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성준휘가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자 민하은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뭐, 뭐 이딴 놈이 다 있어?’
살려 줘서 고맙다고는 못 할망정, 자기보다 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는다고?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정신이 멍해졌다. 민하은은 뭐라 따지지도 못하고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어떻게 된 거지?’
성준휘의 태도가 이해 안 되는 건 정도현도 매한가지.
‘민하랑이 한 말이랑 좀 다른데.’
「생명의 불씨」로 부활한 사람은 어떤 명령도 거역할 수 없다고.
그런데 성준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아예 통제가 안 됐다.
‘레벨이 너무 높아선가?’
성준휘는 136레벨. 반면에 민하은은 110레벨을 겨우 넘겼다.
사역마나 키메라를 조종하는 흑마법사라 치면, 저 정도 레벨 차이면 술사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벗어난 셈이다.
하지만 「생명의 불씨」는 흑마법이 아니라 개인 특성이었다.
‘개인 특성은 레벨 차이가 나도 상관없을 텐데.’
대부분의 개인 특성은 개인 특성으로만 대항할 수 있다.
성준휘의 고집과 정신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개인 특성에는 버틸 수 없을 터.
그런데 방금은 버틴 수준이 아니라 아예 무시했다.
‘…설마?’
정도현의 머릿속에 혹시나 하는 가정이 떠올랐다.
아까도 말했듯 개인 특성은 개인 특성으로만 대처할 수 있다. 그럼 이러한 결론도 나온다.
‘성준휘도 개인 특성이 있나?’
* * *
“아, 예. 있습니다. 근데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무한테도 밝힌 적 없는데…….”
“난 메시아니까.”
“아…….”
정도현은 곧장 성준휘를 따로 불러내 얘길 나눴다.
개인 특성이 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성준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답이었다.
“그럼 정말로… 태양신은 존재하는 겁니까?”
“있지.”
“맙소사…….”
태양신은 분명 있다. 태양신이 직접 창조했다는 자손들이 버젓이 존재하니까.
물론 그 태양신이란 자가 진짜로 신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마는.
태양신이 실존한단 말에 성준휘는 아연실색하며 숨김없이 털어놨다.
“제 개인 특성은 「강철의 심장」입니다.”
“「강철의 심장」?”
“예. 제 몸이나 마음에 해로운 영향을 주는 것들은 전부 막아 줍니다.”
“그래서 아무 효과가 없었군.”
“예? 뭐가 말입니까?”
성준휘가 민하은의 명령에 거역했던 건 전부 「강철의 심장」 덕이었다.
「생명의 불씨」의 부활 효과는 괜찮지만, 복종을 강요하는 효과는 해가 되니 차단해 버린 것이다.
‘뭐, 내 입장에선 이게 오히려 좋지.’
나중에 성준휘와 한 번 더 싸우는 건 크게 상관없지만, 민하은 그 간교한 여자가 질 게 뻔한 싸움을 걸어올 리 없다.
성준휘를 비롯해 다른 강자들까지 싹 동원해 그녀의 비밀을 아는 자신을 없애려 들겠지. 그럼 상당히 성가셔진다.
그런데 「강철의 심장」이란 변수 덕에 성준휘가 그녀를 도울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게다가 내 편이 됐어.’
성격이나 언동은 엉망이어도 성준휘는 교황과 성녀와 더불어 현 교단의 실세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자신을 돕는다면 실보단 득이 더 컸다.
“성준휘.”
“예, 메시아 님.”
“너한텐 성녀의 비밀에 대해 알려 주마.”
“…성녀의 비밀이요?”
성준휘는 그게 뭘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지 고갤 갸우뚱했다.
정도현은 「동경의 거울」과 「생명의 불씨」에 대해서 쭉 털어놨다.
민하은이 숨겨 왔던 진실을 안 성준휘는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그, 그럼 성녀는 민하랑이 아니라 민하은이란 겁니까?”
“그래, 차기 성녀로 내정됐던 언니를 살해하고 그 자릴 꿰찼지.”
“허, 참. 그래 놓고 뻔뻔하게 고결한 척 굴며 성녀 행세를 해 온 겁니까?”
“그래.”
세간에는 동생 민하은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언니 쪽이 살해당했다.
성준휘는 원래도 민하은이 썩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이젠 징그러운 벌레를 보는 것처럼 혐오감이 솟구쳤다.
“그런데… 이걸 알려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조만간 성녀를 죽일 생각이다. 살려 두면 성가시거든. 네가 좀 거들어 줘야겠다.”
“음…….”
성녀를 암살하겠단 말에 성준휘는 망설였다.
아무리 추악한 범죄자여도 자신에겐 피해를 주지 않았으니까. 대뜸 칼을 뽑자니 좀 그랬다.
하지만 그건 숲이 아닌 나무만 바라보는 것처럼 짧은 생각이었다.
