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한편 목숨이 아까웠던 제갈성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그래봤자 마법사라 얼마 가지도 못했지만. 팽철연이 뒤따라와 그를 넘어뜨렸다.
“큭! 이, 이거 놓게! 자네도 남궁제한테 죽고 싶은 건가!?”
제갈성은 팽철연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똑똑히 봤었지 않은가.
용인으로 변신한 남궁제를, 그가 내뿜던 괴물 같은 힘을.
정도현이 그를 쓰러트릴 리 없다.
하지만 팽철연도 다 이러는 이유가 있었다.
“미안하지만 자넬 보내 주면 나도 죽거든.”
“뭣이?”
정도현은 팽철연에게 명령했다.
남궁제는 자신이 처리할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갈성을 놓치지 말라고.
물론 정도현이 남궁제를 잡아낸단 확신은 없었다. 용인의 힘을 목격하고선 더더욱 그랬고.
하지만 이미 그와 정도현은 한배를 탔고 도중에 내릴 수도 없었다.
“가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때, 저 멀리서 몇몇 이들이 달려왔다.
입구 앞에서 대기하던 남궁제와 제갈성의 호위 병력이었다.
그들은 팽철연과 제갈성을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무기를 겨눴다.
누가 봐도 제갈성이 목숨을 위협받는 모양새였으니까.
남궁세가의 기사들은 발 빠르게 산개해 팽철연을 포위했고, 제갈세가의 마법사들은 곧장 진법을 펼쳤다.
아군에겐 각종 버프를, 적에겐 디버프 효과를 주는 진법.
혹시 모를 팽철연의 도주에 대비해 주위 공간을 비트는 환영(幻影) 진법까지.
두 가문을 수호하는 최고 전력들이 힘을 합치자 제아무리 팽철연이라도 돌파하기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팽철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전원 움직이지 마라.”
팽철연이 제갈성의 목을 붙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목을 분지를 수 있단 협박이었다.
그러자 제갈성의 호위 병력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졸지에 인질이 된 제갈성이 덜덜 떨며 말했다.
“패, 팽철연! 정녕 이런 식으로 나올 건가!”
“살고 싶으면 결판이 날 때까지 얌전히 입 다물고 있어라.”
그 말에 남궁세가의 기사들이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고 보니 남궁제가 어디에도 안 보였다.
매정한 말이겠지만 제갈성이 죽든 말든 그들은 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남궁제의 안위였다.
“팽철연, 가주님은 어디 계시지?”
기사단장의 질문에 팽철연은 엄지로 자신의 어깨 너머 별장을 가리켰다.
그러자 남궁세가의 기사들이 포위망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들의 행동에 제갈성의 호위대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기사들이 전력에서 빠지면 팽철연을 상대로 승산이 없었으니까.
‘젠장, 어쩌면 좋지?’
제갈성이 식은땀을 흘릴 때.
쿠르르릉-!
별장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음은 물론이고, 마력 파장까지 차단하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마구 뒤흔들렸다.
“뭐, 뭐지?”
“가주님께서 싸우시는 거다!”
여기서 건물까지 거리가 제법 있는데도 마력 충돌의 여파가 피부 위로 생생히 전해졌다.
마치 그들 코앞에서 싸우는 것처럼.
실로 어마어마한 마력이었다.
‘설마…….’
남궁세가의 기사단장과 정예 기사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챘다.
남궁제가 최후의 수단인 용혈을 일깨웠다. 대체 그의 상대가 누구길래 저리 진지하게 임한단 말인가?
기사단장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머릴 굴려 봤다.
‘가주님께서 질 리가 없다.’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남궁제가 용인의 힘까지 끌어다 썼단 건 만만찮은 상대란 뜻.
자신들이 합류해 봤자 큰 도움은 줄 수 없다. 끽해야 고기 방패 역할이겠지.
‘그렇다면…….’
판단을 끝마친 기사단장이 부하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용인화를 사용하고 저들을 처리한다.’
그의 지시에 기사들은 사뭇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들도 무슨 의도인지 이해했다.
용인으로 변하면 너덧 시간은 유지된다. 저들은 남궁제의 비밀을 알게 되겠지.
‘한 명도 살려 보내선 안 된다.’
자신들이 용인으로 변한다면 팽철연을 죽이진 못해도 도망 못 치게 발목은 잡아 둘 수 있을 터.
남궁제가 싸움을 마무리 짓고 돌아올 때까지 버티면 된다.
