니셨소."

"그랬군요. 그래서 그토록……"

섭수진은 의문이 생겼다.

자신은 모르는 전대(前代)의 일을, 어떻게 진소백은 상세하게  아는 것일까? "혹시 

진 공자의 사부님께서도 여기 적힌 명단에 계신 분 중 한 분이세요?"

그러나 진소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웃으며  고개를 매일도 등에게로 돌려 물

었다.

"매(梅) 형! 혹시 사부님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소?"

매일도는 생각에 잠겼다가 진소백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있었소. 글로 전하기 어려우니  말로 전하라 하셨소…… 뜻  모를 말씀이셨는

데, '그의 뒤에는 

그들이 있다' 분명 그리 전하라 하셨소."

─`그의 뒤에는 그들이 있다.

무슨 말인가? 누가 있다는 말일까? 

하지만 진소백은 알아듣는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중얼거렸다.

"있었군. 그들이 있었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다.

진소백의 얼굴이 너무 굳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일도는 결코 호기심을 참지 못하여 예의를 잊어버리는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진 형! 어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해주시오."

진소백이 설명을 시작하려는 순간, 개방 사천지부를 책임지는 광풍개 사종쾌(司綜

快)가 보낸 전갈이 있었다.

백의개(白衣 ) 구정(邱精)이 가져 온 전갈이었다.

"엽혼이란 사람이 진 공자님을 찾아왔습니다."

진소백은 당연히 '어서 안으로 들어오게 하라'고 했다.

하지만 금청청의 표정은 굳어 갔다.

그녀와 엽혼의 관계는 미묘했다.

 화약의 폭발이 일으킨 폭풍(暴風)이 한차례 옥산 사성곡의 외곡(外谷)을  훑고 지

난 뒤, 흑회의 고수들이 나타났다.

잠복해 있다가 화탄으로 비응방의 철시대를 한 번에 전멸시킨 천령 휘하의 일호와 

이호! 그들은 내곡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내곡에서도 치열한 싸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시대가 전멸한 지금, 화탄의 엄호를 받지 못하는  사공두의 삼대(三隊)는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밀려 외곡으로 후퇴한다면 곧 흑회의 화탄 공격을  받게 될 것이

다. 일호는 손을 들어 수하들을 정해진 위치로 전개시켰다.

검은 그림자들이 부챗살처럼 퍼지며 내곡으로 통하는 좁은 길을 봉쇄(封鎖)했다.

사공두도 폭발 소리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외곡에서 일어난 폭발은 결코 자신들의 철시대(鐵矢隊)가 일으킨 것이 될 수 없었

다.

순간적으로 그는 두철심이 터뜨린 신호탄을 보았다.

비록 곧 폭발에 묻히기는 했지만 두철심이 마지막으로 전한 '위기(危機)'의 신호는 

비응방 전무사들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어쩌면 두철심 같은 사람들이 진정한 충신이리라.

"당주님……"

검대(劍隊)의 대장 안검(安劍)이 넋을 잃고 사공두를 보았다.

사공두는 이를 악물었다.

"적들이 우리의 기습을 역이용했다면 어차피 외곡 쪽도 이미 포위되었을 게다. 전

진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비록 사공두 자신의 성미에 맞는 결론을 내린 것이지만 사실  지금으로선 이 방법

밖에 없었다.

후퇴한다면…… 흑회의 화탄이 기다릴 것이다.

화탄 공격을 피하는 방법은 혼전(混戰)밖에 없었다.

적아(敵我)를 구분 못 하는 곳으로 화탄을 쏠 수는 없으므로.

"힘을 내라. 곧 방주님의 후발대가 올 것이다."

사공두가 우렁차게 외치며 내곡(內谷)의 흑회 총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가 입구을 향해 들어섰을 때! 

 맞추기라도 한 듯 좌우에서 곡 내의 좌우에 있던 숲속에서 흑회의 무사들이 쏟아

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와아`─`"

줄잡아도 각각 육십 명 정도씩은 되어 보였다.

"당황하지 마라. 너희는 비응방의 정예(精銳)다. 침착히 적들을 맞아 가라."

도대(刀隊)의 대장인 욱일도(旭日刀)와 창대(槍隊)의 연환창(蓮幻槍)이 각각 외치며 

좌우의 흑회를 맞아 갔다.