“수명까지 투자해 가며 기껏 널 되살려 놨더니 자기 말을 안 들어. 그럼 민하은이 어떤 감정을 품을까?”
“그야… 악감정을 품겠죠?”
“단순히 악감정 수준으로 끝나면 상관없겠지.”
“그 말씀은…….”
정도현은 그녀의 본성을 아주 잘 안다.
자신의 비밀을 들킨 걸 알자마자 눈동자에 언뜻 살심이 비쳤었다.
정도현이 약했더라면 진즉 죽였으리라.
거기에 개인 특성이 안 먹히는 별종까지. 예상을 벗어난 존재들이 연달아 나타났다.
그녀는 분명 무서우리라. 혹 자신이 공들여 쌓아 올린 것들이 와르르 무너질까 봐.
“게다가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넌 나한테 무릎까지 꿇었어. 내 편에 서겠다 선언한 셈이지.”
“아, 예. 그랬었죠.”
“그럼 성녀 눈에는 우리가 눈엣가시, 아니 위험한 정적으로 비칠 거야.”
메시아와 팔라딘이 하나로 뭉친다?
성녀는 물론이고 교황 세력마저 바짝 긴장해야 할 긴급 사태였다.
“어쩌면 교황이랑 손을 잡고 우릴 제거하려 들지도 몰라.”
“죄, 죄송합니다. 거기까진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 하, 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
성준휘는 괜한 짓을 해서 적을 늘려 버린 게 미안한지 어쩔 줄 몰라 했다.
교황과 성녀의 우려와 달리 정도현은 교단을 장악할 마음이 없었다.
단지 민하은이 짜증 나게 자꾸 들쑤시고 다녀서 짓밟아 두려는 것뿐. 그 이상을 바라진 않는다.
하지만 권력이란 다 그렇다.
평화로운 공존은 불가능하다.
경쟁 상대를 잡아먹고 위로 올라가야만 하는 구조.
교황 세력은 이렇게 생각하리라.
성녀가 무너지면 그다음은 자신들 차례라고.
그럴 의도가 없다고 정도현이 말한들 믿어 줄 리 없었다.
정도현이 교황의 입장이었어도 의심할 테니까.
‘설사 믿어 준다 해도 성녀의 능력이 아까워서 쉽게 내치지 못할 테고.’
대화로 풀릴 문제는 아니다. 싹 솎아 내야 한다.
폭군이나 떠올릴 방법이었지만 그게 가장 깔끔했다.
‘싹 쓸어버리고 되살리자.’
성녀를 잡으려다 졸지에 교단 본부까지 장악하게 되다니, 일이 커져도 너무 커졌다.
* * *
한편, 결투를 지켜본 교황 세력은 정도현의 예상대로 민하은과 따로 접촉했다.
장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성녀여, 그 남자는 대체 누군가?”
“…저도 모릅니다. 북해빙궁에서 우연히 만났으니까요.”
민하은도 평소와 달리 여유가 없었다.
성준휘한테 생명력을 나눠 주느라 머리가 핑 돌았다.
원래는 며칠 푹 쉬며 체력을 회복해야만 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성준휘가 그 남자한테 완전히 굴복했어.’
내 것이 되었어야만 했는데 눈앞에서 뺏기고 말았다.
이대로 가다간 메시아한테 교단을 홀라당 뺏기게 생겼다.
민하은은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다릴 가만히 놔두질 못했다.
그녀의 초조함이 전해진 걸까. 장요한이 먼저 제안했다.
“성녀. 그대도 알겠지, 우리끼리 신경전이나 펼칠 때가 아님을.”
“물론이죠.”
“힘을 합쳐서 그자를 몰아내야겠지. 우리 모두 메시아의 실체가 뭔지 알고 있잖나.”
“예.”
성서에 기록된 메시아란 영웅은 실존하지 않는 허상에 불과했다.
일반 사제나 성기사들은 어릴 때부터 세뇌에 가까운 신앙 교육을 받기에 메시아의 존재를 의심치 않겠지만, 이곳에 모인 교단의 핵심 인력들은 안다.
태양교가 인류 전체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단 걸.
‘시민 등급은 플레이어의 각성 확률과 관계없어. 단지 A구역에 올려 보낼 제물들을 편하게 선별하기 위함이야.’
민하은은 단순히 성녀라는 허수아비로 전락하기 싫었다.
그래서 교황의 눈을 피해 자신의 편을 야금야금 늘렸다.
그러다 교단의 여러 기밀문서를 입수했고, 시민 등급의 존재 이유와 낙원으로 끌려간 자들이 어찌 되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성서에 나온 구원자, 메시아.
그자 역시 예언에 짤막이 나온 존재에 이것저것 살을 덧붙여 만든 가상의 영웅이었다.
“고대의 예언가는 이렇게 말했다죠. ‘암흑룡’이 태양을 꺼트리고 세상을 어둡게 했으나, 어떤 인간이 무찌른다고.”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악마와 인간들이 시도 때도 없이 치고받던 암흑기 시절.