기사단장이 잠들었던 용혈을 깨우자 부하들도 그를 뒤따랐다.
콰드득-!
기사들의 몸에 용의 뿔과 날개 그리고 꼬리까지 자라났다.
“뭐, 뭐야?”
“괴물이 됐……. 커헉!”
몬스터처럼 변한 기사들이 다짜고짜 달려들며 칼을 휘두르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전위 역할이던 칼잡이들이 칼을 거꾸로 드니 마법사들 입장에선 대처하기 힘들었다.
파지직-!
벽력이 담긴 검에 살이 지져지자 역한 악취가 진동했다.
“저, 저 괴물 새끼들이 감히!”
가문의 중요 전력을 눈앞에서 잃어버린 제갈성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절규했다.
그러자 피를 뒤집어쓴 용인들이 살기등등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봤다.
“팽철연, 제갈성.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라.”
“…….”
기사단장의 일방적인 통보에 팽철연은 인질로 붙잡았던 제갈성의 목을 슬며시 놔줬다. 그런 뒤 전음으로 속삭였다.
‘제갈성, 넌 어쩔 거지?’
‘어쩌긴 뭘 어째! 저 괴물 새끼들, 모조리 다 찢어 죽일 테다!’
남궁제 앞에서 늘 굽신댔던 그가 남궁세가의 기사들을 도륙 내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느껴졌다.
방금 무참히 살해당한 이들은 제갈성이 애지중지 키운 제자들이었다.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만 친손주처럼 여긴다 들었다.
제갈성은 계산적이긴 해도 자신이 거둬들인 이들에겐 정을 많이 주는 남자니까.
팽철연은 기회다 싶어서 말했다.
‘살릴 수 있다.’
‘…뭐?’
‘방금 죽은 제자들, 그 남자라면 전부 살려 낼 수 있다.’
‘그 남자? 아까 그 젊은 청년을 말하는 거냐?’
‘그렇다.’
황당무계한 소리에 제갈성은 들끓던 분노도 잠시 잊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린다고. 자네 혹시 노망이라도 났나?’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할 사람 같나?’
그래, 팽철연은 허언을 내뱉을 남자가 아니다.
제갈성은 땅바닥에 널브러진 제자들을 바라봤다.
칼에 썰리고 벼락에 맞아 전신이 시커멓게 탔다. 보기 안쓰러웠다.
‘팽철연, 맹세해라. 정말로 살릴 수 있나? 흑마법 같은 편법이 아니라?’
‘나와 내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살릴 수 있다. 그런 사술 따위가 아닌 성녀의 부활처럼 정상적인 방식으로.’
‘…내가 뭘 하면 되지?’
이런 얘길 그냥 꺼냈을 린 없다.
분명 원하는 게 있겠지.
제갈성이 눈치 빠르게 거래 조건을 캐묻자, 팽철연은 정도현이 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 남자에게 평생 충성해라.’
‘뭐? 그 말은…….’
가주가 누군가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건 곧 가문을 통째로 바치란 뜻.
제갈성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놈한테 가문의 운명을 맡기라니.
‘어차피 남궁제는 널 여기서 죽일 거다. 네가 없어지면 제갈세가도 멋대로 주무르겠지. 그럴 바엔 차라리 이쪽에 붙는 편이 낫지 않겠나?’
‘최악보단 차악을 고르란 건가.’
제갈성은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고를 선택지가 하나뿐이었다.
억울하게 죽을 바엔 발악이라도 해 봐야지.
‘…알았다. 그렇게 하지.’
‘잘 생각했다.’
‘그래서, 그 남자가 정말 남궁제를 이길 순 있는 거냐?’
정도현과 손잡는 건 좋다만 결국 남궁제를 어쩌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글쎄.’
‘뭐?’
‘그 남자가 어떤 인간인지 나도 도저히 모르겠거든.’
꼬드겨 놓고선 그런 무책임한 소릴 하다니. 괜히 받아들였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콰앙-!
저 멀리서 굉음이 날아들었다.
제갈성과 팽철연 그리고 기사들까지 한곳을 바라봤다.
특제 건물의 천장을 뚫고 하늘로 솟구친 존재가 보였다.
“저, 저건?!”
황금빛 날개와 황금안. 마치 성서에 나오는 천사를 닮았다.
저건 소문으로만 듣던 영광의 일족의 「태양신공」이었다.