그사이 사공두는 흑회 총단의 정문을 부수며 난입했다.

그의 뒤를 따라 검대가 지원하기 위해 뒤따라 총단으로 들어갔  장내는 검과 도가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만이 가득했다.

사성곡(四聲谷)의 메아리는 온갖 소리를 끊임없이 증폭(增幅)시켜 흡사  이곳이 지

옥인 양 느끼게 했다.

무사들의 싸움은 고수들간의 대결과는 전개 양상(樣相)부터 판이하게 달랐다.

정면 대결을 펼쳐 실력이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결투가 아니었다. 공격은 주로 뒤와 

측면에서 행해졌다.

한 명을 베고 나면 어느새 뒤에서 적의 도가 날라든다.

뒤쪽의 살기(殺氣)까지 일반 무사가 느낀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 아닌가? 등이 

갈라지며 쓰러지는 무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냥 쓰러지든지 아니면 사력을 다해 자신을 공격한 자에게 한 번 더 도를 휘두르

고 쓰러지든지.

둘의 차이가 바로 사기(士氣)의 차이였다.

물론 쓰러지며 휘두른 도가 적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전 방주 금사진의 죽음과 잇따른  앵아의 죽음으로 흑회의 잔악함을 충분

히 맛본 비응방 무사는 이를 악물고 

도를 휘둘렀고, 흑회의 무사는 피해야 했다.

어떤 도라도 맞으면 상처를 입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죽어 가는 자의 도를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 바람에 그의 뒤에 있던 다른 비응방 무사의 창이 허리를 찌르는 것을 보

지 못했을 뿐이었다.

"커억!"

처음 등에 칼을 맞고 도를 휘둘렀던 무사는 이미 눈에서 빛이 꺼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마지막 일도가 만들어 낸 작품(作品)을 기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어차피 살 수 없으나 아깝지는 않았다.

적어도 자신을 죽인 자와 동행할 수는 있었으니까.

작은 차이가 모이면 대세를 좌우하기도 한다.

심화절이 떠날 때 심어 주었던 흑회에 대한 강한 증오와 비응방에 대한 굳은 충성

심은 비응방 무사들의 사기를 높여 흑회는 밀리고 있었다.

숫자에서는 비록 비응방의 무사들이 조금 적었으나 결국 이긴 것은 그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사기(士氣)였다.

비록 살아 있는 무사들이 이십여 명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두 배 가까운 적들을 섬

멸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안심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천령 이호가 이끄는 흑회의 화탄 부대는 어느새 그들의 배후까지 접근해 있었다.

원래 사공두가 총단 안으로 바로 들어간 것은 자신의 급한 성격 탓이었을 게다.

하지만 그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뒤따라 들어온 검대의 무사들은 그가 얼마나 용감하게 싸우는지 보았다.

결코 물러섬이 없었다.

웬만한 자들은 그의 기세만으로도 기가 질려 주춤거렸다.

"크악!"

물러서는 자의 허리에는 예외없이 사공두의 박룡도(搏龍刀)가 작렬했다.

"싸움은 기세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아라. 싸움에 임한  이상 오직 전진만이 있

을 뿐이다."

사공두가 외치며 앞서가자 검대 무사들은 용기 백배했다.

그들은 함성을 지르며 사공두의 뒤를 따랐고 흑회의 몇몇 무사들은 살아남지 못했

다.

비응방의 기세(氣勢)는 총단 안의 넓은 광장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실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넓은 곳이었다.

원형의 광장(廣場) 둘레에는 곳곳으로 길이 뻗어 있어 사공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였다.

이때 어디선가 갈라지는 듯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좋아! 비응방의 박룡도(搏龍刀)가 싸움에 임하면 그  기세를 당할 자가 없다더니, 

과연 그렇군!"

사공두가 놀라서 몸을 돌렸다.

존령! 

그가, 아니, 그녀가 세 명의  수하만을 좌우에 이끌고 어느새 광장의  한구석에 서 

있었다.

"어때, 이곳은 싸우기 좋지 않나? 본래 우리 흑회의 연무장이지. 밖에 소리가 들리

지 않도록 고생하여 만들었던 

곳인데, 이런 용도로 쓰이다니."