교단을 세운 선조들은 어떤 예언가의 예언에 언급된 용살자를 메시아라 여겼다.
세월이 흐르면서 메시아는 교단이 지어낸 영웅담이나 설정들이 붙었고, 종국엔 신이 내려보낸 비범한 인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창작물에 불과했다.
“설사 그자가 진짜 예언에 나온 용살자라 하더라도 태양신의 대리인은 아니죠.”
“그렇네. 메시아란 결국 망상의 산물이니까.”
민하은은 자신의 비밀을 들켜서 혹시 싶었으나 교황과의 대화로 확신했다.
그자는 메시아인 척하는 사기꾼이다.
‘신이 내 죄를 알려 줬다고?’
그럼 교황이 대성당 지하에 뭘 감추고 있는지도 알았어야 한다.
정도현이 진짜 신의 대리인이었다면, 교황을을 보자마자 크게 죄를 꾸짖고 천벌을 내렸어야만 했다.
하지만 정도현은 교황을 보고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즉, 교황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혀 모르고 있단 뜻.
“그나저나 실험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요?”
“아주 순조롭네. 일 년 안에 완성될 걸세.”
“그거 다행이네요.”
민하은은 안도했다.
여기서 더 무리하지만 않으면 일 년쯤이야 충분히 버틸 테니까.
그것만 완성되면 망가져서 골골대는 이 몸뚱이도 다 나으리라.
정도현은 한 가질 간과했었다.
교황과 성녀는 교단의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사이지만, 동시에 한 가지 목표를 이루고자 협력하는 관계기도 했다.
교황 세력이 추구한 목표는 불로장생.
고레벨 플레이어는 마력으로 신체가 강화된 덕에 장생하지만, 사제나 마법사처럼 상대적으로 육신이 약한 자들은 예외였다.
오래 살아 봤자 무투계 플레이어에 비하면 한계점이 명확했다.
가뜩이나 타인에게 생명력까지 나눠 준 민하은은 더더욱 오래 못 살 터였고.
장요한은 그 부분을 파고들어, 막 성녀가 된 민하은을 포섭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교황은 성녀가 이렇게 야욕 넘치는 인물인지 몰랐었다.
불로장생을 위한 인체 실험에 쓰인 사제와 이단 심문관들. 그들 대부분은 실험 도중에 죽어 나갔다.
민하은은 그들 중 특출난 이들만 따로 빼돌려 되살린 뒤, 자신의 사병으로 삼았다.
교황 세력이 눈치챘을 땐 이미 그녀만의 사설 부대가 창설된 뒤였다.
눈떠 보니 그들의 일원에서 교황과 비등한 힘을 거머쥔 거물이 된 것.
고양인 줄 알고 키웠는데 호랑이 새끼였다.
“그자의 정체가 뭐든 성혈(聖血)의 안정화만 해 내면 무서워할 필요 없네.”
“그건 그렇죠.”
성혈. 그들이 불로장생을 위해 수십 년간 연구하다 찾아낸 해답.
대성당 지하에 봉인된 그 존재의 혈액을 분석해 플레이어의 신체와 결합하는 것.
하지만 성혈을 담아내기엔 인간의 육신은 너무도 약했다.
성혈을 주입하자마자 족족 몸이 붕괴하며 죽어 나갔다.
극소수는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혼자선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폐인이 되었다.
그렇게 난항을 거듭하던 중. 불과 몇 년 전에 드디어 성공의 실마리를 잡았다.
“어린애의 몸이 그나마 성혈에 거부 반응이 덜한 점을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그대의 발상 덕에 진척이 있었지.”
민하은은 수십 년간 쌓인 실험 자료를 쭉 살피다 의아한 부분을 발견했다.
성혈을 주입한 아이들은 대체로 일주일 가까이 버티다 숨을 거뒀다는 것.
그래서 그녀는 교황에게 제안했다.
막 플레이어로 각성한 아이들을 구해다, 시간 간격을 둔 채 농도를 희석한 성혈을 주입해 보자고.
“죽어도 돈 몇 푼 쥐여 주면 F구역에서 얼마든지 사 올 수 있으니까.”
지난 몇 년간 수천 명의 아이가 실험 중에 희생됐다. 하지만 괜찮다.
돈이라면 썩어 넘칠 만큼 많았고 유의미한 실험 데이터를 얻었으니까.
그걸 기반으로 성혈을 안정화하면 그들의 육체에 주입해도 거부 반응이 없으리라.
“교황 성하, 혹시 모르니 당분간 지하 실험실의 경비를 강화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러지. 뭐, 들킬 일도 없겠지만.”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으니까.
누가 옆에서 길 안내라도 해 주지 않는 한, 십수 킬로미터 지하 속에 감춰진 실험실을 찾아낼 리도 만무하고.