정도현의 화려한 등장에 다들 숨이 멎었다.
“저 남자… 언노운이었군.”
“…….”
제갈성은 정도현이 추방된 영광의 일족, 언노운이라 단정 짓곤 침을 꿀꺽 삼켰다.
팽철연도 「태양신공」을 펼친 모습은 처음 봐서 적잖이 놀랐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기사들은 거대한 위압감에 주춤했다.
“……!”
정도현의 손에 들린 것을 본 기사단장.
눈동자가 마구 떨렸다.
남궁제였다. 싸움 끝에 혼절했는지 몸이 축 늘어져 미동조차 없었다.
“가, 가주님께서…….”
지셨다고? 아무리 영광의 일족이라 해도 저렇게 젊은 플레이어한테?
툭.
옆에 있던 기사는 충격이 심했는지 무기를 떨궜다.
평소의 그였으면 무슨 추태냐며 호통을 쳤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기사단장 역시 부하들과 같은 심정이었으니까.
그들에게 있어 남궁제는 제왕이면서 동시에 하늘이었다.
저분이 패배한다는 건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탁.
정도현이 순식간에 날아와 그들 사이로 사뿐히 착지했다.
손에 들고 있던 남궁제는 바닥에 대충 던졌다.
“가, 가주님!”
기사단장은 바닥에 널브러진 남궁제에게 달려갔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그는 맥을 짚어 보았다. 역시 죽었다.
“아…….”
기사단장은 절망감과 무력감에 휩싸여 붙잡고 있던 남궁제의 팔뚝을 놓고 말았다.
“…정말 남궁제를 쓰러트리다니.”
제갈성도 믿기지 않는지 정도현을 바라봤다.
정도현은 「태양신공」의 힘을 거둬들인 뒤 팽철연에게 질문했다.
“어떻게 됐어?”
“제갈성도 널 따르기로 했다.”
“다행이네. 누구처럼 한 번 안 죽여도 돼서.”
정도현의 섬뜩하고도 의아한 발언에 제갈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겁먹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정도현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당신이 제 제자들을 되살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응? 아, 그런 조건으로 거래했나.”
정도현은 주변에 널린 시체들과 용인으로 변한 기사들을 보더니 고갤 끄덕였다.
“그래, 살릴 수 있다. 네가 충성하겠다고 맹세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맹세하겠습니다. 제 모든 명예를 걸고서 당신께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명예는 됐고, 피의 맹약이나 맺자고.”
“…알겠습니다.”
제갈성이 복종의 의미로 무릎을 꿇자 정도현은 피의 맹약서를 내밀었다.
제갈성은 머쓱한 얼굴로 거기에 서명했다.
그 광경에 기사단장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방금 저들이 뭐라 그랬지? 죽은 자들을 되살린다고?
성녀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의문이 꼬리에 꼬릴 물었다.
“자, 이걸 쓰면 돼. 개인당 하루에 한 번밖에 못 쓰니까 돌려 막기 식으로 살려. 이해했지?”
“이, 이건 대체……?!”
정도현이 웬 구슬을 건네자 제갈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플레이어를 되살리는 아이템이라니, 이런 건 살면서 처음 봤다.
제갈성은 곧장 제자 한 명을 살렸다.
그 제자는 제갈성의 설명을 듣고 또 다른 제자를 살렸다. 그렇게 네 명의 제자들이 전부 살아났다.
“제갈세가는 끝났고.”
정도현은 남궁제의 시신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자 기사단장이 설마 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호, 혹시… 가주님도 살려 주시는 겁니까?”
“어.”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사단장은 정도현이 자비를 베풀어 주는 줄 알고 눈물까지 흘리며 머릴 조아렸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너희도 이름 적어.”
정도현이 기사들의 면전에 피의 맹약서를 들이밀었다. 하는 짓이 사채업자가 따로 없었다.
기사단장과 기사들의 표정이 칙칙해졌다.
기사가 동시에 두 명의 주군을 섬기라니. 어불성설이었다.
“거부하면 그냥 싹 다 죽이고 살려 버리면 그만이야. 너희 레벨 떨어지는 게 좀 아까워서 이러는 거지.”
“하, 하겠습니다…….”
정도현의 몇 마디 협박에 기사들은 결국 마음이 꺾였다.
이렇게 남궁세가와 제갈세가도 정도현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불과 한 달 만에 B구역의 핵심 세력들을 장악했다니. 직접 본 이들도 믿지 못할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