사공두가 코웃음쳤다.

"쓸데없는 소리. 숨어 있지 않고 모습을 나타낸 것이 네 실수다. 차합!"

문답이 필요없었다.

이미 사공두는 허공을 갈랐고 그의 박룡도 또한 내리긋고 있었.

그 기세에는 존령도 감탄했지만 입을 뚫고 나온 것은 차가운 냉소였다.

"감히 그 정도의 힘으로 내게 덤빈단 말이냐?"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 주위에  섰던 세 명이 검을 뽑아  들고 사공두를 

막아 갔다.

놀란 안검도 검을 뽑아 사공두를  도와 날아갔고, 부대장인 단함(段含)  또한 검을 

휘두르며 가세(加勢)했다.

삼 대 삼의 대결이었지만 사공두가 둘을 맡고, 안검과 단함이 하나를 맡는 형세였

다.

창! 창! 

안검과 단함의 이 대 일 대결은 백중지세였고, 사공두는 둘을 상대하여 역시 백중

이었다.

존령은 놀랐다.

그녀는 사공두가 비응방의 삼 당주 중에서 무공이 가장 약함을 알고 있었다.

한데도 일호, 이호 두 명을 상대할 수가 있다니! 

하지만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공두의 무공이 약한 것이 아니라 비응방의 심화절과 고숭무의 무공이 너무 강했

다. 사공두는 상대적으로 약해 보였을 뿐이었다.

그녀는 냉소하며 팔을 들었다.

소매가 말려 올라가면서 하얀 옥수(玉手)가 드러났다.

하지만 안력이 매우 강해야만 그것이 옥수임을 알 수 있었다.

손을 든다 싶자 어느새 검은 경기(勁氣)가 손 주위를 감아 버렸으므로.

경기로 감추어진 그녀의 손이, 일, 이호와 어울리고 있는 사공두를 향해 쏘아졌다.

창! 

그녀의 손과 사공두의 도가 부딪쳤는데도 그녀의 손은 말짱했고  오히려 사공두가 

뒤로 밀렸다.

"헉!"

사공두가 헛바람을 들이키며 호표력(虎豹力)을 최대로 올려 도를 팔방으로 휘둘렀

지만 존령의 손은 그의 도세의 빈틈을 

잘 알고 있는 듯, 어느새 목줄기 가까이로 다가왔다.

따당! 

사공두의 박룡도가 허공을 날아 벽에 박혔다.

그의 목에는 어느새 존령(尊領)의 손톱이 닿아 있었다.

"너를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면 왜 너를 이곳까지 들어오도록 가만 두었겠느냐?"

설명이 길었을 뿐, 사공두가 존령을 보고  공격했다가 반격을 받고 다시 사로잡히

기까지의 시간은 

그야말로 눈 몇 번 깜박일 시간이었다.

검대의 무사 중에는 그나마 안검이나 단함 정도가 몸을 움직여 흑회와 몇 합을 다

투었을 뿐, 나머지 무사들은 모두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변화는 너무 빨랐고, 그 변화에 대처하기에 무사들은 아직 너무 약했다.

그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사공두의 목 앞에 존령의  날카로운 손톱이 닿아 

있었다.

존령이 차갑게 말했다.

"모두 싸움을 멈추고 무기를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사공두의 목숨은 없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삼호가 안검과 단함에게  이검을 급히 쏟아 내곤 물러섰다. 

무사들은 검을 땅에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짓이냐? 난 죽어도 되니 끝까지……"

사공두가 놀라 외쳤지만 곧 존령에 의해 아혈이 짚혔다.

안검이 검을 땅에 버리며 존령에게 외쳤다.

"아까의 초식은 분명 개천풍운조(開天風雲爪)였는데, 너는 공동의 인물이냐?"

존령은 놀랐다.

일개 무사 중에 자신의 풍운조를 알아보는 자가 있다니! 그녀가 목을 까닥이자 뒤

에 서 있던 존령 일호의 검이 어느새 안검의 가슴을 쑤셨다.

"존령께 무례한 죄다!"

비응방 무사들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새 사방의 통로에서 흑회의 인물들이 완전 무장을 하고 나와 그들을 포위했으

므로.

존령은 단신으로 나와 사공두를 안심시키고, 그  틈을 노려 사공두를 제압하여 비

응방의 무사들과 싸움 한 번 벌이지 

않고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흑회 무사의 수효는 삼십여 명.

만일 심기가 깊은 사람이 이런  상황을 본다면 분명히 어디선가  비응방의 정보가 

샜음을 느낄 것이다.

흑회 무사의 숫자는 항상 비응방 무사에 비해 조금씩만 많아, 흑회가 미리 정보를 

알고 있었음을 대변했다.

"후후,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오늘 들어온 자들 중에는 너희만이 겨우 살아남을 것

이다."

바깥의 도대(刀隊), 창대(槍隊)와의 싸움이 흑회의 패배로  끝날 가능성은 거의 없

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의 경우라도 존령은 대비해 두었다.

쾅, 콰쾅! 

멀리서 폭음이 들렸다.

살아남은 비응방의 무사들을, 천령 이호가 화탄을 이용해 죽이는 소리였다.

존령은 감탄한 눈으로 실내의 무사들을 훑어보았다.

그녀는 비응방 무사들이 비록 사로잡혔지만 두 눈 가득 강한  적의를 감추지 않고 

있음을 보았다.

그녀는 심화절에게 감탄했다.

바깥의 싸움에서 비응방이 이길 때만 천령 이호가 화탄을 사용한다.

비응방이 수적인 열세(劣勢)에도 불구하고 이겼다면 그들의 정신력이 흑회를 앞섰

다는 의미! 그가 방주위에 오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수하들의 사기를 이렇게 올려 

놓을 수 있었을까? 쾅! 

폭음이 다시 들려 왔다.

이번의 폭음은 달랐다. 보다 가까운 곳에서 들려 왔다.

존령이 눈썹을 찡그렸다. 

 "아직도 비응방의 잔당이 남았단 말인가?"

콰콰쾅! 

그녀의 짜증 섞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폭음이 일며  광장이 미미하게 흔들렸

다.

존령은 곧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이호의 화탄으로 이렇게 광장까지 울릴 리가 없었다.

그녀의 이런 의문을 확인이라도 해주듯, 다시 한 번 폭음이 울렸다.

꽈`─ 꽝! 

 이번의 폭발은 더욱 강했다.

광장이 흔들리는 정도(程度)를 벗어나 천장에서 돌부스러기마저 떨어졌다.

존령은 사태를 깨달았다.

그녀는 심화절을 너무 무시했다.

그가 이렇게 쉽게 당할 리가 없었다.

존령은 급히 명령했다.

"퇴각하라. 총단이 곧 무너질 것 같다!"

그녀를 필두로 흑회의 인물들이 광장 오른쪽의  통로(通路)로 썰물이 빠지듯 사라

졌다.

남은 건 마혈(痲穴)이 제압당해 광장에 서  있는 비응방의 무사들과 사공두뿐이었

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돌의 크기는 폭음이 증가하며 커졌지만 사공두는  다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미 오경은 지났다.

지금 흑회를 공격하는 것은 심화절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심 방주에

게 다른 여력이 있었을까?' 

고숭무의 죽음으로 비응방(飛鷹幇) 힘의 삼분지 일이 와해되었고, 다시  오늘 흑회

와의 싸움에서 남은 힘마저 거의 소진(消盡)되었다.

하지만 지금 흑회를 공격하고 있는 심화절의 힘은 어디에서 구한  것일까? 후발대

의 전력은 선발대의 사분지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정도의 힘으로 이처럼 흑회를 흔들 수 있는 걸까? 그는  도대체 어디서 

또 다른 힘을 구한 것일까? 

사공두가 의문에 잠겨 서 있는 사이, 떨어지는 돌덩이는 점점 커져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윽고, 

쿠쾅! 

자욱이 돌 먼지가 일어나며 집채만한 돌덩이들이 마구 떨어지기 시작했다.

폭발의 힘을 견디지 못한 광장의  기둥이 무너지며 천장이 완전히  가라앉고 있었

다.

"우악!"

"케엑!"

비명 소리가 잇달아 터지며 광장  안은 돌과 먼지에 완전히  묻혀 버렸다.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비응방의 무사들은 모두 마혈(痲穴)을 제압당해 있었으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자들은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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